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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희망의 신학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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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24 ㅣ No.454

[윤주현 신부의 신학 이야기] 희망의 신학 종말론

 

 

종말을 직면한 시대

 

지난 2012년 세계는 종말설 때문에 한창 뒤숭숭했다. 고대 마야문명에 바탕을 둔 달력이 2012년에 종말을 가리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설은 틀린 것으로 판명이 났다. 또 태양 폭풍이 일어나 지구를 보호하던 자기장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 지구의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실현이 가능한 종말 시나리오는 자원의 고갈에 있지 않나 싶다. 만일 인류가 지금의 속도대로 지구의 자원을 소비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인류는 지구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

 

지구에 생물이 탄생한 이래 수많은 종이 탄생하고 사라졌다. 그 종들은 하나같이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멸종했다. 그런데, 지구상의 생명체 가운데 외부 요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사라져 버릴 위기에 놓인 종이 있다. 다름 아닌 인간이다.

 

현재 인류가 가진 핵폭탄만으로도 지구는 충분히 잿더미가 되고도 남는다고 한다. 인류가 이기주의적인 자원 소비 행태를 바꾸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인류는 자멸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허황하다고 생각했던 종말설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종말에 대해 숙고하고 회개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희망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창조론의 완성편인 종말론

 

그런 의미에서 신학의 마지막 분야로 회자되는 ‘종말론’은 적게는 현세의 삶을 넘어 희망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앞날을 신앙 안에서 성찰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넓게는 인류 공동체의 앞날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 주는 의미 있는 신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교의체계나 철학체계 또는 사상체계를 넘어서 종교적인 전망을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종말론’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종말론적 메시지’다. ‘종말론’은 그리스어 ‘ta eschata(마지막 것들)’와 ‘logia(학문)’란 말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용어다. 곧 종말론은 ‘마지막 것들에 관한 학문’을 뜻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과 세상의 역사에 시작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시작은 원대한 계획을 염두에 두신 하느님께서 이루셨으며 그것이 바로 ‘창조’ 사건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그 자체로 언급할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창조’의 목적을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은 ‘창조론’의 속편이자 완성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죽음의 의미를 바꾸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교가 믿는 종말 신앙은 크게 네 가지로 집약된다. 죽음과 심판, 지옥과 천국에 대한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에서는 통상 이를 사말(四末)교리라고 부른다.

 

먼저 교회는 우리의 인생 여정 마지막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 죽음이 첫 인류가 지은 원죄의 결과라고 가르친다. 첫 인류가 원죄를 짓기 전, 그들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초자연적인 은총의 선물을 누리며 살았다. 그들은 죽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원죄에 떨어진 뒤부터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들이 누렸던 초자연적인 선물은 사라지고 말았다. 원죄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에게 전해져 온 인류가 죽을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돌아가심으로써 죽음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죽음이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국면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고자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심판과 최후의 심판

 

교회는 죽음 뒤 각 개인이 맞이하게 될 심판에 대해 가르친다. 우리는 이를 사심판(私審判)이라 부른다. 그 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역사의 마지막에 인류는 함께 심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를 최후의 심판이라 부른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종말 때 분명 우리 모두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때 우리 삶의 모든 행적은 하느님 앞에 낱낱이 드러나고 그에 대한 상이나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자비하시지만 동시에 공정하시고 의로운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마태 25,31-46에서 말씀하셨듯이, 세말에 심판받을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따라 양과 염소처럼, 이웃 사랑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주님을 잘 섬겼는지 하는 기준에 따라 나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이 우리를 단죄하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이 심판에서 무엇보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신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마지막까지 우리의 자유에 달려있다.

 

최후의 심판에 이르게 되면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 있던 수많은 사건의 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개인과 인류 공동체의 역사는 하느님 앞에서 사랑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정화의 장소인 연옥

 

교회는 심판 이후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연옥과 지옥 그리고 천국에 대한 신앙이 그것이다. 현대로 들어와 이런 죽음 이후의 실재들에 대한 믿음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교회 교도권은 다양한 기회를 들어 이 교리를 재천명했다.

 

인간의 궁극적 소명은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사랑의 합일을 이루는데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 상태에 이르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합일에 이르려면 그분에 대한 사랑을 순수하게 정화해야 한다. 우리가 죽은 뒤 주님께 이르고자 정화되는 곳을 연옥(煉獄)이라고 부른다.

 

교회는 다양한 기회에 공의회의 결정을 통해 사후에 거치게 될 연옥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왔다. 또한 우리보다 먼저 연옥에 가서 정화의 시간을 거치고 있는 사람들을 기도로 동반하며 도울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보통 대중신심은 연옥을 이른바 반지옥(半地獄)처럼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지옥에서 단죄 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연옥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의 요소를 정화시키고 주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에 합당한 상태로 준비시켜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마지막 정화는 죽은 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느님과 영원한 결별로서의 지옥

 

현대인들에게 사말교리 가운데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부분이 지옥의 존재일 것이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지옥의 가르침을 거부하거나 부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옥의 존재를 분명히 가르쳐 왔고,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도 이를 재확인하였다.

 

교회는 공간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차원에서 지옥을 이해하도록 가르친다. 지옥은 하느님과 참된 행복을 누리는 이들이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말한다. 곧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부하여 그분과 영원히 결별하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 불러온 것이다.

 

어떤 이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옥이 모순된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당신과의 친교로 부르시지만, 인간이 끝까지 이 부르심을 거부하여 지옥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친교인 천국

 

사말교리는 천국에 대한 가르침과 더불어 완성된다. 천국이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염원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간 공간적인 차원으로 잘못 이해되어온 가르침이다.

 

천국은 하느님과의 궁극적인 만남의 상태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천국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성모님과 천사들, 모든 복된 이들과 함께 누리는 생명과 사랑의 친교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천국에 이르는 상태를 다양하게 표현해왔다. 예컨대, 하느님을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상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상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상태, 하느님과 영원히 사랑을 누리는 상태 등이 그러하다. 이 모든 표현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을 가리킨다. 이는 하느님께서 영원에서 인류를 위해 준비한 원대한 계획이자 이 계획의 최종적인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에 대한 열망

 

마지막으로 종말론과 관련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초세기부터 늘 주님의 재림(parusia)에 대한 열망을 간직해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재림은 궁극적으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다가섬이 종말에 가서 정점에 이르는 사건이다. 이런 하느님의 다가섬의 역사에 그리스도의 강생이 있었고, 이와 더불어 인류는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세말에 있을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은 하느님과 인류 공동체가 궁극적인 만남을 이루게 될 결정적인 사건이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열망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다시 일으켜야 할 중요한 신앙 감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한 해 동안 ‘봉헌 - 완전한사랑’에 이어 ‘윤주현 신부의 신학 이야기’를 집필해 주신 윤주현 신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윤주현 베네딕토 - 가르멜수도회 사제. 현재 가르멜수도회 대구수도원 원장,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로 활동하며 다양한 저서와 역서를 펴내고 있다. 교황청립 데레사대학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스페인의 아빌라 신비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5년 12월호, 윤주현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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