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21 ㅣ No.899

[밀알 하나]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1)

 

 

저는 요즘 ‘현대교회가 미지근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많이 합니다. 80~90년대의 한국교회의 뜨겁고 활발했던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의 교회가 힘이 많이 빠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미사참례율 감소를 시작으로 세례자 수가 감소하고, 성소자는 급격히 줄어들고, 신자들의 연령대 또한 급격한 노령화의 물결을 타고 있습니다.

 

예전의 그 뜨거움이 그립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권고합니다. 성령의 본성은 불과 같은 뜨거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불을 꺼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 은총의 뜨거움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에 따라 더 뜨거워질 수도,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가장 뜨거웠을 때는 성령께서 교회에 내리셨던 성령강림 이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루 만에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사도 2,41 참조).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불구자에게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라고 말하면 불구자가 바로 일어나 걸었습니다. 온 교회는 성령께서 주시는 뜨거운 은총의 선물로 이렇게 온 백성의 호감을 얻고 나날이 번성해갔습니다.

 

물론 초대교회 때라고 해서 모든 교회가 다 뜨거웠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요한 사도를 통해 미지근하기만 했던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경고를 하십니다. 지금의 터키에 위치한 라오디케이아는 지리적으로도 만년설이 있는 추운 고산지대와 뜨거운 온천이 나오는 지역과의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도 믿는 건지 마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미적지근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6)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말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신앙의 뜨거움은 세상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고 가난과 박해와 순교를 선택했던 초대교회 선배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미지근한 신앙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세상에서도 잘 살고 덤으로 천국도 들어가려는 자세를 말합니다. 주님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문제점을 이렇게 짚어내십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묵시 3,17)

 

재물은 신앙의 뜨거움을 꺼버리는 독과 같습니다. 교회는 가난할 때 뜨겁습니다. 바티칸으로 들어오는 돈의 행렬을 보며 교황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 말을 듣고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제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말하던 시대도 끝났습니다.”

 

불은 물과 함께 할 수 없듯이, 신앙도 세상의 영예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뜨거움은 세상을 이기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처럼 뜨겁고 싶다면, 교회도 세상을 거슬러 먼저 물질적으로 가난해지려 노력해야합니다.

 

성 패트릭에 의해 교회를 받아들인 아일랜드는 현재까지 그 초대교회의 뜨거움을 이어왔던 가톨릭국가였습니다. 영국이 성공회를 강요하며 700년 이상 박해했지만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켜오던 뜨거움이 근래 20여 년 만에 미지근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박해도 없어지고 물질적으로도 잘 살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영국을 넘어서면서 성당은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진정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요해지면서 신앙이 약해지는 일은 마치 법칙과도 같이 어떤 교회도 피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11월 13일,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겸 교구 영성관장)]

 

 

[밀알 하나]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2)

 

 

강의를 하다가 “미사 중 신부님이 성작을 손에 들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하는 부분을 외우실 수 있는 분 손 들어보세요”라고 하면 거의 한 명도 들지 못합니다. 집중하라고 종까지 칠 정도로 미사의 핵심 경문이고, 수천 번은 들었을 텐데도 좀처럼 외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단체로 시켜보면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너희 죄를 용서하려고 흘릴 피다…”라고 얼버무립니다. 그나마 피가 죄를 용서하는 값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도 참 다행입니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서 시켜도 “계약”을 머리에 떠올리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경문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과연 예수님은 무엇을 ‘기억’하라고 미사를 제정하신 것일까요? 바로 미사가 당신과의 ‘계약’임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계약은 예수님만 기억하고 계시면 되는 것처럼 미사 안에서마저 우리 머리에서 지워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계약은 서로간의 ‘필요’에 의해 맺어집니다. 아무와 친구하지 않고 아무와 혼인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필요하니까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집이 필요해야 계약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돈을 받고도 집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기죄로 고발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은 그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계약이 끝난다는 말은 관계도 끝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필요에 의해 맺는 계약이지만 그 계약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 지켜야 하는 의무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과의 계약이 필요할까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고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그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값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죄를 용서받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만약 인간이 보속하는 등의 노력으로 죄가 용서받는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은 지상에 내려오셔서 굳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십자가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위한 당신 ‘피’를 들고 우리와 계약을 맺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에게 해야 하는 의무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게 된다면 계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파기되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의미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미운 마음을 지닌 채 구원을 받아보겠다고 성체를 영한다면 이는 신성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것을 강탈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 없이 행하는 미사는 그분께 고통만을 드리는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11월 20일,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겸 교구 영성관장)]

 

 

[밀알 하나]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3) 회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전쟁에도 나갈 필요가 없이 예루살렘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탄이라는 예언자가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양과 소를 많이 가진 부자가 있었는데, 손님이 찾아오자 자신 것이 아닌 이웃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아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암양은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에 다윗은 분개합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펄펄 뜁니다. 나탄은 말합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2사무 12,7)

 

다윗 왕은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자신을 위해 싸우는 장수의 아내인 밧세바와 정을 통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온전히 믿어온 사람이고, 주님께서 그런 죄는 용서해 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행동이 주님께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은, 그가 누군가를 심판하는 모습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믿는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하느님의 심판자 자리에 올라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강의를 하다가 “‘혹시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지지가 않아서 미워하는 게 너무 힘들다’는 분 손 들어보세요.”라고 묻곤 합니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이 손을 들지 않습니다. 물론 창피해서 손을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미운 사람이 한두 명씩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운 마음을 가지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믿는 사람’이란 뜻인데,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회개 다음입니다.

 

회개는 미움에서 사랑으로의 전환입니다. 판단에서 용서로의 변화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살게 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살과 피가’ 바로 ‘생명나무’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여 나무 뒤에 자신을 숨기고, 또 그 탓을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밖에 없는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나니 이제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어서 자신도 심판하고 이웃도 심판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절대 성체를 영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바로 자신이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 이전으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전에 남을 심판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성체를 모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미운 마음 가지고도 성체를 영합니다. 우리는 먼저 회개해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성체를 영해야 합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11월 27일,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교구 영성관 관장)]

 

 

[밀알 하나]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4) 삼구(三仇)

 

 

요한묵시록에는 심판 때 구원된 이들이 이렇게 표현됩니다.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묵시 15,2)

 

불이 섞인 바다는 지옥을 뜻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고 베드로도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 불바다를 마치 유리 위를 걷듯이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짐승의 숫자를 상징하는 ‘666’을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는 이들은 무언가와 싸워서 승리한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교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하는 그 원수들이 누구인지 명확히 가르쳤습니다. 전쟁에서 누가 적인지도 모르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교황청이 발행한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인간이 뱀의 유혹을 받아 생기게 된 ‘세 가지 오염된 본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77항)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세상은 오염되고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먼저 자기 자신도 다스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혹을 이길 힘을 잃어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 타락하게 된 것은 뱀의 유혹에 의해 생겨난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이라는 ‘세 가지의 욕망’에 사로잡혀버렸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천주교 요리문답」 179번 질문에서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라고 물으면,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현대의 가톨릭교회교리와 비교해보면 ‘마귀’는 곧 교만으로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어 그분을 거슬러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같이 ‘반이성적 자기주장’이고, ‘육신’은 모든 육체적 욕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관능적 쾌락’을 말하며, ‘세속’은 세상의 모든 영화를 말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욕망은 모두 뱀이라는 자아에서 나오고 이 뱀은 ‘여섯째 날’ 창조된 동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6’은 아담이 제외된 불완전한 수이고 ‘7’은 아담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완전수가 됩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싸워서 이겨야하는 동물적 본성은 그 여섯째 날 만들어진 동물인 뱀에게서 나오는 세 가진 원수, 즉 ‘삼구’이고 이것을 ‘666’이라 표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당신을 증명해보라고 교만함을 부추기는 ‘마귀’,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육신’, 그리고 자신에게 절하면 주겠다던 헛된 영화인 ‘세속’을 이기셨기에 우리 모두의 구원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을 매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듯 하라고 명하십니다(마태 16,24 참조). 결국 우리가 싸워 못 박아야 할 원수는 우리 자신이고 그 자신에게서 나오는 세 가지 욕망, 즉 ‘삼구’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처럼 이 삼구와 싸워 승리해야만 지옥의 불바다를 마치 유리를 밟는 것처럼 밟고 서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무엇과 싸워야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더 이상 원수와 친하게 지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12월 4일,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교구 영성관 관장)]

 

 

[밀알 하나]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5)

 

 

에덴동산에 있었던 ‘두’ 중요한 나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하나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도 의외로 생명나무의 존재를 모르곤 합니다. 생명나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는 접근이 금지되었던 나무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여기서 ‘생명나무 열매’라고 번역이 됐지만, 실제로 ‘열매’라는 말은 성경 원문에는 없습니다. 생명나무는 열매를 먹는 것이 아니라 나무 자체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나무’는 ‘인성(人性)’을 뜻합니다. 인성은 신성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벳사이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을 때 그는 사람을 나무처럼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마르 8,24)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사람이 나무처럼 보이게 되었다면 이는 분명 좋은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나무처럼 보게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불붙은 떨기나무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탈출 3,2 참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는 분명 인간의 본성을 입으셔야 합니다. 따라서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불’은 하느님의 본성인 ‘신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신성이 떨기나무라는 인성과 결합된 것입니다. 이를 하느님의 ‘자기계시’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 신성을 인성 안에 감추시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인성을 입으신 성자의 탄생이 바로 가장 완전한 하느님의 자기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기계시인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날, 습관적으로 어떤 나무를 장식합니다. 그 나무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푸른 빛깔을 지니는데, 우리는 그 주위를 빛으로 장식합니다. 우리는 불붙은 떨기나무를 장식한다는 것을 짐작하지도 못한 채 그런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성탄트리는 빛이신 분께서 인성을 입으신 자기계시인 것입니다.

 

그리고 ‘푸르다’는 뜻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나무를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나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을 먹어야만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은 당신이 곧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되는 생명나무임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성탄트리를 만들 때는 전구가 없어서 촛불로 둘레를 밝혔고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의 상징임을 보여주기 위해 둥그런 구슬 대신 밀떡들을 붙였습니다. 죄로 인해 먹지 못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잃었던 인간을, 당신 피로 죄를 씻어주시고 또 당신 살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러 오신 생명나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탄트리’는 있지만 ‘생명나무’는 사라졌습니다. 이것과 함께 감사와 찬미도 사라지고 오직 내년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잘 되기만을 기도하는 기복신앙만 남았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번 성탄부터는 트리를 장식하는 의미를 정확히 깨닫고, 그 생명나무 탄생의 감격으로, 오직 감사와 찬미만을 드리는 성탄의 의미를 되찾아야만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12월 11일,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교구 영성관 관장)]

 

 

[밀알 하나]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6) 표징

 

 

예수님의 첫 번째 ‘표징’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통해 제자들이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요한 2,11 참조). 그러니 표징이란 누군가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령강림 이후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다가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을 고쳐줍니다(사도 3,1-10 참조). 그러자 온 백성이 “경탄하고 경악하며”(사도 3,10) 그들에게 달려가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사도 3,11 참조). 예수님께서도 표징을 통해 사람들을 믿게 하셨듯이, 교회 또한 표징과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일반적인 선교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파견하면서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도 함께 주셨습니다(루카 9,1 참조). 그런데 요즘은 매우 의학이 발전하고 이성적 사고가 발달해서 그런지 이전보다는 표징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저도 아픈 사람이 안수를 해 달라고 하면 치유를 위한 안수를 해 주면서도 저를 통해 그러한 표징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시면서 주신 표징의 힘을 저조차도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불러 이집트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오라고 보내실 때, 모세는 그들이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온 것을 믿지 않을 텐데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 가지 표징의 힘을 주십니다(탈출 4,1-9 참조). 

 

첫 번째는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던져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습니다. 모세는 두려움에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뱀의 꼬리를 잡으면 당연히 뱀에 물리게 돼 있습니다.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라 이 말씀에 순종하자, 뱀은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뱀의 말을 들었던 첫 조상들과는 다르게 뱀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고 주님께 순종하여 죄를 이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활 초기에 사탄이라 불리는 뱀과 광야에서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그러니 첫 번째 표징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어서 항상 죄를 짓고 살았지만 이제는 죄를 이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이 표징만 가지고도 모든 예언자들 중 가장 위대한 예언자가 되어 주님의 길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표징은 손을 품에 넣었다 빼내어 보라는 명령이셨습니다. 그랬더니 손에 나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넣었다가 뺐더니 건강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모세에게 치유의 기적을 일으킬 힘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첫 번째를 믿지 않는다면, 두 번째는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번째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 안의 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첫 번째, 두 번째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면, 세 번째로 나일 강의 물을 마른 땅에 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물은 피가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이 이 땅에 뿌려진 것을 상징합니다. 목숨을 내어주는 삶이 바로 가장 완전한 믿음의 표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태석 신부님이 의사임에도 가난한 나라에서 당신 피를 흘려주신 것이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믿음의 표징이 된 것입니다. 나눔만큼 큰 표징은 없습니다. 세례자 수가 줄고 있다면 우리가 주어야 하는 이 세 가지의 표징도 함께 줄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12월 18일,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교구 영성관 관장)]

 

 

[밀알하나]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7) 단식

 

 

요즘 TV를 틀면 예전에 비해 음식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훨씬 많이 보게 됩니다. 맛을 찾고 배부름을 추구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 내에서도 단식을 하거나 절제를 하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밥은 꼭 챙겨먹어야 한다고 걱정해 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 년에 딱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 아침을 거르는 것만이 의무로 남게 됐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해 끼니를 꼭 챙겨야 한다는 말을 초대교회 신자들이 들었다면 그들도 수긍을 했을까요?

 

루카복음에는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기 위해 성전에 갔을 때, 예수님을 보자마자 ‘메시아’이심을 알아본 시메온과 한나라는 예언자가 나옵니다. 특히 한나 예언자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루카 2,37) 여자였습니다. 루카가 한나의 삶이 ‘기도와 단식’이었음을 굳이 써 놓은 이유는,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 기도와 단식만큼 좋은 수단이 없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했던 끈질긴 마귀를 쫓아내시고는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마태 17,19)라고 여쭙는 제자들에게 “그런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마태 17,21)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기도와 단식의 병행은 초대교회에서도 이어지는데, 사도행전에서도 교회가 즐겨 단식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예배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바오로)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시고(사도 13,2 참조), 이어 교회가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파견했습니다(사도 13,3 참조). 그렇게 파견된 바오로는 심한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기도와 단식으로 그런 시련을 이겨낼 힘을 얻었다고 말합니다(2코린 6,5 참조). 즉, 초대교회 때 또한 성령을 받기 위해 단식하고 또 그 받은 성령을 전해주기 위해 단식했으며 복음을 전할 힘을 얻기 위해서도 ‘기도와 단식’은 짝꿍처럼 함께 병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도 수많은 사례들이 있겠으나 단적으로 다윗이 바쎄바와의 불륜으로 낳은 아기가 병이 들자 “단식하며 방에 와서도 바닥에 누워 밤을 지샜다”(2사무 12,1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단식은 기도의 힘을 극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영적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자들조차도 단식보다는 건강을 더 챙기는 느낌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단식하며 기도하는 분들이 적지 않겠지만, 왜 단식으로 육체의 욕망을 최소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도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지 단식이 한 끼 굶은 값으로 이웃을 돕는 목적이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십 일간 단식한 것이 이웃을 돕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데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셨던 것입니다. 육체가 절제될수록 영적인 힘은 커집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

 

따라서 육체가 힘든 것은 좋은 일입니다. 육체가 편하면 정신이 흐려져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미식가들이 돈 버는 시대에 우리는 되레 단식을 외쳐야하는 입장입니다. 

 

성령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기도와 단식이 마치 두 다리, 혹은 두 팔과 같이 함께 가야 함을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몸을 즐겁게 하면 영은 괴롭습니다. 영을 행복하게 하려면 육체를 괴롭혀야 합니다. 그래서 단식은 영적 생활을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행해오던 기도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육체의 만족이 아닌 영적 만족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돼야겠습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12월 25일,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교구 영성관 관장)]

 

 

[밀알 하나]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8) 묵상

 

 

제가 교구청 들어와서 소공동체를 맡고 공부를 하다가 ‘복음나누기 7단계’의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사실 복음나누기 7단계는 교회 수도원 전통의 말씀묵상 기도방법이었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를 남아프리카 룸코(Lumko) 연구소에서 신자 누구나 할 수 있도록 편리하게 만든 묵상과 나눔 방법입니다. 문제는 렉시오 디비나의 핵심인 묵상 부분이 복음나누기 7단계에서는 3분 정도로 매우 짧다는 데 있습니다.

 

복음을 읽으며 자신이 선택한 단어나 구절을 오랜 시간 동안 되뇌이고, 그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들어야하는데 이 과정을 짧게 줄여놓았기 때문에 깊은 묵상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랜 묵상을 통해서 깨닫게 된 내용을 반원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데 충분히 묵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나누기를 하다 보니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은 모임이 부담스러워지고, 묵상을 안 하고도 찻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들만 하다가 끝나버리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 전통의 묵상기도는 ‘반추’기도라고도 불렸습니다. ‘반추’란 뜻은 초식동물들이 풀을 뜯는 동안에는 맹수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에 우선 빠르게 풀을 먹고 안전한 곳에서 다시 ‘되새김질’한다는 의미입니다. 먹는 데는 몇 분도 안 걸리지만 되새김질은 몇 시간씩 걸립니다. 따라서 묵상은 한 단어를 가지고도 되새김질 하는 시간이 며칠, 혹은 몇 년이 소요될 수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아마도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어렸을 때부터 왠지 모르는 마음의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수녀원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만나면 그 공허함이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수녀가 되고서도 그 텅 빈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수녀원 복도를 걸어가다가 그리스도께서 채찍을 맞으시는 성화를 보게 됐습니다. 사실 그 그림은 복도를 지날 때마다 수 천 번은 더 본 것이었으나 그날 그 순간만은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매 맞으시는 그런 고통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음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를 묵상을 통한 ‘말씀의 육화’라고 합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응답했기에, ‘말씀이 그 태중에서 사람이 되신 것’과 같습니다. 비로소 그 성화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난 수녀님은 바닥에 엎드려 한없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녀님이 그리스도의 수난 그림을 매우 오래 보아온 끝에 그것이 누적됐고 결국 100도에서 물이 끓듯이 때가 차서, 주님이 말씀이 수녀님을 사로잡게 됐습니다. 우리 또한 한 묵상을 할 때 말씀이 내 마음 안에 온전히 육화될 때까지 묵상을 놓지 말아야합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위해 열 달을 엄마 뱃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처럼 우리가 묵상하는 말씀도 그 묵상시간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코 육화된 말씀의 신비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의 체험이 약해지면 저절로 성체에 대한 신심도 약해지게 돼서 미사 때 성체를 영해도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슴이 뜨거울 때까지 성경말씀을 이해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야만 부활하신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그들에게 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으로 충만해진 상태에서야 비로소 빵을 떼어주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다(thank)’란 단어는 ‘생각하다(think)’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기도가 되면 ‘묵상’이 됩니다. 모든 묵상은 참다운 감사로 마무리돼야 합니다. 성체에도 감사(Eucaristia)란 뜻이 있습니다. 반복하지만 참다운 묵상이 죽으면 성체에 대한 신심도 죽습니다. 성체가 죽으면 교회도 죽습니다. 성체를 영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묵상기도의 부활이 절실합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1년 1월 1일,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교구 영성관 관장)]

 

 

[밀알 하나]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9) 십자가

 

 

요즘 성당들의 제대 십자가를 보면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형상 뒤로 그저 십자가 하나가 배경으로 서 있는 모양이 많습니다. 잔인하게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기가 거북해지는 시대가 돼가는 것 같습니다. 보통 어머니를 떠올릴 때는 어머니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고생이 떠오르고 그러면 그 사랑에 대한 고마움도 함께 커집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점점 십자가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그 고마움이 의무로 이어지는 부담을 덜려고 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잊으면, 교회는 성황당과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 희생으로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리고 ‘물’을 통해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와 한 몸이 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흘리셨는데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만들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빼낸 ‘피와 물’로 교회가 태어난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766항 참조). 이 피와 물은 성령이라고 해도 되는데, 그래서 ‘피와 물과 성령은 하나로 모아지는 것’입니다(1요한 5,8 참조). 이 사실이 가톨릭교회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없이는 새롭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십자가가 빠지면, 상대를 이용하게 되지 사랑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살아있으면 사랑이 아니라 이용하게 됩니다. 만약 내가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고 있다면, 이는 자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대학 다니는 아이를 가진 부모가 되기 위한 자기사랑에 불과합니다. 부자가 구원받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는데, 왜 아이들을 부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까? 결국 세상에서 인정받으려는 부모들의 자기사랑으로 인해, 아이들은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엄마가 그렇다면 남편은 자녀를 통한 엄마의 꿈을 이루기 위해 희생당하는 돈 벌어오는 기계가 되고 맙니다. 어떤 누구도 행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질지라도 그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배제된 순결한 사랑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광야로 나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만 했습니다. 교만해지려는 마음과 싸웠고, 육체적 욕망과 싸웠으며, 세상 욕심과도 싸웠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못 박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참 사랑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나타나시어 청할 것이 있다면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저함 없이 “저는 ‘고통과 멸시’만을 청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통과 멸시’는 ‘십자가’의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멸시 당하셨습니다. 모세가 성령의 지팡이를 들고 파라오가 지배하고 있는 이집트 땅으로 들어가서 한 일은 그 성령의 힘으로 파라오와 대결한 것입니다. 파라오는 자아의 상징입니다. 모세는 우리 각자가 그 파라오 때문이 이 모든 고통이 오는 것임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파라오는 이렇게 고통당하고 멸시 당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빛이 다가오는 것이 어둠에겐 재앙이듯이, 주님을 받아들임은 우리에겐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났다면 고통과 멸시를 찾게 돼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어떤 부활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구원의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1년 1월 8일,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교구 영성관 관장)]

 

 

[밀알 하나]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10) 변화

 

 

쇄신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예화가 있습니다. 바로 솔개가 40년을 더 살게 되는 방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솔개가 40년을 살아 나이가 들면, 부리가 구부러지고 발톱이 무뎌지며 깃이 무거워져 잘 날 수 없게 되고 먹이도 재빠르게 잡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홀로 산 위로 올라가 부리를 바위에 쪼아 부서뜨리면 새 날카로운 부리가 다시 자라나는데 그 부리로 발톱을 뽑고 깃털을 다 뽑아내면 강한 발톱과 가벼운 깃털을 가지게 돼 40년을 더 살 수 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솔개는 일 년 정도 더 살다가 죽고 만다고 합니다. 

 

‘항상 쇄신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교회가 항상 쇄신해야 하는 이유는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가만히 놓아두면 죄로 기울게 돼, 끊임없는 쇄신과 변화가 없이는 자연적으로 도태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완전’하기는 했지만,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완전’한 인간이기는 할지라도, ‘완성’된 인간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해 완성해야 하는 소명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만하면 됐어!’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교회는 어느새 성장을 멈추고 도태되기 시작합니다. 사실 봉사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단체장을 10년 넘게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자신이라도 하지 않으면 단체가 사라지게 될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이런 모습은 차라리 그런 단체가 사라지는 것보다 좋지 않습니다.

 

물은 흘러야합니다. 흐르지 않으면 썩기 때문입니다. 몸에서는 피가 그렇고 사회에서는 돈도 그렇습니다. 단체가 살아야 교회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포가 생기기 위해서는 이전의 세포는 죽어야 하듯이 교회를 위해서라면 우리 단체가 사라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겨야합니다. 교회를 위해 순교하신 수많은 순교자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런 피 흘림이 쇄신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시고, 나머지 사도들에게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 두 사도 중에 가리옷 유다가 그만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사도들은 유다를 대신할 한 명의 사도를 ‘제비뽑기’로 결정했습니다(사도 1,26 참조).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기 위해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열한 사도는 다른 사도를 뽑기 위해 그저 제비뽑기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가 한마음이 돼 쇄신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들자, 식탁을 돌보는 일을 위해 ‘일곱 부제들’을 선발했습니다. 부제 제도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이 논의해서 새로운 교계제도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사도 6,1-7 참조). 이렇게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새로 생겨나야 할 것은 새로 생겨나는 마치 세포로 이루어진 몸과 같은 유기적인 모습이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도 차차 변화를 두려워해 근 2000년이나 라틴어로만 미사를 고집해 왔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장을 멈추었다는 뜻입니다. 변화는 내가 죽어서 교회가 산다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야 가능합니다. 내가 살려고 하면 다른 세포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 성장을 위한 거름입니다. 내가 살자고 교회의 변화와 성장을 막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1년 1월 15일, 전삼용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교구 영성관 관장)]



2,48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