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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25: 세상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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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21 ㅣ No.412

[추기경 정진석] (25) 세상과 교회


라틴어 교사, 방송 진행자, 법원 서기… 다재다능한 신부

 

 

- 소신학교 교사 시절 학생들과 소풍을 간 정진석 신부가 활짝 웃고 있다.

 

 

교구의 갑작스러운 발령이었지만 정진석 신부는 순명하는 마음으로 소신학교 교사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처음으로 아이들을 만나기로 한 날, 한창 사춘기일지도 모를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군에서 거친 장정들을 통솔한 경험이 전부였던 그에게 선생으로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고 긴장됐기 때문이다.

 

“나는 정진석 니콜라오 신부야, 반갑구나.”

 

라틴어 수업 첫날 처음으로 까까머리 아이들을 마주한 정진석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경청하고 있었다. 이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눈빛에 긴장 가득했던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무장해제됐다. 길 잃은 어린 양을 만난 목자의 마음이 된 정진석 신부는 쓰러진 김정진 신부의 뒤를 이어 아이들을 잘 이끌어야겠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정진석 신부는 라틴어 교사이자 신부로서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뜻밖에 본당이 아닌 학교에서 지내게 됐지만, 이 역시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다. 하루하루가 그에겐 새로운 행복이었다. 까까머리 어린 소신학생들을 보면 꿈 많던 자신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세상만사 궁금한 것이 참 많았던 학창 시절, 교실과 도서관에서 세상을 배우고 꿈을 키워나가며 그는 참으로 행복했다. 그래서 진석은 학생들에게도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기쁨과 행복을 전해 주고 싶었다. 수업시간이면 진석은 어린 양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애를 썼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정진석 신부의 라틴어 수업을 좋아했다. 어렵기만 한 라틴어 수업을 어떻게 가르쳐줄지 밤낮으로 고민해 고안한 그 나름의 교수법 때문이었다. 그는 라틴어를 가르칠 때 아이들이 라틴어보다는 조금은 더 익숙한 영어를 함께 가르쳤다. 영어와 라틴어를 평행이 되도록 나란히 칠판에 쓰는 것이 그의 대표적인 교수법이었다. 라틴어도 배우고 영어도 함께 배우니 일거양득이라 학생들도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 소신학교 교사 정진석 신부(맨 왼쪽)가 학생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소신학교에서 라틴어 교사로 활동한 것은 진석 자신에게도 라틴어 실력을 갈고닦는 시간이 됐다. 이는 훗날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의 라틴어 서한을 번역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이다.

 

당시 정진석 신부는 소신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국립 서울중앙방송국(KBS)에서 천주교 방송을 진행했다. 선배 신부님의 강권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꽤 오래 방송을 한 셈이었다.

 

당시 방송국은 남산에 있었다. 천주교 교리나 강론 등의 원고를 쉽게 작성해서 방송하는 것이었지만 방송 준비하는 것이 서품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제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송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색다른 경험과 매력이 있었다. 정진석 신부는 그때 방송한 원고도 착실하게 엮어 「라디오의 소리」와 「라디오의 메아리」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펴냈다. 차곡차곡 알찬 경험이 그의 사제 생활을 풍요롭게 채워나갔다.

 

정진석 신부는 소신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서울대교구 법원 서기로도 일했다. 1964년 1월부터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 겸 제7대 「경향잡지」 주필을 맡았다. 「경향잡지」는 서울대교구에서 발행하다 1959년 편집 발행권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이관된 교계 잡지였다. 주교회의 사무국은 1954년 중구 장충동 1가에 있다가 1965년 10월에 종로구 계동으로 이전했다. 진석은 혜화동과 장충동, 계동을 오가며 부지런히 주님께서 맡겨주신 어린 양들을 돌보았다.

 

그 당시 세계 교회는 큰 변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특별히 1958년 11월 4일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착좌한 것은 세계 교회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요한 23세는 전임 교황들과 많은 점이 달랐다. 전임 교황들이 주로 귀족 출신이었던 것에 반해 요한 23세는 가난한 농촌 출신의 인물이었다. 또 나이도 많았다. 교황에 선출된 당시 그의 나이 77세였다. 그 때문에 요한 23세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과도기의 교황’이라 말하기도 했다. 전임 교황 비오 12세가 20년간 강력한 통치를 해온 것에 비해 연로한 요한 23세는 잠시 있다가 지나갈 교황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요한 23세 교황은 선출 직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화려함에 둘러싸여 감옥살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는 교회 쇄신을 위해 앞장섰다. 서민적이고 개방적인 교황을 많은 이들이 사랑했다. 그리고 착좌 3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소집 발표를 한 공의회는 세상 속에 가톨릭 교회를 세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공의회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요한 23세가 연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4번의 회기를 거치면서 치열한 격론과 타협의 과정을 통해 현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공의회 문헌에 담았다.

 

「계시헌장」, 「전례헌장」, 「교회헌장」, 「사목헌장」 등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문으로 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현대 가톨릭 교회의 시금석이 됐다. 이 가운데 으뜸은 「교회헌장」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급격한 세상 변화에 따라 거듭된 교회 개혁의 요구를 받아들여 2000년 교회 역사를 돌아보고 복음 정신을 시대에 맞춰 재조명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가톨릭 교회는 신중하게 큰 걸음을 내디뎠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20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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