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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인박해 역사신문 제16호 1873년: 병인박해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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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21 ㅣ No.787

[병인순교 150년 - 역사신문] 제16호(끝) 1873년 - 병인박해를 돌아보다


7년간 신자 8000여 명 희생… 그래도 부활을 꿈꾸다

 

 

- 병인박해 기간중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 덕산 사건으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사진은 탁희성 화백이 그린 절두산 순교도.

 

 

박해가 끝났다.

 

1873년 12월 24일 현재 고종 임금이 즉위 10년 만에 친정 체제를 이뤘다.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남에 따라 1866년부터 7년간 지속해온 천주교 박해도 끝을 맺게 됐다. 이 기간에 베르뇌ㆍ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 9명과 신자 2000여 명이 순교한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교회 일각에선 전국에서 8000여 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추정하고 있다.

 

병인박해 종식을 기념해 박해 원인과 진행 과정, 교회에 끼친 영향 등을 재정리했다.

 

 

병인박해 직전 조선 천주교 상황

 

1866년 조선 천주교 신자 수는 2만 50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병인박해 직전 조선 교회에는 주교 2명과 신부 10명 등 12명의 선교사가 사목하고 있었다. 1865년 가을에는 미리내 교우촌에 상설 경당이 세워졌다. 선교사가 세운 첫 번째 경당이다. 오매트르 신부는 이 경당 제대 벽에 성모상을 설치하고, 벽면을 십자가의 길 14처 상으로 장식했다. 교우촌 신자들은 매일 이 경당에서 성모님께 기도하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병인박해 직전까지만 해도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가 곧 닥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새 임금인 고종이 즉위했고, 1860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청나라가 맺은 북경조약의 영향이 조선에도 미칠 것으로 여겼다. 또 천주교 신앙이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돼 신자가 크게 늘었다. 무엇보다 왕족과 양반 등 상류층 사람들의 세례가 이어졌다. 그리고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도 참된 종교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베르뇌 주교님은 대단한 수확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단 한 번 출행으로 북부 지방에서 성인 800명에게 세례를 줬습니다. 주교님은 체포되기 며칠 전 제게 보낸 편지에서 조정의 가장 높은 사람들 집에서 여러 사람이, 심지어 궁 안에서도 천주교를 알거나 공부하거나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여럿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궁 안에서, 지방의 여러 관청에서 우리 종교의 선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답니다. 한마디로 지금이 과거보다 커다란 발전을 내딛게 됐고, 종교 자유가 이 나라에 꽃피게 될 듯한 전조를 보이고 있었습니다”(깔래 신부가 쇠학골에서 1866년 10월 6일자로 쓴 편지에서).

 

조정에서도 선교사들의 활동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베르뇌 주교가 키가 크고 수염을 멋지게 길렀으며 상복 차림으로 교우촌을 방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주교가 사는 집이 다른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하지만 주교가 실소유자인 것도 묵인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중국 내에서 여행, 재산 소유, 전교를 허락하는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만 유럽인을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법을 집행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방관할 뿐이었다.

 

- 흥선대원군은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서울 종로와 조선 8도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한 때에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 되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 만년 자손은 경계하라’고 적혀 있다. 사진은 절두산성지에 있는 척화비.

 

 

박해 원인

 

병인박해는 1866년 2월 19일 최형(베드로), 전장운(요한)에 이어 2월 23일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토마스)가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조선 천주교 최대 박해인 병인박해의 원인은 무엇일까? 병인박해의 도화선은 러시아의 진출이었다. 러시아의 통상 요구는 당시 정권 실세인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도록 빌미를 제공했다. 선교사의 중재로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 보자는 방아책이 그를 흔들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천주교와의 교섭을 비난하고 선교사들과 신자들을 색출해 처형해야 한다는 조정의 대세에 따라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이렇게 시작된 병인박해는 단기간에 끝나지 않았다. 1866년 10월 프랑스 함대에 의한 병인양요, 1868년 5월 남연군 묘를 파헤친 덕산 사건, 1871년 5월 미 군함 제너럴 셔먼호의 신미양요 등이 이어지면서 1873년 대원군 실각 때까지 지속됐다.

 

 

조선 교회의 피해 상황

 

병인박해로 조선 천주교는 황폐해졌다. 선교사들은 순교하거나 중국 요동으로 피신해 단 한 명도 조선에 남아 있지 못했다. 신자들은 8000여 명이 순교했다. 공식적으로 병인박해 기간 「포도청등록」에 기록된 체포 신자 수는 2116명이다. 이 중 1549명(73.2%)이 순교했고, 300명(14.2%)이 배교했다. 267명(12.6%)은 미상으로 처리돼 있다. 체포된 신자 수는 덕산 사건이 있던 1868년에 가장 많았다. 신자의 85%가 1866년부터 1868년 사이에 체포됐다. 남자는 1866년도, 여자는 1868년도에 가장 많이 희생됐다. 이는 병인양요와 덕산 사건이 박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려 준다. “교우가 잡혀 배교하면 놓아 주는 법인데, 덕산 산소 일 후에는 잡혀 배교해도 마구 죽였다”는 신자들의 증언처럼 덕산 사건 이후 박해가 더욱 심해졌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병인양요와 덕산 사건 모두 선교사들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배타적 문명관과 조선 출병론이 박해를 자초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복음 선포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선교사들의 이중적 인식이 결국에는 조선 교회를 황폐화하는 데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1873년 12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했다는 소식을 들은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는 중국 요동 차쿠에서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76년 2월 조선과 일본이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개항 시대가 열리고 그해 5월 10일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서울에 입국하면서 조선 교회 재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2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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