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교의신학ㅣ교부학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이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06 ㅣ No.647

[‘교회와 나’ 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이해 ① 선교는 순례하는 교회의 본질

 

우리의 <‘교회와 나’ 새롭게 알기> 나눔 여정이 순례를 시작하여 한고비를 달리고 이제 끝자락에 와 있다. 그동안의 나눔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됐고, 또 무엇이 가슴 한 편에 남아 우리의 (능동적)행위를 이끌어낼까? 그게 무엇이 되었든 중요한 건 결국 그 새로운 앎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 마지막 장에선 그것을 살아내는 일을 함께 나누려 한다. 바로 이제껏 나눈 ‘교회와 나’의 삶을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사는 일, ‘선교’이다.

 

공의회는 「교회헌장」에서 교회의 성사성(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드러내는 그리스도 안의 성사-1항)에 근거하여 교회를 세상에 대한 구원 사명을 위임받은 선교적 교회로 특징짓고 있다. 교회를 이해하는 데 선교가 절대로 필요하고, 선교는 순례하는 교회의 본질이다(교회헌장 17, 선교교령 2항 참조). 그렇다면 선교는 구체적으로 무얼 말하는가?

 

우선, ‘선교’는 ‘파견’이란 뜻의 라틴어(missio)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 무엇보다 ‘파견’과 관계가 깊다. 교회의 설립자이신 예수님이 애당초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성부에게서 파견되셨고(요한 3,16),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또한 세상에 파견하셨다(마태 28,18-20). 이 파견 명령이 사도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에게 주어졌다면, 전체 교회가 곧 우리 모두가 이 명에 따라야(교회헌장 17, 선교교령 5항 참조)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이는 교회 스스로 자기 기원을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 두고 있고(선교교령 2항 참조), 교회의 실존(삶) 역시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파견되는 것에 의미와 목표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곧 교회는 인류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세상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행위로써 그것을 드러내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로써 교회는 그 자체로 선교적이며, 따라서 교회의 정체성의 실현 역시 선교(복음화)에 있다는 말이 타당성을 얻는다. 달리 말하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곧 선교에 있는 것이다.

 

공의회는 「선교교령」을 통해, “교회에서 파견된 복음 선포자들이 온 세상에 가서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과 집단에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 자체를 심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활동을 일반적으로 ‘선교’라고 한다.”(6항)고 말한다. 이 안에 선교의 대상이 드러나는데, 곧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관건은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교가 무엇인지 머리로 인식한 것을 가슴으로 사는 일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의 본질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신이 스스로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지식으로만 전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지식, 앎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은 자칫 ‘아는 체하기’나 ‘독선’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이는 우리가 전하려는 주님과 도무지 맞지 않은 행위다.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전하려면, 오직 살아있는 복음, 체험된 신앙의 전파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공의회 선교 이해의 첫 시간은 선교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는 것으로 마무리해보자. [2022년 2월 6일 연중 제5주일 대전주보 4면, 서명옥 로사(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이해 ② 교회의 실존과 선교의 관계

 

이 공의회 선교 이해의 둘째 시간은 (지난회의 선교에 대한 마음가짐에서) 교회의 실존과 선교의 실제적인 관계를 들여다보는 데 쓰려한다. 이를 위해 이 공의회의 교회 실존의 의미와 목적을 제시한 수에넨스(Suenens) 추기경의 구상을 살펴보며 그 이해에로 나아가보자. 사실 추기경의 이 구상이, 교회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명시한 「교회헌장」과 「사목헌장」(이 두 헌장이 곧 이 공의회의 교회론임)의 기틀이 되므로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띠고 있다 하겠다.

 

우선, 추기경의 구상의 대전제에는 이러한 물음과 답이 놓여있다: ‘교회가 어떻게 실존해야 하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느님 안에 있는 인간 실존에 대한 메시지의 보유자로 파악돼야 한다.’ 딱딱하게 들리는 이 말을 풀어쓰면,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삶에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는 존재로 있어야 한다, 곧 인간 삶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직접 관련된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추기경이 제안한 구상의 근본은 교회 자체이다. 계속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모든 인간의 동시대인이 되신 그리스도로의 교회 자체가 그 근본주제인 것이다.

 

바로 이 주제를 살아가는 데에 예수님의 파견 명령이 들어선다. 곧 오늘날의 교회가 얼마만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를 실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파견 명령은 ‘교회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원천과 목표의 두 관점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교회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동시에 관련되어 있다. 곧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백성으로 있도록 불리었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내적) 사람들에게로 파견된다(외적). 내적인 면으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이들의 임무는 무엇인가,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고, 외적인 면으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며, 교회가 전달해야 하는 내용이 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교회는 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져야 하는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추기경의 구상은 이를 내향적 교회(ecclesia ad intra: 교회에 속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교회헌장」)와 외향적 교회(ecclesia ad extra: 인간에 대해서 묻고, 이 인간들에게로 파견된 교회-「사목헌장」)로 나타내며, 결국 교회의 실존은 내적인 동시에 외적이며, 교의(교리)적인 동시에 사목(삶)적인 양극을 함께 포함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교회의 교리와 삶, 그리고 교회 안팎의 백성이 별개가 아니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교회 실존의 양극의 원리는 그 양극을 스스로 드러내고 제시한 그리스도인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교회는 교회 안과 밖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가시오), 가르치며(가르치시오), 거룩하게 하고(세례를 베푸시오), 기도하는 교회(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로서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시오.”를 실현해간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과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드러내 보이는 교회의 선교적 삶이다. [2022년 2월 13일 연중 제6주일 대전주보 4면, 서명옥 로사(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이해 ③ 선교의 자세와 실제: 복음화

 

이제 이 공의회 선교 이해의 끝 시간이자 1년에 걸친 우리 배움 여정 대장정의 마지막 시간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으로 무엇을 우리는 간직해야 할지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억지로 무엇을 끄집어낼 게 아니라) 자연스러움에 답이 있지 않을까? 이제는 총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인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그리스도처럼 살까를 고민하고 그것을 살아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다. 그것을 지금 우리의 주제인 ‘선교의 자세와 실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교회 밖 하느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를 염두에 두고 살펴보기로 하자(이는 동시에 교회 안 백성, 바로 자신을 함께 향해야 함을 잊지 말자).

 

가장 우선적으로 전제돼야 할 것은, 이 공의회가 지향하는 교회의 사목적 구원활동과 세상에 대한 선교 과제가 이전 공의회들과는 완전히 다른 토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곧 교회의 사목 활동과 선교 과제가 전 인류를(타종교와 비그리스도인, 심지어 무신론자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선교를 그리스도의 구원 파견의 계속으로,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과의 또 인간 서로 간의 일치를 위해 봉사해야 할 전체 교회의 사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선교하는 사람은 우선 대화적이어야 한다. (앞서 살폈듯-11.②) 교회는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종교의 자유가 전제돼야 함을 강조한다. 그에 따라 선교를 강조하면서 종파 간 대화를 교회의 임무로 받아들이고, 타종교들의 모든 정신적, 도덕적, 사회-문화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므로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적 자세를 취하는 선교방식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선교는 내 것을 일방적으로 남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며, 복음화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종교 신자들뿐 아니라 비종교인과도 대화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는 선교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타문화와 가치들로부터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알려준다. 다른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면서 교회는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선교사명이 인류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다음으로 ‘선교’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신앙의 공동체로 안내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신비로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은 인간의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자체인 까닭이다. 그러니 지식만으로 선교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선교는 결국 사람들을 이 신비(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이자 예수님 자신)로 안내하는 일을 과제로 삼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복음을 들은 사람이 먼저 복음화해야 한다. 오직 체험된 신앙과 복음만이 체험을 낳는 신앙을 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도교 계시 안에서 본래 중요한 것은 교리인가 아니면 삶인가? 물론 이 둘을 분리시킬 순 없다. 그럼에도 삶이 일차적이며, 따라서 교리들은 삶을 나타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삶의 중개, 곧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고 중개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중개에 관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 바로 이것이 선교이자 복음화의 가장 본질적이며 실제적 자세가 아닐까?

 

(그동안 함께 해주신 모든 분께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축복이 늘 함께하시길 빕니다.) [2022년 2월 20일 연중 제7주일 대전주보 4면, 서명옥 로사(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1,45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