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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22: 5세기 (3) 아우구스티누스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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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1 ㅣ No.93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2) 5세기 ③ 아우구스티누스 영성


하느님 향한 여정, 사랑의 발걸음 멈추지 말아야

 

 

- 암브로시우스.

 

 

오늘날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를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이자 서방 교회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기억합니다. 만약 조금 더 아는 사람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가 한동안 마니교 신도로서 방황했지만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Ambrosius Mediolanensis, 339~397) 대주교의 강론에 감화돼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자로서 수도 생활을 실천하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짧은 시간이지만 수도 생활을 실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수도 규칙서도 저술했습니다. 본격적인 영성 작품을 남기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 작품들 속에서 끊임없이 영성 생활에 대한 성찰을 시도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빈한 공동체 수도 생활을 갈망

 

387년 세례를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족 및 몇몇 지인들과 함께 밀라노 근교에서 1년여간 고요한 은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전에 그리스도교 수도 생활을 접할 기회가 없었으며, 개종할 즈음해서 밀라노 근교에 금욕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근교에서 금욕 생활을 하던 사람들과 잠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방 교회 수도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388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집을 개조해 지인들과 공동체를 이뤄 수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청빈 생활을 기초로 했던 이 공동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금욕 생활과 함께 연구 활동에도 매진했습니다. 하지만 인근 지역 사람들이 수도 생활에 방해된다고 판단한 아우구스티누스는 391년 히포로 이주해 수도 생활을 계속하고자 했으나, 뜻하지 않게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의 배려로 작은 정원 안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지인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396년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의 주교가 됐으나, 역시 수도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구 사제들을 불러 모아 주교관에서 수도 공동체를 조직하고 수도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여러 수도 공동체를 설립했으며, 수도 규칙서도 저술함으로써 고대 서방 교회에서 수도 생활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수도 생활의 핵심은 애덕 실천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날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Regula Sancti Augustini)」라고도 하는「계명집(Praeceptum)」을 저술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 생활이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하는 초기 공동체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수도 생활을 공동체 생활 안에서 서로 친교의 삶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도 수도 생활을 위해서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 삼덕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는 수도 생활에 대한 규정을 자세하게 언급하기보다는 공동체 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본질적인 요소들을 강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복음 말씀의 핵심인 애덕을 수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겼습니다. 즉, 애덕 실천을 통한 수덕 생활이야말로 수도 생활의 정수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는 훗날 주교좌 성당에 속한 ‘의전 사제단(Chapter of Canons)’ 공동체 생활의 근간이 되었고, 공동생활 속에서 청빈을 실천하는 수도 생활뿐 아니라 성직자로서 사목적 직무도 함께 수행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인 ‘의전 수도회(Canons Regular)’가 설립되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이외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규칙서를 여성 수도자들에게 적용한 「서간」을 저술했으며, 그의 친구이자 수도자인 알리피우스(Alypius)가 저술한 「수도원 규정서(Ordo Monasterii)」에 서언과 결어를 첨부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역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언급하면서 수도 생활의 중심이 사랑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삼위일체 신비의 깨달음을 통한 신비체험

 

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서방 교회에서 신비체험을 언급한 중요한 인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저서 「고백록(Confessiones)」에서 어머니 모니카와 오스티아에서 함께 신비체험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제9권 제10장 참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신비체험에서 경험한 황홀 상태와 지복 상태를 상세하게 설명했으며(제7권 제17장; 제10권 제40장 참조), ‘영혼의 상승’ 개념도 활용했습니다.(제10권 제6장~제8장) 아울러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기억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제10권 제25장. 제27장)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저서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신비신학을 내비쳤습니다. 후반부인 제8~15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이성적인 영혼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상승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창조된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성찰하는 과정을 밟아간다면, 차차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나면서 인간 영혼이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제14~15권 참조) 따라서 인간 마음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모상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넓혀나갈 때에 하느님과 함께 거룩해질 수 있고, 하느님 모상이 완성될 때에 인간은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제14권 제17장 참조)

 

아우구스티누스는 저서 「신국론(De civitate Dei)」 끝 부분에서 ‘지복직관’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했습니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평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최고 경지에 있는 평화를 이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구원을 경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공간의 제약이 없는 비물질적인 사물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인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하느님을 뵐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제22권 제29장 참조)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단계의 사랑, 상당히 진보한 사랑, 매우 큰 사랑, 완전한 사랑이라는 네 가지 단계를 언급하면서, 단계별 발전을 위해 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잠시라도 쉬고 있으면 뒤로 퇴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비신학은 오늘날 ‘사랑-신비신학’으로 불립니다. 그만큼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성 한가운데에 사랑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30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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