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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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자기 자신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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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16 ㅣ No.1062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나만을 위하는 마음 벗어던지고 주님에게로

 

 

찬미 예수님.

 

여러 주에 걸쳐 다루었던 가치와 욕구, 그 둘 사이의 긴장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어떠세요? 욕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싫어하는 것을 하는’ 나의 모습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셨나요? 누구나 신앙인으로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성숙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일 텐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욕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욕구라는 것이 드러나게 우리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교묘하게 다른 이유들로 포장된 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왜 그런지 이유를 잘 알지 못하면서 자꾸만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의식 성찰을 통해서 내 안에서 움직이는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이 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겸손’의 참된 의미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도 ‘겸손이란 진리 안에 사는 것’(「영혼의 성」, 제 육 궁방, 10,7)이라고 말씀하시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숨기면서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가 좋아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모습(욕구)도 함께 있다는 것, 그 모습도 ‘나’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인정하는 것이 겸손의 참 의미라는 말씀입니다. 겸손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사실 겸손이 아니라 겸손의 결과입니다. 근본적으로 나 중심으로 움직이려고 하고, 그래서 그 욕구를 따라 자꾸만 죄로 기울어지는 자기 모습을 제대로 알게 되면 스스로를 낮출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아는 것은 생략한 채 겉으로만 자신을 낮추려고 한다면, 과연 이런 모습을 참된 겸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처럼 내 안에 나 중심의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에만이 우리는 그 반대의 방향, 곧 너 중심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해야 그 아픈 이유가 뭔지를 찾고 낫게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어떻게 나 중심으로 움직이는지를 알아야만 그 행동을 따르지 않을 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여정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이 여정을 전체적으로 비춰주는 예수님의 말씀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말씀이었는지 기억하세요? 네, 바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 안에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도 말씀드렸지요. ‘자신을 버리는 것’ ‘제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먼저 ‘자신을 버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것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이 듣고 또 말하는 내용이죠. 그런데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고 계십니까? 자기 자신을 어떻게 버리고 계세요?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소유한 돈이나 물건일 수도 있고 시간이나 노력과 같은 비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다 버리는 것, 그래서 정말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먼저 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나의 시간과 노력을 그 사람을 위해 쓴다는 것도 언제나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또 사실은 늘 좋은 모습도 아니죠.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자기 자신을 버리시겠습니까?

 

그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생각이나 의견을 고집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복음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일이라면 나의 의견을 고집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모습입니다. 특히 나의 이익과 상대의 이익이 서로 대치될 때, 예를 들면 하다못해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상대방과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서로 다를 경우,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나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는 모습이죠.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로 내 몸을, 내가 가진 것을, 내가 소유한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를 위하고 싶은 마음, 나에게 집중하게 되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만 나도 모르게 나 중심으로 움직여가는 마음들, 그 마음을 부추기는 욕구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 중심의 욕구를 따라가지 말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제가 너무 당연한 말씀을 드리고 있죠.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영의 차원에서의 움직임, 삼위일체 하느님의 움직임 그리고 성부와 성자, 성령 세 위격의 고유한 활동 안에서의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너 중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너 중심으로 살아가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나 중심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전제인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버리는 모습의 훌륭한 예를 우리는 바오로 사도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께서 말씀하시죠.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19-22) 내가 중심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삶, 곧 자기 자신을 버리는 너 중심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떠세요?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이제 조금은 더 쉽게 느껴지시나요?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1월 12일, 민범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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