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강론자료

루카복음 16,19-31 부자와 라자로 (2016. 9. 25. 연중 2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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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6-09-24 ㅣ No.2142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는데 개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습니다.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은 권력과 명예이며 즐겁고 호화로운 삶은 재물과 쾌락이다. ‘부자는 욕망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을 상징한다. 라자로는 마음을 찢고 회개함으로써 성령의 지혜를 누리고 있는 하늘나라의 제자를 대표한다. ‘가난는 회개이며 종기투성이는 세상의 비웃음이며 은 영적 생명이다. 가난은 세상의 즐거움(쾌락, 재물, 명예, 권력)에 초연함을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마태오복음 5:3)” 라고 할 때의 가난과 마찬가지이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은 세상의 경쟁에서 물러나 있음을 가리킨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현세의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남들과 다투지 않고 주어지는 삶의 현실로 만족한다. 그는 이미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리고 있으므로 현세의 행복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개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소위 지혜로운 스승을 가리킨다. 그들은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훼방한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제자를 비웃는 한편 권력자와 부자의 문턱을 기웃거린다. 종기는 세상의 모욕이며, 역설적이게도, 하늘나라의 명예이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세상의 지혜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지혜를 발휘한다.


 

가난한 사람이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습니다. 부자도 죽어서 묻혔습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올려다보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습니다. 그가 큰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더러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적셔달라고 하십시오. 저는 이렇게 불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게. 그러니 이 사람은 지금 즐거움을 누리고 자네는 고통을 받는 것이네. 게다가 우리 사이에는 깊은 도랑이 있어서, 우리가 있는 곳에서 자네에게 건너갈 수도 없고 자네가 있는 곳에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네.’

 

하늘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죽음의 거울에 비추어 대비하는 수법이다. 천국과 지옥은 死後에 닥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다. ‘사후의 세계라는 말은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에게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없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죽음을 이기는 영적 생명을 지니고 있으므로 육신의 죽음은 있을지언정 죽음은 없다. 아무튼 진리와 거짓은 육신의 죽음 앞에서 분명하게 판명된다. 진리는 육신의 죽음을 이기고 살아있을 것이며 거짓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소멸할 것이다.

 

아브라함 곁은 하늘나라이다. ‘아브라함 아버지는 부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성서적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아브라함을 본받아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부자가 오해하는 것처럼 혈통, 문화, 관습의 후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옥은 사람들이 영적 생명을 모르고 헛된 즐거움에 탐닉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은 성령이며 은 욕망이다. 겉으로 보기에 고통을 받는 라자로는 이미 하늘나라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되 겉으로 보기에 온갖 즐거움을 누리는 부자는 이미 지옥불의 고통을 받고 있다. ‘도랑은 회개를 거부하는 고집이다. 회개란 세상의 즐거움이 덧없음을 깨닫고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는 결단의 행위이다. 부자는 고집스럽게 회개를 거부함으로써 계속 지옥에 머물러 있다. 하늘나라와 지옥은 모두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그 둘은 정반대 방향에 있다. 하늘나라에서는 지옥이 투명하게 보이지만 지옥에서는 하늘나라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부자를 라자로의 입장으로 옮겨놓고 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부자가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아버지, 그러면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거기에 저의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되네.’ 부자가 말하였습니다.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 아버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야만 그들이 듣고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네.’”


악인이라도 가족을 고생시키지 않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줄 안다. 그렇다면 참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제 아버지 집은 지옥의 고통을 겪고 있는 세상 사람들, 구체적으로는 성서의 독자를 가리킨다. ‘다섯 형제는 육정의 즐거움을 탐닉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성서에서 5는 육신을 가리키는 상징수이다. 모세와 예언자는 율법과 성령을 상징한다. 율법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부추기며 성령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하늘나라의 제자이다. 말하자면, 부활이란 지옥의 생명을 죽이고 하늘나라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일이다. 라자로가 하늘나라의 제자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지옥에 남아있다.

 

하늘나라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내적 사건이므로 화려한 모습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화려한 것은 지옥의 모습이다. 화려한 것을 추구하려면 남과 경쟁해야 하므로,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해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회개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건지며,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하늘나라의 제자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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