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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과 신앙: 서양과학과 동양과학 그리고 천주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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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2 ㅣ No.303

[과학과 신앙] 서양과학과 동양과학 그리고 「천주실의」

 

 

과학과 자연

 

과학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자연에서 볼 수 있는 현상에 관한 지식체계와 자연현상을 설명하려는 탐구활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자연에 대한 합리적 지식이나 자연 현상의 규칙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탐구활동, 곧 과학을 정의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단어는 자연입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등도 과학의 한 갈래로 나누지만, ‘과학’ 하면 으레 자연과학이라고 불리는 갈래를 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연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아직 모르고 있는 비밀이 훨씬 더 많습니다. 자연이란 그만큼 신비로운 것이지요, 집회서의 말씀(42,15-43,33)에서는, 자연에 깃든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합니다. 자연은 정말 경이롭습니다. 이런 자연의 신비를 푸는 활동이 바로 과학입니다.

 

지혜서의 말씀을 보면, 믿음의 선조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이집트 민족에게 내린 여러 가지 하느님 구원의 표징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렇게 자연의 근본요소들 사이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수금을 뜯을 때에 소리는 늘 같으면서도, 음률의 성격이 음표에 따라 바뀌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19,18).

 

과학은 바로 이렇게 자연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우리의 지성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간의 문화활동이지요. 오늘날 ‘과학’ 하면 대개 서양과학을 떠올립니다. 탁월성의 척도라는 노벨상 수상자의 면면을 보아도 그렇고, 실제로 오늘날 첨단과학의 선도 연구자들은 대부분 서양의 과학자들입니다. 어쩌다 일본이나 중국, 인도에서 군계일학 격인 과학자 이름이 거명되긴 합니다만….

 

자연의 신비를 밝히는 지적 활동이라면 동양에서 훨씬 더 활발히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서양 사람들보다는 동양 사람들이 훨씬 더 자연을 두려워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과학의 뿌리인 자연현상에 대한 탐구활동은 서양에서보다 동양에서 훨씬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동양과학과 서양과학의 차이

 

동양과학과 서양과학의 차이는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서양과학은 기계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동양과학은 유기적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동양의 과학은 주로 중국의 과학을 중심으로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일본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 전통과학도 주로 중국의 과학을 받아들인 것이 대부분이기에, 동양과학 하면 중국과학을 떠올리게 됩니다.

 

세계 또는 우주의 근본을 이해하고자, 서양에서는 주로 자연을 낱낱의 궁극요소로 봅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나 결합, 분해 등을 통해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려고, 원자론과 인과론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과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에 반해 동양에서는 자연을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 보고 전체적으로 이해하면서 과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음양오행도.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였듯이, 이 세상이 흙과 공기, 물, 불 등의 근본물질로 구성되었다는 서양과학적 인식과, 목(나무), 화(불), 토(흙), 금(쇠), 수(물)의 오행설에 바탕을 둔 동양과학의 오래된 뿌리는 어찌 보면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방법 서설」에서 시작하여 베이컨과 뉴턴, 아인슈타인에 이르면서 발전해 온 근현대 서양과학을 생각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동양과학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 차이의 중심에 음양사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의 본질적 특징인 운동과 변화를 수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기계론적으로 풀이하는 서양과학과 달리, 동양과학은 이 변화과정 가운데 지속적인 유형이 있으며, 운동과 변화가 순환하는 이 유형에 음과 양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서양과학과 근본적으로 차별되는 본질을 가집니다.

 

현대 양자물리학의 여러 가지 개념을 설명하다 보면, 음과 양, 곧 서로 대립하는 일이 없이 음이 양이 되기도 하고 양이음이 되기도 한다는 이 음양의 개념과 일치하는 개념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뉴턴의 기계론적 과학 이전의 서양과학과 아인슈타인 이후의 양자과학 사이에는 엄청난 반전, 이른바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루어졌지만, 동양과학은 한결같이 변함없는 본질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사실, 저는 과학철학자나 과학사가가 아니므로, 동양과학과 서양과학 사이의 깊은 차이를 더는 자세히 설명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양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이긴 해도, 한국인으로서 제 몸속에 동양과학적 사고의 피가 흐르는 것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천주실의」와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탄생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례없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학문적 관심을 바탕으로 태동한 것이지요. 실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를 통해 태동한 한국 천주교회, 그러면서도 목숨으로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들의 깊은 신심이 오늘날 우리는 물론이고 세계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성모님의 전구로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과학도와 공학도로서 철저하게 과학적인 사고에 익은 한 젊은이의 마음을 꾸준히 두드린 신심서적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중국의 저명한 법학자였던 우징숑 박사의 「동서의 피안」과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는 저에게 가톨릭 신앙을 확신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동서의 피안」을 읽으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선조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배경에 바로 그 동양과학의 신비가 숨어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구나 조선시대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우리 신앙선조들이 당시 신식 학문으로서 중국의 학문을 공부할 때,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읽으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마테오 리치와 「천주실의」.

 

 

마테오 리치는 물론이고 아담 샬, 페르비스트 등 예수회 신부들이 중국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양과학의 도움이 컸습니다. 당시 중국의 지배층 식자들이 서양의 신부들이 소개한 갖가지 서양 과학기술의 산물에 깊이 관심을 가졌던 덕분입니다.

 

그들은 전교활동보다 먼저, 중국에 역법과 천문학, 수학, 지리 등, 서양과학의 눈부신 성과들을 소개했습니다. 마테오 리치도 「천주실의」와 함께 만국지도와 기하학, 측량법 등에 관한 책을 펴냈고, 아담 샬 신부도 천문도와 역법 등에 관한 책들을 펴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 고위층의 환심을 사게 된 것이지요.

 

페르비스트 신부도, 같은 방법으로 서양과학을 소개하면서 황제의 원정길에 단독으로 동행할 정도로 중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요서론」과 같은 훌륭한 천주교 교리서를 펴냈습니다.

 

우리 신앙선조들도 북경으로 오가는 외교사절단 역관들의 짐 꾸러미에 담겨 들어온, 중국의 서양과학 소개 책자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천주실의」와 「교요서론」 등을 공부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앙선조들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서양과학에 대한 감화를 받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그렇게 된 배경은 당연히 음양오행, 더 나아가 ‘도(道)’로 일컬어지는 하늘에 대한 공경심, 자연에 대한 두려움 등 동양과학적 사고가 몸에 배어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천주실의」를 읽으면서, 동양적 사고방식에 철저히 기초한 교리 전개에 깊이 감동했던 까닭도 제 몸에 그런 피가 흐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과학자의 마음으로 읽은 「천주실의」

 

1601년 풍응경이 간행한 「천주실의」의 초판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리치 선생은 8만 리를 주유하며 위로 우주, 그리고 가장 깊은 바닷물을 측정하였으나 모두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을 일단 다 헤아려서 확실한 증거를 대었다. 그렇다면 그의 「칠극」 같은, 우리 천주교회사에 이름을 신묘한 이치는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며 속임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지조는 1607년에 「천주실의」 재판의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니, 그 뜻이 종종 근세의 유학자들과 같지 않으나, 중국 상고시대 자연과학적 고전들(소문[素問], 고공[考工], 칠원[漆園] 편 등)과 소리 없이 서로 통하니, 도리어 순수하여 올바름에 거짓이 없다. … 진실로 동양과 서양은 마음도 같고 이치도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은 다만 아마 언어 문자뿐이다.”

 

과학자인 제가 「천주실의」를 처음 읽었을 때도, 풍응경이나 이지조와 꼭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동양과학과 동양사상이 몸에 익은 중국인들이 어찌하여 천주교 교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조선시대 우리 신앙선조들도 같은 마음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또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이 섰기에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올해는 병인박해 1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마테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 페르비스트 신부의 「교요서론」, 그리고 판토하 신부의 남긴 소중한 고전들을,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들에게 꼭 일독할 것을 권해드립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저처럼, 우리 신앙선조들의 뜨거웠던 신앙심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시길 소망합니다.

 

* 하창식 프란치스코 - 부산대학교 고분자공학과 교수.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호주 퀸즐랜드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접착 및 계면학회 회장, 부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6년 11월호, 하창식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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