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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맥: 사막 교부들의 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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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13 ㅣ No.451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맥] 사막 교부들의 금언

 

 

이번 호에는 인물이 아닌 특별한 작품을 소개한다. 소위 ‘사막 교부들의 금언’이란 작품이다. 금언(Apophthegmata)은 이집트 수도승 생활과 문화를 드러내는 가장 전형적 문학 유형으로사막 수도승들의생생한 언행을 담고 있는 짧은 일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체계화되지 않은 사막의 지혜를 단순한 언어로 전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사막 교부들의 평범한 삶과 단순한 가르침을 가장 잘 접하게 된다.

 

 

사막교부

 

흔히 ‘사막 교부’라고 할 때, 좁은 의미로는 주로 이집트 북부(나일강 하류)에서 명성을 떨치던 독수도승을 뜻한다. 본디 ‘교부’란 주교에게만 붙여진 칭호였다. 그러다 사막의 은수자 무리 안에 새로운 영적 부성(父性)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영적 부성은 지혜와 말씀의 은사에 연결되었다. 사막에 새로 도착한 사람은 자기 영적 사부인 원로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제자를 지도하는 이 원로를 바로 ‘사막 교부’라 일컫게 되었다. 이집트 남부(나일강 상류)의 회수도승생활 창설자 파코미우스와 그의 후계자들 역시 교부들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막 교부들은 아니다. 그들의 공동체들은 사막 한가운데 있지 않고 나일강 계곡 마을들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막 교부들의 과거는 무척 다양하고 흥미롭다. 그들 대부분은 이집트 농부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는 상인과 대장장이, 심지어 노예 출신도 있었다. 악명 높은 강도들이 회개하여 유명한 수도승이 된 경우도 있었다. 강도 두목이자 무덤 약탈자였던 파테르무티우스, 아기가 뱃속에서 어떻게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갈랐던 아폴로, 강도들 사이에서 사악함과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던 모세가 대표적이다. 어느 날 4명의 강도가 모세의 암자를 습격한다. 모세는 그들을 꽁꽁 묶어 교회로 데리고 간다. 모세는 이 강도들의 운명을 사제들이 결정하게 한다. 강도들은 자기들이 약탈하려 했던 인물이 그 악명 높은 모세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회개하고 수도승이 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교부들의 과거가 어떠했든 그들은 모두 하느님만을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살려는 의지로 사막으로 갔다.

 

필자가 사막 교부들의 일화를 처음 접했을 때 마치 중국 선사(禪師)들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양한 과거, 예측 불가능한 언행, 단순성, 본질과 핵심을 꿰뚫는 혜안, 분별력 등이 그러하다. 일찍이 토마스 머튼은 사막 교부들과 중국 선사들의 유사성에 주목한 바 있다.

 

 

아포프테그마타

 

그리스어 아포프테그마타(Apophthegmata)는 ‘어디로부터 온’이란 뜻의 아포(apo)와 ‘말하다’란 뜻을 지닌 프테곰마이(phthegommai)의 합성어로 우리에게 전해진 사막 교부들의 금언을 뜻한다. 대부분의 금언은 이집트 북부 스케티스(Sketis)의 수도승생활을 특징짓는 일상적 관계와 교류에서 생겨났다. 이 금언들은 전통과의 생생한 접촉을 유지하려는 갈망에서 한 수도승에게서 다른 수도승에게 구전되었고, 후에 기록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금언 모음집들이 생겨났고, 마침내 두 개의 모음집으로 편집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곧 ‘알파벳순 모음집’과 ‘주제별 모음집’이다. 전자는 금언들을 인물에 따라 묶어 그리스어 알파벳순으로 정렬한 모음집이다. 후자는 금언들을 주제별로 모아 정렬하고 있는데, 강조점이 인물이 아니라 가르침 자체에 있다. 금언의 출처보다는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금언의 가르침

 

“압바, 한 말씀 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겠습니까?” 금언의 핵심 구절이라 할 수 있는 이 물음은 제자가 스승에게 던지는 전형적 질문이었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공석에서 자주 사용하는 ‘한 말씀’도 여기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질문을 받은 원로의 응답은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교부들은 보통 말을 매우 절제했다. 한 번은 어떤 수도승이 한 원로에게 와서 청했다. “압바, 한 말씀 해주십시오.” 그러자 원로가 말했다. “네 마음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 수도승은 즉시 떠나갔다. 20년 후 그가 돌아와서 말했다. “압바, 당신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제게 또다른 말씀을 해 주십시오.” 그러자 원로가 말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자 그 수도승은 그 말씀 역시 지키려고 자기 독방으로 되돌아갔다.

 

교부들에게 가르침을 위한 체계적인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삶으로써 제자에게 모범이 되었고, 삶의 모범 자체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었다. 포이멘의 다음 일화가 이를 잘 말해준다. “한 수도승이 압바 포이멘에게 이렇게 여쭈어 물었다. ‘저와 함께 어떤 형제들이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원하십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아니오! 당신이 먼저 행하시오. 만일 그들이 살고자 한다면 스스로 주의할 것입니다.’ 그 수도승이 말했다. ‘하지만 사부님, 그들은 제가 명령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에 원로가 그에게 말했다. ‘아니오! 그들의 입법자가 아니라 그들의 모범이 되시오.’”(『교부들의 금언』 포이멘 174) 이제 금언집의 몇 가지 핵심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자.

 

 

기도

 

교부들은 기도 자체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삶 자체가 기도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에게 있어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였다. 이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 일상의 모든 순간에 늘 ‘하느님 기억’(mneme Theou)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들에게 ‘하느님 기억’은 영성생활의 핵심이었다. 여기서 생겨난 것이 멜레테(melete) 수행이다. 이는 성경의 한 구절을 반복하는 수행으로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멜레테는 보통 ‘자비를 구하는 기도’와 ‘도움을 청하는 기도’로 구분되는데, 마카리우스의 다음 금언이 이에 대한 좋은 예이다. “누군가 압바 마카리우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압바가 대답했다.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히 손을 펼쳐 들고 ‘주님, 당신 뜻대로 또 당신이 아시는 대로 하시고,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하시오. 그리고 만일 여러분 안에서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면, ‘주님, 도와주십시오!’ 라고 하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바를 아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이지요.”(『교부들의 금언』 마카리우스 19) 어찌 보면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는 이 두 종류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다.

 

 

금욕수행

 

교부들은 끊임없는 기도, 하느님과 항구한 대화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거슬러 싸웠다. 단식과 철야, 노동, 자기 죄에 대한 기억, 마음 돌보기, 악한 생각들에 대한 거부, 죽음에 대한 묵상, 그리고 독방에 항구히 머무는 것은 그들이 했던 금욕수행이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영혼과 육체의 온갖 욕정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 독방은 그들의 금욕생활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말한다. “네 독방에 앉아 있어라. 그러면 독방이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만일 누가 자기 독방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면, 어떤 다른 곳에 가더라도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독방에 머무는 것은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하느님께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교부들은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러 사막에 왔다. 사막에 항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독방의 고독 속에서 생활할 필요가 있었다.

 

수도승으로 하여금 독방을 떠나도록 부추기는 고질적인 악령이 있다. 영적 무기력 혹은 태만을 뜻하는 아케디아(akedia)이다. 교부들은 이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손노동과 죽음에 대한 묵상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이 둘은 아케디아를 고치는 훌륭한 치료약이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날 죽어야하는 것처럼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사랑

 

수도승의 삶의 목표는 금욕수행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이었고, 하느님을 향한 길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은 수도승이 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자 그들의 생활방식에 대한 평가기준이었다. 사랑은 환대와 온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고 또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도 사랑의 표시 중 하나였다. 교부들은 평소 엄격하게 생활했다. 하지만 방문객이 오면 자신의 엄격함을 감추고 그를 맞이했다. 한 형제가 말했다. “압바, 저를 용서하십시오. 제가 당신의 규칙을 깼습니다.” 그러자 원로가 말했다. “내 규칙은 당신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이고 당신이 평화로이 당신 길을 가게 하는 것이오.” 압바 모세는 어느 날 한 형제가 공동체 앞에 끌려나와 심판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모래를 가득 채운 바구니를 들고 왔다. 그리고 말했다. “내 죄가 이 바구니에 있는 모래처럼 내 뒤로 줄줄 흘러내리는데 내가 어떻게 내 형제를 심판해야 한단 말이오?” 끝으로 포이멘의 다음 일화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활짝 틔워준다. “원로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압바 포이멘에게 와서 물었다. ‘공동기도 중에 조는 형제를 보면 우리가 그를 흔들어 기도 중에 깨어 있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압바 포이멘이 그들에게 대답했다. ‘나는 자고 있는 어떤 형제를 보면 그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누이고 그를 쉬게 할 것이오.’”(『교부들의 금언』 포이멘 92) 이런 모습이 바로 종종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교부들의 예측 불가능한 언행이었다. 늘 본질과 핵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교부들의 자유롭고 지혜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나가면서

 

방대한 금언집에 담긴 사막 교부들의 삶과 영성을 제한된 지면에 소개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사막 교부들이 우리에게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오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사막 교부들은 수도생활과 수도영성의 뿌리이고, 수도영성은 그리스도 영성의 토대와도 같다. 그들의 모범적인 삶과 영적 가르침은 현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도 많은 가르침을 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더욱 다가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5년 가을호(Vol. 31),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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