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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영성과 심리로 보는 칠죄종: 나태 (1) 그리스도인의 나태 다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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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2-26 ㅣ No.904

[영성과 심리로 보는 칠죄종] 나태 (1) 그리스도인의 나태 다루기

 

 

우리는 정말 나태하게 살고 있을까?

 

‘신과 함께’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세상에서 태만하게 살아온 이들이 평생 동안 계속해서 회전하는 거대한 봉을 피해 달리는 형벌을 받는 ‘나태 지옥’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소개한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관객들에게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짐작한다.

 

영화에 소개된 나태한 이들이 벌을 받는 모습은 단테가 「신곡」에서 묘사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단테의 「신곡」에 따르면, 세상에서 나태의 죄를 저지른 자들은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으로 계속해서 달리는 벌을 받는다. 단테 또한 이러한 묘사를 통해 당대의 사람들에게 나태함을 극복하도록 초대했다.

 

하지만 얼핏 보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나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밤늦게까지 일하고도 모자라 밤이 새도록 일을 하고, 하나의 일도 부족해 이중 삼중으로 겸업을 한다.

 

또한 부부는 맞벌이하며 치열하게 산다. 버스나 지하철, 심지어는 신호등 앞에 잠시 멈춰 설 때나 차를 운전하면서도 찰나를 이용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현대 사회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이렇듯 분주하고 치열하게 사는 이들에게 나태에서 달아나려면 더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요구는 지나침을 넘어 가혹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쉬라.’는 말이 더 종교적이고 영적인 위로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과연 이러한 시대에 ‘나태’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사회의 일부 게으른 이들에게 더 열심히 살라며 던지는 채찍일 뿐일까?

 

칠죄종에서 말하는 나태의 경고는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게으름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칠죄종은 우리에게 하느님과 관련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 곧 하느님 나라, 사랑에 대한 목적이 있는 움직임을 하는지를 묻는다.

 

칠죄종에 따르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움직이지 않는 것은 분주함을 가장한 나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찰하고 대면해야 하는 나태의 실체다.

 

 

나태의 진정한 의미

 

교회의 전통 안에서 수많은 신학자와 문학 비평가가 ‘Acedia’를 나태, 게으름, 무관심, 우울 또는 지루함이라는 단어로 그 의미를 담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칠죄종에서 언급한 ‘Acedia’의 본뜻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용어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이들이 다 품지 못하는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먼저, 에바그리오와 그의 제자인 카시아노에게 나태는 악령의 여덟 가지 악한 생각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그들은 ‘우울’과 ‘나태’가 서로 연관이 있지만 서로 다른 실체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그들의 견해를 수용하면서도 나태를 우울의 일부로 여겨 칠죄종 목록을 만들 때 우울이라는 큰 개념 안에 포함시켰다. 그 뒤 나태가 우울보다 더 다양하고 복합적인 개념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나태를 우울보다 상위 개념으로 여겨 목록에서 우울을 빼고 나태를 넣었다.

 

이러한 역사는 비록 우울이 칠죄종에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태를 다루는 데 우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이 둘 사이에 유사성과 연관성뿐만 아니라 상이성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일반적으로 나태에 대해 우리가 가진 이미지는 ‘Sloth’(나무늘보)라는 영어 단어가 보여 주듯이 몸이 굼뜨고 행동이 느린 모습이다.

 

하지만 칠죄종에서 말하는 나태는 이와 성격이 매우 다르다. 칠죄종의 나태(Acedia)는 희랍어 ‘아케디아’(άκηδία)에서 유래한 것으로 α(없음)와 kŋδоς(관심)의 합성어이다. 직역하면 ‘관심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수도승들은 이를 ‘영적 태만’, ‘영적 무기력’ 등과 같이 영혼 상태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단어 자체의 의미뿐만 아니라 은수자들과 수도자들에게 사용되었던 실례를 보더라도 나태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내적인 태도와 관련된다. 곧 단순히 몸이 느슨하고 느린 상태가 아니라 영혼이 병든 것처럼 의욕과 활력을 잃어버린 상태를 뜻한다.

 

사막의 은수자였던 에바그리오는 은수 생활을 하던 이들이 열악한 환경과 오랜 금욕 생활에 따른 심신의 미약 상태, 단순한 일의 반복, 앞날에 대한 불안과 염려, 영성 생활이 크게 발전하지 않는 데서 오는 좌절을 체험하면서 지루함과 무기력, 우울과 낙심으로 말미암아 기도와 노동, 독서 등을 게을리하거나 은수 생활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이를 ‘나태’라고 불렀다(「프락티코스」, 12항 참조).

 

특별히 나태는 다른 칠죄종의 죄들과 달리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범하는 죄가 아니라 하지 않음으로써 범하는 죄, 곧 ‘행하지 않는 죄’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태는 다음의 두 가지 차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선에 대한 염증이나 반감으로 이를 실천하는 데서 수고와 어려움을 피하는 것.

 

둘째,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뜻, 이웃의 필요, 자신의 의무를 비롯한 사랑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는 것. 나태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나태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나태

 

「성경」에 나태라는 단어가 사용되지는 않지만(라틴어 성경에서는 ‘Acedia’가 세 번 사용된다.) 나태함의 특징적인 행동인 ‘게으름’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한다.

 

▶ 게으름에 대한 경고

 

「성경」에 따르면 게으른 이는 지혜를 지니지 못한 사람이다. 지혜를 추구하지 않는 게으름은 경계의 대상이며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로 「성경」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 게으름뱅이야, 개미에게 가서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지혜로워져라”(잠언 6,6). 바오로 사도 또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게으름을 경고한다.

 

▶ 게으른 이들의 전형적인 행동

 

「성경」은 게으른 이들의 행동 특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첫째는 미루는 태도다.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 있자!”(잠언 6,10) 둘째는 빈둥거림과 쓸데없는 참견, 수다스러움이다(1티모 5,13 참조). 셋째는 교만이다. “게으름뱅이는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로운 줄 안다”(잠언 26,16).

 

▶ 내면의 두려움

 

「성경」에 따르면 게으른 이들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있다. 게으른 이들은 “‘밖에 사자가 있어! 길거리에 나가면 난 찢겨 죽어!’ 하고 말한다”(잠언 22,13; 26,13 참조).

 

▶ 게으른 이의 운명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게으름을 궁핍과 파멸에 이르는 삶으로 소개한다. 게으른 이는 부를 얻지 못하고(잠언 10,4; 12,27; 20,4 참조)누군가의 부림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잠언 12,24; 15,19 참조). 하지만 욕심은 그대로 남아 있기에 결국은 죄악에 빠지게 되어 파멸에 이르게 된다(잠언 21,25 참조).

 

▶ 음욕과의 연관성

 

게으름은 음욕에 영향을 미친다. 성경에서 둘 사이의 연관성은 다윗에게서 볼 수 있다. 「성경」은 그의 게으름을 자신의 의무와 역할을 뒤로한 채 다른 부하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것과 저녁이 되어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 옥상을 빈둥거리는 모습으로 소개하면서 게으름이 음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소개한다(2사무 11,1-2 참조).

 

▶ 하느님에 대한 게으름

 

「성경」은 게으름과 더불어 하느님과 율법에 대한 ‘소홀함’ 또한 죄로 여긴다.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48,10).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서 게으르고 소홀한 율법 교사들을 지적하신다(루카 11,46 참조).

 

또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을 방해하는 게으름이 얼마나 무서운 악이 되는지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 참조)를 통해 말씀하신다.

 

▶ 이웃에 대한 게으름

 

「성경」은 하느님의 일과 은총에 대한 게으름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게으름, 무관심도 소개한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심판(마태 25,46 참조)의 모습을 소개하시며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은 이들은 당신에게 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 김인호 루카 - 대전교구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대학원장 겸 교무처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평화방송 TV ‘김인호 신부의 건강한 그리스도인 되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저서로 「신앙도 레슨이 필요해」, 「거룩한 독서 쉽게 따라하기」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9년 2월호, 김인호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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