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 (8) 창세 12,1-9에서 본 출가(出家)와 가출(家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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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07 ㅣ No.533

[레지오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斷想) (8) 창세 12,1-9에서 본 출가(出家)와 가출(家出)

 

 

‘출가’(出家)와 ‘가출’(家出)은 똑같은 한자를 앞뒤로 바꾸어 쓴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그 뜻은 완전히 다르다. 출가는 어떤 큰 뜻을 목적으로 하여 집을 떠나는 것이고, 가출은 다만 집을 나가는 것에 목적이 있다. 출가는 내적 자유를 위해 세속적인 인연과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집을 떠나는 것이기에 종교적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가출은 어떤 문제나 짐을 벗어버리려고 집을 나가는 것이기에 도피적인 의미가 강하다.

 

창세기는 그 내용상 구조로 볼 때, 원역사(1-11장)와 성조사(12-50장)로 구분된다. 원역사를 끝내면서 노아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면서 약속하셨던 하느님께서 이제는 구체적인 인간 아브람을 불러 새로운 약속을 이루시고자 하신다(창세 12,1-9). 원역사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부터 시작되어 세상을 완성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다. 이러한 아름다운 질서가 깨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래 최초의 살인인 폭력이 등장하고 결국 원역사는 6장에 이르러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고 고백한다.

 

인간의 선한 의지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게 되는데, 이것이 노아의 홍수이다. 곧 세상의 멸망, 종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 땅과 새 하늘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담겨 있다. 곧 새로운 질서를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시작이 바로 아브람의 부르심이었다.

 

아브람은 단지 하란에 몸 붙여 살고 있는 한 떠돌이 메소포타미아 인에 불과했다. 그의 아버지 테라 집안은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11,31) 우르를 떠났다가 하란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테라가 죽었다(11,32). 이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새로운 삶을 위해 하란을 떠나라고 하신다. 아브람은 테라에게서 나왔지만, 그의 새로운 삶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다(12,1).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장차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길 떠나는 사람에게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정해주신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더 이상 떠도는 유목민이 아니라 목적지를 알고 떠나는 순례자가 된다. 유랑?방황과 순례는 둘 다 일정한 곳에 정착하기를 거부하지만, 전자는 목적과 방향 없이 떠나는 것이고 후자는 목적과 방향을 뚜렷이 가지고 떠나는 것이다. 그 방향과 목적도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곳이어야 한다. 그래서 아브람의 집 떠남은 단순한 가출(家出)이 아니라, 뚜렷한 방향과 목적을 지닌 출가(出家)이다. 출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떠남은 전적으로 다른 존재에 온전히 내맡기는 일

 

하느님께서 비록 가나안으로 떠나라고 행선지를 밝혀 주시지만 이 가나안이라는 땅에서도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스켐(12,6)에서 산악지대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베텔과 아이가 보이는 곳(12,8)으로 갔다. 그래서 아브람은 가나안에 도착하여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네겝 쪽으로 이동했다고 전한다(12,9). 이처럼 떠남은 알 수 없고 전적으로 다른 존재에 온전히 내맡기는 일, 믿음의 행위로 바뀐다. 믿음은 머리와 입술을 넘어 이제는 몸으로 구현된다. 사실 아브람은 평생 옛집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끝끝내 나그네로 살았다. 말씀에 따라 떠돌 뿐이었다.

 

주님의 약속은 말씀뿐, 어떠한 표징도 없었지만 아브람은 주님께 감사와 경배의 뜻으로 자신이 가는 곳마다, 또 머무는 곳에 제단을 쌓아 주님께 바쳤다(12,7.8). 이 땅이 주님의 땅이라는 뜻이다(1사무 14,35). 이러한 아브람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어주셨던 첫 부르심과 응답, 그리고 자신의 서원과 서약을 늘 상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도직 소임을 하기 위해 머무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간에 우리 또한 아브람처럼 잠시 삶이 머무는 곳에 마음의 제단을 쌓는 경신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란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다른 한편 축복을 동반한다. ‘복’이라는 단어가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오면서 그 범위가 점차 넓어진다(12,1-4). 처음에는 아브람에게만(2절), 이어 그에게 축복하는 사람에게(3ㄱ절), 끝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 한 처음과 대홍수 이후 하느님의 복을 받은 뒤(1,28; 9,1.7) 다시금 하느님의 복이 약속된다. 마치 새로운 창조를 약속하시는 것 같다. 복을 받아야 생명체가 창조 질서에 따라 창조된 본성대로 살 수 있고 자기 안에 깃든 잠재성을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복이 그에게만 머물지 않고 그를 통해 주변으로, 온 땅으로 흘러 넘쳐야 한다. 그것이 복을 받은 이의 책무이기도 하다. ‘자기’ 안에, ‘우리’ 안에 복을 가둬 놓고 누리기만 하려 할 때 그것은 화로 변한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복이 궁극적으로 온 땅에 충만해지리라는 약속은 저주와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사에 복음으로 선포된다.

 

아브람은 75세에 길을 떠났다(12,4). 그에게는 현재에 안주할 수 없는 어떤 내적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게 나의 삶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내적 갈망. 어쩌면 75년 인생을 살았어도 충만함을 체험할 수 없었던 아브람은 비로소 하느님의 부르심인 그 길을 걸으며 진정 자신이 가야 할 길, 걸어야 할 길을 가야 한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그가 말씀을 듣고 그에 응답하여 따른 그의 발걸음은 실로 인류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다. 아브람의 ‘떠남’은 생명과 자유의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순례 여정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 상태로 시간을 계속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영원과 연결시키는 부르심에 복종할 때 자신의 참된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신앙을 선택한다는 것은 복음에로 출가하는 것

 

앞서 출가는 단순히 살던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거룩한 열정이 담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집을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출가를 했다고 해도 어느 순간 또 다른 집을 짓고 그곳에 안주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 살던 집은 떠났지만 어딘가에 다시 집을 짓고 거기서 머무르려는 순간부터 출가는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출가는 단 한번 ‘집’(家)을 나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이 안주하려 하고 집착을 가지는 데서 빠져 나오고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그저 가출한 사람이 되고 만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집을 나왔을 때가 아니라, 주님 부활 이후 온전히 그 진리에 투신할 때에 이루어졌다.

 

신앙을 선택한다는 것은 굳이 사제나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복음에로 출가를 하는 것이다. 집이 있고 가족이 있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가치대로 산다면 그는 출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출가인(出家人)이라 해도 그가 여전히 세상 것에 대한 온갖 번뇌와 집착에 사로잡혀 고집을 부리고 있으면 그 모양새만 추해진다. 그것은 출가했다는 것을 빙자해서 더 추한 욕심과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때로 어떤 이에게는 여전히 가족에 대한 집착이, 또 어떤 이에게는 사람이나 재산에 대한 소유의 집착이, 더러는 명예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서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관계가 방해를 받는 수도 있다.

 

사람(人)의 행위(爲)를 한자로 합쳐놓으면 참 재미있는 글자가 된다. 거짓 위(僞), 곧 ‘속인다’는 뜻이다. 사람이 무엇을 행할 때, 그 자신마저도 깜빡 속을 때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선인들의 지혜와 경고가 아닐까 한다.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비일비재한 것 같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8월호, 이동훈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상설고해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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