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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하느님의 계획에서 본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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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03 ㅣ No.446

[윤주현 신부의 신학 이야기] 하느님의 계획에서 본 인간

 

 

신학적 인간학 

 

신학, 교회의 영적 보화로 인도하는 안내자 신학은 말 그대로 하느님(Theos)에 대한 학문(Logia)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복음을 전하던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점차 이방 세계로 복음 선포의 영역을 확대해 갔습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많은 도전에 직면하며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점차 자신들이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깊이 있는 학문적 성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이른바 ‘토착화’ 작업은 역사적으로 볼 때 바로 이 시기에 처음 시도되었습니다. 

 

교부들을 비롯해 많은 신학자는 우리가 믿는 신앙의 신비를 시대의 정신과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재해석해서 풍요롭게 설명해 왔습니다. 이를 통해 교도권을 수행하는 교회의 장상들에게 믿을 교리를 체계화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당대의 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재해석되면서, 마치 신학은 소수의 학자가 엄격한 학문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구축해가는 일부 엘리트 신학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신학적 성찰 이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이 있었고, 그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열두 사도들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 근원에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핵심적 사건과 그에 대한 제자들의 원체험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단순히 학문적 영역으로 축소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신학은 우리가 믿는 신앙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인 동시에 우리가 믿는 교리들이 간직한 심오한 신비들을 엿보게 해주는 안내자입니다. 

 

이러한 신학의 역할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신학은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보화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호부터 우리가 믿는 구원의 신비를 다양한 신학의 시각으로 접근하면서 그 안에 담긴 교회의 다양한 영적 보화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신학적 인간학이란 

 

첫 번째 주제로 ‘신학적 인간학’이라는 주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학적 인간학은 ‘신학’을 인간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바라보는 현대의 신학적 흐름이며, 이를 학문적으로 재구성한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에 대해 그리고 구원의 역사와 계시 진리에 대해 말하되 ‘인간의 관점’에서 이 작업을 하는 것, 그리고 계시의 빛 안에서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구원 선물의 수취인인 인간 존재의 신비를 해명하는 분야가 바로 신학적 인간학입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학문은 그 출발점으로 인간에 대해 언급합니다. 신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뺀 신학은 공허할 뿐입니다. 그 모든 신학적 주제가 이 시공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한 문제가 해명되지 않는다면, 신학은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이나 다름없는 당신의 아드님까지 선사해 주셨던 인간, 그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하느님 계획’의 빛 아래서 본 인간 

 

인간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신학 공리에 따르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은 모든 원인을 있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인 한에서 인간 존재와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하는 모든 선택과 결단의 객관적인 기준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신학자와 영성가는 인간의 ‘최종목적’을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至福直觀)’ 또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합일’로 불러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최종목적을 염두에 두고 이를 위해 인간을 이 땅에 존재케 하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은 하느님의 모든 행위와 구원 개입을 가능케 하는 뿌리가 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에 개입하셔서 베푸시는 모든 은총, 그리고 그분의 섭리적인 이끄심은 바로 이 최종목적을 이루려는 당신의 활동입니다. 

 

하느님이 정말 하느님이시라면,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셨고 그것을 이루겠노라 하신다면, 마지막까지 그것을 충만히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하느님의 성실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1테살 5,23-24 참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그가 죄를 짓고 또 계속 넘어지고 깨지면서 심지어 당신을 배반하고 멀리할 것까지도 다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준비하신 궁극적 목적인 그분과의 합일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계획이 불완전하고 결국은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불완전함과 거기서 파생되는 당신의 계획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미리 내다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까지도 모두 당신 계획에 두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인간의 모든 죄와 배신을 결정적으로 없어지게 하고 그를 새롭게 만든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불합리와 죄를 받아안고 돌아가셨으며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다시 일어나신 그분의 부활사건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결코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이런 인간의 모든 불완전까지도 내다보셨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안전장치까지도 마련하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예정 은총 

 

이처럼 하느님께서 이미 역사 이전에 인간을 당신과 하나되도록 원하셨다고 하는 그분의 결정을 ‘예정(豫定)’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과 하나되도록 인간을 예정하신 은총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모든 구원 개입 행위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예정은 곧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계획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예정하시고, 그 예정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시고자 이 땅에 우리를 존재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하느님의 심중(心中)에 이미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바오로 사도의 서간인 로마서 8,28-30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분께서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알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알지 못한 채 우리를 위한 계획을 세우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바탕으로 한 앎입니다. 우리에 대한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앎, 예정, 계획의 뿌리가 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예정에 뒤이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이 오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최종목적을 위해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정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계획을 실현하시려고! 

 

그런데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최종목적으로 예정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 각자를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선택한 이들을 예정하시고, 또한 예정하신 이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부르신 이들을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하셨으며, 그렇게 의롭게 하신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자녀로서 영광을 누리도록 안배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계획’의 가시적 형상인 인간 

 

한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존재 그 자체로 그에 대한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을 이 역사 안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이러한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이 ‘나’라고 하는 고유한 한 인간 존재를 통해 표현된 은총의 가시적인 모습입니다. 우리 각 존재가 가진 고유한 모습, 그 누구도 아닌 ‘나’라고 하는 독특한 존재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사랑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라고 하는 소중한 모습을 통해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선사하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가는 협력자이자 동료로 불러주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느껴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통해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그리고 여러분에 대한 그분의 계획과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윤주현 베네딕토 - 가르멜수도회 사제. 교황청립 데레사대학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스페인의 아빌라 신비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현재 가르멜수도회 대구수도원원장,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로 활동하며 다양한 저서와 역서를 펴내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7월호, 윤주현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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