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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뿌리: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와 안토니오 가볼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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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5 ㅣ No.566

[영성의 뿌리]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와 안토니오 가볼리 신부


‘애덕’ 활동 통해 일본교회 발전에 헌신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왼쪽)와 안토니오 가볼리 신부.


“까리따스 수녀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예수마음의 사랑을 알리고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하는 수단과 목적으로 도움이신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까리따스수녀회는 1937년 6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설립인가를 받고 8월 설립됐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며 사랑, 평화와는 동떨어진 행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 설립된 수녀회는 가난과 전쟁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애덕사업과 음악이라는 선교 수단을 통해 복음화를 촉진하고, 방인사제 양성 등으로 일본교회 발전에 공헌했다.

수녀회의 창설자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는 1879년 이탈리아 로마냐 지방 파엔짜에서 태어났다. 1895년 살레시오수도회에 입회해 사제품을 받은 치마티 신부는 토리노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농학, 교육학과 철학 등의 학위를 받았고, 우수한 성적으로 빠르마 음악원을 졸업했다. 30년 동안 토리노의 발살리체 수도원에서 교육과 신학생 양성 및 사목에 종사했고 교장과 수도원장을 역임했다. 1926년 살레시오회의 첫 일본 선교단 단장으로 일본에 도착한 그는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 일본 최초의 여성 빈첸시오회를 설립했다. 1935년에는 미야자키 초대 지목구장과 일본 살레시오회 관구장의 임무를 맡았다.

선교지의 방인수도회 설립을 권고하는 교황 비오 11세의 원의와 지침에 따라 치마티 신부는 1937년에 안토니오 가볼리 신부와 함께 까리따스 수녀회를 설립했다. 그는 1965년 10월 6일 86세로 도쿄 조후 수도원에서 선종할 때까지 ‘일본의 돈 보스코’로 불리며 지칠 줄 모르는 복음화 활동을 펼쳤다. 그의 시복시성조사는 1976년 시작돼 1991년 12월 가경자로 선포됐고 현재 시복 준비 중이다.

치마티 신부와 함께 수녀회를 설립한 안토니오 가볼리 신부는 1888년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 싼 죠반니 인 마리냐노에서 태어나 1901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종신부로 자원해 4년 7개월 동안 복무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 일본에 최초로 파견되는 살레시오회 선교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당시 살레시오회 총장이던 필립보 리날디 신부는 송별사에서 “선교지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유일한 수단은 애덕”임을 강조했는데, 가볼리 신부는 이를 선교활동의 지표로 삼았다. 그는 가난한 자와 병자를 방문하면서 1932년 살레시오회 선교사들이 미야자키에 최초로 설립한 구호원의 원장으로서 애덕사업을 펼쳤다. 1933년에는 이 일을 위해 성 빈체시오 드폴의 정신으로 봉사하는 아가씨들의 단체인 애자회를 만들었는데, 자신의 장상인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의 권고에 따라 후에 이 단체를 토대로 1937년에 설립된 까리따스 수녀회를 위해 투신했다.

가볼리 신부는 1972년 11월 22일 선종할 때까지 자신의 선교지인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한편, 1956년 한국을 시작으로 남미, 유럽으로 선교수녀를 파견했다. 한국에 진출한 까리따스수녀회는 2010년 ‘예수의 까리따스수녀회’로 수도회명을 변경하고 광주, 서울, 수원에 각각 관구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5년 11월 1일, 
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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