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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최경환 성인 가문의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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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5 ㅣ No.1114

최경환 성인 가문의 삶과 신앙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 부부는 부친 최인주의 이웃사랑과 평등주의에 기반한 천주신앙을 계승하여 자기 희생과 절제에 바탕을 둔 남다른 자선을 베풀었고, 열심한 기도와 영적 독서로 얻게 된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신앙심을 순교로써 입증하였다. 이러한 부모의 감화를 받은 최양업 신부와 그의 형제들은 물질적, 영적인 나눔의 생활에 충실했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헌신하였다.

 

1925년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시복(諡福)을 계기로 1929년 6월 송 아가타의 고증으로 복자 최경환의 분묘가 교회 당국에 의해 확인되고 1930년 5월 발굴되어 유해가 이장되었고,〈송 아가다 이력서〉, 〈최 신부 이력서〉, 〈최 바시리오 이력서〉등 가문의 신앙 내력을 정리하는 작업들이 진행되어 신앙 선조들의 순교신심에 대한 현양작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1984년 103위 한국 복자의 시성식(諡聖式)을 계기로 해서는 배론, 배티, 청양, 수리산 등 최경환 성인 및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각종 성지 개발 사업에 후손들이 적극 참여하기 시작하고, 해마다 후손들이 풍수원 선산에 모여 신앙 선조들에 대한 추모미사를 봉헌하는 등 본격적인 현양 사업에 참여해왔다.

 

특히 성인의 후손 가운데에서도 최양업 신부를 비롯하여 2009년 현재 모두 12명에 달하는 사제들과 9명의 수도자들은 아동교육, 사회복지 분야 사업 등에서 헌신적으로 교회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최양업 신부가 정결과 희생의 삶으로 일구어낸 ‘땀의 순교’와 최경환 성인 및 이성례 마리아가 보여준 약자에 대한 우선적 관심과 보호라는 인권의식(人權意識)을 몸소 실천하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Ⅰ. 머리말 - 연구사정리, 글의 취지, 자료, 전개방식

 

2009년은 최경환(崔京煥, 1804~1839, 譜名 榮訥, 字 치운, 프란치스코) 성인이 순교한지 꼭 170년이 되는 해이다. 이 해에 ‘최경환 성인과 수리산 성지’라는 제목으로 수리산 성지에서 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된 것은 성인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고귀한 정신을 높이 기리어 현양(顯揚)할 뿐만 아니라, 그 가문의 후손들이 최경환 성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이를 실천함으로써 대대로 계승해온 성직자, 수도자, 성가정의 거룩한 전통과 열절한 신심(信心)을 오늘날의 우리도 함께 본받자는 점에 더욱 큰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심포지엄의 목적에서 최경환 성인 부부 및 그 아들 최양업 신부와 그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가문의 전통과 신앙심의 구체적인 면모에 대해서 기왕에 밝혀진 문서자료들과 후손들의 진술을 종합하여 정리해본 글이다.1)

 

본고와 관련하여 최경환 성인이나 이성례(李聖禮, 일명 性禮, 1801~1840, 마리아) 순교자에 대한 선학들의 언급은 단편적으로 산견될 뿐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분석을 가한 독자 논문은 없었다.2) 그러나 그 아들 최양업(崔良業, 보명 九鼎, 1821~1861, 토마스) 신부와 관련해서는 1990년대 이후 본격적인 자료의 발굴과 함께 다양한 연구논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3) 본고는 이같은 선행 연구결과들을 참고로 하면서 대체로 시간 순서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최경환 성인과 그의 아들 최양업 신부의 신앙과 교회활동을 중점 과제로 삼아 이를 당대와 후대의 가전 기록 등을 통하여 정리하고, 아울러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 부부가 그의 자녀들에게 물려준 신앙심의 구체적 내용을 파악했다. 그 다음으로는 최경환 성인의 손자 대부터 현재까지 이루어진 가계 기록의 정리, 조상의 분묘수리, 기념비 건립 및 성지개발 참여 등 신앙선조들에 대한 후손들의 현양운동(顯揚運動)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최경환 성인 부부가 후손들에게 물려준 정신적 유산을 ‘인권의식(人權意識)’과 ‘나눔의 삶’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간략히 평가해보았다.

 

 

Ⅱ. 최경환 성인의 표양과 최양업 신부의 계승

 

최경환 성인에 대한 교회 내외의 평판은 이미 선종 직후부터 그의 가문 안팎에서 동시에 형성되고 있었다. 우선 가문 안에서는 그의 아들 최양업 토마스 신부4)와 최 베드로에 의해서5) 그들의 부친으로부터 받은 긍정적 감화를 기술한 것으로부터 차츰 며느리 이 마리아6)와 손자 최상종 빈첸시오7) 등에 의해서 신앙과 애덕의 측면에서 성인의 훌륭한 점들이 술회(述懷)되고 기려졌다. 가문 밖에서는 주로 이웃에 거주하면서 성인을 직접 목격하거나 또는 그 명망을 전해들은 이들 즉, 김 막달레나8), 변 아나스타시아9), 유 바르바라10), 오 바실리오11), 김 프란치스코12), 이 베드로13) 등에 의해서 칭송이 자자했다. 이처럼 최경환 성인의 주위 인물로부터 그의 훌륭한 인품과 신앙심을 전해들은 교회 내 순교자 전기 기록자14) 및 다블뤼, 달레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고서나 서한을 통해서15) 그리고 일제 때부터는 경향잡지 등 교회내 언론을 통해서16) 오늘날까지도 각종 언론매체와 교회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최경환 성인에 대한 칭송과 찬양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내 이성례 마리아에 대해서도 최경환 성인과 마찬가지로 순교 직후부터 가문 안팎의 관련 증언들이 그의 아들 최양업 토마스 신부17), 최 베드로18) 등에 의해서 제기되어 점차 며느리 이 마리아19), 손자 최상종20) 등 가문 내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한편, 가문 밖의 지인21)들과 프랑스 선교사들22)에게 전달되고 일제 때에는 경향잡지 등 교회언론23)에 알려져서 오늘날까지 교회 언론과 교회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그 신심과 인품이 기려지고 있다.

 

이처럼 교회 내외에 널리 알려진 최경환 성인과 그 아내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의 행적은 일차적으로 그 자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최양업 토마스와 그의 남동생들은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의 열심한 신앙심과 인격에 감화 받아 자연스럽게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장성해서 결혼을 하게 된 이후에는 그 며느리들도 시부모의 신앙심을 이어받게 되었다. 특히 부친 최경환 성인의 신심과 인품은 그의 아들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최선정 안드레아(베드로), 최우정 바실리오 등에 의해서 기려지고 계승되었으며, 부인 이성례 마리아의 덕행과 신심은 그의 오남(五男) 최신정의 델레신포르의 아내 송 아가다 등 며느리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부친에 대한 평소의 인품과 순교 행적에 대해서 그의 스승 르그레즈아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당신 신심의 발원처가 그의 조부 최인주(崔仁柱, 1767~1824)의 가르침이었음을 알려준다.

 

저의 아버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이고 저의 어머니는 이성례 마리아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고결하고 부유한 신자 부모한테서 출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최인주)는 첫 번째 박해(1791년의 신해박해) 때 많은 고초를 겪은 후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순박함과 신심이 뛰어났습니다.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미리 알아서 구제의 손길을 펼치는 자세도 유별났습니다. 자기집 종들에게 자기들을 영감님이나 마나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세 아들에게 세 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 서로 무엇을 줄 때 거저 주어라. 보증을 서거나 혼인 중매를 절대로 서지 말아라. 이웃들과는 항상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이었습니다.24)

 

〈최 바시리오 이력서〉를 인용한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최경환 성인의 가문은 성인의 조부 형제인 최한일(崔漢馹)과 최한기(崔漢驥)가 1787년(정조11)경 내포의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의 전교를 받아들여 교회에 입문함으로써 신자 가문이 되었다고 한다.25) 그러나 성인의 후손들에게 계승되어진 참된 신앙심과 덕행의 본보기는 성인의 부친 최인주에게서 비롯된 것이 분명한데, 그것은 최인주가 앞의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양반 중심의 신분차별을 반대하고 비천한 계급의 하인들을 친자녀처럼 사랑으로 보듬어 평등한 신앙공동체를 추구했던 점과, 남에게 아낌없이 자선을 베풀 것을 강조했던 점 등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겼던 데서 확인된다.

 

이러한 최인주의 가르침이 그의 자손들에게 두루 계승되었던 점은 이하 본문에서 살펴볼 것인데, 특히 그의 아들 최경환 성인은 남다른 자선행위가 두드러졌고, 손자 최양업 신부는 평등한 신앙공동체의 추구와 같은 점이 특별히 잘 드러난다. 최경환 성인이 베푼 자선행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조금씩 달리 나타나고 있지만 공통적인 점은 이러한 자선의 밑바탕에 극기(克 己)를 통한 겸손(謙遜)의 영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가]

◦ 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26)

◦ 의식(衣食)을 박(薄)히 하며 애긍(哀矜)을 힘써 입은 옷이라도 헐벗은 사람에게 입히고27)

◦ 한 번은 가계치패(家計致敗, 가정이 몰락함)하여 홍주(洪州) 몇 두락 토지를 팔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두어 사람이 악독히 싸우는지라, 연고를 물은 즉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는 연고라 하였다. 그 채무자를 불쌍히 여겨 갚지 못하는 채금(債金)을 갚아주어 화목케 하였다.28)

 

[나]

◦ 프란치스코는 장을 보러 갈 때에는 물건 중에서 제일 나쁜 것이나 흠 있는 것을 골라서 사옵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29)

◦ 또 한번은 시변(市邊)을 지나시다가 떡장수가 파 하나를 실수하여 (밟아) 떡그릇을 진흙 개천에 엎지르고 앉아 울고 있었다. 측은한 마음이 감발하여 물은 즉, 노파가 울며 말하되, “이 떡을 팔아야 어린 자식과 생명을 보존할 터인데, 이 지경이 되었나이다” 하였다. 이에 그 가문(價文, 값)이 얼마냐고 물어 값을 다 물어 주었도다.30)

 

[다]

◦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31)

◦ 서울에서 50리 떨어진 자기 마을에서 신자들을 권고하여 의연금을 거두고,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찾아 매장하였으며, 또한 불쌍한 교우들을 찾아 동분서주하였습니 다.32)

 

위의 인용들에서 [가]의 공통된 점으로는 자신이 다른 이의 딱한 사정을 돌볼 때 자신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도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 절약하고 아껴서 그 돈이나 물건으로 다른 이를 아낌없이 돕는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가난한 과부의 헌금33)에 비길 수 있는 헌신적인 자선(慈善), 온전한 베품[哀矜]이었다. 또한 [나]에서 볼 수 있듯이 떡과 과일을 살 때 흠결이 많거나 거의 먹을 수 없는 물건을 사주었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의 상식과는 정반대의 행동으로 일종의 기인(奇人, 이상한 사람)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남다른 선행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사정을 돌보지 않고 온전히 타인의 불행을 도와주려는 마음은 바로 가장 ‘겸손(謙遜)’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자신의 이기심(利己心)을 철저히 극복하는 ‘극기(克己)’의 수양에 그 바탕을 둔 것으로 최경환 성인이 평소 그리스도교 수양서(修養書)인 《칠극(七克)》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34) 이를 실천한 결과로서 해석된다. [다]의 경우는 재물과 능력의 적극적인 나눔 행위에 속하는 것들로서, [가], [나]와 마찬가지로 겸손에 바탕을 둔 자기 희생이 전제되지 않으면 결코 실천하기 쉽지 않은 자선행위에 속한다.

 

최경환 성인은 이러한 자신의 덕행을 신앙심과 함께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는데35), 특히 최양업 신부는 부친의 헌신적인 베품의 덕행을 이어받아,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1년 중에 한두 달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전국에 산재한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교우들의 영적인 갈증과 주림을 해결해주고자 분투노력하였다.36) 최경환 성인의 자선이 물질의 베품이었다면 그 아들 최양업 신부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선은 곧 체력과 능력과 시간의 온전한 투신이라는 정신적, 육체적인 베품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입국한 직후부터 그가 질병과 과로로 선종하던 1861년 6월까지 무려 11년 6개월 동안이나 이러한 영적이고 육체적인 베품의 생활을 지속함으로써 서양 선교사들이 도저히 다니기 힘들었던 방방곡곡의 심산유곡에 위치한 교우들에게도 성사의 혜택을 나누어주었다. 그 결과로 1857년 선교사 수의 증가로 사목관할 구역이 축소되기 이전까지 그는 전국 영세자수의 46.5%(거의 절반)에 달하는 신입교우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전국 신자 중에서 약 34.7~52.1%에 달하는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할 수 있었다.37)

 

최경환 성인의 헌신적인 나눔의 삶은 그의 넷째 아들이자 최양업 신부의 셋째 동생 최우정(崔禹鼎, 1832~1886, 바실리오)에게도 계승되었다. 최 바실리오는 병인박해로 인한 10여년의 공백기 후에 다시 조선에 재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 특히 블랑 주교의 지시에 순명하여 여비도 없이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남지방으로 구걸을 하다시피 도보여행을 하면서 흩어져 숨어사는 교우들에게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였으니 교회로 모여서 성사를 받고 신앙생활을 재개하 라”는 주교의 메시지[輪告]를 전달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석(朝夕)의 끼니를 궐한 적이 많아 겨울철에 몇 번이고 아사지경(餓死之境)을 당하면서도 곳곳에서 겪는 모욕과 구박을 견디어 내며 끝까지 전교여행을 수행하였다.38) 이러한 바실리오의 삶 또한 그의 형 최양업 신부의 헌신적인 전교여행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교우들을 위하여 온전히 베푼 정신적, 육체적 나눔의 삶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최경환 성인은 그 부친의 가르침을 따라서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였고, 어머니에게는 효도하면서, 아랫사람들을 자상하게 보살펴줌으로써39),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화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성인은 자신이 지도하는 수리산 교우촌 신자들의 인심을 단기간에 얻을 수 있었다. 1839년 7월, 그가 수리산에서 체포될 때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수리산의 교우들 60명 중 약 40명이 포졸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성인과 함께 50리 길을 걸어 서울 포도청으로 함께 동행하여 끌려간 것40)은 바로 이같은 성인의 후덕한 보살핌에 따른 전적인 신뢰심 때문이었다.

 

이러한 최경환 성인의 성품은 그가 과일을 추수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나누어주고, 흉년에는 특히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백방으로 구제했다는 사실과 함께 낮은 신분의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정신”이 구현된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는 곧바로 지역사회의 복음화를 실천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안의 하나가 될 수 있었는 데, 최양업 신부에게 계승된 성인의 이 같은 정신은 최 신부의 비판적 안목과 선구적인 인권의식(人權意識)에 논리적 바탕을 두고 좀 더 분명하게 행동으로 옮겨진다. 최양업 신부는 그의 사목 서한에서 조선의 양반제도가 교회를 병들게 하는 좀이나 다름없다고 역설하거나 여성 교우들의 비참한 현실에도 가슴 아파 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의 양반제도와 양반들의 폐단에 대해 여러 번 냉정한 비판을 쏟아냈다.

 

㉮ 양반 신분의 사람들은 대개가 한가로운 생활을 합니다. 아무리 찌들고 가난해서 먹고 살아갈 것이 없어도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결코 일을 해서 최소한의 생계비라도 벌 생각을 안합니다. 그래서 횡령과 사기와 착취로 살아갑니다. 희생으로 삼을 제물감을 찾아다니면서 한데 어울려서는 도박과 주색잡기에 푹 빠져 지냅니 다. 저들이 입교하여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게 되면 하느님의 법에 따라 그전의 방탕한 생활을 버리도록 강요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직한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꾸려나가기에 유익한 전문기술이 전혀 없거나 전문 기술자가 될 소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먹을 것이 없는 처지이니만큼 굶주림에 못 이겨 이전의 못된 버릇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보다도 더 나쁜 사람들이 됩니다.41)

 

㉯ 우리 조선에서 양반이라는 자들에 대한 여론을 말하면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양반 자신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백성이 양반 계급의 독선, 오만, 횡포, 부도덕이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고 백성들의 온갖 비참함의 원인임을 시인하며 지겨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42)

 

㉰ 우리 포교지의 상태는 신자들 중에서 신분 계급의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므로 분열이 일어나서 큰 걱정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덕(信德)과 형제애(兄弟愛)가 부족하고 계속되는 논쟁과 암투와 증오로 신자 공동체가 와해되고 비건설적으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이 폐단을 시정할 무슨 대책이 없는지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우리 포교지에 큰 손실을 초래할 것입니다.43)

 

㉱ 다름이 아니라, 베르뇌 주교님의 선임자이신 페레올 고(高) 주교님이 생존하셨을 때, 신자들 사이에서 말이 많아 주교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레올 주교님께서 당신을 보좌하는 복사들을 잘못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사들은 크게 비난받을 짓을 많이 범하고서도 양반임을 내세워 항상 너무 거만한 행세만 부리므로 모든 교우들한테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유독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그들만 사랑하시고 신임하시어 그들하고만 모든 일을 의논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이를 그대로 두면 주교님께도 해로울 것이고, 일반 교우들에게도 손해가 되겠기에 주교님께 여러 번 서한도 올리고 직접 면담하면서, 그들을 내보내시라고 진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저는 주교님한테 큰 꾸중만 들었고, 저들 복사들로부터는 큰 미움을 샀을 뿐이었습니다. … 주교님은 양반 계급만 너무 편애하시어 이미 너무도 높아져 있는 양반들을 더 높이 추겨 주고, 그 반면에 이미 너무나 비참하고 억눌려 있는 일반 서민들을 더욱 억누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 사이에 나날이 더욱 불화가 심해지고 많은 이들이 의분을 느끼고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또한 교우들의 열심히 나날이 감퇴되어 가고 악한 사정이 더욱더 악하게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44)

 

위 인용문에서 ㉮는 조선사회에서 양반제도가 갖는 제도적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양반 계급의 허위의식을 통박(痛駁)하고 있다. ㉯는 조선사회 일반 백성(서민층)의 양반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들을 소개하였고, ㉰는 교회내 양반 출신 신자들의 존재가 공동체에 미치는 분열과 적대감 등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을 하였고, ㉱는 실제로 페레올 주교 당시에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신자들의 열심을 감소시켰던 일부 양반 출신 복사들의 행패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를 통하여 최양업 신부는 그의 보고를 받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께, 양반층의 횡포와 사회적 특권에 눌려 일방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조선사회와 교회 내의 서민층 신자들에 대한 관심과 실질적인 보호 대책을 간청하고, 아울러 그 자신도 직접 이러한 관심을 행동으로 옮겼는데, 그것은 ㉱를 통하여 드러난다. 곧 최 신부는 ㉱를 통해서 단지 이론적으로 양반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이 잘못된 표양을 보인 양반층 신자들의 비리를 공격하고 이를 제거하도록 주교님께 여러 차례 간곡하고 과감하게 건의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비판의식이 행동적이고 실천적인 것임을 입증하였다.45)

 

최양업 신부는 조선사회의 약자였던 여성에 대한 동정심과 이들에 대한 보살핌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 또한 부친 최경환 성인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양반집 부녀자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합니다. 여자들은 자기 집 문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아주 가까운 자기 친척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마주 보아서는 안됩니다. 알지 못하는 낯선 남자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이게 되면 큰 죄악으로 돌립니다. 과부가 되면 비록 혼인한 지 단 하루 만에 남편을 잃었다 하더라도 본인이 원하든 말든 상관없이 반드시 수절을 해야 합니다. 만일 재혼하려고 하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그녀의 불명예로 말미암아 온 가문도 망신이 됩니다.46)

 

㉯ 그래서 여자들은 항상 밤에 성사를 받으러 옵니다. 이렇게 여자들이 밤길을 다니는 모험을 하는 중에 얼마나 많은 비극을 당할 위험이 있는지 모릅니다. …… 외교인 부모나 남편의 슬하에 매여 있는 여교우들은 대개가 성사를 받으러 올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성사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애만 태웁니다. 어느 때가 되어야 저렇게도 천상 음식에 굶주린 영혼들을 실컷 배불리 포식시킬 수 있겠습니까?47)

 

위의 인용문들은 최양업 신부가 19세기 중반 당시 조선사회의 약자였던 여성들, 그중에서도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던 사대부 양반가 부녀자들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동정적인 기술을 하면서 여교우들의 성사생활(聖事生活)에 제약과 어려움이 많음을 몹시 괴로워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여교우들에게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해줄 수 있는 풍성한 성사를 자유롭게 베풀 수 있기를 소망하였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동정심이, 외교인 집으로 출가한 어떤 여교우가 오랫동안 성사를 받지 못해서 괴로워할 때, 그녀가 고해(告解)와 영성체(領聖體)를 할 수 있도록 최 신부가 남몰래 그 여교우의 집 근처로 가서 신속하게 성사를 베풀어준 것이나48) 동정을 지키고자 하는 여교우 바르바라에게 성사를 막는 기절벌이 내려진 조선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어떤 대안이 없어서 애만 태우다가, 갑자기 병이든 그 여교우에게 죽음 직전에 베풀 수 있는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베푼 일49) 등을 통해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보호와 구제활동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양업 신부는 부친 최경환 성인의 감화를 받아 사회적 약자인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남성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은 행동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여성들의 신앙생활과 교회활동을 위해 양반층의 비난을 당하거나 무뢰한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는 등 그에게 닥친 여러 가지 괴로움과 수고로움을 꿋꿋이 참아내면서 몸소 그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기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경환 성인은 비록 세속적인 출세를 위한 한문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자주 깊이 신앙의 신비를 묵상하고 매일 규칙적으로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매일 조만과(早晩課)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공동으로 바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식구들의 영혼을 구하는 데 힘을 다했다.50)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의 열정이 그의 자녀들에게도 온전히 전달되어 최양업 신부와 그의 형제들이 박해 중에서도 묵주나 스카풀라, 십자가 보목(寶木) 등을 품속이나 행장 속에 깊이 넣고 다니며 성모님과 성인들게 자신들을 보호하고 인도해주기를 간청하면서 천주교 신앙심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51)

 

최경환 성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 가문에서 4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기상을 나타냈으며, 열여덟 살에 최경환과 결혼하여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나가고 식구들 간에 불화를 없애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잦은 박해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든 터전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을 참아 받았다. 이러는 가운데 어린 자녀들이 칭얼거리거나 보채면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가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을 길러주어 어떠한 박해와 역경 속에서도 항구한 신앙심을 간직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52)

 

이성례 마리아는 수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포도청으로 끌려갈 때 치근거리며 그녀의 신앙심을 비웃던 포졸을 엄중하게 질책할 정도로 대담했는데53), 이같은 신앙심은 그의 막내 며느리 송 아가타에게도 그대로 잘 드러난다.54) 송 아가타는 남편 최신정 델레신포르와 함께 병인박해를 피해 어린 네 자녀를 데리고 강원도 춘천의 물은다미로 흘러들어가 그곳 농가의 빈 단칸방에서 주인집 일을 거들거나 동네의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간신히 연명해 나갔는데,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러자 그 동네 홀아비와 무뢰배들이 작당하여 송 아가타를 보쌈질하였으나, 납치된 송 아가타가 갇혀 있던 방안에서 벽에 달린 기름병을 붙잡고 집안의 그릇과 기물들을 마구 파괴하면서 발버둥을 치고 죽기 살기로 항거하자 마침내 풀려났다. 그후 송 아가타는 이 사실을 본동 직강(直講)에게 호소하여 홀아비 황가(黃哥)에게 태벌(笞罰)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또다른 무뢰배가 그녀를 강제로 납치하려 했을 때엔 아예 고을 관장에게 원정(原情)을 올려 관장이 직접 그 무뢰배를 징치(懲治)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일련의 사정을 돌아보면 경제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공허감이 그녀로 하여금 개가(改嫁)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신앙 안에서 굳센 기개를 발휘하여 남편에 대한 신의와 성가정(聖家庭)을 동시에 지켜 나갔고 마침내는 한동안 중단되었던 성사생활마저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송 아가타의 일화는 최경환 성인 가문 내 여성들에게 자주 회자되는 자랑스러운 전통이 되었음을 최근의 방문 인터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55) 바로 이 송 아가타가 1928년 교회당국의 요청에 의해서 구순이 넘는 나이(92세)로 수리산에 올라가서 당시 복자 최경환의 무덤자리를 확인시켜 준 그분이었다.56)

 

 

Ⅲ. 신앙 선조의 현양과 순교 신심의 계승

 

본장에서는 박해시기 이후를 대상으로 삼아, 신앙 선조들에 대한 현양운동의 관점에서 후손들이 벌이는 가문의 가계(家系)와 행적의 정리 작업, 순교 신심(殉敎信心)의 계승, 성지개발 참여와 산소의 정비 과정 등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이를 위해 먼저 최경환 성인 가문의 가계와 관련된 문제를 짚어본다.

 

최경환 성인의 가계는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서 비교적 소상히 드러났지만 아직도 연구자들 간에 일치되지 않는 몇 가지 의문이 남아있어 이에 대한 본격적인 고증이 필요한 상태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최경환 성인의 여섯 아들과 그들의 이름, 나이와 관련된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최경환 성인의 장남인 최양업 신부의 보명이 정구(鼎九)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동안의 전승에 무언가 착오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 다음으로 최신부 바로 밑 동생 이름이 ‘의정(義鼎)’으로 많이 알려지고 있지만 ‘희정(羲鼎)’으로 써야 옳다는 생각이다. 또 이 ‘희정’의 세례명이 ‘요한’이 맞는지, 아니면 ‘베드로’인지 라는 문제에 관한 것인데, 이는 그의 바로 밑 동생인 ‘선정’의 세례명이 ‘안드레아’인지 ‘베드로’인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들 형제들의 기해박해 당시의 나이가 기록마다 서로 달라서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씩 검토해보자. 먼저 최양업 신부 형제들의 이름과 나이에 대해서 언급한 자료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아내 마리아와 다섯 아들들과 함께 갔는데, 그중에서 큰 아들인 야고보가 열네 살이요 막내가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최양업 신부의 진술]57)

 

㉯ 회차 99 : 최 베드로 증언 ① (1886.11.2) … 죄인의 성은 최씨요 본명은 베드로요, 태생은 서울이요, 부모는 다 교우로 열심 수계하다가 기해년에 잡혀 부친 프란치스코는 옥중에서 임종되고 모친 이 마리아는 같이 잡혔다가 그해 섣달에 서소문 밖에 나가 9인과 한가지로 참수하였삽고, 죄인의 나이는 정해생(丁亥生) 60세 오며 어려서 서울을 떠나 18세에 공주 땅에서 장가들었더니, 여러 곳으로 이사하여 농업으로 생명하고 지내다가 금년 괴질에 아내 죽으매 지금은 의탁할 데 없이 되어 살기 극난하외다.[*최 신부의 동생 최 베드로의 진술]

 

㉰ 최 방지거의 부인 이 마리아씨는 수월을 옥중에서 종종 문초추열(問招推閱, 심문을 받고 조사를 당함)과 몸이 박상되시고, 식음이 간핍하시매 유모의 유도(乳道)도 어찌 지탱하리오? 붙들릴 적에 업고 들어온 3세 유아의 유도가 핍절(乏絶)되어 여러 달 만에 명이 진하니, 그 정상은 목불인견이오. 외국으로 공부하러 간 큰 자제 다음으로 12세 된 자제 야고버와 9세, 7세, 5세 된 어린 자제들은 산산분주 되었으니 … ① 백씨(伯氏)는 탁덕(鐸德, 사제)으로 승품되사 위에 적었고, ② 둘째의 희정(羲鼎) 야고버 씨는 여러 해 난중에 많은 간고를 겪을 뿐 아니라, 모친 순교 때에 목도하였으며, 말년에는 진천군(鎭川郡) 바라산 교우촌에서 선종하시고, 부인 이 마리아씨는 연만쇠로(年晩衰老)하여 횡성군(橫城郡) 유현 일안동에서 선종하사 산소가 일안동에 계시며 그 자제 3형제 …, 바실리오씨의 ③ 셋째 중씨 선정(善鼎) 안드레아씨는 위인이 비범하시고 성정(性情)이 걸걸하신지라, 자제는 없고 다만 따님 형제를 두었는데 … 계해년 봄에 경상도 경주 개무덤이(황성동 동쪽 옛들) 최진사 집에 내려가서, 선대의 내력과 종파의 갈린 촌수를 역력히 적어가지고 올라와서, 이듬해의 병인보(丙寅譜)에 입참하시었다. 일생에 이같이 호활(豪活)한 행세를 많이 하시다가 말년에는 광주군(廣州郡) 시어골 교우촌에서 선종하시었다. … ④ 넷째 아우 바실리오씨는 진천 동골 어떤 친척의 집에서 양육할 때, … ⑤ 바실리오의 다섯째 계 씨(季氏) 신정(信鼎) 델레신포르 씨는 그 부인 송 아가다와 더불어 30여년을 동거하시며 그 백씨 신부도 여러 해 모시고 있다가 ……… ⑥ 말째 계씨는 어려서 옥중치사(獄中致死)하시고 … [*최 신부의 조카 최상종 빈첸시오의 기록]58)

 

위 인용기록 중에 가장 신빙성이 큰 기록은 물론 최양업 신부의 진술인 ㉮기록이다. 그러나 매우 단편적인 기록이다. 또 최 신부의 동생 베드로의 진술인 ㉯기록은 ㉮기록 못지않게 신빙성이 큰 기록인데 형제들에 대하여 모두 소개하고 있지는 않으며, 가장 자세한 기록인 ㉰에 비교해 보면 도대체 베드로가 몇 째인지 그러한 세례명을 지닌 형제가 ㉰기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한편 ㉰기록은 매우 자세하고 형제들의 전체 명단과 세례명과 나이마저 파악할 수 있도록 자세하긴 하지만 1세대 뒤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 두 기록에 비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형제들의 나이에 관한 기록이 ㉮와 비교할 때 둘째의 경우 2살이 적고 막내(여섯째)의 경우 1살이 많은 차이가 드러난다.

 

이상의 서로 다른 자료들 중에서 이름과 관련하여 가장 자세한 ㉰자료를 중심으로 하여 최양업 신부 동생들의 이름과 세례명을 우선 나열해보면 희정(羲鼎, 야고보), 선정(善鼎, 안드레아), 우정(禹 鼎, 바실리오), 신정(信鼎, 델레신포르), 스테파노 등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경환 성인의 장남인 최양업 신부의 이름은 ‘양업(良業)’ 외에도 ‘정구(鼎九)’와 ‘구정’(九鼎)이 있다. 여기서 ‘양업’은 어릴 적에 부르는 이름인 아명(兒名)이고, ‘구정’은 족보상에 등재된 이름 즉 보명(譜名)이다.59) 이와 같은 사실은 최경환 성인의 후손인 최대식(崔大植, 레오) 씨가 보관 중인 가승(家乘)60)에 최경환 성인의 넷째 아들인 우정(禹鼎)과 그 부인 진천 송씨(鎭川宋氏)의 항목 다음(왼쪽)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長子九鼎 鐸德昇品 二子羲鼎 三子善鼎 五子信鼎”

 

위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최양업 신부의 ‘족보상 이름’(=譜名)이 우리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름인 ‘정구(鼎九)’가 아니라 분명히 ‘구정(九鼎)’으로 되어 ‘◦鼎’이라는 경주최씨 관가정공파 26世 항렬의 일반적인 보명에 맞게 기재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정구’란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또한 과연 보명인 ‘정구’가 관명이기도 했는지, 또 ‘양업’이라는 이름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양업 신부에 대한 선학들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경향잡지》의 경우에는 그 전신인 《보감》 제206호(1910년 9월 23일) 61)에 〈성교긔〉란 제목 하에 ‘최도마’란 이름으로 기록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일제 치하에서 ‘최도마’란 이름으로만 단편적으로 동 잡지에 간혹 등장하다가, 그의 사제서품 100주년이 되는 1949년 4월에 가서야 다른 이름들이 등장한다. 즉 1849년 4월 15일 상해의 서가회 성당에서 당시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이 된 최양업 신부에 대하여, 《경향잡지》는 1849년 4월호에 최신부 특집을 내고 이후 총 17회에 걸쳐 〈최도마 신부 전기〉를 연재하였는데, 제3회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최 도마는 아명으로 양업(良業)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 외에 도마 신부의 이름이 그 묘석(墓石)에 정구(鼎九)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도마 신부의 친족들이 전하는 바이다.62)

 

위 인용문을 보면 최도마 신부의 이름이 그의 묘비석(墓碑石)에 ‘최정구(崔鼎九)’로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최신부의 친족들에 의하여 그대로 인정되고63) 또 언론에도 보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도마’ 신부의 아명은 ‘양업’이고 비석에 새겨진 그의 대표적 이름은 ‘최정구’라는 설명을 1949년 교회언론을 통해서는 최초로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후 그의 이름 ‘최정구’는 교회 내에서 보명(譜名) 또는 관명(冠名)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보명인지 관명인지 따지지 않고 그냥 언급되기도 했다.64)

 

현재 필자의 능력으로써는 ‘정구(鼎九)’를 관명으로 인정해야 할 것인지 여부는 확언할 수 없다. 이 문제는 향후 한국교회사를 포함한 조선후기 한국사의 범주에서 ‘관명(冠名)’, ‘보명(譜名)’, ‘아명(兒名)’ 등 역사적 인물로서 한 개인(個人)의 이름 관련 자료들을 두루 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등의 작업을 거쳐야만 비로소 올바른 해답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가 내려야 할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은, ‘정구(鼎九)’는 보명이 아니고, ‘구정(九鼎)’이 집안의 가승에도 나오고, 또 가문의 항렬자에도 맞는 족보상의 이름(=보명)이라는 점이다.

 

한편 위의 가승을 토대로 볼 때 최경환 성인의 제2자(=次男)의 이름은 ‘희정’(羲鼎)이 분명함을 확인할 수 있다.65) 이는 논리적으로 생각해볼 때도 최희정의 백부(伯父, 큰아버지)인 최영열(崔榮說)의 아들이 ‘의정(義鼎)’이므로 사촌 간에 한자(漢字)가 같은 이름을 쓸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 근거가 찾아지는데, 최상종이 쓴 〈최 바실리오 이력서〉에 보면 영열씨의 큰 자제로 의정(義鼎)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66)

 

그 다음으로 형제들의 나이 및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쓰는 이의 신원과 관련된 문제인데,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동생들의 나이에 대해서 조카인 최상종(빈첸시오)보다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 형제들의 나이와 관련된 다른 기록들을 확인해보면 좀더 쉽게 그 시비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인데 필자가 현재까지 찾은 바에 의하면 앞의 논문에서 ㉮ ㉯ ㉰로 나타난 최양업 신부, 최 베드로, 최상종의 언급 이외에는 다른 기록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와 그 출처가 다르지만 역시 최상종이 기록한 〈가승〉과 20세기 초반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최경환 성인 후손 최대식 씨가 보관한 《경주최씨세보(慶州崔氏世譜)》(제3권)를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가승]

四子 諱 禹鼎 二十六世 本名 바시리오

壬辰二月八日生 丙戌七月七日卒 享年五十五 …

長子九鼎 鐸德昇品 二子羲鼎 三子善鼎 五子信鼎

 

[세보]

禹鼎   - 壬辰生 丙戌七月七日卒… 子 相鍾 / 亨鍾

義鼎67)- 丁亥十月九日生       … 子 起鍾 / 道鍾 / 裕鍾

信鼎   - 丁酉三月三日生       … 子 台鍾 / 奎鍾

 

위의 가승과 세보 기록들에서 특징적인 점은 가승의 경우 비록 ‘우정’ 바실리오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지만, 그의 형제들의 이름이 어려서 감옥에서 숨진 스테파노를 제외하면 모두 등재되어 있지만, 세보의 경우에는 어려서 숨진 막내 스테파노는 물론이고 최경환 성인의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삼남 최선정 안드레아의 이름마저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68)

 

위의 인용에 나오는 간지들의 경우 임진(壬辰)은 1832년, 병술(丙戌)은 1886년, 정해(丁亥)는 1827년, 정유(丁酉)는 1837년으로 각각 추정된다. 또한 최양업 신부가 그의 장상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나이는 아마도 ‘만○세’에 해당하는 나이로 전통적인 한국식 나이보다 1살이 더 적게 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최경환 성인의 온 가족이 다함께 서울의 포도청에 잡혀간 때인 1839년의 시점에서 따져볼 때, 최경환 성인의 차남 희정(羲鼎)은 15세, 사남 우정(禹鼎)은 8세, 오남 신정(信鼎)은 5세로 계산된다. 이상의 검토 내용을 종합하여 이를 도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 표를 통하여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최 바시리오 이력서〉와 〈가승〉은 모두 최상종 빈첸시오가 작성한 것인데, 그의 부친 우정 바실리오의 나이가 서로 다르게 나오고 있으므로 어느 한쪽은 분명 착오(錯誤)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성인의 차남 최희정의 경우는 12세~15세(=만14세)까지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두 곳의 기록이 13세로 일치하여 한편으로는 13세였을 가능성이 좀더 큰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가정할 경우 1886년 11월 2일에 열린 제99차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재판시에 자신을 정해생(1827년) 60세로 이야기한 최 베드로는 결국 성인의 삼남 최선정이므로69), 그의 형 최희정과 나이가 같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의 차남 최희정은 13세보다 많은 나이, 그의 장형 최양업 신부가 말한 15세(=만14세)가 보다 자연스럽게 된다.

 

다만 최상종 빈첸시오의 기록인 〈최 바실리오 이력서〉나 종친회에서 나온 〈경주최씨세보〉 등의 최양업 신부 형제의 나이 또는 출생년도와 관련된 일부 기록은 오류가 된다. 따라서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다시 최경환 성인 아들들의 기해박해 당시 나이와 생년을 헤아려 본다면 장남 최양업(九鼎, 재외국, 1821년생, 19세), 차남 최희정 야고보(1825년생, 15세), 삼남 최선정 안드레아(또는 베드로, 1827년생, 13세), 사남 최우정 바실리오(1832년생, 8세), 오남 최신정 델레신포르(1835년생, 5세), 육남 최 스테파노(1837년생, 3세, 젖먹이로 옥중치사)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최경환 성인의 가계 전승 기록인 최상종 빈첸시오의 ‘최양업 신부 일가의 이력서들’에도 다소간의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오류가 어떻게 하여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경환 성인 가문의 가전 전승들을 책자로 기록한 ‘최상종 빈첸시오’의 생애와 그가 이러한 전승 기록을 남긴 시점 및 그 배경 등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최상종 빈첸시오는 1870년생으로 병인박해 중에 태어났는데, 이 무렵 그의 부모는 박해를 간신히 피하여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경기도 죽산의 광혜원 부근의 새터말이라는 곳으로 피난하여 외교인들 틈에서 살면서 1876년까지 10년간 짚신을 삼아 생계를 근근히 꾸려 나갔다.70) 그후 그의 부친 최우정 바실리오는 개항 전후부터 재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 특히 블랑(Blanc, 白圭三, 1844~1890, 요한 ; 1866년 사제서품, 1876년 조선입국, 1878년 부주교 피임, 1883년 7월 주교승품)의 요청을 받고 삼남(三南)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흩어져 냉담한 교우들로 하여금 다시 선교사들에게 나와서 성사를 받고 신앙생활을 재개하도록 권면하였으며, 블랑 주교의 배려로 목판을 다듬어 교회서적을 간행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1886년 바실리오는 병사하였는데, 교회 일을 하면서 지게 된 부채를 블랑 주교가 탕척해주면서, 바실리오의 큰 아들 최상종 빈첸시오에게 한문을 공부하도록 종현의 한문학당으로 보냈다. 그러나 최상종이 학당에 들어가서 그 교과내용과 교수의 방침을 보고서는 세속적인 성공을 기하기 어렵다고 보고 학업을 포기한 후 가평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충주까지 수백리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내왕하다가 병이 들어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 후 풍수원 성당이 위치한 유현리에 자리 잡고 그곳 성당의 회장 직무를 맡아보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런 와중에 그의 작은 어머니 송 아가타를 부축하여 1929년에는 수리산 뒤뜸이에 모셔진 그의 조부 최경환 프란치스코 복자의 묘를 찾아내도록 도와주었다. 이를 전후한 시기인 1927년부터 1930년 사이에 송 아가타는 풍수원 성당 근처에서 살면서 그의 파란 많은 전 생애를 구술토록 하여 〈송 아가다 이력서〉를 만들어 냈다. 이같은 이력서를 만들게 된 것은 1925년 그의 시아버지 최경환이 다른 순교자 78위와 함께 복자로 시복되면서, 그 무덤을 교회 당국에서 공적으로 발굴하여 유해를 소중하게 보관하는 등 일련의 순교자 현양사업에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순교복자를 낸 영광스런 가문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같은 이력서를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이력서는 송 아가타의 구술을 누가 받아 적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지근에서 당시 송 아가타를 모시고 있던 조카 최상종 빈첸시오가 종현 학당에 다닌 경험 등을 바탕으로 한글과 한문 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므로 구술하는 바를 필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빈첸시오는 1939년 경 〈최 바실리오 이력서〉를 통하여 최경환 성인 가문의 선대 최한일 씨로부터 비롯된 천주교 믿음생활의 내력을 자신의 대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또 해방을 전후한 무렵에 가서는 다시 〈최 신부 이력서〉를 작성하여 조선교회 제2호 사제인 큰 아버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하기도 했다.

 

최상종 빈첸시오가 이 같은 가전 기록들을 정리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이 기록들의 말미에 붙어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음미해봄으로써 살펴볼 수 있다. ⓐ 오! 옛일을 생각하니, 슬픔의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향수(享壽)는 찬 90에 손도 마르고 머리도 백발이며, 시력도 감퇴하였음은 많고 많은 고초를 겪으신 탓이리라. 그 남기신 공과 덕은 지극히 공의하신 천주께서 털끝만큼이라도 틀림없이 세세역역(世世歷歷) 두고두고 갚으실 터이니, 이 아니 다행이며, 그 아니 행복한가? 이같은 이력(履歷)의 행적은 예나 이제나 매우 보기 드문 일이며, 가문의 표준이니 이 책을 보는 사람은 자연히 마음이 감동하리로다. [*〈송 아가다 이력서〉]

 

ⓑ 이같이 십분지일로 이력서를 기재함은 후손들로 하여금, 선대 내력을 알게코자 함이다.[*〈최 바실리오 이력서〉]

 

위의 인용문 ⓐ와 ⓑ를 통해서 보면 이력서를 작성한 대필자와 필자는 가문 내의 열심한 신앙인이 걸어온 아름다운 신앙생활의 궤적을 드러냄으로써 자랑스런 믿음살이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며, 동시에 수십년 박해의 역경 속에서 지켜낸 신앙의 불씨를 길이 후손들에게 전달코자 하는 의도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의도 하에서 작성한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는 최경환 성인 가문의 전후 내력을 총체적으로 다루려고 했다. 그러나 개항전후 시기까지 수십 년간 지속된 박해의 와중에 일가친척들이 가족단위로 뿔뿔히 흩어지고 피난하여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윗대로부터 전해오던 수많은 가전기록들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최양업 신부의 형제들은 한 곳에 모여서 동족부락을 이루며 살지 못하고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산거하게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서로 간의 사정에 어두워지면서 친족들의 나이 등에 대한 인지에 약간의 착오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가전 기록들의 줄거리는 모두 진실하고 참되며, 가문내 신앙사의 다양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약간의 착오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가치있는 교회사의 소중한 자료로 남겨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이력서의 정리 작업은 가문내 신앙선조들의 행적을 밝게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신앙 선조에 대한 현양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최근까지 필자가 최경환 성인의 후손들을 탐방하여 인터뷰한 결과에 의하면, 2009년 현재 70대가 대부분인 식(植)자 항렬의 후손들은 일제 말기부터 해방 전후에 이르기까지 거의 시골의 공소(公所)에 적을 둔 경험이 있어 매우 엄격한 신앙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한결같이 너무나도 두껍고 많은 분량의 조만과(早晩課)를 온 가족이 함께 봉헌했다고 하며, 만일 조만과를 빠트리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밥을 굶겼다고 하는 증언들을 하곤 했다.71) 또한 “공부는 못해도 상관없으나 주일미사는 꼭 지키라”는 말씀과 “신부가 되는 것이 최고로 명예로운 일이었다”고 하는 진술들을 공통적으로 들려주곤 했다.72) 또한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병이 걸렸을 때엔 최경환 성인 할아버지나 최양업 신부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며 응답과 치유를 받았다고도 했다.73) 그리고 요즘도 자녀들에게 어디에 가든지 늘 순교복자, 성인 가문의 후손답게 신앙생활에 열중할 것을 강조한다고 한다. 2009년 현재까지 최경환 성인의 가문 내에서는 모두 약 20여 명에 달하는 성직자(12명) 수도자(9명)들이 배출되어 가문의 순교신심의 맥을 잇고 있다.74) 한편 유난히도 가난하게 살아온 최경환 성인의 후손들은 사업을 해서도 크게 돈을 번 사람이 없었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돈을 많이 버는 일은 청빈(淸貧)한 삶 가운데에서 자선(慈善)을 중시한 최경환 성인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으로 이해했다.75) 그러나 없는 돈이지만 형제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풍수원에 선산을 마련하고 이곳에다 그간 각지에 흩어진 조상의 분묘들을 모셔왔으며, 실전된 묘는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76) 또한 이곳 선산에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 최양업 신부 등의 기념물과 비석을 세우고77) 후손들이 매년 한번씩 이곳에 모여 후손 사제가 집전하는 연미사를 거행하고78)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신앙선조들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며 서로 화합하고 고락을 나누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계기로 삼는다.

 

한편 최경환 성인이나 최양업 신부과 관련이 있는 청양 줄무덤성지, 진천의 배티성지, 제천의 배론성지, 안양 수리산 성지 등을 개발하는데 최경환 성인의 후손들은 직접 간접으로 힘과 재물을 봉헌해왔다. 특히 수리산 성지의 경우, 박해시기 이후 이곳에 사는 후손은 없었지만 최경환 성인의 무덤을 돌보던 수리산의 구교우들과 안양 중앙성당(장내동 성당)의 봉사자들의 정성을 본받아, 후손들은 1984년 103위 시성식을 계기로 매주 이곳을 찾아와 자발적으로 성인의 무덤을 중심으로 형성된 14처와 야외재단의 설립, 성모동굴의 조성, 무덤 주위의 정원 조성 등의 작업에 한푼 두푼 정성어린 헌금을 모으고 가족들이 함께 와서 필요한 작업을 직접 함으로써 수리산 성지 개발에 힘써왔다.79) 그러다가 2000년 이후 이곳 수리산에 전담사제가 파견되면서 후손들의 이러한 능동적인 성지개발은 성지측의 몫으로 넘어가게 되었지만, 현재까지도 매년 순교자 현양행사가 벌어질 때면 이곳 성지에 와서 단순히 행사에 참여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물질적 육체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아낌없이 제공하고 있다.

 

 

Ⅳ. 인권 의식의 계승 및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

 

본고에서 ‘인권(人權)’이란 말은 사람의 사람다운 생존에 필요한 정신적(신앙적), 물질적(경제적) 권리를 비롯한 사회적(공동체적) 측면에서의 천부(天賦)의 불가침적(不可侵的) 권리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80) 이러한 인권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님이 추구했던 영적, 물질적 나눔의 사상 및 사회적 약자(弱子)에 대한 관심과 보호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정치적, 종교적으로도 자기 결정권이 인정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경환 성인에게서 최양업 신부로 이어져 내려온 이같은 정신적 가치 내지 자산은 현재의 후손들에게서도 그 계승의 측면이 면면히 드러나는 데, 최경환 성인의 현손(玄孫)인 최기식(崔基植, 베네딕도) 신부에게서 그러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최기식 신부는 신품성사를 받을 때 상본에 새긴 말씀을 “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라고 정하고, 스승 예수를 따라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살고자 결심했다고 한다.81) 그는 1970년대 유신정권 하에서 독재를 비판하다가 강제로 구금되었던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위해서 단식 투쟁과 항의를 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시민적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 그리고 사회적 약자의 보호라는 인권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후 최 신부는 1980년대 신군부 집권하에서 일어난 광주 민주화운동(또는 광주 민중항쟁)에서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고 살아나와 계속 수배에 쫓기던 청년 김현장을 받아들여 2년간이나 숨겨주었고, 김현장은 또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한 문부식을 아무도 모르게 받아들여, 결국 ‘약자보호’라는 신부님의 순수한 취지와는 무관하게 빨갱이 용공분자로 오해되어 당국의 재판을 받게 됨은 물론 관제 언론에 휘말린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불신과 모욕을 감수해야만 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당시 최 신부는 정의와 양심의 관점에서 이들 두 청년의 행동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지만, 사건의 발단은 그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최 신부의 보호를 요청하며 이들이 최 신부의 거처로 숨어들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며, 이에 대해 최 신부는 차마 이들을 고발하여 사지로 넘겨 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 신부는 당시 대한민국의 실정법을 엄연히 위반한 두 청년에게 자수를 하도록 설득하여 결국 자수를 하였지만 최 신부도 범인을 은닉한 혐의로 감옥생활을 해야만 했다. 당시 신군부 정권은 자신들의 민주주의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천주교회가 공산당의 소굴이 되었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1983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공동의 성명을 내걸고 최기식 신부의 행위가 하느님의 법 앞에서 떳떳한 인간 양심의 발로로 보고 이를 정당한 행위로 선언했다.82)

 

이 때문에 천주교와 신군부와는 불편한 관계가 한동안 지속되었는데, 당시 최기식 신부는 의로운 청년들의 행위를 감싸고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감옥으로 가서 수의를 입고 재판을 받으며 민족의 정당한 자존심을 떳떳이 주장하면서 결국 한국 천주교회가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 가운데에 서게 하는데 선구자적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했다. 최기식 신부는 또한 교회의 지나친 성직주의로 인하여 시골 공소의 연로한 신자들이 젊은 사제들에 의해서 함부로 대접받는 것을 괴로워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평신도의 사도적 열정이 보장되고, 청소년과 여성이 교회의 복판에서 밀려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출감이후 청소년, 장애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사회복지사업을 전개하여 원주 ‘천사들의 집’에서 그의 사도적 신념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최기식 신부의 활동이야말로 그의 조상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가 주창했던 영적, 물질적 나눔의 실현이며,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라는 총체적 인권사상을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한다.83) 2009년 현재 최경환 성인의 가문에서는 남계와 여계를 모두 합쳐서 12명의 사제와 9명의 수도자가 배출되어 청소년 유아 교육과 해외선교, 사회복지 사업과 일반 본당사목 등에 묵묵히 헌신하고 있는데84), 이들을 통해서도 소외된 이웃과 약자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고스란히 잘 전달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Ⅴ. 맺음말 - 최경환 성인 가문의 훌륭한 전통과 교훈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신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 부부는 그들의 부친 최인주의 이웃사랑과 평등주의에 기반한 천주신앙을 계승하여 남다른 자선을 베풀었고, 열심한 기도와 영적독서로 얻게 된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신앙심을 순교로써 입증하였다. 이러한 부모의 감화를 받은 최양업 신부와 그의 형제들은 물질적, 영적인 나눔의 생활에 충실했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헌신하였다. 그후 수십 년간 지속된 박해의 시련 때문에 전국 각지로 산거하게 된 성인의 후손들은 한동안 신앙생활에 기복이 있었지만 박해가 끝나자 곧바로 예전의 열심한 신앙심을 회복하여 더욱 교회활동에 충실하였고, 가난과 주림을 참으며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들의 이러한 삶은 곧 최경환 성인과 그 부인 이성례 마리아의 신앙심과 행적을 계승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한 가계 전승자료의 소실 및 상호간 연락의 두절 등으로 인해서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각자 신앙생활에 충실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1925년, 최경환이 포함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가경자가 시복된 사건은 그의 가문에서 후손들에게 신앙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면서, 선조들의 신앙생활의 역정을 추적하고 이를 정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만들어주었다. 그리하여 1929년 서울교구가 수리산 뒤뜸이에 묻혀있던 복자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무덤을 찾아서 1930년 5월 26일 이장하였는데, 최경환 성인의 무덤을 분명하게 알려준 분은 성인의 다섯째 자부(子婦) 송 아가타였다. 1929년 6월, 당시 92세의 송 아가타를 부축하여 수리산 현장에 직접 참여한 성인의 손자 최상종 빈첸시오는 가문의 빛나는 신앙내력을 정리하여 후손들이 본받도록 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이즈음 〈송 아가다 이력서〉를 잘 마무리한 후 계속하여, 1939년 〈최 바시리오 이력서〉, 해방 전후에는 배론에 ‘최도마 신부 기념비’를 건립하는 일에 참여하고 이를 반영하여 〈최신부 이력서〉 등을 기술하면서 가문의 계통과 신앙의 발자취를 밝혀 후손들이 선조들의 신앙심을 본받도록 노력하였다. 그후 한동안 후손들은 생업의 현장에서 가난과 싸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신앙선조들의 대한 본격적인 현양운동을 하지는 못하였다,

 

1984년 103위 한국 순교복자의 시성식이 거행되면서 최경환의 후손들도 조상들의 신앙심을 본받고 이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현양운동에 재삼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하여 흩어진 조상의 분묘를 한데 모아 풍수원에 새로 마련한 선산에 안장하고, 이곳에 최경환 성인 부부 및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동상과 기념비석 등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9월 순교자성월에 전 가족이 이곳에 모여서 조상들을 위한 합동 연미사를 거행하고 조촐한 음식을 나누며 서로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신앙생활의 정진을 다짐해왔다. 뿐만 아니라 청양의 다락골, 진천의 배티와 제천의 배론, 안양의 수리산 등 최경환 성인이나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사적지들을 방문하여 이곳들을 성역화(聖域化)하는 사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양에는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 부자(父子)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수리산 성지의 개발과 관련하여 최경환 성인의 후손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 이곳에 정식으로 전담신부가 파견되어 성지사목을 본격화할 때까지 약 15년간 주말마다 이곳을 찾아서 가족들이 함께 성인의 무덤을 찾아 돌보고 무덤 주위에 작은 정원을 조성하고 성모동굴을 건립하며, 안양의 장내동 성당 신자들과 함께 협력하여 14처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는 등의 성지개발(聖地開發)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2009년 현재도 수리산 성지 위원회에 후손의 대표가 참여하여 성지개발에 영적, 물질적 도움을 계속해서 제공해오고 있다.

 

최경환 성인 가문에서 이루어진 이같은 신앙선조 현양운동은 순교자의 후손인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다함께 본받고, 나아가 자발적으로 동참해야할 일임에 틀림없다. 최경환 성인의 가문은 최양업 신부를 비롯하여 2009년 현재까지 모두 12명의 사제와 9명의 수도자를 배출해냈으며, 이들은 아동교육, 사회복지 분야사업 등에서 헌신적으로 교회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최양업 신부님이 동정(정결)과 헌신적 희생으로 땀의 순교를 일구어낸 신앙의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으며, 최경환 성인과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가 보여준 약자에 대한 우선적 관심과 보호라는 인권의식(人權意識)을 실천한 삶, 자신의 재물, 시간, 능력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이웃과 나눔을 실천하는 자선(慈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신앙의 후손들에게 탁월한 모범이 되고 있다.

 

본고와 같은 연구주제를 통하여 앞으로도 계속하여 최경환 성인 부부와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에 대한 현양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남아있다. 그것은 자금까지 알려진 기존의 문헌자료 외에도 박해시대 이래의 선교사 서한, 관찬기록, 개인 소장 문집자료들을 발굴, 정리하여 이를 순차적으로 번역, 간행하고 후손들에 대한 인터뷰 탐방의 범위를 최경환 성인의 형제를 포함한 그의 방계 후손들에까지 확대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지속하여 박해시기를 포함한 200여년 동안 이 가문에 전승되어온 구전(口傳)을 채록하여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명문으로 자리잡은 성 김대건 신부와 남종삼 성인, 그리고 이승훈, 권철신을 비롯한 한국교회 창립선조들 가문의 역사와 최경환 성인 가문의 현양운동을 상호 비교 검토하는 작업도 순차적으로 추진하여 한국 천주교회 순교신심의 연원을 밝히고 이를 후손들에게 신앙의 귀감(龜鑑)으로 잘 전달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원사료 및 사료번역본

 

《일성록(日省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기해일기》(황석두루가서원 국역영인판, 1986)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한국교회사연구소 영인본, 2004)

《조선 주요순교자 약전(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e)》(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사 비망기(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ee)》(다블뤼 주교)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 5,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08

《최양업 신부의 서한》(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1), 청주교구 배티사적지, 1996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2), 청주교구 배티사적지, 1996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3), 청주교구 배티사적지, 1996

《경향잡지》(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영인본, 1984)

《경주최씨세계(慶州崔氏世系)》(최대식 소장 가승)

《경주최씨세보(慶州崔氏世譜)》 제3권(최대식 소장 족보)

〈최신부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송 아가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최 바시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달레 저, 최석우 · 안응렬 역,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로네 저, 안응렬 역, 《한국 七十九위 순교복자전》, 경향잡지사, 1946

 

2. 연구논저

 

김옥희, 《최양업 신부와 교우촌》, 학문사, 1983

김옥희, 《한국천주교여성사(Ⅱ)》,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1983

류한영 · 차기진 공저,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 양업교회사연구소, 2000

박기갑, 《21세기 국제인권법의 과제와 전망》, 삼우사, 1999

배은하,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 성바오로출판사, 1992

차기진 · 서종태 · 원재연 · 류한영 공저,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역과 선종지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김정숙, 〈교회의 재건과 여성교세의 신장〉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류한영,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박금옥,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그 의미〉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방상근, 〈최양업 신부와 수리산〉 《교회와 역사》 29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후 사목활동〉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정종득, 〈박해시대 순교자와 성모공경의 전통〉 《교회사학》 3, 수원교회사연구소, 2006

조규식, 〈최양업 신부의 영성〉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최석우, 〈최양업 신부 선교활동과 시복추진의 의미〉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3. 구전녹취

 

최대식과 최인식 증언녹취록 (2007.3.26)

최광식 신부 증언녹취록 (2009.4.23)

김순덕(최현식 부인) 증언녹취록 (2009.6.6)

김제옥 수녀 증언녹취록 (2009.6.14)

최기식 신부 증언녹취록 (2009.8.15)

김경진 수녀 증언녹취록 (2009.8.16)

오연순(최인식 부인) 증언녹취록 (2009.8.18)

김형상 프란치스코(수리산 교우) 증언녹취록 (2009.8.18)

김영진 신부와 모친 최묘순 여사 증언녹취록 (2009.8.20.)

 

………………………………………………………………………

 

1) [가] 문서기록 : ⓐ 교회측 기록 - 《기해일기》, 《조선 주요순교자 약전》(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사 비망기》(다블뤼 주교),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상·하(2004, 한국교회사연구소 영인본) / 《한국 七十九위 순교복자전》(아드리엥 로네 저, 안응렬 옮김, 경향잡지사, 1946) pp.108-117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 제5집(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편, 2008.2) pp.317-345 / 청주교구 배티사적지에서 펴낸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1집 《최양업 신부의 서한》(1996), 제2집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 제3집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부록 《기해 병오박해와 순교자들의 행적》(*《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3건의 가전기록 〈최 신부 이력서〉, 〈송 아가다 이력서〉, 〈최 바시리오 이력서〉 등과 동일한 자료임 / ⓑ 관찬기록 - 《일성록》, 《비변사등록》, 《조선왕조실록》 / ⓒ 최대식 소장 가승, 족보

[나] 구전기록(후손의 진술 녹취록) : 〈최대식, 최인식 증언녹취록(2007.3.26)〉, 〈최광식 신부 증언 녹취록(2009.4.23)〉, 〈김순덕(최현식 부인) 증언녹취록(2009.6.6)〉, 〈김제옥 수녀 증언 녹취록(2009.6.14)〉, 〈최기식 신부 증언 녹취록(2009.8.15)〉, 〈김경진 수녀 증언 녹취록(2009.8.16)〉, 〈오연순(최인식 부인) 증언 녹취록(2009.8.18)〉, 〈김영진 신부와 모친 최묘순 여사 증언 녹취록(2009.8.20〉, 〈수리산 교우 김형상 방지거 증언 녹취록(2009.8.18.)〉

 

2) 김옥희, 《최양업 신부와 교우촌》(학문사,1983) pp.23-32 / 김옥희, 《한국천주교여성사(Ⅱ)》(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1983) pp.165-167 /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교회사연구》 제14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 김정숙, 〈교회의 재건과 여성교세의 신장〉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2008.12) pp.88-146

 

3) 자료는 위의 주1) 최양업 신부의 전기자료집 제1~3집과 부록 참고. 본격적인 연구의 단초는 김옥희 앞의 책(1983)으로 볼 수 있다. 그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낸 《교회사연구》 제14집(1999년)에 실린 최석우, 〈최양업 신부 선교활동과 시복추진의 의미〉, 차기진 위의 글(1999) ; 류한영,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 박금옥,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그 의미〉 ; 조규식, 〈최양업 신부의 영성〉(*이상에 열거된 차기진~ 조규식의 글은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양업교회사연구소, 2003.9)에 재수록됨. 양업교회사연구소의 이 책에는 ‘최양업 신부와 천주가사’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5편의 글이 더 수록되어 있다. 김진소, 〈최양업 신부와 천주가사 연구의 의의〉 ;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와 저작배경〉 ; 장인산,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에 대한 교부학적 연구〉 ; 류한영,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에 나타난 신관〉 ; 양희찬, 〈국문학의 입장에서 본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 배은하,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성바오로출판사, 1992.6) pp.139-220 / 류한영, 차기진 공저,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양업교회사연구소, 2000.6) / 차기진, 서종태, 원재연, 류한영 공저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역과 선종지 연구》(양업교회사연구소, 2007.12) / 방상근, 〈최양업 신부와 수리산〉 《교회와 역사》 제298호(한국교회사연구소, 2000.3)

 

4) 《최양업 신부의 서한》(1996, 천주교 배티성지)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pp.155-169) 및 〈최양업 신부의 열한 번째 서한(1855.10.8, 배론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pp.195-197).

 

5)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상·하(2004, 한국교회사연구소 영인본) 중에 나오는 회차99(1866.11.2), 회차101(1886.11.4)에 나오는 최경환의 아들 최 베드로의 증언.

 

6) 위의 책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중에 나오는 회차102(1887.4.2)에 나오는 며느리 이 마리아의 증언.

7)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 바시리오 이력서〉 pp.210-219

 

8) 위의 책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중에 나오는 회차 27(1883.6.11) ; … 최 프란치스코가 시골서 죄인과 한 이웃하여 살 때 많이 보았으니, 인정이 많아 한 번은 길에 가다가 보니 한 늙은 할미(가) 떡을 많이 놓고 쉬어서 팔지 못하여 애를 쓰매 프란치스코가 돈을 내어 먹을 수 없는 것을 샀다 하고 또 한 번은 빚 까닭으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자기 돈으로 빚을 갚아 주어 화목하게 하였더니 군난에 잡혀 치명 잘한 말을 들었으나, 자세한 사정은 모르옵고 …

 

9) 같은 책 회차 35(1883.6.25) ; … 최 프란치스코도 아는 사람이오니, 시골 수리산서 살며 열심 수계하매 모든 교우들이 그 덕행과 표양을 찬미하더니 기해 3월에 죄인이 과천 땅에 피난 가서 있은 지 3~4일 만에 어떤 사람들이 심야에 “문을 열라” 하거늘 죄인 오라비 문을 열고 본 즉 7~8인이 세간 짐을 지고 도망한 교우가 들어와 하는 말이 이 밤에 수리산 최 프란치스코와 그 집 소솔들이 한가지로 잡혔다 하더니 추후 말 들은즉 프란치스코가 아들을 중국으로 보낸 연고로 형벌을 더욱 많이 받았으나 종내 굴(복)하지 아니하여 치명하였삽고 …

 

10) 같은 책 회차 42(1883.7.10) ; … 최 프란치스코의 내력은 모르오나 포청에서 그 아내 (이 마리아)의 말을 들은 즉 극진히 애인하여 혹 구차한 교우가 오면 음식을 예비하여 대접하고 혹 무슨 것을 사러 갔다가 상한 것을 사서 오매 아내(가) 나무라면 프란치스코가 대답하되 “내가 아니 사면 살 사람이 없어 장사가 해를 보겠기에 사왔노라” 하던 말을 그 아내에게 친히 들었습니다. …

 

11) 같은 책 회차 69(1884.4.23) ; … 최 프란치스코 치운이는 과천 수리산서 살 때 죄인과 친하게 지내었으니 열심 수계하고 회장 소임을 맡아 영육간에 동네일을 보살피더니 둘째(*첫째의 오류) 아들을 성교회에 바치고 중국으로 보내어 신품에 올린 후 조선으로 다시 나와 전교하시더라. 프란치스코는 기해년에 수리산서 잡혀 형벌을 많이 당하고 치명 잘한 말까지 들었으나 다른 사정 모르옵니다.…

 

12) 같은 책 회차 80(1884.5.23) ; … 최 프란치스코는 본래 홍주 사람으로서 타당히 수계하기를 위하여 고향을 떠나 서울 와 문밖에 큰집 하나를 사 살다가 위험이 있어 집을 버리고 시골로 여러 곳에 이사하여 나중에 수리산에 와 농사하고 지낼 때 죄인이 여러 번 가보기도 하고 서울서도 많이 보았으니 성품이 충직하고 도리에 명백하여 열심 수계할 뿐 외에 표양이 아름답고 덕행으로 모든 교우의 찬양한 바이요 맏아들 토마스를 성교회에 바쳐 중국으로 보내어 신품 공부를 시키었습니다.

 

13) 같은 책 회차 97(1885.10.13) ; … 최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사람으로서 가산이 요부하더니 성교 봉행하기에 조당이 많으므로 서울 벙거지골로 이사하여 살 새 앞집 포교가 잡으려한즉 세간을 다 버리고 도주하여 시골로 피하니 가산이 점점 탕패한지라. 부평 접푸리서 죄인과 같이 3년을 살 때 간고를 감수하며 열심히 강론하여 교우들을 많이 제성하고 속담은 도무지 듣기 싫어하여 고개를 숙이다가도 누가 도리 말을 시작하면 마음이 즐거워 흔연한 빛이 드러나더라. 과천 수리산으로 이사하여 무식한 사람이라도 회장 소임을 맡아 직분을 다하고 교우를 만나면 권면제성하고 재물이 없으나 애긍을 종종 하니 모든 교우들이 다 찬미하고 공경하더라.

 

14) 《긔일긔》(1905년 뮈텔주교 감준본) 〈최방지거〉 107쪽

 

15)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p.420 ;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권 pp.429-434, 447-448 ; 《일성록》 헌종기해 8월7일 조에는 최양업을 외국에 유학 보낸 사건과 관련하여 최영환(崔榮煥, 崔京煥)의 죄악을 논하는 간략한 기록이 전한다.

 

16) 《경향잡지》 제24집(1930.8) 통권692호 pp.376-380 〈복쟈 최방지거(崔京煥) 회쟝 치운 이)〉 ; 《경향잡지》 제43집(1949.6) 통권1011호 pp.84-86 〈최도마 신부 전기(三)〉 ; 《경향잡지》 제63집(1971.6) 통권 1239호 pp.544-553 〈두번째 한국인 신부〉 ; 《한국 七十九위 순교복자전》(아드리엥 로네 저, 안응렬 옮김, 경향잡지사, 1946) pp.108-117

 

17) 《최양업 신부의 서한》(1996, 천주교 배티성지)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pp.171-180) 및 〈최양업 신부의 열한 번째 서한(1855.10.8, 배론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p.197).

 

18)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상·하(2004, 한국교회사연구소 영인본) 중에 나오는 회차99(1866.11.2), 회차101(1886.11.4)에 나오는 최경환의 아들 최 베드로의 증언.

 

19) 위의 책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중에 나오는 회차102(1887.4.2)에 나오는 며느리 이 마리아의 증언.

20)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 바시리오 이력서〉 pp.218-221

 

21) 《긔일긔》(1905년 뮈텔주교 감준본) 〈리마리아(최방지거의 안오 최신부의 모친)〉 86쪽 ; 위의 책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회차 42(1883.7.10.)

 

22)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p.14 ; 다블뤼 주교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407-408, 492-493 ;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권 pp.432-435 : 이성례 마리아의 경우에는 관찬기록에도 그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물론 이른바 ‘사학죄인’(邪學罪人)에 관한 부정적인 서술이지만 그의 굳은 신앙심을 잘 드러내 주는 기록이다. 《일성록》 헌종 기해(1839) 8월7일, 12월11일, 12월 13일, 12월 27일, 《비변사등록》 헌종 기해(1839) 12월 27일 참조

 

23) 《경향잡지》 제17집(1923.3) 통권513호, pp.110-117 〈치명젹〉 마리아 리셩녜 부인은 … ; 《경향잡지》 제17집(1923.6) 통권519호, pp.252-256 〈치명젹〉 ○ 七위치 명쟈의젹 … 리마리아(최신부의 모친, 최방지거의 안) 李女性禮 혹聖禮 … ; 《경향잡지》 제43집(1949.5) 통권1010호 pp.72-74 〈최도마 신부 전기(二)〉 十, 이마리아는 복자 최방지거의 부인이시오 …

 

24)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1996, 천주교 배티성지)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 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155 ; 이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 가전(家傳)으로 전해진다.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0 ; …(최인주가) 불과 수년 후 임종을 당하여 자제 3형제를 불러 앞에 앉히시고 유언하시되, 먼저 사주구령(事主救靈)에 필요한 도리와 가정처리의 규칙이며, 또 외속(外俗) 교제상에 불가한 사유를 말씀하사 이르시되, “남의 혼인의 중매와 남의 채무에 보인(保認)과 남의 앞에 근본을 자랑하는 이같은 조건이 신분을 손상하는 것이니, 십분 조심하고 주의하라” 하시고 …

 

25)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 바시리오 이력서〉 pp.205-206 ; 김옥희 앞의 책(1983), p.20, 배은하 앞의 책(1992)p.140, 차기진 앞의 글(1999)p.23 ; 필자가 〈가승〉에 나오는 최한일의 생몰연대(갑자1744년~정축1757년)를 계산해본 결과 위 기록과 합치되지 않았는데, 이는 〈가승〉의 착오로 보인다. 왜냐하면 〈가승〉을 작성한 최상종이 ‘최 신부 일가의 이력서’들을 작성하였으므로 둘 중의 하나는 오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작성한 〈최 신부 이력서〉나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 비록 연기(年紀)는 언급되지 않지만, 최한일 형제의 입교기록이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가승〉에 의하면 최한일의 동생으로는 최한기 외에 최한현(崔漢䮄)도 있어 최한일의 형제는 모두 3형제가 된다.

 

26)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1996)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161

 

27) 위의 책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회차102(1887.4.2)에 나오는 며느리 이 마리아의 증언. ; 이와 유사한 증언으로 “재물이 없으나 애긍을 종종하니…”(같은 책 회차97, 1885.10.13, 이 베드로의 증언)가 있음. 28)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4 ; 이와 유사한 증언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또 한번은 빚 까닭으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자기 돈으로 빚을 갚아 주어 화목하게 하였더니 …”위의 책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중에 나오는 회차27(1883.6.11) 〈김 막달레나의 증언〉

 

29)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1996)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159 ; 이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혹 무엇을 사러 갔다가 상한 것을 사서 오매 아내가 나무라면 프란치스코가 대답하되 ‘내가 아니 사면 살 사람이 없어 장사가 해(害)를 보겠기에 사왔노라’하던 말을 그 아내에게 친히 들었습니다.”(앞책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회차42(1883.7.10)에 나오는 유 바르바라의 증언)

 

30)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4 ; 이와 유사한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최 프란치스코가 시골서 죄인과 한 이웃하여 살 때 많이 보았으니 인정이 많아, 한번은 길에 가다가 보니 한 늙은 할미가 떡을 많이 놓고 쉬어서 팔지 못하여 애를 쓰매 프란치스코가 돈을 내어 먹을 수 없는 것을 샀다 하고 …” 위의 책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중에 나오는 회차27(1883.6.11) 〈김 막달레나의 증언〉

 

31)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1996, 배티성지)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161

 

32) 위와 같은 곳

 

33) 루카복음 21,1-4 ; …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

 

34)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4 ; “… 방지거가 본디 칠극의 도리를 능통한 고로, 수신입공(修身立功)에 전일(專一)하여 밤낮으로 여가만 있으면 책보기를 종사하며, 본디 성정(性情)은 초급(峭急)하나 도리로써 억제하고 온순 인애함으로 일생동안의 행위가 인류의 모범적이 되어 그 초월한 덕을 다 기록치 못하겠다.” : 이와 유사한 증언이 있다. “죄인 부친의 사정이오라 여쭙기 불감(不堪)하오나 성품이 본래 혹독하더니 차차 힘써 분노의 독한 마음을 이기며 억제하여 나중에는 도리어 유순한 성품으로 모든 이 찬미하였삽고 …”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회차101(1886.11.4) 최 베드로 증언

 

35)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회차101(1886.11.4) 최 베드로 증언 “… 죄인이 5형제 이온데 세속 공부는 시키지 못하였으나 성교(聖敎) 도리와 아름다운 표양은 익히 가르치며 …”

 

36)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신부 이력서〉 p.184 ; … 1년에 6~7월 두 달 동안만 본댁에 계시고 그 밖에는 전적으로 전교에 근무하시기를 12년 동안이나 하셨다.

 

37) 차기진 앞의 글(1999) p.56 ; 이에 의하면 최양업 신부는 1857년 이후 담당구역과 신자수가 줄어들면서 그가 탄생시킨 영세자의 숫자도 감소하였지만, 과로(過勞)가 그의 중요한 사망 원인이 될 정도로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38)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 바시리오 이력서〉 pp.232-233

 

39)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1996)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161

 

40) 앞의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회차102(1887.4.2) 이 마리아의 증언 ; “그때 포교들이 잘 때 동네 사람들이 피할 만하나 이왕부터 말하기를,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가지로 치명할 원의가 간절하여 피하지 아니하고 남녀 40여 인이 한가지로 올라가 (해가) 저물 임시에 포청으로 들어가 그날 밤을 같이 지내고 …” / 동 회차 42(1883.7.10) 유 바르바라 증언 ; “죄인이 포청에 있어 여름 장마 때에 최 프란치스코와 수리산 한 동네에서 같이 살던 교우 40여 인이 잡혀 밤에 포청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나 …” /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1996)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163 ; 포졸들이 잠에서 깨어나서 식사를 마치자 …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40여명이 넘는 남녀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다음 오랏줄에 묶이지 아니한 채 길을 떠났습니다. … // 이상의 기록들과는 달리 최경환 성인과 함께 끌려간 사람들이 30여명이라는 기록과 백여 명에 이른다는 또다른 기록도 있다.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7 ; “… 본디 동중(洞中) 교우들이 전부터 말하기를, “우리 모두 회장님을 따라가 순교하자!”하고 별로 피신치 아니하고 있다가, 남녀 교우 30여명이 포착(捕捉)되어, 바로 서울로 압송하니, … /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회차101(1886.11.4) 최 베드로 증언 “… 남녀 교우 백여 명이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열심을 따라 노소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잔치 참예하러 가는 사람 같이 포졸과 한가지로 올라갈 때 …

 

41)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 중 〈최양업 신부의 열한 번째 서한(1855.10.8, 배론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191

 

42) 같은 책, 〈최양업 신부의 열네 번째 서한(1857.9.15, 불무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245

43) 같은 책, 〈최양업 신부의 열 번째 서한(1854.11.4, 동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185

44) 같은 책, 〈최양업 신부의 열네 번째 서한(1857.9.15, 불무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p.244-245 

 

45) 최양업 신부의 이같은 비판은, 기해~병오박해 직후에 박해 극복을 위한 유능한 일부 지식인 신자들의 활약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던 페레올 주교 시대와는 달리, 당시에는 선교사들의 교우촌 순방이 점차 본궤도에 진입하고 신자 공동체의 결속이 강조되는 상황 하에서 양반 출신 복사들의 교회 내 역할이 긍정적인 측면이 감소하고 부정적인 측면이 증가되는 과도기적인 시대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후 사목활동 - 김대건 신부 현양 및 양반중심 교회운영을 중심으로 -〉 《교회사학》 제5집(2008.12) 참고

 

46)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 중 〈최양업 신부의 일곱 번째 서한(1850.10.1, 도앙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p.88-89

 

47) 같은 책, 〈최양업 신부의 일곱 번째 서한(1850.10.1, 도앙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89

48)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최 신부 이력서〉, pp.183-184

 

49) 위와 같은 곳;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 중 〈최양업 신부의 일곱 번째 서한(1850.10.1, 도앙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p.93-111

 

50)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p.159-161

 

51) 정종득, 〈박해시대 순교자와 성모공경의 전통〉 《교회사학》 제3집(수원교회사연구소, 2006.12), pp.32-38

 

52)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173

 

53) 위와 같은 책, 같은 서한, pp.174-175

54) 이하 송 아가타의 일화는 앞의 책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송 아가다 이력서〉, pp.193-198

55) 〈김제옥 수녀 증언 녹취록(2009.6.14)〉 ; 김제옥 발바라 수녀는 송 아가타의 손녀 최 요안나의 딸이다.

 

56) 앞의 책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송 아가다 이력서〉 pp.203-204 ; “… 서력 1928~9년간에 조선 순교 복자의 분묘를 찾았을 적에 복자 최 방지거의 산소가 어디인지 몰랐다. 다행히 송 아가다를 찾아내어 당국(교구청과 시복관계 기관)에서 불러들였다. 송 아가다의 시질[시댁 조카]인 원선시오 상종(相鍾)이 92세나 된 송 아가타를 모시고 나와서 서울대교구청에 나가서 여러 관계 신부님들과 함께 지금의 안양시(당시는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의 뒤듬촌에 이르러 서슴치 않고 분묘를 찾아내어 증거하여 주었다. 송 아가다의 길잡이와 노쇠하시고 증거하는 모습을 본 여러분은 이구동성으로 확신할 수가 있다고 결정 짓고 영화로이 천묘하였다.…”

 

57) 앞의 《최양업 신부의 서한》 중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1851.10.15.,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p.167

 

58) 〈최 바시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pp.219-220

 

59) 《경향잡지》 제43집(1949년 6월) 통권 1011호 〈최도마 신부 전기(三)〉 ; 이에 의하면 최도마 신부의 아명은 ‘양업’이라고 불렀으며 그 외의 이름으로 그 묘석에 쓰인 ‘정구(鼎九)’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는 친족들이 전하는 바라고 하였다. 한편 앞의 최양업 신부 전기자료집 제3집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배티사적지 편, 1996)의 p.31에도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관명은 鼎九, 아명은 良業이라고 되어 있다.

 

60) 이 가승은 경주최씨(慶州崔氏) 관가정공파(觀家停公派) 참판공광문파(參判公光門派)의 가 승(家乘)으로 그 앞쪽의 표제가〈경주최씨세보(慶州崔氏世譜)〉라고 되어 있고, 뒤쪽 표지에는〈최수백수견(崔洙百受見)〉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가승의 소장자 최대식의 조부인 최상종(崔相鍾) 빈첸시오가 최대식의 부친 최수백(崔受百) 모데스토에게 “받아보아라(受見)”고 써준 의미로 해석된다.

 

61) 《보감》제4권 p.304

62) 《경향잡지》 제43권 p.84, 통권 1011호(1949.6.1.)

 

63) 〈최 신부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pp.185-186에 최도마 신부의 묘비명 전문이 그대로 실려있고 그 내용에 대해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고 다만 “감사하다”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최경환의 후손들은 이 비석의 이름을 인정한 셈이 된다. 그런데 최경환 성인의 후손 중에 ‘최신부 일가의 이력서’를 정리한 최상종은 필자가 본문에서 인용한 〈가승〉을 만들어 그의 직계 자손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가승에 나오는 보명을 가문의 항렬 돌림자에 맞게 ‘구정(九鼎)’으로 기록하고 있으면서, 그 보명을 거꾸로 쓴 ‘정구(鼎九)’를 묘비석에 새기게 된 일을 “감사하다”고 받아들이는지 도대체 왜, 어떠한 배경에서 이같은 이름 ‘정구’를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대표명으로 인정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64) 《경향잡지》1972년 7월호(통권 제1252호) p.40, 동 잡지 1985년 8월호(통권 제1406호) p.132 ‘정구’를 보명(譜名)으로 기록했다. 임충신 · 최석우 역주 《최양업신부서한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p.5에서도 양업을 아명, 정구를 보명으로 인식했다. // 앞의 책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p.181에는 최상종이 쓴 〈최신부 이력서〉의 본문 중에 ‘최 도마 정구’라는 부분에 괄호를 치고 주(註)를 달기를 “정구(鼎九)는 관명(冠名), 아명 (兒名)은 양업(良業)”이라고 했다. ; 배은하 앞의 책(1992) p.219에서도 최신부의 묘비명을 해설하면서 “최정구(崔鼎九)는 최양업 신부의 관명이다”고 서술했다. ; 배티사적지(편),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청주교구, 1996) p.31 아명은 ‘양업’, 관명은 ‘정구’로 표기했다. // 한편 ‘정구(鼎九)’를 아명으로 본 일련의 연구도 있다. 차기진, 앞의 글(1999) p.23, 같은 이의 앞의 글(2003) p.19, 《한국가톨릭대사전》 권11,〈최양업〉 p.8230 등 // 《경향잡지》 1972년 5월호(*통권 제1250호) p.48 최신부의 이름을 ‘최 토마 양업(鼎九)’로 표기하여 관명인지, 보명인지 밝히지 않았다. ; 《경향잡지》 1961년 8월호(*통권1121 호) p.31 최신부 선종 100주기를 맞아 당시 청주교구에서는 ‘최도마(정구)’ 신부로 표기했다. ; 《경향잡지》 1976년 9월호(통권1302호) p.16 ‘최 도마 양업(崔良業)’으로 표기했다. 최양업 신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논저라고 평가할 수 있는 김옥희 앞의 책(1983) 맨 뒤 부록 〈최양업 토마스 신부 가계표〉에도 보명과 관명을 구분하지 않았고 다만 ‘양업’은 아명(兒名)이라고 하였다. ;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1985)부록, p.192, p.204은 보명, 관명, 아명을 구분하지 않았다.

 

65) 최양업 신부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를 출간한 김옥희 수녀님의 앞의 책(1982) p.27에도 최양업 신부의 조카인 최상종이 쓴 〈최 바시리오 이력서〉를 인용하면서 분명히 ‘희정(羲鼎)’으로 밝혀두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의 다른 곳(p.65의 각주48번, 책의 맨 뒤쪽에 별지로 첨부되어 있는 가계도)에는 모두 ‘의정’(義鼎)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저자와 무관한 편집과정상의 단순한 착오(오타)로 보인다. 이같은 내용에 대해서 필자의 논문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 : 교회 안의 전승을 중심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역과 선종지 연구》(양업교회사연구소, 1997.12) p.97 참고

 

66) 〈최 바시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pp.226-227 ; 바실리오의 백부와 중백부의 이력을 대충 말하건대 그 백부 영열(榮說)씨는 목천 서들골에 사시다가 … 다만 이남일녀를 두셨는데 … 큰 자제 의정(義鼎) 요한씨는 일직 공부하여 학식이 유여하고 위인이 비범하시며 또한 재상가에서 수학하신 고로 행세와 예모에 출중하셨다. …

 

67) 희정(羲鼎)의 오기로 보임. 이 〈세보〉는 최경환 성인의 6남 중에 장남 최양업 신부, 삼남 최선정, 막내 최 스테파노 등 3명이 빠지고, 이남 희정, 사남 우정, 오남 신정 등 3명만이 기재되어 있고, 그 마저도 사남 우정이 이남 희정보다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상종이 작성한 〈가승〉을 대본 삼아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68) 어떠한 연유로 최양업 신부와 최선정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은 모두 그의 직계 아들이 없으므로 즉 절손(絶孫)이라고 하는 공통점이 있다. 앞서 언급한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 의하면 아마도 이 《경주최씨세보》는 최선정이 1866년 병인박해 직전에 경주의 대종가로 찾아가서 최경환 성인의 가계를 參入시킨 후에 뒷날 새롭게 그 자손들을 첨록한 20세기 초반의 족보로 추정된다. 필자가 이 세보를 1866년(=병인년) 간행한 족보가 아니라 20세기 초반에 간행한 족보로 본 것은 등재된 자손의 이름이 ‘정자(鼎字)’ 항렬(○鼎)의 손자대인 ‘수자’(洙字) 항렬(○洙)까지 있고, 그 수자 항렬의 출생연대가 1900년대 초반에 해당되는 사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69) 이제까지 연구에서 최 베드로는 성인의 둘째 아들 최희정으로 보아온 경향이 있다. 1880년대 당시 시복재판 교회법정에서 최 베드로는 자신의 아내가 당년(=1886년)의 괴질로 인해 사망해서 의지할 바 없는 몸이 되었다고 말했는데, 만약 그가 최희정이라면 그의 아내(이 마리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1887년 4월 2일에 열린 제 102차 시복재판에서 증언한 셈이 된다. 무언가 착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최 베드로는 최희정 야고보와는 다른 인물 곧 그의 동생 최선정 안드레아라고 보아야 순리에 맞다. 이렇게 볼 경우 최양업 신부가 말한 최희정 야고보의 체포당시 나이(만 14세)와도 잘 들어맞는 진술이 되게 된다. 앞의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회차 102, 이 마리아 증언 ; 죄인의 성은 이씨요 본명은 마리아며 …죄인은 무사생 60세온데, 17세까지 공주 땅 최 야고보와 혼배한 후 자주 이사하여 진천서 사옵더니 … 지금은 가평 전패서 자식에게 의지하여 그렁저렁 사옵니다. … 70 최 프란치스코는 죄인의 시부라도 치명한 후에 시집을 간 고로 보지는 못하였으나 죄인 장부에게 그 이야기를 많이 들었더니 … : 이 같은 결론은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첫째 앞의 책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 회차99, 최 베드로의 1886년 11월 2일자 진술에서 그는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가 사형 당하는 장면을 자신의 형이 친히 보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시 그의 장형 최양업 토마스는 외국 유학 중이었으므로 국내에 없었으니 그 사형 장면을 직접 목격한 형이 될 수 없고, 남은 것은 그의 둘째 형인 최희정 야고보가 그 사형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진술이다. 따라서 1827년생 최 베드로는 결국 최선정 안드레아와 동일 인물이라고 추정된다. 둘째 회차 99에서 진술한 최 베드로는 당년에 마누라가 죽어서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만약 그가 최희정이라면 그의 아들들이 기종, 도종, 유종 등 셋이나 있으므로 말이 안된다. 그런데 그를 최선정 안드레아로 보면 그의 자식으로 딸만 둘이 있었다고 하므로 그 딸들이 시집 갔을 경우에는 이른바 ‘독거노인’(獨居老人) 즉 의지할 것 없는 신세가 되었다는 진술과 합치되게 된다.

 

70) 이후 최상종의 일화와 관련된 기술은 앞의 글 〈최 바시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 들》(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pp.205-240에 의거한다.

 

71) 〈김경진 수녀 증언 녹취록(2009.8.16.)〉

72) 〈최대식과 최인식 증언녹취록(2007.3.26.)〉

 

73) 〈김경진 수녀 증언 녹취록(2009.8.16)〉, 〈김제옥 수녀 증언 녹취록(2009.6.14)〉, 〈김순덕(최현식 부인) 증언녹취록(2009.6.6.)〉

 

74) 이는 필자가 성인의 후손 최대식(레오) 씨로부터 전해 받은 가계도(본고 뒤편에 부록으로 제시함) 및 주소록에 근거하여 파악한 것이다.

 

75) 〈오연순(최인식 부인) 증언 녹취록(2009.8.18.)〉

76) 〈김순덕(최현식 부인) 증언녹취록(2009.6.6.)〉, 〈최기식 신부 증언 녹취록(2009.8.15.)〉

77) 〈최광식 신부 증언 녹취록(2009.4.23.)〉

78) 〈김영진 신부와 모친 최묘순 여사 증언 녹취록(2009.8.20.〉 등

79) 〈최광식 신부 증언 녹취록(2009.4.23.)〉, 〈오연순(최인식 부인) 증언 녹취록(2009.8.18.)〉

 

80) 오늘날 인권(人權, Human right)의 개념은 계속 확대되고 있지만, 대체로 ‘인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핵심적인 권리’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권은 시대에 따른 개념의 변화를 가져와서, 제1세대 인권이 주로 국가의 횡포로부터 개인의 자유 및 기본적 권리를 보호하는데 중점을 둔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의미한 데 반하여, 제2세대 인권은 사회주의 이념에 영향을 받은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권리 등 국가의 적극적 개입만이 효율적인 권리의 향유를 가능케 하는 권리를 의미했고, 제3세대 인권은 개발에의 권리, 평화추구권, 깨끗한 환경 추구권 등 국제사회의 연대에 호소하는 집단적 차원의 권리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박기갑, 《21세기 국제인권법의 과제와 전망》(삼우사, 1999), pp.10-13

 

81) 이하 최기식 신부의 인권운동과 관련된 내용은 최기식, 《로만칼라와 빈무덤》(기쁜소식, 1997) 및 〈최기식 신부 증언 녹취록(2009.8.15)〉에서 발췌한 내용들이다.

 

82) 《경향잡지》 1982년 5월호 〈최기식 신부 구속 사건에 대한 담화문〉 *1982년 4월 15일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명의의 담화문

 

83) 그러나 본인은 이러한 필자의 평가에 손을 내저으며 “자신이 하는 일이 성인 할아버지와 최양업 신부님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고 감히 말할 정도가 아니다“고 겸손한 입장을 취했다.

 

84) 본고 맨 뒤쪽에 첨부된 가계도 참고

 

[학술지 교회사학 vol 6, 2009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원재연(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15671&Page=18&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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