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강론자료

요한복음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다 (2017. 6. 4. 성령 강림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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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6-02 ㅣ No.2173

 

주간 첫날 늦은 저녁에 제자들은 함께 모여 문을 잠그고 있었다. 유대인의 관리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가 와서 그들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말을 한 후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예수가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보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하였다. “성령을 받으시오. 여러분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들은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날로서 하느님과 제자들이 협력하여 새로운 창조사업을 시작하는 사건을 상징한다. 이에 관련하여 앞의 빈 무덤 (20:1-10)’의 기사를 참조하면 복음 저자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요한, 베드로가 빈 무덤을 발견한 때는 이른 아침이었고 무덤의 문은 열려 있었으며, 그들은 보고 믿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늦은 저녁이고, 그들은 방문을 잠그고 있으며, 백성의 지도자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성령의 지혜는 희망, 생명, 믿음을 낳는데 사람의 지혜는 절망, 죽음, 공포를 낳는다. 이로써 하느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예수는 의심하는 제자들의 가운데에 서 있다. ‘가운데(among)’는 의심으로 말미암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의심은 공동체를 와해시킨다. 예수는 제자들 개개인의 깨달음과 더불어 다가온다. ‘있음은 영적인 생명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하루 종일 세상과 겨루다가 지쳐 있는데 권력자들에 의해 목숨마저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이때 예수는 그들 개개인에게 다가와서 그들이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그들을 이끌고 하느님에게 돌아와 있다.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맞닥뜨리자 함께 모여하느님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의 바람에 호응하여 하느님께서는 메시아 예수를 보내주신 것이다. 죽음의 공포 자체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지만 그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면 그분께서는 반드시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생명의 위로를 주신다. 예수는 영적인 생명에서 오는 평화로 제자들을 뒤덮었던 죽음의 공포를 거두어낸다.

 

은 성령의 지혜를, ‘옆구리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상징한다. 손과 옆구리에 있는 상처는 예수가 실천하는 신덕과 애덕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상을 사랑하는 예수는 세상으로부터 모욕과 고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기쁨으로 가득찬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살아있음을 알고 그와 동시에 자신들 또한 살아있음을 알고 기쁘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이 그 기쁨에만 머무르지 말고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에도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주는 평화는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입게 될 사랑의 상처를 치유한다. 아버지께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에 예수는 세상으로부터 모욕과 고통을 받아들인다. 예수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 그들도 스승처럼 모욕과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의 위로를 받는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바로 그 평화를 제자들에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평화는 참되며 영구적이다.

 

은 성령을 상징한다. 예수의 행위는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영적 인간으로 창조하고 계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주 하느님께서 대지로부터 흙을 조금 집어 그것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창세기 2:7) 영적 생명을 주는 것은 성령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어주고, 제자들은 예수의 성령을 세상 사람들에게 불어 넣어준다.

 

망은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낳는다.(야고보서 1:15) 욕망은 허상이므로 죄 또한 허상이다. 사람의 지혜는 욕망과 죄를 살아있는 실체로 착각한다. 그래서 소위 지혜로운 사람들은 욕망을 단속하고 죄를 징벌하기 위하여 계율, , 도덕, 윤리, 권력, 전쟁 등의 수단에 호소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노력은 또 다른 욕망과 죄를 낳을 뿐이다.

 

영적 자아는 사람의 지혜와는 관계없이 이미 죄를 벗어나 있다. 그는 죄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그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한다. 이것이 예수가 가르치는 용서이며 사랑이다. 죄가 허상임을 아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 이외에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다른 이는 이 세상에 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책무를 주고 있다. 남을 용서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랑의 상처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지만 그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육정의 괴로움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가르치는 용서와 사랑은 느긋한 강자의 아량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남이 자신에게 잘못한 것을 덮어주는 것으로는 아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그런 식으로 용서하는 사람은 아무 근거도 없이 자존망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용서를 받는 사람 또한 죄책감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강자가 약자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거래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약자로서 남에게 용서를 받기보다는 강자가 되어 남을 용서하고 싶어 한다. 약자로서는 시세부득이기 때문에 감사히용서를 받는 것뿐이다. 이런 종류의 용서도 당장에는 평화를 가져오지만 이런 평화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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