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하) 구원 역사 시작된 땅에서 울려퍼지는 희망의 약속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96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하) 구원 역사 시작된 땅에서 울려퍼지는 희망의 약속


예수 탄생 예고 됐던 성모영보성당서 구원 의미 묵상

 

 

(위)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잉태 계시를 받은 성모영보 동굴. (아래) 스페인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고 있는 성모영보성당 2층 대성당. 

 

 

흔히 누군가를 지칭할 때 그의 고향을 수식어로 붙이곤 한다.

 

‘그 사람 서울 사람이지?’, ‘전라도 양반 ○○○’ 식. 그렇다면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이다. 성경은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2,23),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마태 21,11),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루카 2,39)이라고 전한다. 또한 나자렛은 성모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기 예수를 잉태하리라는 말을 전해들은 곳이기도 하다. 구원의 역사는 나자렛에서 시작됐다.

 

갈릴래아 호수를 벗어나 차로 30여 분. 나자렛에 다다랐다.

 

나드는 버스와 차들로 혼잡한 도심 한복판. ‘마리아의 샘(우물)’에 들렀다.

 

2000년 전 이곳에도 마을이 있었고 우물이 있었다. 어느 날 처녀 마리아도 물을 길어 오기 위해 우물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아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깜짝 놀라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간다.

 

사실 이 이야기는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전이다. 그리스 정교회는 마리아의 샘이 예수님 탄생 예고의 장소라 여긴다. 우물에서 불과 100여 m 떨어진 곳에 그리스 정교회의 성모영보성당인 ‘가브리엘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복음(루카 1,28)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 사건이 마리아의 집에서 이뤄졌다고 적고 있다.

 

우물을 뒤로 하고 멀리 보이는 마리아의 집, 성모영보성당으로 향했다.

 

마리아가 놀라 집으로 뛰어갔을 그 길을 다시 걸어가는 셈이다.

 

성모영보성당(Basilica of The Annunciation)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장소에 걸맞게 웅장하다. 성당 전면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복음사가들의 거대한 조각을 바라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1층 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집인 성모영보 동굴이다.

 

- (왼쪽) 성 요셉 성당 지하 경당에 설치된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약혼 모습을 담은 스테인드글라스. (오른쪽) 성모영보성당 2층 대성당 입구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

 

 

‘마리아의 집은 동굴이었구나.’

 

2층 집 창문으로 천사가 날아 들어왔을 것이라는 상상이 단번에 깨진다. 최대한 절제한 조명과 어둡기까지 한 성당 전체의 모습이 거룩함을 더한다. 순례자들을 따라 동굴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천사가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마리아가 답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0-38).

 

말씀 묵상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미사 시작을 알리는 입당성가가 울려 퍼진다. 스페인 순례자들의 미사다. 성가소리를 좇아 2층 성당으로 오른다.

 

1층 성모영보 동굴 성당과는 다른 분위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성당을 한층 밝게 만들어준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주인공은 성모 마리아를 공경했던 교부들과 성인들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성당 옆면에는 세계 각국의 성모자상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의 화려함은 천장과 제대 뒤 모자이크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붕의 둥근 천장은 백합꽃 모양. 성모님을 상징한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백합꽃의 모양을 머금고 내려오는 모양새다. 제대 뒤편을 가득 채우는 느낌의 대형 모자이크에는 성 베드로부터 1964년 이곳을 방문한 교황 바오로 6세까지 교황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성당 중앙에서는 1층 성모영보 동굴을 내려다볼 수 있다. 예수님의 잉태 역사가 담긴 성지를 바라보며 미사를 봉헌하는 은총은 다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다.

 

마리아가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을 그 때, 약혼자 다윗 사람 요셉은 어디 있었을까. 목수인 그가 살고 일하던 곳은 성모영보 동굴에서 불과 100여 m 떨어진 곳에 있다. 성모영보성당 구내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이렇게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이웃사촌이었던 셈. 요셉의 작업장이었을 것이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공생활 이전까지 살았을 그 자리에 지금은 ‘성 요셉 성당’이 있다.

 

제대 위 성가정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다. 성당 양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성 요셉의 작업장과 물 저장소, 비잔틴 시대의 세례 터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1954년부터 11년 동안 발굴된 것이다.

 

지하 경당 스테인드글라스에 서 찬찬히 살펴본다.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마태 1,20-21), 요셉과 마리아의 약혼, 예수님과 마리아가 부축하고 있는 요셉의 임종 모습이 담겨 있다. 성당의 이름처럼 지하 경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일생을 압축해놓고 있다.

 

고향 나자렛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가 군중에게 쫓겨 오른 추락산. 나자렛이 한눈에 보인다.

 

 

다시 성모영보성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성당 밖 회랑에는 전 세계 각국에서 만들어 봉헌한 성모자상이 자리하고 있다. 말과 글, 피부색, 전통이 각기 다른 많은 나라 사람들은 이곳에 살았던 성모 마리아를 자신들의 성모님으로 바꿔놓았다. 키도 피부색도 옷차림도 다른 성모님이지만 그 안에는 같은 성모신심이 깊숙이 배어있기에 회랑을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한복을 입은 성모마리아와 색동옷으로 치장한 예수님이 순례자를 반긴다.

 

나자렛 남쪽 추락산(Mount of Precipice)에 올랐다. 해발 397m의 야트막한 산이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뤄졌다’(루카 4,21)며 안식일 나자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예수님에게 군중들은 화를 낸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기껏해야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며 군중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벼랑으로 끌고 갔다. 그 벼랑이 바로 추락산이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마르 9,2-10)가 이뤄진 타보르산과 그 뒤로 이즈르엘 평야가 펼쳐져 있다.

 

해가 진다. 순례를 마치며 이제껏 친구 삼았던 신약성경의 끝자락을 되새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있음을 나자렛을 한눈에 담으며 생각해본다. 순례 첫날처럼 내일도 분명 갈릴래아 호수에서는 세상을 밝게 비춰줄 해가 떠오를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9년 10월 25일, 갈릴리(이스라엘) 이승환 기자]



1,41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