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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인간과 세상: 영화 사일런스 - 주님의 침묵, 침묵이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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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11 ㅣ No.1016

[영화 속 인간과 세상] 영화 ‘사일런스’ - 주님의 침묵, 침묵이 아님을

 

 

드라마, 2017.02.28., 15세 이상 관람가, 159분, 감독 마틴 스콜세지

 

 

침묵한다고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은 것인가

 

“주님, 저는 어찌하면 됩니까?”

 

고통과 절망에 빠졌을 때,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그 간절한 기도가 주님께 닿아 구원받고, 길을 찾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주님은 응답하지 않고, 침묵한다. 심지어 당신의 자식인 예수님에게까지도.

 

그런 주님을 향해 우리는 “당신은 정녕 계시는 것입니까?”, “당신이 바라는 세상이 이런 것입니까?” 하고 원망한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도 울부짖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그러나 침묵한다고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은 것인가. 발자국이 없어졌다고 나와 함께 걷다가 사라진 것일까. 뚜렷한 음성으로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나를 버린 것일까. 침묵 속에 이미 답은 있고, 가버리신 것이 아니라 나를 업고 걸어가시고, 길은 이미 자신의 신앙 속에 있음을, 우리는 그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안다. 그래야 하느님의 복음을 진정 깨닫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기 위해, 그 가치의 숭고함을 참혹하게 증명하기 위해 어쩌면 하느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순교와 박해’란 시간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부터.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의 침묵을 알았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까지 받아들이려는 주님의 기다림임을. 그것을 알게 된 예수님은 “아버지시여, 저의 생명을 바치오니 아버지의 의노(義怒) 대신에 인간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소서.”라고 간구했다.

 

순교와 박해. 이 두 수난의 역사가 없었다면 진정 하느님의 복음이 이 세상이 널리, 그리고 이토록 오래, 그리고 영원할 수 있었을까. 그 자체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지만, 그 비극 속에서 주님은 침묵했고, 그 침묵으로 주님의 존재는 더욱 분명해졌으며, 침묵은 침묵이 아니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순교로 그것을 증언했고, 이를 부정하는 인간들은 박해로 그 두려움을 표현했다. 그러나 늘 승리는 박해가 아니라 순교였다.

 

어느 곳이나 주님을 부정하고, 두려워하는 눈먼 자들은 있었다. 그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고,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는 자들이었다. 구한말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앞서 일본도 그랬다. 그곳에서도 주님의 복음을 막으려는 자들의 끔찍한 박해와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맞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아름답고 지고한 순교의 역사는 있었다.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비록 일본이 과거 역사에서 우리에게 저지른 과오가 크다 할지라도 이것까지 폄하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주님의 역사이고, 잊지 말아야 할 복음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목숨을 걸고 선교에 나선 이방인 신부가 있었고, 로마의 카타콤 같은 컴컴한 지하에서 지옥 같은 현실에서 구원해 줄 주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는 바로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원작인 일본의 엔도 슈사쿠의 소설 제목 역시 <침묵>이다. 천주교 박해가 절정에 달했던 17세기 두 포르투갈 선교사의 이야기를 통해 결코 우리보다 덜하지 않은 일본의 순교의 역사를 보여준다.

 

다만 우리와 다른 것은 일본은 처음에는 천주교의 전파가 쉬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한 16세기 중반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일본 막부는 천주교도 그 하나라고 생각해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신자수도 30만이 넘을 정도였고, 지방의 한 다이묘는 전체가 천주교를 믿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면서 탄압은 시작됐다. 핍박에 시달린 백성들이 천주교를 점점 더 믿게 되자 위기감을 느껴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내리고, 거센 탄압과 박해로 돌아선 것이다.

 

<사일런스>에서 예수회 신부인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는 동료인 가루페(아담 드라이버)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에서도 박해가 가장 심했던 나가사키 지역으로 몰래 들어간다. 앞서 파견되었지만 연락이 끊긴 지 오래인, 신앙의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를 찾아서 만약에 소문대로 배교(背敎)를 했다면 영혼을 구해주려고 했다.

 

그들이 도착한 일본은, 수천 명의 신자들이 참수당한 뒤 배교를 하고 오카다 산에몬으로 개명해 일본인 아내와 사는 스승 페레이라가 말한 대로 ‘나무가 절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늪과 같은 땅’, ‘검은 땅’이었다. 그 속에서 로드리게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숨어서 신앙을 지키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경탄하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묵주알을 나눠주고, 세례와 미사를 봉헌하는 일을 위태위태하게 수행해 나간다.

 

그러나 믿음과 사명감이 더 없이 굳은 로드리게스도, 상금까지 걸고 신자를 밀고하게 하고, 적발된 신자들에게 끔찍한 박해를 가하는 참상 앞에서는 절망하고 신음한다. 그는 “이들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주님은 왜 이들을 선택했습니까?”라고 하느님에게 묻는다. 자신을 일본 땅에 밀입국시켜 준 길잡이로, 유다와 같은 때론 돈을 위해, 때론 자기만 살기 위해 배신을 밥 먹듯이 반복하고는 그때마다 자신에게 나약함과 의심에 용서를 구하는 기치지로에 분노하면서 “예수님이라고 해도 이런 인간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묻는다.

 

<사일런스>는 지옥 같은 현실보다 좋은 천당에 가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하는 신자들, 그들과는 정반대로 생존을 위해 후미에(성화밟기)를 서슴지 않는 유약하기 그지없는 기치지로, 믿음과 절망 사이에서 끝없이 고통스러워하며 다른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스승인 페레이라가 그랬던 것처럼 배교를 선택하는 로드리게스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너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

 

결국 다른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를 선택하려는, “저들의 목숨을 저에게 맡기지 마세요.”라고 울부짖는 로드리게스에게 긴 침묵을 깬 주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가장 고통스런 사랑의 실천이다. 어서 하여라. 괜찮다. 나를 밟아라. 너의 고통을 안다. 너와 함께 가려고 십자가를 졌다.”

 

평생을 절망과 굴욕,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로드리게스를 끝까지 옆에서 지켜준 사람은 다름 아닌, 마지막에 성화를 몰래 지니고 있다가 끌려가는 기치지로였다. 순교한 신자 모키치가 만들어준 작은 나무십자가를 끝내 버리지 않고 손에 쥐고 천국으로 간 로드리게스는 배교자가 아닌 영혼의 순교자였다. 그들 모두의 믿음은 죽지 않았다. 그 어떤 박해와 죽음, 그로 인한 배신과 절망도 믿음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것을 알기에 주님은 우리의 절규와 호소에도 침묵한다. 아니 침묵한 적이 없다. 우리가 듣지 못할 뿐. “네가 가려고 하는 길을 가거라.”

 

[평신도, 2017년 여름(계간 56호),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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