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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평신도 사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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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5 ㅣ No.53

[공의회 강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평신도 사도직 (1)

 

 

이 글은 ‘가톨릭평화신문’과 월간 ‘레지오 마리애’에 연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평신도사도직 교령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네 번에 나누어 싣는다.

 

 

I.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움

 

21번째 세계 공의회(또는 보편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이전 공의회들과 다르다. 첫째, 공의회 소집 동기가 다르다. 이전 공의회들은 공의회를 소집해야 할 상당하고 긴급한 사유가 있었다. 이단 문제, 교회 분열, 세속 권력의 간섭 배제, 교회 생활의 폐해 근절과 규율 확립 등등.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의회 소집의 특별한 동기가 별로 없었다.

 

둘째, 공의회 결실인 문헌들의 성격이 다르다. 이전 공의회들은 교리적 측면에서 정통과 이단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이단에 대해서는 단죄했다. 또 교회 규율과 관련해서도 법적 규율이 주를 이뤘다. 이에 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6개 문헌들은 일반적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전 문헌들에서 볼 수 있는 제재나 단죄, 처벌 같은 내용들은 찾아볼 수 없다. 교리 상 오류를 단죄하고 교회 생활의 폐해를 척결하기보다 시대의 도전과 요구에 대해 하느님 말씀을 바탕으로 총체적으로 신학적 종교적 답변을 제공하려 했다.

 

이런 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새로운 공의회다. 이 새로움은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가 공의회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한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현대화’ 또는 ‘쇄신과 적응’이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는 아조르나멘토는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여 사회나 시대 상황에 적합하게 맞춰나간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 23세는 아조르나멘토를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방 안에 가득 채우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라’는 표현으로 풀이했다. 요한 23세의 눈에 교회는 정적이었고 고착화돼 있었다. 바깥세상은 변하는데 교회는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교회는 이제 오래된 공기를 갈아야 했다. 시대의 징표들을 식별하여(마태 16,3 참조) 쇄신을 이뤄야 할 때가, 아조르나멘토의 때가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었다.

 

1) 신앙 진리에 대한 이해의 새로움

 

이런 정신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선포하는 신앙 진리를 새롭게 이해했다. 진리 자체는 불변하지만 그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시대와 상황에 적합하게 적용돼야 함을 이해했다. 성경에 맛들이기, 전례의 토착화와 능동적 참여,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 참여에 대한 이해 등을 새롭게 했다. 비가톨릭교회와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접근 방식, 현대 무신론에 대한 이해와 접근 방식도 새롭게 했다.

 

2) 교회에 대한 이해의 새로움

 

공의회는 교회를 새롭게 이해했다. 이전까지 교황을 최고 정점으로 그 아래 주교들과 또 그 아래에 신부들과 부제들이 포진하고 있는 피라미드 형태의 위계적 교회관이 주를 이루었다. 공의회는 이런 위계적 교회관보다 교회를 신비체로 보면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하느님 자녀로서 똑같은 품위를 누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친교의 공동체로 이해했다.

 

3) 세상에 대한 이해의 새로움

 

공의회는 나아가 세상을 새롭게 이해했다. 이제 세상은 이전처럼 교회가 담을 쌓고 멀리해야 할 부정적 대상이 아니었다. 세상은 나름대로 질서를 갖고 있지만 그 질서는 복음 정신으로 개선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교회는 비록 현세에서 나그네 살이를 하지만 현세 질서를 하느님 뜻에 맞도록 개선하는 일은 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이 현세질서를 개선하는 일은 특히 평신도에게 맡겨져 있다. 평신도는 나름대로 교회 성장을 위해 봉사하고 협력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세속에 살면서 누룩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공의회는 이렇게 평신도에 대한 이해도 새롭게 했다.

 

※ 신학적 원리

 

여기에는 근간이 되는 신학적 원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강생의 원리였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류를 구원하시려 몸소 사람이 되신 것처럼, 교회도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과정과 결실

 

1959년 1월 25일 로마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을 마치는 예식을 집전하고 난 교황 요한 23세는 대성전 옆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추기경들에게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공표했다. 교황은 이 공의회가 ‘일치 공의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해 갈라져 나간 그리스도교 공동체 대표들도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준비 과정을 거쳐 1962년 10월 1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회했다. 전 세계 2908명 교부들 가운데 2540명이 참석한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유럽이 거의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아프리카에서 379명, 아시아에서도 300명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당시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를 비롯해 모두 9명 주교가 참가했다.

 

공의회가 1차 회기를 마친 후 1963년 6월 3일 요한 23세 교황은 82세 나이에 위암으로 선종한다. 요한 23세 후임으로 교황 직에 오른 밀라노 대교구장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 곧 바오로 6세 교황은 1963년 9월 29일 공의회 2차 회기를 개했다. 교황은 개회 연설에서 4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교회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이해, 교회 쇄신, 그리스도교 일치의 촉진, 현대 세계와의 대화였다.

 

이렇게 계속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 12월 7일까지 4차 회기에 걸쳐 모두 4개 헌장, 9개 교령, 3개 선언 등 모두 16개 문헌을 공포하고 12월 8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주례한 장엄미사로 폐막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폐막은 또한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신호다. [평신도, 2017년 봄(계간 55호), 이창훈 알폰소(서울평협 기획홍보위원장, 가톨릭평화신문 기자)]

 

 

[공의회 강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평신도 사도직 (2)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변화

1) 전례 쇄신과 하느님 말씀 강조


가장 먼저 이뤄진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전례 분야였다. 공의회의 첫 결실인 전례헌장이 반포되고(1963년 12월 4일) 난 직후 1964년 4월 한국 주교회의는 전례쇄신과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 촉진이라는 전례헌장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산하에 전례위원회를 설치했다.

전례위원회의 첫 결실은 한국어 미사였다. 주교회의는 공의회 기간인 1964년 10월 로마에서 회의를 열어 1965년 1월 1일부터 자비송, 대영광송, 독서, 복음, 신경, 거룩하시다 등 신자들이 함께 하는 부분은 한국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미사통상문’으로 지칭되는 우리말 미사는 이후 로마(교황청)의 미사경본 개정 작업에 따른 우리말 번역 작업과 수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됐다.

공의회 이전에는 제대가 벽에 붙어 있었고 사제는 성찬 전례 때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봉헌했다. 신자들은 사제 등을 바라보며 미사 전례에 ‘참석’했다. 하지만 공의회 이후 사제는 지금처럼 제대를 중심에 두고 신자들을 바라보며 미사를 거행하기 시작했다. 제대가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 있다는 것은 제대가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공동체의 중심에 모신다는 의미를 지닌다. 신자 석과 제단 사이의 난간이 치워진 것, 서서 손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 성당에서 제대를 가로지를 때 절을 하며 제대를 향해 예를 표시하는 것, 여성이 미사 복사를 서거나 평신도에게 예외적으로 성체 분배권을 수여하는 것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에 따른 변화들이다.

전례력 개혁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에 따라 이뤄진 변화 가운데 하나다. 교회가 예수 성탄과 예수 부활을 두 축으로 해서 대림시기를 시작으로 성탄시기-연중시기-사순시기-부활시기-연중시기로 1년을 전례주년으로 지낸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성인들의 축일이 중심이)었다. 공의회는 전례 쇄신을 통해 전례주년의 중심은 주님이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경축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에 따라 1969년 지금과 같은 전례력이 마련됐다.

전례 쇄신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느님 말씀 곧 성경에 관한 강조다. 공의회 이전에는 미사에서 성찬 전례가 강조됐고 말씀 전례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졌다. 이는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이 “오직 성경만으로!”를 주장한 데 맞서 가톨릭교회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성전(聖傳)과 함께 성사(聖事)를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성경을 소홀히 한 데 따른 것이다.

공의회는 전례헌장을 통해 하느님 말씀인 성경이 미사 전례에서 더욱 다양하고 풍요롭게 활용될 것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미사에서 말씀 전례도 성찬 전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이 부각됐다. 공의회는 계시헌장을 통해 하느님 말씀에 맛들일 것을 강조하면서 성경 번역은 물론 성경 읽기와 성경 보급, 성경 연구 사도직 활성화 등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에서도 성경에 대한 관심이 일고 성경 공부에 집중하는 사도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주교회의 산하에 성서위원회가 설립된 것도 공의회가 끝난 후인 1965년이었다.

전례 쇄신 운동과 성경 연구 및 보급 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부터 특히 유럽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운동들이 운동으로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변화와 쇄신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다 준 획기적 변화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공의회 이전의 교회는 한마디로 엄격한 위계 중심의 교계제도로 이뤄진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교황이 있고, 그 아래에는 주교들이, 주교들 아래에는 신부들이, 아래에는 하급 성직자인 부제들이 있다. 평신도들은 이 위계 중심의 교계제도의 지시를 받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했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교회가 모두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특히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모습은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교회관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교회헌장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공의회는 교회를 무엇보다도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했다. 세례로 하느님 자녀가 된 신자들은 비록 교회 안에서 수행하는 직무에 있어서는 성직자들과 본질적 차이가 있지만(평신도의 보편 사제직과 성직자의 직무 사제직) 하느님 백성으로서 똑같은 품위와 존엄을 지닌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교회를 친교 공동체로 보는 ‘친교의 교회’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위계 중심의 제도 교회에서 친교 공동체로 전환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대단히 크게 강조되는 소공동체 운동은 바로 공의회가 제시하는 친교 공동체로서의 교회 모습을 구현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위계 중심의 제도 교회가 틀렸다거나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계 조직이 군림하는 조직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 조직이라는 점이다.

하느님 백성인 교회, 친교 공동체인 교회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교회관은 교회 통치 혹은 운영 면에서도 변화를 가져다줬다. 우선 주교단 단체성 혹은 주교단성(主敎團性)을 들 수 있다. 주교단성이란 주교들이 교황을 단장으로 하나의 주교단을 이뤄 보편 교회(전 세계 교회)에 대해 최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주교단 단체성을 통한 최고 권력은 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하게 행사된다.

친교 교회관에 바탕을 둔 주교단 단체성을 보여주는 또 한 가지는 교회와 사회의 주요 현안과 관련해 교황을 자문하는 상설기구인 주교 시노드(주교 대의원회의)다. 주교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있었지만 보편 교회의 교회법적 기구로서 상설화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자문기구 성격을 지니지만 주교 시노드가 교회법적 기구로 존재하게 된 것은 친교 교회관에 바탕을 둔 주교단 단체성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교황은 주교들 의견을 더욱 존중해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친교 교회관을 반영하는 교회법적 기구로 오래 전부터 지역 교회 차원에서 지역 주교회의와 관구 공의회 등이 있었지만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별 교회인 교구 차원에서 이를 반영하는 교회법적 기구들이 마련됐다. 대표적인 것이 교구 사제평의회와 교구 사목평의회다.

개별 교회인 교구의 최고 목자인 교구장 주교는 교구 사제들을 대표하는 사제평의회와, 사제뿐 아니라 수도자와 평신도 등 교구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교구 사목에 반영토록 하기 위한 사목평의회를 의무적으로 두게 돼 있다. 사제평의회와 사목평의회는 물론 교구장 자문기구다. 따라서 교구장은 자신이 원하면 굳이 사제평의회와 사목평의회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 정신 특히 친교 교회관을 왜곡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본당 사목협의회(사목평의회) 역시 친교 공동체로서의 교회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을 반영하는 교회법적 기구다. 교구장 주교가 합당하다고 판단하면, 본당마다 설치해야 한다. 현행 「교회법전」이 규정하는 본당 사목평의회는 본당 주임신부의 자문기구이지만 본당 신자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 더욱 효과적으로 사목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교구 사목평의회나 본당 사목평의회가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기구라는 사실이다.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 또는 사목에 참여할 길을 열어놓은 것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다준 획기적 변화다. 친교 교회관을 바탕으로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를 사목 대상으로 여긴 이전과는 달리 사목 협력자로, 교회 사명에 함께 참여하는 주체로 이해했다. 신학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평신도를 위한 공의회’라고 부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 백성인 교회, 친교 공동체인 교회. 여기에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 목자인 주교와 그 협조자인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세례와 견진성사로 하느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은총 속에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인 성령께서 작용하신다는 것을 공의회는 다시 확인한 것이다(신앙 감각, 12항). 서로 역할은 다르지만 같은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로 이뤄진 하느님 백성인 교회다. 신자들은 목자를 존경하며 따르고, 목자는 신자 공동체 안에서 부는 성령의 바람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친교 공동체인 교회 모습이다.

3)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

① 교회 일치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발표할 때부터 새 공의회가 일치를 위한 공의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을 정도로 교회 일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사안이었다.

후임 교황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는 1964년 1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정교회 수석 총대주교인 아테나고라스 1세와 역사적 회동을 한 데 이어 그해 9월 13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에 탈취해 보관하고 있던 사도 성 안드레아 유해를 그리스 파트라이에 반환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그리스 정교회 수호성인이어서, 교황은 이를 통해 정교회와 화합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교황은 공의회 폐막 전날인 1965년 12월 7일 1054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노플과의 상호 파문을 911년 만에 철회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공의회가 끝난 후 바오로 6세는 1967년 7월 터키를 방문, 이스탄불에서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다시 만났고, 그해 12월에는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가 처음으로 바티칸을 방문한다.

이에 앞서 교황은 1966년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를 만났고, 이 만남을 계기로 성공회와 가톨릭교회의 쟁점들을 논의하기 위한 성공회-로마 가톨릭 국제위원회(ARCIC)가 설립된다. 바오로 6세는 196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본부를 찾았고, 1973년에는 로마에서 칼케돈 공의회(451년) 때 갈라져 나간 고대 동방교회인 이집트 콥트 교회 총대주교 쉐누다 3세와 그리스도 신앙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교황은 또 공의회를 준비하기 위해 설치했던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을 공의회가 끝난 후에는 교황청 상설기구로 설치해 일치 문제를 관장하게 한다. 이 일치 사무국은 1988년 교황청 기구 개편과 함께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약칭 일치평의회)로 개편돼 오늘에 이른다.

보편 교회 차원의 일치 노력은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교황 때 더욱 활발하게 펼쳐졌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특히 정교회와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9년에는 이스탄불을 방문, 디미트리오스 1세 총대주교를 만났고, 이를 계기로 가톨릭-정교회 합동 위원회가 구성됐다.

교황은 또 1987년에는 디미트리오스 1세를 바티칸으로 초청한 데 이어 1995년 그 후임 바르톨로메오 1세 총대주교를 초청했다. 루마니아(1999)를 비롯해 우크라이나와 아르메니아(2001)를 방문했을 때나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시나이, 예루살렘, 시리아, 그리스까지 성경의 세계를 순례했을 때 정교회와 고대 동방교회들과 일치도 주요 사안이었다. 특히 1995년에 발표한 회칙 「하나되게 하소서」는 교회 일치를 위한 교황의 염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문헌이다.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는 1978년 이후 해마다 안드레아 사도 축일(11월 30일)에는 가톨릭 대표단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가 있는 이스탄불을 방문하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6월 29일)에는 정교회 대표단이 로마를 방문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교회임을 확인하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 갈라져 나간 개신교 교회들과의 일치 노력 역시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교황청 일치평의회는 신앙교리성 등 유관 부서와 협조하면서 정교회와 고대 동방교회들뿐 아니라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교회, 복음주의교회 등 주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과 일치를 위한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1999년에는 루터교와 함께 ‘신앙에 의한 의화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 16세기 종교 분열의 한 원인이 된 의화 교리 문제에 있어서 원칙적 합의를 보았다. 이 공동 선언은 2006년 7월 서울에서 가톨릭교회와 세계감리교협의회 그리고 루터교 세계연맹의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으로 이어졌다.

일치 노력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정교회 일부 교회들은 특히 동유럽 지역에서 가톨릭교회가 정교회 신자들을 개종시키려 한다며 탐탁지 않은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또 성공회와의 일치 노력은 성공회에서 여성 사제 서품을 인정한 것이 암초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갈라진 형제들과 일치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② 종교간 대화

종교간 대화 노력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새롭게 시작됐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가 진행 중인 1964년 6월 타종교와의 관계 증진을 위해 비그리스도교 사무국을 설치했다. 공의회가 비그리스도교 선언 「우리 시대」(1965년 10월 28일)를 발표한 후 이 선언의 정신에 따라 타종교와 대화를 추진해 온 사무국은 1988년 교황청 기구개편과 함께 종교간대화평의회로 개편했다.

종교간대화평의회는 보편 교회 차원에서 그리스도인들과 타종교인들과의 상호이해와 존중을 증대하고 대화와 협력을 증진한다. 종교간대화평의회 의장이 해마다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교 등 주요 종교의 축제일에 경축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아시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지도자 모임을 열었고, 아시시 25주년을 맞아 2011년 10월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 역시 아시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지도자 기도 모임을 열었다. [평신도, 2017년 여름(계간 56호), 이창훈 알폰소(서울평협 기획홍보위원장, 가톨릭평화신문 기자)]

 

 

[공의회 강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평신도 사도직 (3)

 

 

4) 교회와 세상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변화와 관련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한 분야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 혹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해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특별히 다루고 있는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이다. 사목헌장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1항).

공의회 문헌 가운데서 말 그대로 ‘심금을 울리는’ 대목으로 꼽히는 사목헌장의 이 대목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게 결부돼 있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공의회 이전에 교회는 세상을 이러한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 공의회 이전에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은 이원론에 가까웠다. 이원론이란 한마디로 세상이 영과 육, 성과 속, 정신과 물질, 선과 악의 대립 구조로 진행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물론 교회가 이원론을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교회는 이런 이원론을 언제나 단호히 배격하였다.

그래도 교회와 신자들의 실제 삶에는 이원론적 경향이 적잖게 배어 있었다. 교회 일을 하는 성직자나 세속을 떠난 수도자에 비해 세속에 파묻혀 사는 평신도는 열등하다는 생각, 성을 속되다고 보고 독신이나 동정 생활을 결혼 생활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생각, 현세 삶은 귀양살이에 불과하기에 내세만을 본향으로 여겨 그리워하는 생각 등이 바로 이원론적 경향에 해당한다. 오늘날에도 영혼의 세 가지 원수 곧 삼구(三仇)로, 마귀와 세속과 육신을 들면서 마귀만 아니라 세속과 육신까지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성과 속, 영혼과 육신을 대립 구조로 이해하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이원론적 경향에는 세상을 불변적이며 정적으로 이해하는 세계 · 역사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세를 귀양살이로 여기고, 내세의 천국만을 그리워하는 것을 당연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와 역사의 변화와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고정된 실재로만 여기는 정서와 무관치 않았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교회는 이런 세계관에서 벗어난다.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그리스도 제자 공동체의 순수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세상과 대화하며 세상과 화해한다.

교회는 단지 세상을 위해 혹은 세상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세상 안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한마디로 전 인류 가족과 함께 있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비롯하는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거룩하지만, 또한 나약한 인간들로 이뤄진 공동체라는 것도 새롭게 인식한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돼 있지 않다. 오히려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한다. 세상 사람들과 긴밀하게 결합해 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헌장 첫 대목에 나오는 저 가슴 뭉클한 메시지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도 이제 세상에 파견돼 세상 가운데서 살아간다. 교회는 이제 세상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방주인 교회 안에서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자신 안에 숨겨진 보화를 찾으라고,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고귀하고 존엄한 인간 모습을 되찾아 함께 기쁨을 누리자고 초대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신 그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삶의 자리를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개선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초대한다.

그뿐 아니다. 교회는 또한 세상으로부터도 도움을 얻는다. 공의회는 이렇게 고백한다. “교회를 역사의 사회적 실재로 또 그 누룩으로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듯이, 바로 교회도 인류의 역사와 발전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지 않는다. …… 교회는 그 공동체 안에서는 물론, 각각의 자기 자녀들 안에서 온갖 계층이나 신분의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고 있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닫고 있다. 가정, 문화, 경제, 사회, 정치의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인간 공동체를 향상시키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교회 공동체에 …… 적지 않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사목헌장 44항).

이러한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달라진 모습이다. 역사는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하고 발전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서 영과 육, 정신과 물질, 성과 속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할 때까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다.


II. 교회헌장의 평신도 이해

교회헌장 제4장은 평신도를 다룬다(30~38항). 평신도는 하느님 백성 가운데서 성직자와 수도자 신분을 제외한 모든 신자를 말한다.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 성직자나 수도자와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한 하느님 백성으로서 똑같은 품위를 지닌다. 그런데 평신도에게는 ‘세속적 성격’이라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래서 성직에 종사하며 하느님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성직자나 참 행복의 정신으로 하느님 나라의 증인이 되는 수도자와는 달리 평신도의 고유한 임무는 “자기 소명에 따라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31항)이다.

이를 위해 평신도는 나름대로 사도직을 수행하고 교회 사명에 참여한다. 평신도들은 교계 사도직, 곧 성직자들에게 맡겨진 직무에 좀 더 직접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사도직을 수행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에서 사제직과 왕직과 예언자직을 수행함으로써 사도직을 실천한다.

평신도들이 모든 일을, 곧 기도와 사도적 활동과 부부 생활과 가정생활은 물론 일상 노동과 심신의 휴식까지도 성령 안에서 행하고 특히 삶의 괴로움을 꿋꿋이 견뎌낸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다(34항). 또 믿음과 희망으로 인내하면서 세상의 악을 거슬러 싸우는 생활의 증거와 말씀 선포를 통해 복음의 증인이 됨으로써 예언자직을 수행한다(35항). 나아가 겸손과 인내로 이웃에게 봉사하고 극기와 거룩한 생활로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쳐이김으로써 왕직을 수행한다(36항).

하지만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사도직 수행과 관련해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인 목자들이 교회 안에서 결정하는 것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목자들 또한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의 품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향상시켜야 한다(37항).

평신도들은 이렇게 저마다 세속에서 그리스도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고 하느님의 표지가 됨으로써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한다. 헌장은 평신도에 관한 부분을 마치면서 평신도를 ‘세상의 혼’이라고 부른다. “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 혼이 되어야 한다”(38항).


III. 평신도교령의 평신도 사도직

1. 평신도교령의 특징과 구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와 평신도 그리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평신도 사도직의 본질과 성격, 다양성과 기본 원칙, 효과적 실천을 위한 사목 지침 등을 제시하는 문헌을 발표했다. 그것이 2000년 교회 역사에서 처음으로 발표된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이하 평신도교령) 「사도직 활동」(Apostolicam Actuositatem)이다.

공의회의 마지막 제4회기 때인 1965년 11월 18일에 공포된 교령은 이보다 1년 앞서 공포된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이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그 가운데서도 ‘평신도’에 관한 제4장을 교리적 기초로 하고 있다. 또 평신도교령이 제대로 다 취급하지 못한 사도직 부분은 공의회 폐회 전날인 1965년 12월 7일에 공포된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이하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에서 다루고 있다. 따라서 평신도교령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교회헌장과 사목헌장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평신도교령은 △ 서론(1항) △ 평신도 사도직 소명(2~4항) △ 평신도 사도직의 목표(5~8항) △ 사도직의 여러 분야(9~14항) △ 사도직의 다양한 형태(15~22항) △ 사도직에서 준수해야 할 질서(23~27항) △ 사도직을 위한 양성(28~32항)과 권고(33항) 등 전체 33항으로 이뤄져 있다.


2. 평신도의 사도직 소명 : 그 토대와 영성(2~4항)

1) 평신도 사도직의 본령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평신도 사도직’이란 특별한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일부 계층의 평신도에게 한정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됐다. 그런데 공의회는 평신도, 곧 교회를 이루는 하느님 백성 가운데 성직자와 수도자 신분에 해당하지 않는 다른 모든 이들도 다 사도직의 소명을 받고 있음을 천명한다.

① 사도직이란 무엇인가? 교령은 ‘교회 사명, 혹은 교회 설립 목적을 위한 신비체의 모든 활동’(2항)을 사도직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신비체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킨다. 평신도 역시 신비체인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 사명을 위한 활동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평신도 사도직이 무엇인지 규정할 수 있다. 평신도 사도직은 교회 사명 수행을 위한 평신도의 모든 활동이다.

② 교회 사명은 무엇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이에 대한 답변은 한마디로 ‘영혼을 구하는 일’이었다. 이와 관련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널리 사용되던 말 가운데 ‘삼구’(三仇)가 있었다. 삼구란 영혼의 구원을 방해하는, 그래서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세 가지 원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세 가지 원수는 육신과 세속과 마귀였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삼구란 용어는 사실상 폐기됐다. 멀리하고 경계해야 할 원수는 마귀뿐이다. 육신과 세속은 멀리해야 할 원수가 아니라 잘 관리하고 개선(改善)함으로써 구원의 여정으로 함께 이끌어야 할 대상이다.

실제로 교령은 교회 사명과 관련해 이렇게 밝힌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총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줄 뿐 아니라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는 것이다”(5항).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총을 전해주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뿐 아니라 “현세 질서”를 복음 정신으로 개선하고 완성하는 일까지도 교회 사명에 속한다.

여기서 현세 질서란 바로 세속 사회의 질서, 세속의 삶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속은 이전처럼 결코 몰아내고 경계해야 할 원수가 아니다. 평신도교령은 오히려 세속이 평신도의 고유한 삶의 자리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또한 평신도 사도직의 특성이 있다. “세상 한가운데서 세속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평신도의 신분이므로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인 정신으로 불타올라 마치 누룩처럼 세상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부름 받았다”(2항).

이것이 평신도 사도직의 본령이다. 물론 평신도 역시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지체이기에 자기 역량에 따라 교회 발전과 성장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평신도의 고유한 자리는 세속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복음화와 인간 성화에 힘쓰면서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도록 노력하는”(2항) 것이 바로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2) 평신도 사도직의 토대

평신도 사도직은 근원적으로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그리고 같은 주님이신 성령에게서 나온다. 그 근거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에게서 파견돼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을 드러내신 것처럼,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와 결합한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자신의 삶의 자리로 파견된다. 또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의 힘으로 튼튼해진 평신도들은 성령에게서 받은 은총의 선물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행복과 교회의 건설을 위해 이 은사를 사용할 권리와 의무”(3항)를 지닌다.

하지만 이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특별히 유념해야 할 일이 있다. “성령의 자유로운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과 특히 자기 목자들과 일치를 이루며 사용해야 한다”(3항). 교령은 “이러한 은사의 순수성과 올바른 사용에 대한 판단은 목자들이 할 일”이라며 목자들의 판단에 따를 것을 요청한다. 그것은 “성령의 불을 꺼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보존하려는 것”(3항)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나 혹은 밖에서 사도직 수행과 관련해 함께하는 형제 평신도들과는 물론 지도신부와도 마찰을 빚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성령의 불을 끄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서로 마음을 열고 충분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무엇이 선하고 좋은 것인지를 헤아려야 한다. 그래도 부합하는 결론을 내지 못할 때는 목자들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도리다. 목자들 역시 자신들이 내리는 판단이나 결정이 개인적 감정이나 주관적 판단에 의한 것은 아닌지, 신자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불을 꺼버리는 것은 아닌지 깊이 유념해야 한다.

3) 평신도 사도직의 영성

영성이란 간단히 ‘삶에서 풍기는 신앙의 향기’라고 할 수 있다. 관건이 되는 것은 신앙과 삶의 일치다. 평신도는 “일상생활의 현세 임무를 올바로 이행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와 자기 삶을 분리시키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기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이 일치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4항).

신앙과 삶의 일치와 관련, 두 가지가 강조된다. 하나는 일상생활의 현세 임무를 올바로 이행하는 것이다. 평신도는 “영성 생활을 이유로 가정을 돌보지 않거나 다른 세속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4항). 그뿐 아니라 “직업의 전문 지식,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사회생활과 관련된 덕 곧 정직, 정의, 성실, 친절, 용기를 존중하여야 하며” 이런 덕행들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덕행이 없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4항).

다른 하나는 “모든 사도직의 원천이시며 기원이신”(4항)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일이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성사, 특히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통해 강화되기에, 평신도들은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 일치를 강화하고 이 일치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

이렇게 평신도들이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가운데 사도직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끊임없는 실천”(4항)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교회의 모든 지체에게 불어넣어 주시는”(3항)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덕을 통해 평신도들은 특히 이 시대 사람들에게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 따라서 평신도 사도직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늘 성령께 마음을 열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특별히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대신덕(對神德)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자주 성찰하고 점검하는 자세가 요청된다.


3. 평신도 사도직의 목표(5~8항)

평신도 사도직의 목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다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한 가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현세 질서를 개선하고 완성하는 일을 교회 사명에 포함시킨 것이다. “교회 사명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총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뿐 아니라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는 것이다”(5항).

1) 평신도 사도직의 두 가지 목표

평신도 사도직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복음화와 성화(6항)이고 다른 하나는 현세 질서의 그리스도교화(7항)다. 복음화와 성화는 전통적으로 말씀 선포와 성사 집전을 고유한 직무로 하는 성직자들의 몫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교령은 평신도들이 “진리의 협력자”(3요한 8)가 돼야 한다면서 평신도들도 복음화와 성화를 위한 사도직을 수행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평신도는 어떻게 복음화와 성화를 위한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생활의 증거와 초자연적 정신으로 실천하는 선행”(6항)을 통해서다. 내가 그리스도 신자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특별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행을 실천할 때 그것은 믿지 않는 이들을 “하느님과 신앙으로 이끄는 힘”(6항)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증거만으로는 부족하다. 기회가 있는 대로 말로써도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 하는 사랑 이야기는 힘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이나 행동으로 전하는 복음이 힘이 있으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에 젖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은 요란한 구호에 불과할 것이고 우리가 드러내는 행동은 가식과 위선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말과 행동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그 빛을 가려 버린다.

평신도 사도직의 또 한 가지 목표인 현세 질서의 그리스도교화는 사람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생활환경과 현세 질서 곧 세상을 대상으로 한다.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현세 질서를 개선하고 끊임없이 완성해 나아가는 것”(7항)이기 때문이다.

현세 질서의 개선과 완성을 창조 질서의 보전과 연관된다. 현세 질서를 이루는 모든 것 곧 인간 삶의 행복이나 가정의 선익, 문화와 경제, 국가 제도, 국가 관계 등은 저마다 하느님께 받은 고유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고유 가치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하신 창조 질서를 반영한다. 그런데 ‘보시니 참 좋았다’ 하신 창조 질서가 인간의 악습과 잘못으로 심각하게 훼손됐다. 이렇게 훼손된 “현세 질서를 바로 세우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힘껏 도와주는 것이 온 교회의 임무”(7항)이지만 특별히 세속에 몸담고 있는 평신도에게 고유한 임무다. 평신도는 현세 질서의 개선을 고유 임무로 받아들이고……복음의 빛과 교회 정신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확고하게 바로 행동하여야 한다”(7항).

2) 그리스도교 양심의 지배 : 신앙과 삶의 일치

복음화와 성화, 그리고 현세 질서의 개선과 완성이라는 평신도 사도직의 두 가지 목표를 수행함에 있어서 평신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신자이면서 동시에 시민인 평신도는 두 질서 - 교회의 영적 질서와 세상의 현세 질서 - 안에서 지속적으로 한 그리스도교 양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5항).

그런데 많은 평신도들이 이 점에서 어려움에 직면한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똑같이 사회에서 생활하다가는 쪽박 차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는 자신들의 고유 임무인 현세 질서의 개선을 위해 더 더욱 노력해야 한다. “시민으로서 전문 지식과 고유한 책임감을 지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협력하며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찾아야 한다”(7항). 현세 질서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면 될수록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질서와 현세 질서 안에서 동일한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도 쉬워질 것이다. [평신도, 2017년 가을(계간 57호), 이창훈 알폰소(서울평협 기획홍보위원장, 가톨릭평화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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