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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평양의 순교자들1: 패트릭 번(Patrick J. Byrne)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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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3 ㅣ No.1608

[평양의 순교자들] (1) 패트릭 번(Patrick J. Byrne) 주교


조선 교회와 평양교구 복음화의 초석된 ‘평양의 사도’

 

 

전쟁이 끝난 지 65년. 세월은 흘렀지만, 갈등과 질곡은 여전하다. 오히려 화해와 일치, 평화의 길은 더 멀어져 가는 듯하다.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로 피를 흘린 현대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간다. 이에 평양교구 설립 90주년을 맞아 ‘평양의 순교자들’을 연재한다. 이미 시복 재판에 들어가 있는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중 24위, 자료 미비로 시복 대상자에는 포함되지 않은 순교자 4위 등 28위의 삶과 발자취, 순교 행적을 싣는다.

 

- 1949년 6월 14일 패트릭 번 주교가 주교 서품식을 마치고 퇴장하며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고 있다.

 

 

초대 평양지목구장, 초대 주한 교황사절, 초대 메리놀 외방 선교회 한국지부장…. 

 

‘평양의 사도’ 패트릭 번(한국이름 방일은) 주교의 이름 앞에는 ‘초대’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다. 1922년 11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에서 메리놀 외방 선교회에 평안남ㆍ북도 선교지를 위임하면서 그해 11월 메리놀회의 첫 한국지부장에 임명된 이후로 두 차례 한국과 인연을 맺으며 평양교구와 우리나라 복음화를 위한 초석이 됐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한국을, 특히 평양을 사랑했던 성직자, 번 주교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번 주교는 1888년 10월 26일 미국 워싱턴D.C.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계 패트릭 번과 안나 쉴즈 번 사이에서 난 10남매 중 일곱째로 그해 12월 30일 유아세례를 받았다. 메릴랜드 주 세인트 찰스 대학을 거쳐 1909년 볼티모어교구 성 마리아신학교에 들어가 1915년 6월 23일 졸업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교회의 초석을 다지다

 

해외 선교를 갈망했던 그는 당시 볼티모어교구장이던 제임스 기본스 추기경의 동의를 받아 메리놀 외방 선교회로 이적했다. 1915년 9월 메리놀회 총장 월시 신부의 비서 겸 참사가 됐으며, 1918년에는 메리놀 소신학교 교장을 맡아 4년간 신학생을 양성했다. 

 

그의 삶에 전기가 된 것은 1922년 교황청이 평안도 선교를 메리놀회에 맡긴 것이었다. 곧 메리놀회 초대 한국지부장에 임명된 그는 1923년 5월 10일 평양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한국에 들어와 의주본당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메리놀회 한국지부를 출범시켰다. 동시에 교구 행정체계를 마련하고자 준비하면서 한국에 파견되는 젊은 메리놀회 신부들의 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어 본부를 비현, 신의주로 옮겼으며, 메리놀회의 지원을 받아 교세 신장과 성당 신축에 힘을 쏟았다.

 

- 1925년 중강진 근처 얼어붙은 압록강에서 썰매를 타고 사목 순시 중인 패트릭 번 신부.

 

 

1927년 3월 17일, 드디어 평양지목구가 서울대목구에서 분리되자 초대 지목구장에 임명돼 미래 주교좌를 설치할 도시로 평양을 생각하고 지목구 본부를 평양 외곽 서포로 옮겼으며, 교구 기반을 확충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온 지 6년 만에 평양을 떠나야 했다. 1929년 메리놀회 총회에서 제1참사 위원으로 선출된 번 신부는 지목구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참사와 메리놀신학교 학장으로 활동했다. 이어 1937년 7월 12일 메리놀회가 일본에 진출하면서 그는 닷새 뒤 교토지목구장에 취임했으나 미ㆍ일 관계가 악화해 1939년 지목구장직을 사임했다.

 

 

전쟁의 아픔 함께한 진정한 목자

 

해방 뒤 번 신부는 또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비오 12세 교황은 1947년 8월 12일 번 주교를 초대 주한 교황순찰사(Visitor Apostolicus)로 임명한 것이 계기였다. 그해 10월 9일 다시 한국에 들어온 번 주교는 입국하자마자 ‘대한민국을 합법적 독립 국가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교황청 승인 문서를 발표, 이듬해 12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는 데 이바지했다. 1948년 11월에는 전국적 교회 협의체를 구성하도록 해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를 출범시켰고, 1949년 4월 17일에는 교황순찰사에서 초대 주한 교황사절(Delegatus Apostolicus)로 승격, 가세라(Gazera) 명의 주교로 임명돼 그해 6월 14일 서울대교구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주교품을 받았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6ㆍ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번 주교는 수난과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전쟁 직후 서울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대부분의 미국인은 일본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번 주교는 한국에 남았고, 비서 부드 신부도 자원해 남았다.

 

 

양들 돌보다 주님 품으로

 

하지만 교황사절관이 약탈당하고 날로 상황이 악화하자 명동 주교관으로 거처를 옮겨 지냈다. 그러던 중 그해 7월 11일 명동에서 체포된 번 주교는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7월 19일 평양으로 이송돼 감옥에 갇혔으며 10월 8일에는 만포군(현 자강도 만포시)으로 이송됐다. 이어 같은 날 고산진(현 자강도 만포시 고산리), 초산진(현 자강도 초산군) 등으로 끌려갔다가 11월 7일 중강진 부근 하창리(현 평안북도 구성시 남창동) 수용소로 갔다. 이른바 ‘죽음의 행진’이었다. 

 

번 주교는 이 여정 중에 얻은 병고로 죽음을 맞게 되는데, 함께 끌려갔던 춘천지목구장 토마스 퀸란 몬시뇰에게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늘 내 소원이었는데 좋으신 하느님께서 내게 이런 은총을 주셨다”고 했다. 부드 신부에게도 “내가 지닌 사제직 은총 다음으로 새 삶의 가장 큰 은총은 당신들 모두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수난을 받는 것”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11월 25일 62세로 선종, 하창리 근처에 묻혔다. 

 

많은 고위직을 역임하면서도 권위를 앞세우지 않았고 겸손했던 사제,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으라”는 메리놀회 규칙을 늘 새기며 자신을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사제, 매일같이 홀로 성체 앞에서 1시간 이상 기도를 빼놓지 않았고 아무리 바빠도 성무일도(시간전례)를 꼭 바쳤으며 매일 묵주기도 15단을 바쳤던 깊은 영성의 사제, 바로 그가 번 주교였다.

 

 

 패트릭 번(파트리치오) 주교는

 

△ 1888년 10월 26일 미국 워싱턴 D.C. 출생 

 

△ 1915년 6월 23일 사제수품(볼티모어교구) 

 

△ 1915년 6월 30일 메리놀 외방 선교회 입회

 

△ 1923년 한국파견

 

△ 1950년 7월 11일 서울대교구 주교관에서 체포

 

△ 1950년 11월 25일 중강진 하창리 수용소에서 선종

 

△ 소임 : 평양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 메리놀회 초대 한국지부장, 초대 평양지목구장, 메리놀회 제1참사 위원, 메리놀신학교장, 교토지목구장, 초대 주한 교황순찰사, 초대 주한 교황사절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2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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