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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행복하십니까: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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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20 ㅣ No.1356

[경향 돋보기 - 행복하십니까]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행복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행복’은 오늘날 시대적 물음이다. 그만큼 우리는 행복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다. 새해를 여는 이 시점에‘  행복’을 주제로 글을 써야 하는 게 부담스러운 것은 어두운 시국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우리는 2016년을 뒤로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어제나 내일은 우리의 의식 세계 안에 있는 시간이지, 실제 시간이 아닌 까닭이다.

 

이렇듯 실제 시간이 지금 이 순간뿐이라면, 지금의 행복이나 불행을 결정하는 것 또한 지금 내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말은 곧 나의 행복은 너에게 달려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다른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 각자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마음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한국인의 행복지수

 

‘한국인의 행복’을 말할 때 보통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의 행복지수를 비교한 수치를 제시한다. 한국의 행복지수는 OECD 35개국 가운데 행복지수가 29위다(2016년기준). 또한 자살률은 1위,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최하위다.

 

사실 행복을 측정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자 행복의 기준이 다른데 어떻게 객관적 기준으로 이를 측정한다는 말인가? 물론 행복에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면도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면도 있다. 이는 사회적 요인이 개인적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인의 행복지수의 요인에 대한 한 사회학자의 분석에 주목해 보자. 김문조 교수(고려대학교 사회학과)는 한국인의 심성에 내재된 혈연·지연·학연의 관계주의와 현세 기복주의 · 배상주의가 한국인이 지닌 지복 의식에 영향을 준다고 발표한 바 있다(‘문화의 안과 밖’, 2014년 12월 20일 강좌).

 

그는 한국인의 습성은 자기 식구를 우선시하는 혈연 중심의 관계주의와 현세주의,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삶의 고통의 대가를 되돌려받기를 갈망하는 배상주의라는 삼중 나선형 구조로 되어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 세 심성적 특성은 (아는 이들) ‘끼리끼리’, (살아생전에) ‘빨리빨리’, (챙길 수 있는 한) ‘많이많이’라는 의태어 속에 잘 담겨있다고 한다. ‘빨리빨리, 많이많이’라는 심성은 자신을 숙고할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그저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학벌과 부, 명예가 행복의 비교 기준이 되어, 많이 갖고 출세한 이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 그들을 쫓아가려고 허둥대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도 한국인이 지닌 기복적 행복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제시하는 행복관보다 세속적 행복관을 그대로 자신의 행복의 척도로 삼고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새해에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이 말을 기억하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서로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코 혼자서만 행복해질 수 없다. 끼리끼리 행복해지는 것도 일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진정 행복해지려면 ‘함께’ 행복해져야 한다. 지난해에 우리 앞에 드러난 한국 사회의 민낯은 자신의 실속만을 챙기고 끼리끼리 행복해지려 했던 이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끼리끼리 잘살아보겠다고 꼼수를 쓰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다른 사람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부터

 

새해는 지난해보다는 조금 더 행복한 한 해가 되면 좋겠다. 그러려면 나부터 행복의 전달자가 되어보면 어떨까? 구체적으로 이를 위해 내 주변에 긍정적인 시선과 말을 건네는 작은 노력을 시도해 보자.

 

먼저 가까운 가족부터 말이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는 “많이 피곤하시죠?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아이들에게는 “사랑한다. 고맙다. 잘했구나. 미안하다.” 등의 말을 먼저 건넴으로써 긍정적인 씨앗을 내 주변에 뿌려보는 것이다.

 

인간 뇌세포 속에는 경험과 역사로 말미암아 기억된 것이 저장되어 있다. 이 저장된 프로그램으로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행복도 훈련이 필요하다. 놀랍게도 긍정적인 말을 하면 내 안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쌓이게 되면서, 자연히 마음에 평화와 행복감이 차오른다.

 

다른 이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덕분에 내 마음이 행복해진다. “감사해요. 사랑해요. 용서합니다.”라는 긍정적인 말들을 자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행복의 씨앗에 물을 주는 일이기에 그렇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마음에는 두 마리 여우가 싸우고 있단다. 하나는 선(기쁨, 평화, 사랑, 자비)이고, 하나는 악(화, 질투, 욕심, 건방짐, 열등감, 우월감, 자만, 거짓)이란다.” 그러자 손자는 할아버지께 여쭈었다. “그럼 할아버지, 어느 여우가 이겨요?”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녀석이 이기지.”

 

나는 과연 어떤 여우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가? 내가 먹이를 준 녀석이 결국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모든 게 습관 들이기 나름 아닌가? 내가 하루하루 주는 먹이에 따라 자신의 습관도 그 방향으로 강화된다.

 

우리의 마음은 일종의 밭이다. 그 안에는 기쁨, 사랑, 즐거움, 희망과 같은 긍정의 씨앗도 있고, 미움, 절망, 시기, 두려움과 같은 부정의 씨앗도 있다. 내가 상대에게 거칠게 말하면 내 안에 있는 분노의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이다. 거기에 자꾸 물을 주면 분노의 감정은 점점 더 커진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고, 미움이나 시기 질투 또한 눈덩이처럼 증폭되기 마련이다.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은 화를 푸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너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고, 자신이 지금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라. 그리고 도움을 청하라. 나는 지금 고통스럽고 그래서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는 “화는 보살핌을 간절히 바라는 아이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우는 아이를 달래듯 화를 돌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화를 돌본다는 것은 호흡이나 보행을 통해 화라는 부정적 에너지를 긍정적 에너지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의 에너지는 크기 때문에 당장 화를 표출해 버리면 크게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화가 났을 때 우리는 흔히 “내 옆에 오지 마. 당신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말해버리면 결국 상대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만다.

 

우리는 자신이 타인에게 행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불화를 멈출 수 없다. 불화의 씨앗은 도처에 있고 우리의 사고방식에도 잠재되어 있다.

 

우리 안에 타인에 대한 미움이나 시기, 분노를 지니면 지닐수록 그 적대감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어두워지고 만다. 행복해지려면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되돌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께 머무는 것

 

인간의 마음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는 원숭이처럼 쉬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다니며 열심히 무언가를 찾지만,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한다.

 

이리저리 헤매는 마음을 다잡으려면 조용히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감실 앞에 고요히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온갖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마음에 고요히 흐르는 평온함을 맛보곤 하지 않았던가?

 

그 평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께 머무르는 것에서 비롯함을 말해준다. 그분께 마음을 의탁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의 변화무쌍한 역사 속에서도 비교적 덜 흔들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올 한 해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잘 말해주고 있다.

 

“마음의 평화를 통하여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평화는 무엇보다 먼저 한 개인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사랑과 이해, 남을 위하는 마음이 평화의 근본이라고 믿는다”(틱낫한의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참조).

 

* 최현민 엘리사벳 - 사랑의 씨튼수녀회 수녀. 종교 대화 씨튼 연구원 원장과 도서출판 영성생활 편집인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월호, 최현민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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