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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실루바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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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08 ㅣ No.1584

[은총의 성모] 실루바의 마리아

 

 

실루바의 성모 성화는 ‘길의 인도자 이신 성모’ 형태로 그려졌으며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는 로마의 ‘로마인들의 구원자 성모(Salus Populi Romani)’와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 기적의 성화는 1457년 리투아니아 귀족 페트라스(Petras Gedgaudas)가 리투아니아의 실루바에 성당을 세우고 로마에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계시는 성모 성화를 가져와 모시게 된 것이 그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532년 이 실루바 지역은 영주 자비엘라가 칼빈파를 받아들이며 그 지역 전체가 강압적으로 칼빈파가 되어야 했고,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많은 가톨릭 성당들이 압수되고 폐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오래 된 성당들은 계속 버티어 나갔으며, 사람들은 결국 그 성당들마저 폐쇄되고 파괴될 때까지 교회 행사들에 참석했다.

 

1569년 실루바 성당의 마지막 교구 사제 요나스 홀룹카(John Holubka)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모든 교회의 귀중품 및 문서들을 이 성모 성화와 함께 쇠로 만든 상자에 넣어 폐허가 된 교회의 기초 부분에 묻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실루바는 완전히 비가톨릭적 환경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가톨릭교회는 그 지역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가톨릭은 압수된 교회 재산을 회복하고자 칼빈파에 대한 법적 소송 절차를 시도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소유권을 주장할 문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았는데 이 문제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으로 뜻하지 않게 해결되었다.

 

 

실루바 외곽에서 양떼 치던 목동들에게 성모 마리아 발현

 

1608년 여름 어느 날,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실루바 외곽 바위 옆에서 양떼를 치던 목동들에게 나타나셨다. 그곳은 홀룹카 신부가 칼빈파들의 성화상 파괴를 피해 성모 성화를 파묻었던 곳이다. 아이들 앞에 나타나신 성모 마리아는 그 지역민들의 냉담과 잘못된 생활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이 소식을 들은 칼빈교회의 교리교사인 미칼로우스 피에라와 살리아모나스 그로시우스는 아이들에게 그 발현에 대해 발설하지 못하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한 목동들은 부모와 이웃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발현하신 성모님에 관해 전해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바위 옆으로 모여들었고, 거기서 성모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모습을 보여 주셨다. 당시 칼빈교회의 한 목사는 이 사건을 ‘가톨릭의 음모’로 간주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그 자신도 그곳에 갔다가 그 또한 울고 계신 성모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마리아께서는 목동들이 전한 그대로 그에게도 발현하셨던 것이다.

 

실루바의 성모 마리아 발현사건은 아주 강력한 폭풍이 되어 그 지역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그곳의 주민은 물론이요 인근의 주민들까지 수많은 이들이 회개하고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9월8일 성모성탄축일에는 그 발현지에서 1만1000명 이상이 성체를 모셨다. 이때 어느 100세 노인은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환시를 보면서 눈이 치유되는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이후 그곳에서는 홀룹카 신부가 1532년에 파묻은 쇠 상자를 땅속에서 찾아냈는데, 거기에는 성모님의 성화와 교회의 중요 물품들과 문서들이 예전 그대로 들어있었다. 이렇게 성모님의 발현 후 가톨릭교회는 소유권을 증명할 문서들을 발견하였고, 1622년 가톨릭 소유권 및 손해 배상 소송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땅에 묻혀있던 성화를 발견한 곳, 즉 원래 성당이 서 있던 장소에 작은 나무로 만든 경당이 다시금 지어져 이 은총의 성모 성화를 모셨으며, 이후 이 경당은 여러 번 개축되고 증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775년 8월17일 교황 비오 6세는 실루바의 성모님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교령을 발표하고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전대사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순례지로 공표하셨다. 1903년에는 그 당시 리투아니아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중 하나인 안타나스 비불스키스에 의해 새로운 성당이 건립되어 1924년 9월8일 성모성탄축일에 새 성당이 봉헌되었고, 현재 매년 십만 명 이상의 순례자가 실루바의 성모님을 방문하고 있다.

 

실루바의 마리아는 리투아니아 민족의 위대한 수호자가 되어 그들과 함께 빛과 어둠, 흥망성쇠를 함께했다. 성모님께서는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당신을 처음으로 드러내신 400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결코 리투아니아 민족을 떠나지 않으셨다. 마리아께서는 이 민족이 가장 고통스런 시간을 보낼 때도 늘 함께 계셨다. 그러면서 실루바는 위로의 장소, 격려의 장소, 이 민족을 이끄는 나침반이 되었다.

 

 

발현 후 400년간 리투아니아 민족의 수호자 되셔

 

리투아니아는 발트해에 면한 작은 국가로 러시아의 오랜 지배하에 있었고, 1941년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1944년 소련군의 진입으로 공산화를 겪었고, 1990년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991년 소련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시련기에도 리투아니아인들은 이 기적의 성모성화 앞에서 성모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청하며 끊임없이 기도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발트해 연안의 국가들의 독립 회복 2주년이 되던 1993년에 실루바를 방문하여 이 리투아니아인들의 성소에서 기도했고, 베네딕토 16세는 2006년 실루바를 방문하여 이 기적의 성화의 마리아와 예수님을 위한 금으로 만든 새로운 왕관을 축복하셨고, 2008년에 실루바의 마리아 발현 사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에는 교황 특사를 보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워싱턴 DC에 있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대성당 안에 실루바의 성모께 봉헌된 뜻깊은 경당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 Vincent Brizgys 주교의 지도하에 미국의 리투아니아 이주자와 난민 공동체는 1963년 이 실루바 경당의 설립을 위해 모였고, 1966년에 완공하여 봉헌하였다. 2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이후 소련의 리투아니아에 대한 억압과 점령 동안 망명 리투아니아 예술가들은 뛰어난 예술적 역량을 다해 조국 리투아니아를 성모님께 봉헌하며 이 경당을 꾸몄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0월호,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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