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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앙과 정치: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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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19 ㅣ No.1348

[신앙과 정치] 이제 다시 시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신앙과 정치’ 칼럼을 마감하면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박근혜와 최순실 특종기사에 망설여졌고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랑예찬 글을 쓰기에는 시절이 너무 수상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 지면을 통해 인내를 갖고 기다려준 편집부에 감사드린다. 준비한 이야기로 일단 시작해 본다.

 

호기심이 많았던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인류의 첫 말을 찾으려는 실험 이야기다. 시인으로 자처한 프리드리히 2세는 7-8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였고, ‘왕좌에 오른 이 중에 최초의 근대인’(야곱 부크하르트)이라는 칭송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의 실험은 이랬다. 궁중에 영아실을 만들어 유모들이 갓난아기들에게 젖을 먹이고 씻기며 잠을 재우는 등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도록 했다. 다만 한 가지, 유모들이 그 아기들과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인간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이유에서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인류의 최초 언어는 당시 주류사회 지식인의 언어인 라틴어나 그리스어일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의 추론은 틀렸다. 온갖 정성을 들였어도 말을 할 줄 아는 아기는 없었고, 이른 나이에 모두 죽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 예화는 중요한 사실을 암시한다. 젖과 잠으로 상징되는 물질적 풍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고 사랑이 사라지면 인간은 이른 죽음에 이르게 된다.

 

관계의 단절은 죽음을 의미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관계가 없다면, 거칠게 말해서 이승과 저승 같은 서로 다른 세계와 사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사회의 대통령과 시민의 처지가 그렇다.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같은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둘의 관계는 생명의 한편과 죽음의 한편에 따로 서있는 관계이다.

 

소통되지 않는 권력자는 프리드리히 2세가 실험했던 아기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권력과 돈을 손에 넣었다 한들 그 삶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생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만을 말한다면, 그 사랑은 사사로운 사랑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느님을 집어넣는다. 사람 ? 하느님 ? 사람의 순환 관계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듯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교의 사회교리가 ‘공동선’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사랑의 일화로 시작해 인류의 보편적 사랑과 공동선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자판에 올라간 내 두 손은 다른 곳을 건드리고 있었다. 박근혜와 최순실 게이트는 수십 년간 한국인의 의식을 농락한 신정체제의 실체를 이해하게 해주었다. 전방위적으로 드러나는 실체는 가히 악마적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악령의 실체를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는 신부님도 있다.

 

온 민중이 방방곡곡에서 정권 퇴진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구난방이다. 사방에서 박근혜를 정점으로 한 권력과 자본의 세력을 질타하고 있다. 또한 교구별로 시국을 염려하는 성명과 미사가 이어지고 있다. 수원교구의 시국성명에서 제시한 것처럼 ‘사탄이 물러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교회의 반석으로 세웠던 제자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소리치셨다(마태 4,10; 16,23 참조). 예수님의 이 외침에서 사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사탄은 언제나 돈과 권력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다. 천국의 열쇠를 쥔 베드로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십자가보다는, 세상에서 누릴 “저승의 세력도 이기지 못할”(마태 16,18) 교회의 위력만 생각했다.

 

베드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느님을 넣어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에게 속한 것을 황제에게 주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마태 22,21 참조). 사람과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돈과 권력만을 탐한다면 지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지혜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광신과 맹신이 춤추고 사탄이 활개 치면서 문제는 더 꼬여만 간다.

 

 

5%와 95%

 

국정 지지율 5%로 견디는 지도자가 대통령인 나라, ‘이게 나라냐’, ‘박근혜 퇴진’을 외치면서 광화문광장에 시민들이 모였다. 아니 그 어느 정권 아래서도 이렇게 많은 시민이 모여 정권 퇴진 집회를 열었던 기억이 없다. 100만 시민이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모였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한바탕 축제를 즐겼다. 광장에서부터 오랜 세월 닫혀있던 길이 열렸다. 자정이 다 된 지하철 안에는 출발지가 같은 많은 시민이 타고 있었다. 시민 대다수는 광장에 함께 있었던 이들처럼 보였다. 피곤해 보이는 엄마의 품속 아기를 바라보는 아빠의 입가에는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그런 밤이었다.

 

시민들은 권력의 천박함과 비열함의 바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뜨겁던 지난여름부터 학습을 해왔다. 누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공동체를 폐허로 만들어버렸는지 95%의 시민들이 알게 되었다.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 보수언론과 종합편성 채널들마저 하루아침에 죽은 짐승의 사체를 물어뜯는 하이에나처럼 대통령에게 달려들고 있다. 상전벽해다. 그래서 언론은 더 믿을 수가 없다. 또 줄곧 기호 1번, 박정희, 박근혜를 말하던 노인정 문화도 바뀌었다고 한다.

 

두 번에 걸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에도 시민들의 분노와 참담함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충분한 고백이 아니었고, 진정성 없는 수사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사과문은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패러디로 바뀐다. 참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장의 시민들은 그들의 더 근원적인 분노가 심각한 불평등과 불신에 기초한 빈부 격차의 심화, 상대적 박탈감에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다시 시작할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나치를 허락한 독일인에게 「죄의 문제 - 시민의 정치적 책임」을 물으며 근본적 반성을 촉구했다. “야만적인 폭력 앞에서 나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무엇을 잘못했고, 지금 개인으로서 그리고 동료와 연대해서 무엇을 해야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가?” 야스퍼스는 동포의 죄를 질책하고 동포들에게 비난받아 조국을 떠나는 예레미야 예언자에 자신을 빗대기도 했다.

 

야스퍼스는 “인간은 자신이 지배받는 방식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는 정치적 문제의식을 넘어서, 인간 내면을 향하는 도덕적이고 형이상학적 죄에 철저한 성찰과 각성을 촉구했다. 그것이 철학과 신학의 임무라 했다. 이는 또한 사적 영역으로 물러난 신앙과 종교적 관습을 정치라는 공적 영역으로 돌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세상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교 신앙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거리에 선 시민들이 민주주의 회복과 공동체의 복원을 열망하지만, 정치를 이해타산과 권력투쟁으로만 아는 협잡꾼들로 말미암아 그 꿈이 무산될 수 있다. 새로운 사탄의 노예는 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보수와 진보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전환기에 서있다.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의 탈출이 연옥에 멈추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천국,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일이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는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 선언하신다. 톨스토이는 이 선언을 제목으로 책을 쓰면서 “그리스도교는 신비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생활의 이해다.”라는 부제를 달아놓았다.

 

하느님 나라는 저세상을 욕망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저세상에 대한 믿음으로 지금 여기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혼자일 때보다 여럿이 뜻을 합치고 연대하게 되면 더 많은 권리를 가진다. 그것이 나라의 주인 된 권리, 곧 주권이다.

 

하느님 나라도 나만 가는 곳이 아니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가는 곳이다. 더는 가망 없는 세상에서 살 수는 없다. 이제 정말 새롭게 시작할 때다.

 

* 한 해 동안 ‘신앙과 정치’를 집필해 주신 오민환 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12월호, 오민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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