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성지순례의 시작과 전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15 ㅣ No.1778

[특별기고] 성지순례의 시작과 전개

 

 

오늘날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성지순례는 그리스도교 밖의 여러 분화권과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에도 발견된다. 신전을 찾아 그곳에서 수일간 머무르며 복을 청했던 순례는 그리스 시대부터 나타난다. 유대교 · 이슬람교 · 그리스도교 등의 아브라함 계열 종교뿐 아니라 힌두교와 불교 및 일본의 신도에서도 성지순례는 공통분모로서 드러난다. 그만큼 성지순례는 역사를 지닌 종교에서 신앙인의 정체성 인식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 종교의 공동성지, 예루살렘

 

그리스도교인들의 성지순례는 유대교의 성지순례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공동성지인 이스라엘의 운명이 그 연관성의 고리에 놓인다. 그리스도교 출현 당시의 유대교에서 예루살렘은 유일한 ‘의무순례지’였다. 유대교의 모든 남성이 일 년에 세 번, 예물을 들고 순례하는 의무가 주어졌던 곳이 예루살렘이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 가족의 성지순례에서도 이러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유대교에서 중심성지가 된 시점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된 이후였다. 그 이전에는 단과 스켐, 실로, 베델 등이 중요한 순례지이자 국가의 회합 장소였다고 알려졌다.

 

예루살렘은 ‘터’를 의미하는 ‘예루’와 ‘평화 · 샬롬’을 의미하는 ‘살렘’의 합성어이다. 인류 역사상 세계분쟁의 최대 진앙지로 꼽히는 현실과 무관하게, 예루살렘은 ‘평화의 땅’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1010년경(또는 기원전 1000년), 통일왕국의 첫 왕이었던 다윗이 이곳을 왕국의 수도로 정하면서 유대 역사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후, 솔로몬 왕이 북쪽 모리야 산 위에 성전을 짓고(기원전 957년 또는 기원전 962년), 계약 궤를 이곳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유대교에게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이라는 특정한 장소가 성스러운 장소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예루살렘 제2 성전의 건축과 예루살렘 성지순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이후에도 남유다의 수도로서 건재하다가, 기원전 586년에 이르러 바빌론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때 함께 파괴된 솔로몬 성전은 즈루빠벨에 의해 다시 재건(기원전 515년)되었지만 이 성전 역시 기원전 169년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왕에 의해 파괴되었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예루살렘 제2 성전은 헤로데가 46년에 걸친 공사기간을 통해 63년경에 완성한 성전이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정화하셨던 성전과 성전을 허물과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언급하셨던 성전이 바로 이 예루살렘 제2 성전이다.

 

헤로데의 성전은 즈루빠벨의 성전이나 솔로몬 성전보다 그 규모와 완성도에서 훨씬 화려하고 장대한 성전이었다. 이 때문에 헤로데 성전은 건축 순서상 세 번째 성전임에도 제2 성전으로 불리며 유대인 사회와 종교 신심에서 중심 지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예루살렘이 구약과 불가분한 성지이며, 동시에 예수 삶의 가장 중요한 단면이 전개된 장소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은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며, (임박한 종말을 믿던 그들에게) 예수가 부활하여 세상을 구원하러 다시 오실 곳이기도 했다.

 

예수 사후 20년 후부터 작성되었다고 알려지는 바오로 서간에서 이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바오로는 유대교로부터 전향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루살렘에 대한 공경을 분명하게 지닌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는 특정 장소에 대한 신성화가 이제 시작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충돌하는 지점을 정확히 간파한 뛰어난 신학자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었던 구원범위가 신앙에 기반한 보편적 구원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특정 장소 예루살렘만을 성전으로 정위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이미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유효했던 임박한 종말 신앙에 입각하여,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에 새로운 신앙관을 옷 입혔다. 그 해법은 예루살렘과 제2 성전에 한정되었던 성전의 의미를 탈 시간적이고 탈 공간적인 의미로 변모시키는 방법이었다. 바오로는 모든 신자의 마음을 성전으로 해석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정한 장소로서의 성전 개념을 탈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신학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70년 이전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크게 유행하지 못했고 극히 소수만 순례를 했다고 짐작된다. (헬레나 성녀의 십자가 발견 설화의 원형으로 보이는) 시리아의 기록은, 1세기부터 이미 그리스도인들의 예루살렘 성지순례(예수님의 빈 무덤 등)가 유대인들에 의해 통제되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예루살렘 순례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초기 교회 시대 그리스도인의 성지순례는 박해시대의 ‘순교자 무덤 순례’에 집중되었다.

 

 

예루살렘 제2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 성지순례

 

한편, 헤로데가 완성한 제2 성전은 로마인과 유대인 간의 갈등 때문에 벌어진 유대 전쟁 당시 티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사건은 예수 사후 한 세대(3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기다리던 종말은 기약 없이 지연되고 있던 시점인 70년에 발생했다. 통일왕국이 시작될 때부터 유대인들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현재까지도 ‘통곡의 벽’으로 불리며 남아 있는 성전의 서쪽 벽을 제외하고 모두 허물어졌다. 성전파괴 사건은 유대인의 정신적 뿌리였던 종교적 요소에 치명적이고 복원 불가능한 타격을 가했다.

 

그런데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들의 신학과 역사 인식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교회론, 구원론, 종말론 등의 모든 신학 논제의 변화를 가져왔다. 성전파괴 사건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를 근본부터 흔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의 의미는 이전과 다르게 제시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성전파괴 이후 완성된 루카 복음서의 저자는 구약과 신약의 계약을 잇는 의미로 예루살렘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바오로 신학에서 시작된 탈(脫) 시간화, 탈 공간화 작업은 요한복음과 요한묵시록, 히브리서 등에서와 같이 영적인 천상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신학으로 이어졌다.

 

예루살렘에 불어 닥친 역사적 폭풍우는 135년에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제2 성전파괴 이후에도 로마 정부를 향해 꾸준히 저항 운동을 펼친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이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나라 이름을 팔레스티나(Palestina)로 개명하고 예루살렘의 도시 이름도 ‘아일리나 카피톨리나’로 개명하였다. 이 이름은 황제의 가문인 ‘아일리아’와 황제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되는 신, ‘카피톨리누스’를 합한 이름이었다. 유대교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파괴된 성전 터에 주피터와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도시 광장을 로마신들의 성상으로 가득 채웠다.

 

철저히 예루살렘의 흔적을 지운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들에게 일 년 중 하루만 예루살렘이었던 도시의 순례를 허락했다. 이날은 성지를 빼앗긴 유대인의 슬픈 역사를 눈물로 기억하는 날이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하드리아누스의 예루살렘 파괴를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유대교를 실패한 종교로 보여주며, 종교적 황무지가 되어버린 예루살렘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혼동과 변화 속에서도 2,3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내에서 예수의 자취가 남아있는 장소를 가려내어 성지로 자리매김했다고 알려진다. 이때까지도 그리스도인의 주요 순례성지는 순교자들의 무덤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평화 시대의 예루살렘 성지순례

 

평화 시대에 진입한 이후 성지순례의 양상은 크게 변화된다. 카타콤바 순례는 이제 순교자의 시신을 안치한 거대한 바실리카 성전으로 옮아갔다. 성 바오로와 성 베드로의 유해를 모신 바실리카 성전은 이때부터 성지순례가 정점에 다다르는 중세에 이르기까지 가장 인기 있는 성지순례지의 자리를 지켰다. 이때까지도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인들의 주요 순례지로 부상될 수 없었다.

 

예루살렘이 다시 순례성지로 떠오르는 계기를 교회의 첫 보편공의회였던 니케아 공의회(325년)가 제공했다. 황제로서 공의회를 소집했던 콘스탄티누스는 주요 논제와 무관하게 마카리우스 주교로부터 예루살렘의 실태를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마카리오스 주교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한 성지인 예루살렘이 이름조차 잃었으며 반듯한 성전도 없는 비참한 현실을 보고했다. 이에 황제는 그에게 예루살렘에 그리스도교 성전을 건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 황제의 모후인 헬레나 황후의 순례와 눈부신 활동이 더해져 예루살렘은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5대 교구의 반열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예루살렘에는 예수의 탄생과 승천을 기념하는 장소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리스도 무덤 위에 아나스타시스 대성전이, 해골산에는 순교자기념성당이 세워졌다. 그리스도의 유년기 및 공생활과 연관된 유적지들도 순례지가 되었고, 구약과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는 순례도 시작되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승천하신 예루살렘뿐 아니라 베들레헴과 나자렛 등도 주요 순례지점에 포함되었다. 당대의 예루살렘 순례는 골고타 언덕과 성모교회, 라자루스의 무덤 교회, 예수탄생 교회에서 진행된 전례와 정해진 시간의 기도 등으로 구성되었다고 보인다.

 

한편, 이 시기에 확장된 순례 영역과 급격하게 가열된 순례 열기는 교도권 경계 등의 불을 밝히게 했다. 성지순례가 제기한 문제는 특정 장소에 특별한 구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에 따르는 신학적 문제와 당대의 순례자들에게서 발견되었던 구복적인 순례신심에 대한 교정의 필요성이었다. 후자의 예수는 순례를 권장하였던 예로니모조차 잘못된 순례신심을 지적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신앙의 열쇠는 특정 장소에 있지 않고, 올바른 행동에 있으며, 순례는 예루살렘을 찾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곳을 거쳐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무슬림의 예루살렘 정복과 성지순례

 

예루살렘 성지는 6세기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안정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무슬림이 639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 십자가 운동이 시작되는 1099년까지의 기간 동안 예루살렘은 순례하기 어려운 성지로 되돌아갔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예루살렘의 성지순례자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9세기에 산티아고 성지순례가 급부상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로마는 각 지역의 순례자를 칭하는 Iacobipeta와 Romeseeker라는 신조어까지 사용될 만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순례지의 양대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야고보 성인의 스페인어 이름은 티아고였고, 영어식 이름은 제임스였기 때문에 이런 용어들이 생겼다. 중세 시대의 주요한 순례성지는 이 두 지역 이외에 켄터베리 성지와 투르의 성 마르텡 무덤, 그리고 예루살렘 등이 있었다.

 

중세 시대의 성지순례 열풍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교회가 성지순례에 전대사를 부여하면서 성지순례는 신자들의 일생 소망이자, 대화의 중심소재가 되었다. 죄를 씻기 위한 순례와 기도를 위한 순례, 성지에서 발견하거나 판매하는 유해 · 유물을 얻기 위한 순례 등 다양한 동기들이 순례 열기의 불을 지폈다. 성지순례를 인증하는 증서를 사고파는 일이 횡행했고, 순례지 방문 배지와 순례의복이 유행하게 되었다. 교회는 예루살렘 성지 복원의 열망이라는 기름을 부어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고 성지순례 열풍을 정점으로 이끌어가는 견인차가 되었다.

 

십자가 운동(또는 원정)은 오랫동안 지속된 예루살렘 순례단을 향한 무슬림들의 박해와 약탈에 대한 반발이 그 시작점에 놓여 있었다. 교회는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보상으로 천국으로 가는 사다리를 얻을 수 있다고 설파하며 신자들 마음 안에 예루살렘 탈환의 소망을 키워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르바노 교황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거닐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획득해준 거룩한 땅을 다시 빼앗기를 원하신다.”고 한 감동적인 연설이 십자군 운동의 방아쇠를 당겼다.

 

십자군 운동은 교회쇄신의 일환으로 이전까지 진행되었던 청빈 운동과 더불어 일어났다. 당대의 참여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없는 위험과 고생을 이기고 예루살렘을 순례함으로써 구세주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함께 지고자 했다. 이때부터 순례를 나타내는 단어 필그림(pilgrim)은 종교적 목적을 가진 여행의 의미로 분명하게 사용되었음을 주목할 만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십자군 운동은 교회뿐 아니라 서구 강대국의 판도를 뒤바꾸는 데 결정적인 모티브가 되었다. 많은 희생과 문제점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던 십자군 운동이 끝난 이후에 성지순례의 열기도 이전보다 많이 사그라들었다.

 

 

십자군 운동 이후 성지순례

 

십자군 운동 이후, 성지순례는 교회 전례력과 맞물리며 신앙의 정수로 다가가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성 필립보 네리가 제안한(1553년) 성 목요일부터 시작되는 7개 성지순례 프로그램이 그 예로 제시될 수 있다. 이후, 종교개혁을 겪으며 더욱 냉각된 성지순례 열기는 먼 나라에 가는 여행적 의미의 순례보다 영적 여정을 의미하는 ‘십자가의 길’ 즉, ‘14처 기도’를 강조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특정 국가들의 신앙이나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한 특별한 순례가 다시 성행하게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루르드, 파티마, 과달루페, 아시시, 몬세라트, 나가사키 성지 등이 이때 이후부터 부상된 성지의 예로 제시될 수 있다.

 

이처럼 성지순례는 순교자 공경의례, 성화상과 유해공경 등 다른 사례와 같이 역사의 소용돌이와 대중 신심의 열기와 맞물려 성장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구복적이고 미신적인 신심 양태도 나타났고, 인류사의 굴곡에 깊숙하게 개입된 양상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순교자 공경의 방편으로서 시작된 성지순례는 교도권의 가르침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인 예수 그리스도와 전례로 수렴되었음을 확인했다. 교회는 특정 지역의 특별한 능력을 믿으려는 신심을 지양하고, 성지와 순례의 의미를 분명하게 선언했다.

 

교회 가르침에 따르면, 최고의 결정적인 성전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제자들의 공동체는 주님께서 머무시는 새로운 거처가 된다(<대중 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원칙과 지침>, 262항). 또한 교회는 성지를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구원 현존을 보여주는 표지로서 천상 도성으로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이 순례 여정을 계속하는 데에 필요한 새로운 힘을 얻는 휴식처로 제시한다(<순례지 – 살아계신 하느님을 기념하며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예언의 자리>).

 

각종 특별기도가 난무하는 시대에 한국교회의 성지순례를 돌아본다. “신앙의 열쇠는 특정 장소에 있지 않고, 순례의 종점은 삶의 자리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곳에 있다.”는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이 바람처럼 귓가에 다가온다. 우리의 성지순례가 자기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현존과 구원을 증거하는 자리로, 곧 성지로, 변화시키겠다는 다짐을 발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교회와 역사, 2018년 8월호, 권영파 베아트리체(순교영성연구소 연구원)]



2,94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