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이야기9: 교회가 암흑기를 맞이하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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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9-01 ㅣ No.667

[성당 이야기] (9) 교회가 암흑기를 맞이하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

 

 

지난 회에 롬바르디아 건축 이야기를 하면서, 성당 건축은 교회와 국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회에는 그와 관련된 9-10세기의 교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국가뿐만 아니라 교회의 질서도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신학자 알쿠이누스의 도움으로 많은 법령집을 만들고, 지역 교회에 주교들을 임명하였으며, 로마 전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습니다. 814년 사망한 그는 아헨 왕궁 성당에 묻혔고, 그의 아들 경건왕(814-840)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루이는 아버지의 개혁을 이어받아 “수도회법”(817년)과 “성직자법”(819년)을 제정하고, 교회의 영성과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궁정 학술원에서는 성경과 고부들의 작품을 연구하였고, 필사가들을 양성하여 많은 훌륭한 필사본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신학의 발달은 신학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성찬례 논쟁’입니다. 이는 코르비 수도원은 아빠스 라드베르투스(Radbertus, +859)와 수사 라트람누스(Rathramnus, +868)가 벌인 논쟁으로,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성찬례에서 축성된 ‘성체’에 대한 사실주의적 입장과 상징주의적 입장의 대결이었습니다. 라드베르투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존재 방식과 성사적 존재 방식에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럴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매일 반복됩니다. 반면에 라트람누스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피의 상징이 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에는 우리가 사실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영하는 것이 됩니다. 이 양극단의 입장은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훗날 교회가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한 ‘실체변화’의 가르침에 도달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때 동방에서는 ‘성화상 논쟁’이 100년 이상 계속되고 있었습니다(726-843).

 

루이 이후 프랑크 왕국은 베르됭(Verdun) 조약(843년)에 의해 세 나라로 분할되었습니다. 이것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기원이 되었고 이후 서유럽은 통일된 국가를 갖지 못했습니다. 서유럽이 분열되자 북쪽에서는 노르만족(바이킹)이 내려와 프랑스 북부 연안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지역을 지금도 ‘노르망디’라고 부릅니다. 또한 동쪽에서는 헝가리족이 독일 동부를 침략하였고, 남쪽에서는 사라센족이 쳐들어와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하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교회도 힘든 시기를 겪습니다. 보편적인 황제권의 보호를 잃은 교황권은 로마 귀족들의 이해관계 속으로 빠져들었고, 지역 교회들도 지방 귀족들의 권력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사학자들은 ‘카롤링거 왕조’ 이후부터 ‘그레고리오 개혁’ 이전까지를 ‘교회의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주교를 선출하던 전통은 사라지고, 봉건제도 안에서 왕이나 영주들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십자가와 반지를 주며 주교직을 수여하였습니다. 이런 성직 서임은 자질 없는 주교들을 양산하였고, 성직 매매도 일어났으며, 사제의 독신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문제들은 클뤼니 수도원(서프랑크)의 설립과 오토 대제(동프랑크)의 등판을 재촉하였습니다.

 

[2019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의정부주보 7면, 강한수 가롤로 신부(민락동 성당 주임, 건축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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