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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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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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6 ㅣ No.41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1902-1977)

(1) 주님께 드리는 작은 꽃


 

라크루 신부

1909년,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들은 온통 억새로 가득했다. 라크루(M.Lacrouts) 신부는 억새를 헤치며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제주의 거친 바람이 라크루 신부의 머리며 수단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라크루 신부의 심정도 거친 바람에 펄럭이는 수단 자락과 같았다. 그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원순 제주목 검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들의 시신들.


라크루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천주교 사제이며 제주본당 주임 신부이다. 1900년 라크루 신부가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신자들의 신심과 호응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한불조약 이후, 천주교 포교 허락이 내려지자 성당은 치외법권의 성역이 되었다. 이를 악용한 일부 신자들의 경거망동이 주민들과 부딪치며 급기야 1901년, 피비린내 나는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이 발생했다. 난리는 신자들의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수세에 몰린 라크루 신부는 중국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에게 다급히 지원을 요청했고, 산지항 앞바다에 프랑스 함대가 진을 치고 섬을 봉쇄하면서 끝이 났다. 제주 거리는 신자들의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나마 목숨을 건진 신자도 목포로 피란을 갔고 형편이 안 되는 신자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1000여 명에 육박했던 신자 중 30여 명만이 라크루 신부 곁에 남았다. 산처럼 쌓인 신자들 시체를 거두는 라크루 신부의 심정은 피를 토하듯 비통했다.

그러나 신자가 아닌 제주 주민들의 피해도 매우 컸다. 프랑스 함대는 출격에 대한 피해 보상을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했고 정부는 피해 금액을 고스란히 제주 주민들에게 떠넘겼다. 어마어마한 보상금액은 주민들을 알거지로 만들었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반감은 더욱 깊어졌다. ‘신축교안’은 너나없이 제주 사람 모두에게 큰 상처였고 고통으로 남았다.

라크루 신부는 마음을 추슬러 얼마 되지 않는 신자들과 부모 잃은 신자들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성영회(聖孀會)’를 만들었다. 거리를 떠도는 비신자 아이들도 거두었다. 규모가 커지자 그는 ‘제주여학당’으로 발전시켰다. 신자들을 학살한 이들의 아이들을 돌보자 주민들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라크루 신부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영세한 보육 시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대로 된 신식 여학교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학생을 모집하기가 어려웠다. 이미 개신교 선교사가 세운 여학교가 있었다. 개신교 신자들은 공공연히 ‘천주교 신자들은 사람들의 눈알을 도려내고 어린이들의 골수를 빨고 다닌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내어 그나마 회복되어 가는 천주교인들의 평판에 찬물을 끼얹었다.

다급해진 라크루 신부는 아이 있는 가정마다 직접 방문하여 수업료도 무료이고 공부에 필요한 교과서, 학용품 모두 무료라고 선전했다. 덧붙여 신학문이 여성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일깨워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제주 주민들은 여전히, 언제 또 끔찍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 천주교인들에게 싸늘했다. 안타깝게도 라크루 신부는 학생 모집에 실패하여 절망하고 있었다.

그가 애절한 심정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고종의 사위이며 개화파의 일원으로 대신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 온 박영효 영의정을 알게 되었다. 박영효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 천주교 여학교 설립에 매우 긍정적이었다. 게다가 박영효는 제주목 검사 최원순에게 8살 된 영특한 딸이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귀띔도 해주었다. 라크루 신부는 날개를 얻은 것 같았다. 사실 좀 더 영향력 있는 고위 공직자의 자녀들이 학교에 온다면 일반 주민들은 거부감 없이 따를 것이었다. 더욱이 최원순 검사는 탁월한 판단을 지닌 사람이라고 정평이 나 있었고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여 곤경에 빠진 사람들이 그를 많이 찾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 친구들과 놀고 있는 8살의 최정숙(맨 오른쪽).


최원순과 박효원

최원순 제주목 검사의 집 마당으로 라크루 신부가 들어섰다. 집은 크지 않았으나 반듯하고 정갈했다. 하인이 라크루 신부를 최 검사의 사랑으로 이끌었다. 바로 그때 최 검사의 큰딸 정숙이 어머니 박효원 곁에서 놀다가 라크루 신부를 보게 되었다. 최정숙은 1902년 2월 10일 최원순과 박효원 사이 2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정숙의 어머니 박효원은 제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가의 딸로 마음 씀씀이가 깊고 넓어 최 검사 못지않게 주민들의 신망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정숙은 라크루 신부를 보자 어머니 뒤에 숨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검고 긴 치마를 입은 남자는 키가 무척 컸다. 짧은 머리는 옥수수처럼 노랗고 눈은 소 눈처럼 크며 수염은 길고 풍성하여 얼굴을 모두 덮었다. 정숙은 너무도 낯선 사람의 등장으로 겁이 났다. 어머니는 정숙의 등을 쓰다듬어 안심시켜주고 부엌으로 나갔다. 평소 자상하고 무엇이든 잘 알려주던 어머니가 그늘진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나가자 정숙은 걱정도 되면서 무척 궁금하였다.

어머니는 남편 최 검사로부터 박영효 어른이 정숙을 학교에 보내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박영효가 처음 제주에 도착하여 제주 사정을 잘 모를 때 최 검사 내외가 많은 도움을 주면서 퍽 가까워졌다. 어머니는 여자도 남자만큼 배울 수 있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제주는 봉건 사상이 강해 남녀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었고 여성 천대 사상이 유별났다. 어머니는 여학교가 여럿 생겼다는 소문도 들었다.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고 질문하는 요량도 남달라 상대방을 진땀 나게 하는 정숙을 어머니는 내심 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 학교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최 검사가 천주교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천주학쟁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흉흉한 기운이 아직 거리에 남아 있었다.

또한 최 검사는 정부에서 학교를 인가할 때 지도하는 수녀가 학생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고도 말했다. 사실 이 부분은 일본이 장차 계획한 식민지 교육에 종교가 걸림돌이 되지 못하도록 일찌감치 교육과 분리시킨 의도적인 지침이었다.

그렇게 부인 박씨를 안심시켰지만 최 검사도 고민이 많았다. 박영효는 최 검사에게 일본인 학교는 일본인들의 자녀가 중심을 이뤄 얻는 것보다 차별을 배울 것이니 어차피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비록 천주교이지만 신문물의 종주국이어서 얻는 바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최 검사도 수긍하는 바였다.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개화 서당들이 많았지만 일어강습소들과 늘 다투고 비방하기 일쑤여서 교육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실로 불안한 사회였다.


작은 꽃

1909년 10월 18일, 가을 하늘이 맑고 높았다. 정숙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학교 가는 첫날이라며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따주고 고운 옷도 입혀 주었다. 지금 가고 있는 학교가 정숙은 너무 궁금하였다. 어젯밤 아버지가 내일 가게 될 학교의 이름이 신성여학교라고 가르쳐주었다. 아버지에게 그 뜻을 묻자, 원래 뜻은 ‘새벽하늘에 빛나는 별’인데 학교 책임자인 라크루 신부가 알려준 뜻은 ‘길 잃은 자를 인도하는 성모 마리아의 별’이라는 것이었다.

정숙은 새벽에 빛나는 별도 근사한데 길 잃은 사람을 인도하는 성모 마리아는 누구일까 궁금해서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았다. 학교에 가면 알게 되겠지, 혹시 학교에 계시는 분일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어서 만나고 싶은 마음에 정숙은 아버지의 손을 재촉하듯 끌었다.

신성여학교 마당에는 부모 손을 잡고 온 여학생들이 소문보다 많았다. 정숙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누가 성모 마리아일까 하고 둘러보았다. 그때 집에 왔었던 라크루 신부가 보였다. 그 곁에 하얗고 커다란 왕관을 쓴 수녀 두 분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정숙에게 다가왔다. 라크루 신부의 요청으로 서울의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온 김 아나타시아 수녀와 이 곤자가 수녀였다. 정숙은 수녀들의 손을 잡고 여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면서 성모 마리아가 누구냐며 소곤소곤 물었다. 수녀들은 깜짝 놀라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필자의 말

자선이란 얼마나 풍요로운 말인지,
빈곤이란 말은 두렵다.
희생은 남이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입으로 머리로 가슴에 십자가를 그으며
그리스도를 닮기 열망하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워하고 망설이고 외면한다.

최정숙 베아트리체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스도처럼
아무 조건 없이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고 보살폈다.
그리스도를 통해 배운 자선과 희생과 빈곤을
평생을 통해 실천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매일 넘어지고
바닥까지 미천해지는 삶을 이어간다.
그래서
최정숙 베아트리체의
빛나는 업적을 나열하기보다
인간적 고뇌와 좌절과 고비마다
주님께 의지하고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미약함에 중심을 두었다.

그의 절망을 위로해 주시고 감싸 안으신
주님을 함께 만나보고자 한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26일, 이미애 작가(데레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1902-1977)

(2) 길 잃은 이들을 인도해 주는 성모 마리아의 별


 

조랑말 탄 김 아나타시아 수녀와 이 곤자가 수녀.


아나타시아와 곤자가

김 아나타시아 수녀와 이 곤자가 수녀는 조용히 신성여학교 곁의 성당으로 정숙을 이끌었다. 성모상 앞에 이르자 두 수녀는 정숙의 손을 놓고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정숙은 두 수녀의 모습을 난생처음 보는데도 아름답고 고결해 보였다. 정숙도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정숙은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하여 공부하는 속도가 남달랐다. 정숙 자신도 공부를 통해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이 신이 났다. 배우는 만큼 아는 것도 많아지고 마치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물방울을 만들어가듯이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좋았다. 공부뿐 아니라 라크루 신부와 김 아나타시아 수녀가 지도하는 영성 생활도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정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김 아나타시아 수녀와 이 곤자가 수녀를 따라 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조잘대던 말수도 조금씩 줄어들고 호기심에 반짝이던 눈망울엔 진지함이 깊어갔다.

정숙은 남들보다 일찍 등교했다. 성모상 앞에 꽃을 한 아름 꽂고 기도를 드린 다음 교실 청소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숙은 기뻤다. 정숙은 두 수녀의 헌신과 겸손을 그대로 배워가고 있었다. 두 수녀의 헌신적인 태도는 정숙뿐 아니라 학부모들까지 숙연하게 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일이 많아 학교에 오지 못하는 학생이 생기면 두 수녀는 바로 조랑말을 타고 달려갔다. 아무리 멀어도, 돌투성이 길이 험해도 마다치 않았다. 그 자리에서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일을 거들어주고 학생을 학교로 데려왔다. 변덕을 부리는 학부모 앞에서는 지쳐 하는 내색 없이 늘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모습들이 정숙의 마음에 크게 자리 잡았다.

1910년, 경술국치가 되고 1912년 일왕이 죽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조표를 단 학생들에게 두 수녀는 처음으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 잃은 슬픔을 자세히 설명하고 절대로 애국과 민족독립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 일은 어린 정숙에게 매우 중요하게 새겨졌다.

정숙은 강평국과 고수선이라는 단짝도 사귀었다. 정숙보다 두 살 위인 강평국은 얼굴도 예쁘고 키도 훤칠하고 공부도 잘했다. 평국은 신축교안 난리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라크루 신부 곁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한 사람이라고 했다. 고수선은 평국보다 더 나이가 많았지만, 수선의 어머니가 신자로서 힘을 다해 가르치려 애썼다. 세 사람 모두 수녀들의 가르침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따랐다. 정숙은 평국과 수선과 함께 성모님 앞에 꽃을 꽂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모아 기도드리는 생활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최정숙(왼쪽에서 두번째).


베아트리체

1913년, 정숙이 12살이 되자 수녀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세례를 받아도 좋다고 말했다. 평국과 수선은 마치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척 기뻐했다. 정숙도 기쁜 마음으로 한달음에 아버지 최 검사에게 달려가 세례를 받겠노라고 말했다. 최 검사는 처음으로 정숙에게 싸늘하고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숙은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도 그늘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최 검사는 정숙의 세례를 절대 승낙할 수 없었다. 예전보다 신자들에 대한 주민들의 감정이 많이 누그러졌다고는 하나 그렇지 않았다. 신자들은 귀한 식수를 제때 얻을 수 없었고 불씨가 꺼져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농사를 지어도 신자들끼리만 주고받을 뿐 시장에서 돈을 만들지 못했다. 심지어 신자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최 검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숙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세례를 받고 싶었다. 사람들이 천주교를 욕하고 두려워하지만, 정숙의 눈에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아주 친절하고 좋은 분들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무시하지 않으며 어른을 대하듯 예의를 갖추었다. 제주에서 어린아이나 여자는 무시당하고 천대받기 일쑤였다. 그래서 정숙은 두 수녀처럼 인자한 교사가 되고 싶었다. 정숙의 애절한 간청으로 어머니의 묵인 아래 정숙은 세례를 받았다. 부모가 신자가 아닌 경우 세례를 받으려면 반드시 부모의 허락서가 있어야 했지만 두 수녀는 정숙의 보증을 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정숙의 세례명은 ‘베아트리체’였다. 그 이름에는 ‘복 받은 여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숙은 세례를 받으며 성모님과 천주님께 맹세했다.

“부디 마음과 몸을 오롯이 주님께 바치오니 기꺼이 받으시어 동정녀로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최 검사는 정숙이 졸업반이 되기 전에 조상의 고향 평안북도 군수가 되어 집을 떠났다. 박영효도 귀양살이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제주 살림을 청산하며 자신이 살던 집과 ‘독짓골’에 이룬 농장과 작은 마을을 최 검사 내외에게 모두 주고 떠났다. 그러나 최 검사도 없이 어머니는 혼자 집안 살림에 독짓골 농사까지 더해져 해가 저물도록 일이 손에서 떠나질 않았다.

제주 산지항 풍경.


산지항

어느새 정숙의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단짝 강평국과 고수선은 서울 경기여고로 진학하게 되어 한껏 들떠 있었다. 같이 기도하고 꿈을 키운 친구들이기에 그들도 정숙에게 같이 가자고 졸랐다. 정숙도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공부하러 가고 싶었다. 제주에는 여자고등학교가 없어 공부는 졸업과 함께 끝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도 없이 혼자 일에 지쳐 허덕이는 어머니를 보면 차마 자신마저 공부하러 떠나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그러나 정숙의 눈치를 알아챈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편지로라도 허락을 받으라고 말하자 정숙은 뛸 듯이 기뻤다. 당장 아버지에게 간곡한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기다리던 아버지의 답장이 도착했다. 공부는 그만 됐으니 어머니를 도와 시집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정숙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정숙은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편지를 썼다. 그러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하루도 쉬지 않고 편지를 썼다. 같은 대답이 쉬지 않고 돌아왔다.

1914년 3월 25일 신성여학교 1회 졸업식이 있었다. 그리고 평국과 수선이 서울로 가려고 산지항에서 배를 기다렸다. 정숙은 타들어 가는 마음으로 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눈물의 이별을 하고 친구들을 태운 배가 점점 멀어져 완전히 사라지자 정숙은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눈물 사이로 차가운 바닷속에서 자맥질하는 해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호흡을 참았다가 물 밖으로 나올 때 내는 숨비소리가 서럽게 들렸다. 정숙은 여자들에게 배울 기회조차 주지 않는 제주가 너무 야속했다. 제주 속담에 ‘여자 팔자 소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다. 정숙의 오빠 남식은 서울 유학 중이었다. 정숙이 남부럽지 않은 최 검사의 딸이더라도 여자는 여자였던 것이다. 제주 여자로 태어나 배움 없는 고단한 현실 속에 자신이 있다니 견딜 수가 없었다. 정숙은 집으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썼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학교에 찾아가 성모님 앞에서 오래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1915년, 서울에서 ‘한일합방 기념 박람회’가 열렸다. 어머니는 정숙에게 친구들도 만나고 아버지도 직접 만나 답을 듣고 오라고 했다. 정숙은 눈물의 산지항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친구들을 만나 박람회 구경을 서둘러 마치고 아버지를 만났다. 정숙은 먼저 아버지에게 이제까지 배운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서울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야무지게 말했다. 아버지 최 군수도 정숙이 누구보다 잘해낼 것을 알았다. 그러나 수녀가 되겠다는 정숙의 꿈을 알기에 허락할 수 없었다. 정숙은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제주로 내려와 그대로 누웠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주로 잠시 출장 내려온 최 군수는 야윌 대로 야윈 채 누워 눈물만 흘리는 정숙을 보고 결국 서울 유학을 허락했다.

서울로 가기 위해 산지항을 떠날 때 정숙은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이 절절히 느껴졌다. 여전히 산지항 바닷속에는 숨비소리를 내며 물질하는 해녀들이 있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왔다.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제주 여성들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 꼭 돌아오리라! [평화신문, 2015년 5월 3일, 이미애 작가(데레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1902-1977) 

(3) 주님, 누구를 위해 등불을 밝힙니까


 

서울 유학 시절의 제주 친구들 (맨 왼쪽).


민족차별주의자

정숙은 1915년 10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아 서울 유학길에 들어섰다. 그만큼 정숙의 각오는 비장했다. 제주의 외딴곳에서 순진하게 지내던 태도를 완전히 벗어버려야 했다. 두려웠다. 그러나 두려움의 다른 이름은 용기라고 했던가. 두려운 만큼 맹렬하게 투지가 타올랐다.

그런데 수업 첫날, 정숙은 절망했다. 일본어 자체가 처음인데 모든 교과목이 일본어였다. 일본어가 국어이고 일본 역사를 외워 시험을 보았다. 교사들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학생 누구나 겪는 일이 아닌, 정숙만의 어려움이고 돌파해야 할 첫 관문이었다. 정숙이 공부하려면 무엇보다 일본어를 알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명동성당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정숙에게 숙소를 제공한 것이었다. 내 집처럼 편안했다. 정숙은 밤새워 공부하고 수녀들과 새벽 미사를 드리고 학교에 갔다. 저녁이면 다시 수녀들과 시간 전례를 바치고 밤새워 공부했다. 드디어 정숙은 편입한 지 두 달 만에 2등을 거머쥐었다.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도 깜짝 놀랐다. 모두 정숙의 비범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정숙은 그로부터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3학년이 되자 정숙은 급장을 맡았다. 공부도 잘하지만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매사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처리하여 학생들은 정숙을 믿고 좋아했다. 어느 날, 일본인 여교사가 불우한 조선 학생의 수업료를 도와준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일본인 교사들은 여교사를 따돌리고 전근까지 보내려 했다. 정숙은 스승이 제자를 도운 일이 왜 잘못이고 일본인이 조선인 제자를 안타까워하면 왜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배움의 터인 학교에 차별이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숙은 학생들에게 여교사를 지지하는 뜻으로 수업 거부를 도모하고 학생 대표 자격으로 조선인 엄순원 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 당시 교장보다 실세였던 일본인 부교장은 정숙을 괘씸하고 당돌하게 보아 퇴학조치를 했다. 그러나 정숙을 아끼던 교장은 부교장을 설득하여 반성문을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정숙은 부교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한 달간 반성문을 써야 했다. 정숙은 민족 차별의 잔인함과 비애를 뼛속 깊이 실감하고 이를 악물며 가슴에 새겨놓았다. 얼마 후, 교장의 조카이자 고종의 아들인 이은 왕세자가 일본에서 잠시 귀국하여 진명여고보를 방문하게 되었다. 학생 대표인 정숙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는 비운의 이은 왕세자에게 백성들이 얼마나 왕세자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애틋한 마음을 담아 환영사를 읽어 나갔다. 왕세자와 교장은 크게 감동하였다. 학생들과 교사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강평국과 타자 연습하는 정숙(왼쪽).


79결사대

정숙은 진명을 졸업하고 곧바로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단짝 평국과 수선도 경성여고보 사범과에 함께 진학해 드디어 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경성사범에는 민족차별주의자들이 진명여고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정숙은 그들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정숙은 더 강해졌고 뜻이 통하는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승하하였다. 경복궁 대한문 앞은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통곡 소리로 가득했다. 독살설도 나돌았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사람인 박희도 선생이 의식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79결사대를 조직했는데 경성사범 사범과 최정숙, 강평국, 본과 최은희가 주축이었다. 79결사대는 고종의 승하를 조문하기 위해 검정 통치마를 잘라 까만 댕기와 조표를 만들어 조선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대한문으로 나가 엎드려 통곡하였다.

2월 28일, 정숙과 평국과 최은희는 박희도 선생의 집으로 갔다. 다음 날인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학생들을 이끌고 나오라고 했다. 세 사람은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고 학교로 돌아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학생들 모두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새벽이 되자 이 사실을 입수한 일본인 교사들이 교문을 잠그고 학생들을 가두었다. 속절없이 애만 태우던 학생들은 멀리서 만세 소리가 들려오자 흥분을 참지 못하고 기숙사 창고로 달려갔다. 도끼와 연장을 꺼내와 교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교문이 열리자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으로 내달렸다. 정숙과 평국도 달려나갔다. 정숙은 너무 기뻐 목청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일본 기마병들이 순식간에 나타나 총을 쏘며 학생들을 짓밟았다. 무자비한 구타와 말발굽에 밀려 정숙과 평국은 흩어졌다. 정숙은 군중 속으로 들어가 만세를 부르며 진고개를 넘고 있었다. 느닷없이 정숙의 머리채가 일본군의 손에 휘감겼다. 일본군은 사정없이 정숙의 뺨을 거푸 후려치고 군화로 짓밟았다. 이어 머리채를 잡고 남산 정무총감부까지 질질 끌고 갔다. 옷이 찢어지고 살이 쓸려 피가 흘렀다. 총감부에 32명의 학생이 잡혀 와 있었다. 교장이 달려와 일본군에게 사정하자 주모자로 추정되는 정숙과 은희만 남기고 모두 풀려났다.

정숙은 한낱 짐승처럼 고문실에 내동댕이쳐졌다. 연락책과 주모자를 대라며 고문이 시작되었다. 거꾸로 매달아 코에 물을 부었다. 손가락 사이에 쇠막대를 끼워 비틀었다. 정숙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린시절 이 곤자가 수녀에게서 들었던 순교자들이 떠올랐다.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과 함께 기도가 흘러나왔다. 고문은 더 악랄해지고 정숙의 정신은 성모님께로 달려가고 있었다. 일본군은 정숙에게 옆방의 최은희가 다 불었으니 너도 이제 다 불으라고 유인했다. 정숙은 은희가 말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설령 고문에 못 이겨 은희가 불었다 해도 일본군 따위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고문당하다 죽는 일이 있어도.

제주의 어머니가 정숙이 독립운동하다 잡혀 옥살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제주도도 일본군의 만행이 지독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다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2632

만신창이가 된 정숙은 총감부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죄수 번호 2632를 가슴에 달았다. 막상 감옥에 갇히고 죄수복을 입자 정숙은 뭐 하나 이루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구나 하고 절망했다. 감옥 문이 열리고 은희가 들어왔다. 은희가 다 불었다는 일본군의 말은 거짓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서러움이 복받쳐 손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정숙과 은희는 자신들 말고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잡혀 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다며 힘을 내 꼭 살아 돌아가자고 서로 격려했다.

서대문형무소는 지옥이었다. 매질 소리와 비명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지 보름쯤 지나자 형무소장이 정숙을 불렀다.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장을 받게 해줄 터이니 너그러운 일본 천황께 감사하고 충성하라고 말했다. 정숙은 풀려났다. 정숙은 선심 쓰듯 말하는 소장이 얄밉고 비위가 상했다. 이 모두가 민족의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석방의 후련함도 잊고 그저 분하기만 했다. 안타깝게도 은희는 석방되지 못했다.

학교에 돌아오자 평국과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안도하며 기뻐했다. 평국은 헌병들에게 쫓겨 어느 가정집에 숨었는데 집주인이 기지를 발휘해 평국을 새색시로 위장하고 병풍으로 가려줘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했다.

졸업식이 다가오자 정숙은 마음이 굳어졌다. 정숙은 평국에게 일본 국가를 부르며 일장기에 절을 하고 일본인들로부터 받는 졸업장은 치욕이라고 말했다. 평국도 그런 졸업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지 않다며 정숙을 거들었다. 정숙은 당장 제주로 내려가 배우려는 사람들을 모아 야학을 만들자고 했다. 지금 우리 민족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알려주고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정숙과 평국은 두 손을 꽉 잡고 졸업식을 뒤로 한 채 제주로 내려왔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정숙은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쓰러졌다. 모진 고문과 옥살이가 정숙을 극도로 쇠약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한 정숙이 자랑스럽다 하였지만, 정숙의 처참한 몰골을 대하니 억장이 무너지고 심장이 녹아내렸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10일, 이미애 작가(데레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1902-1977)

(4) 어두움의 빛은 너무 밝습니다


 

최정숙


어둔 밤의 의미

정숙의 어머니는 지극 정성으로 딸을 돌보았다. 서울로 유학 가고 싶어 그토록 애쓰고 장학금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졸업장도 없이 혼이 나간 듯 누워 있는 정숙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 할 도리를 한 것인데 정작 본인의 심정은 오죽할까. 어머니는 정숙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우편으로 졸업장과 교사 자격증이 배달되었다. 졸업식에 불참한 정숙과 평국의 마음을 헤아린 담임 선생님의 배려였다. 정숙은 자리를 걷고 일어났다. 자신을 믿고 응원하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때 일본군이 정숙을 찾아왔다. 서울의 경성지방검사국에서 보낸 호송관이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모든 것이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재판이라니…아직 성한 몸도 아닌데 징역형이라도 받으면 옥살이를 어떻게 감당할까…. 앞이 캄캄했다. 정숙도 미래를 알 수 없는 절망감에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는 심정처럼 고통스러웠다.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하자 79결사대의 전모가 드러나고 모든 혐의는 정숙에게 씌워져 독방에 수감되었다. 정숙은 사상범으로 찍혀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정숙은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있었다. 빛 한줄기 없는 어두움과 살이 터져나가는 혹독한 냉기, 자존도 잃은 배고픔으로 비참했다.

아무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있었다. 끝없는 어둠 속 그 끝에 주님이 계셨다. 주님은 정숙과 마주하시고 정숙을 물끄러미 보셨다.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도 주님은 정숙의 흐느낌을 들어주셨다. 기도를 받으셨으며 차가운 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정숙을 일으켜 세워주셨다. 가혹한 고문과 취조로 내동댕이쳐진 채 몇 날이고 혼절해 있으면 정숙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정숙은 조금씩 정신이 맑아지면서 어둠에 익숙해져 갔다.

문득 정숙의 귀에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치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다른 감방으로 퍼져 나갔고 형무소 안은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이화여전 유관순이었다. 일본군이 철창문을 열고 들어가 방망이를 마구 휘둘러댔다. 방망이 부딪는 소리와 비명이 만세 소리와 뒤엉켰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 사건 이후 일본군의 고문과 취조는 더욱 악랄해졌다. 정숙은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나라를 위해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다.

수감 생활 여섯 달이 지날 무렵 모교인 진명여고의 부교장이 정숙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숙을 석방하기 위해 모교에서 모금 운동을 펼쳐 100만 원을 모아 드디어 가석방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형무소를 나오자 진명의 은사들이 두부를 들고 서 있었다. 정숙은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설움이 복받쳤다.

정숙을 석방하기 위해 모금 운동이 펼쳐져 100만 원이 모였고 정숙은 은사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설움이 복받쳤다. 사진은 서대문형무소 벽과 창살. 정숙은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을 보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바람을 움켜잡는 일

정숙의 건강은 형편없이 나빠졌다. 쉴 새 없는 고문으로 장이 터져 복막에 눌어붙어 버렸다. 정숙이 돌아오자 어머니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온 제주를 샅샅이 뒤졌다. 고문 독에 좋다는 것은 귀하든 흔하든 모조리 구해 정숙을 돌보았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겨우 일어나 앉게 되자 호송관이 재판을 받으라며 정숙을 다시 잡아갔다. 어머니는 넋을 잃었다.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3ㆍ1 만세 소요 공판이 열렸다. 정숙은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8개월을 이미 형무소에서 보낸 정숙은 곧바로 석방되었다. 제주로 돌아온 정숙은 다시 어머니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고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정숙과 평국은 먼저 신성여학교를 다시 열자고 했다. 신성여학교는 두 사람이 서울 유학 중일 때 라크루 신부가 전주로 부임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가 문을 닫아 버렸다. 신성여학교가 민족 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이 요구하는 식민 교육을 등한시했다는 이유였다.

정숙은 신성여학교 동창들과 힘을 모아 1920년에 여자 장학회를 조직하고, 1922년엔 ‘여수원(女修園)’을 열었다. 신성여학교를 되찾을 초석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주간은 초등 과정 60여 명, 야간에는 여성들과 나이 든 문맹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습소로 운영했다. 여수원에서 공부하는 학생 수가 주ㆍ야간을 합쳐 200명이 넘었다.

정숙과 평국은 여수원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다. 평국은 성격이 불같아 학생들이 잠시라도 게을리하면 당장 혼쭐을 냈다. 평국에게 야단맞고 풀이 죽은 학생들을 정숙은 따스하게 다독여 다시 힘을 내도록 격려했다. 정숙과 평국은 오래전의 김아나타시아 수녀와 이곤자가 수녀 같았다.

여수원의 소문을 듣고 남학생들도 공부하고 싶다며 모여들었다. 정숙은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과 함께 남학생을 위한 ‘명신학원’을 열고 여수원과 합쳤다. 일본군 눈에 명신학원은 눈엣가시였다. 일제는 민립학교를 민족 교육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명신학교와 정숙을 늘 감시했다.

정숙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단에 섰다. 회복도 되지 않은 몸으로 격무에 시달리더니 결국 자리에 눕고 말았다. 정숙을 진찰한 도립병원 의사는 한시라도 빨리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정숙은 명신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의사는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영영 교단에 서지 못할 수도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정숙은 그 길로 서울의 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치료에 들어갔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일본군은 정숙이 없는 틈을 타 명신학교를 제주공립보통학교로 흡수시켜 버렸다. 관립학교는 일제의 요구대로 식민지 교육을 우선으로 가르쳤다. 병원에서 이 소식을 들은 정숙은 크게 상심하였다. 단짝 평국도 명신학교가 없어지자 억압받는 민족을 위해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의술을 배우고 돌아오겠다며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로 입학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어둠의 광채

병원에 입원한 정숙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수습하는 과정이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병도 깊었고 마음의 길도 어두웠다. 그렇게 공을 들인 명신학교를 잃고 정숙은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병이야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하면 나아지겠지만 자신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정숙은 진명여고 시절처럼 해를 마주하고 별을 보면서 기도로 모든 시간을 봉헌했다. 어린 시절 순수하고 기쁜 마음으로 천주님께 헌신하겠다고 성모님 발 앞에 엎드려 서원했었다. 어쩌면 진작 수녀원에 들어가 주님이 비춰주시는 길을 따랐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나가면 수녀원에 입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 밝은 빛이 비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녀가 되려는 정숙의 기대는 무너졌다. 수도자가 되려면 정치적인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데 정숙은 정치범으로 형을 받아 자격이 안 되었다. 나라를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가고자 하는 길에 족쇄가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수녀원에서 정숙을 거절한 것이었다.

빛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수녀가 될 수 없다니….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이제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숙은 성모님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원망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가슴이 저렸다.

‘그랬다면 만세를 안 불렀을 것 같으냐.… 수도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면 만세를 안 불렀을 것 같으냐….’

정숙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만세를…불렀을 겁니다.”

정숙은 말을 마치고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어 성모님을 바라보았다. 성모님이 지그시 바라보셨다.

빛이 다시 밝아지고 있었다. 주님의 뜻이었다. 정숙의 잘못이 아니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분이시다. 정숙은 깨달았다. 주님께서 준비하신 다른 일이 있음을. [평화신문, 2015년 5월 17일, 이미애 작가(데레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1902-1977)

(5)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나바위 성지에서 학생들을 인솔하는 최정숙(왼쪽).


일어나거라

1925년 4월 봄기운이 완연해졌다. 긴 겨울 지루한 병원 생활을 털고 정숙은 제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도 정숙은 할 일이 없었다. 정숙을 불러주는 교육 시설은 없었다. 사상범이라는 꼬리표가 어렵게 얻은 교사 자격증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정숙이 아니었다. 뜻이 통하는 동창들과 제주 여성들의 희망을 일깨워주기 위한 ‘제주 여자 청년회’를 조직했다.

겨울잠에서 깨어나듯 지난했던 과거 일은 제주의 세찬 바람에 날려 버리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려는데 1925년 8월 11일 라크루 신부가 선종하였다. 처음 신성여학교를 세우며 정숙을 찾아 대문을 성큼 들어섰던 키 큰 신부를 정숙은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됐다. 오로지 천주님을 향한 마음 하나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눈물과 영혼과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신자들과 그 식솔들을 보살폈다.

제주본당에서 마련한 라크루 신부의 장례 미사에 정숙은 신부님 약력을 소개하도록 초청되었다. 목이 메었다. 신축교안을 겪으며 그토록 많은 신자의 주검을 거둬 장사지내는 마음이 어떠했을지…, 신부님의 통곡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담담히 지고 가신 분이라는 생각에 고개가 숙여졌다.

장례식장에 참석한 목포 소화학교장이 정숙을 보고 반색했다. 그동안 정숙의 활동을 익히 안다며 소화학교 아이들을 지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학교장 재량이 가능한 사립학교 교사직을 정숙은 흔쾌히 승낙하였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일이었다. 제주여자청년회의 동창들도 모두 기쁜 마음으로 정숙을 응원했다.

목포 소화학교에서 정숙은 일반 교과 과정과 함께 학생들의 영신 지도를 담당했다. 어린 시절, 김 아나타시아 수녀와 이 곤자가 수녀로부터 배웠던 모든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두 분 수녀의 솔선수범을 보며 수도자의 꿈을 키웠듯이 소화의 학생들도 정숙의 고결한 정신과 순결한 성심을 보며 감동받았다. 정숙의 그런 모습을 보며 많은 학생이 수녀원으로, 신학교로 진학했다. 정숙은 마치 자신이 꿈을 이룬 것처럼 행복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육신은 이제 지병이 되어버린 복막협착에 시달려 고달프기만 했다.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당장 제주로 내려오라고 성화를 했지만, 정숙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그러다 정숙은 동생 계숙의 비보를 듣고 제주로 급히 갔다. 정숙과 가장 많이 닮고 정숙을 끔찍이 따랐던 동생이었다. 서울 유학 중 병을 얻어 손도 써보지 못하고 절명했다고 했다. 정숙은 무엇보다 어머니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정숙의 슬픔이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픔에 비할 수 없었다. 목포에서는 정숙의 급작스런 부재로 학사 일정에 차질이 생겨 급한 전갈이 인편을 통해 수시로 오갔다. 난처해 하는 정숙을 보고 어머니는 계숙의 몫까지 열심히 살라며 정숙의 등을 떠밀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목포에 도착하자 반가운 손님이 정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평국과 탁구 경기(왼쪽이 최정숙)


‘조국의 산하’

정숙을 그토록 기다린 사람은 전주의 김양홍 신부였다. 김 신부는 라크루 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 때 본국으로 송환되자 제주본당 주임 사제로 부임했었다. 그때 정숙의 활동과 의지를 눈여겨보아 두었는데 전주로 부임해 목포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숙의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김 신부는 정숙에게 전주의 혜성학원으로 와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들의 신심이 워낙 뜨거워 영적 지도를 제대로 이끌어 줄 사람이 딱 정숙뿐이라고 했다. 물론 소화학교에서도 정숙을 보내기 아쉬웠지만 김 신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1932년 4월, 정숙은 혜성학원으로 부임했다. 정숙은 소화학교에서 이미 학생을 지도한 경험이 있어 혜성학교에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소녀회를 조직해 교리 공부와 봉사 활동을 접목시켜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했다. 신앙을 현실 속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전교도 활발히 나섰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신앙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지도하는 정숙에게 감동받았다. 전주 시내에 소문이 퍼져 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정숙은 학생들의 노력을 뽐낼 예술제를 마련했다. 볼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전주의 많은 시민이 기대에 부풀었다. 정숙은 학생들에게 ‘조국의 산하’라는 합창곡을 지도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으나 언젠가 꼭 되찾아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노래하자는 의미라고 알려주었다. 학생들은 정숙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나라를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예술제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노래가 끝나자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다.

감격적인 행사가 모두 끝나고 교사들이 돌아가려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본군이 정숙을 체포하여 끌고 갔다. 김 신부가 일본군의 팔을 잡으며 쫓아갔지만 소용없었다. 정숙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하여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일본군이었다. 정숙은 유치장에 바로 수감되었다. 학생들을 선동해 불순한 노래를 지도했다는 죄였다. 언제나처럼 정숙은 의연했다. 내 나라에서 내 나라말로 내 나라 학생에게 노래를 가르친 것이 무슨 죄냐고 매섭게 맞섰다. 정숙을 면회한 김 신부는 놀랍도록 수척하고 병색이 완연한 정숙을 보자 교사들과 학부모들을 독려해 헌신적인 구명 활동을 펼쳤다. 지독한 일본군은 정숙이 교편을 놓는다는 조건으로 풀어주었다.


광야에서

1933년 8월 12일, 정숙의 절친한 동료이며 든든한 후원자였던 강평국 아가다가 37세의 나이로 주님 품에 안겼다. 일본 유학 중에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리다 폐렴이 악화되어서였다. 정숙과 함께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와 여수원과 명신학원을 세워 신성여학교의 재기를 불태웠었다. 일본군에 의해 명신학원이 사라지자 평국은 원대한 꿈을 품고 일본의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제주 여성 최초의 유학생이 되었었다.

평국은 일본 도쿄에서 여성청년동맹 초대 집행위원장을 맡아 맹렬하게 지하 독립운동을 펼쳤다. 여성단체인 근우회를 조직하여 도쿄지회의 의장단으로 활약했다. 의학 공부도 만만치 않은데 지하 운동까지 하려니 감기가 폐렴이 되도록 몸을 돌보지 못했다. 밤을 새워 의학 공부를 하면서도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몸이 아파도 돌봐줄 사람이 없어 결국 폐렴이 늑막염이 되자 급히 군대환(君代丸, 1922년부터 제주와 오사카를 정기적으로 오갔던 여객선)을 타고 제주의 80세 노모의 품에 안겼다. 노모의 지극정성과 동창들의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평국은 눈을 감았다.

평국은 정숙보다 두 살 위이지만 자신의 활달하고 불같은 성격과 사뭇 다른 정숙의 진지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늘 존중해 주었다. 정숙 또한 평국의 천재적 영민함과 두둑한 배짱을 늘 부러워했었다. 정숙이 평국에게 손을 내밀면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한달음에 달려왔었다. 정숙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도왔다.

정숙은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을까. 정숙은 전주에서 평국의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평국이 죽자 마치 날개 잃은 새처럼 정숙은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평국의 병이 도쿄에서의 무리한 독립운동과 의학 공부에 있었다니 허망하기까지 했다.

정숙은 평국이 그처럼 허무하게 가버린 것을 두고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주님은 조선의 독립에 없어서는 안 될 거목 평국을 왜 그렇게 빨리 데려가셨단 말인가. 병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평국 대신 거두어 가셨어야 했다. 주님의 깊은 뜻은 무엇일까. 정숙은 평국의 허무한 병사와 자신의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육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국처럼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동생 계숙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병의 끝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평화신문, 2015년 5월 24일, 이미애 작가(데레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1902-1977)
 
(6) 굶주리고 헐벗은 우리의 예수님


 

부름의 길

역설적으로 평국의 죽음은 정숙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병석(病席)의 정숙을 볼 때면 평국은 아픈 사람이 제일 서럽다며 놀리듯 말했었다. 자신은 병든 사람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어 정숙의 병도 거뜬히 낫게 해주마고 호기롭게 말했었다. 정숙은 냉정해져야 했다. 사상범이어서 공립학교의 길은 요원했다. 사립학교 교사도 학교 관계자의 배려가 있어야 가능하니 그도 폐가 되었다. 더욱이 복막협착의 통증이 발작하며 밀려오면 야단스레 들것에 실려 나가 병원에서 여러 날 진정해야 했다. 학생들 보기 민망한 일이었다.

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른일곱의 나이가 학생이 되기에 너무 늦은 건지도 모른다. 정숙은 그런 시시한 핑계는 털어버리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아버지 최원순은 일제하의 고위관직이 몹시 비위가 상해 관을 떠나 제주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 번창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 늙어 새삼 의사가 되겠다는 딸에게 당장 시집가라고 호통을 쳤다. 혼처도 여럿 받아 놓았다. 그러나 딸의 깊은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어머니는 여자라고 다 시집가서 일부종사하는 삶만 있는 것은 아니라며 정숙에게 네 갈 길이 보이면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고 지지해주었다.

어머니의 심적, 물적 큰 도움으로 서울에 도착하고 보니 아버지의 반대보다, 뒤늦은 공부보다 더한 고비가 정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 입학하려면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일본은 조선의 민족자존을 모조리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지독하게 밀어붙였다. 경성여고보 시절 일본 국가를 부르며 졸업장을 받는 것은 수치라며 포기하고 제주로 내려왔던 정숙이었다.

정숙은 텅 빈 성당에서 성모님께 자신의 갈 길이 어디인지 알려 달라고 기도했다. 눈물이 흘렀다. 정숙의 눈앞에 퍼렇게 죽어가던 평국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해맑게 웃던 계숙의 얼굴도 떠올랐다. 도리가 없었다. 정숙은 이를 악물고 입학했다. 굳은 머리지만 혼을 다해 공부했다. 물론 악화된 건강이 몇 번이고 정숙의 발목을 잡았다.

정숙은 의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영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혜화동성당의 오기선 신부를 만나 프란치스코 3회(현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이 된 것이다. 천주님의 뜻에 따라 수도자의 길을 걷지 못했지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의 삶은 수도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삶은 독립운동으로 형을 집행 받아 수녀가 되지 못한 정숙에게 하늘이 열리는 일이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평생을 동정녀로 살면서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삶의 동력을 프란치스코 3회에서 찾은 것이었다.

5년의 의사 공부 끝에 의사고시도 무사히 합격하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성모병원 수련의로 내정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학제가 바뀌어 6년제이던 중고등 과정이 7년제가 되어 있었다. 정숙은 학력이 1년 부족해 의사 면허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중고등 과정 1년이 더 필요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이화여고 교장이 정숙에게 위생감으로 1년 재직하면 이화여고 4년 졸업장을 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이화여고생들은 정숙을 선생님이라거나 아주머니라고 부르고 시험 때는 친구처럼 대했다. 정숙은 42세 나이에 중고등 과정을 졸업하고 경성의전을 1회, 2회 연속 졸업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정화의원

정숙이 서울 성모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할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일본군은 연합군을 저지할 최후의 보루로 제주를 정해 20만에 달하는 병력을 주둔시켰다. 제주는 바람 앞에 촛불이었다. 소문만 무성하고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정숙에게 죽어도 같이 죽자며 당장 짐을 꾸려 내려오라고 성화를 했다. 일본군이 제주를 폐쇄하면 다시 못 볼 수도 있었다. 정숙은 좀 더 의술을 연마하려던 의지도 접고 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을 헤아려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에 오자마자 정숙은 성당부터 찾았다. 듣던 대로 성당은 일본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본은 제주도 내 반일 세력을 축출한다며 적국인 아일랜드 선교사들과 신부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옥사시켰다. 그 일은 교회 안팎을 뒤숭숭하게 했고 충격도 컸다. 정숙은 성모님께 하루라도 빨리 성당에서 주님만을 위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944년 10월, 정숙은 삼도리 천주교회 옆, 신성여학교 자리 그 곁에 ‘정화의원’을 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이 아프다며 병원 문을 들어설 때 정숙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의도했던 뜻이 무엇인지 마침내 알았다. 그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보였다. 정숙은 주님을 대하듯 정성을 다해 돌보며 치료했다. 정숙은 부유한 이들보다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정성을 들였다. 여의사가 친절하게 치료해 준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고 아픈 아이들을 데려오는 아낙네들이 병원과 입구에 가득했다.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고 민간처방이나 미신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치료해 줄 수 있어 정숙은 기뻤다.

환자가 많아지자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항생제와 설사 환자에게 줄 수액이 턱없이 부족했다. 제주는 일본의 전쟁 준비에 떠밀려 곳간이 텅 비었고 남자들은 강제 징용당해 동남아 전쟁터로 끌려가거나 군수공장 노동자로 보내졌다. 생계는 오로지 아낙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주민들은 일본이 요구하는 물자를 대느라 뼛골이 휘었다.

일본 식민당국은 정화의원의 정숙에게 ‘야전 군의관’이란 감투를 씌워 병든 병사들을 치료하게 했다. 한복 차림으로 왕진 오는 정숙을 보고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 군속들이 헌병의 눈을 피해 정숙에게 몰려들었다. 다치고 병들어 쓸모없게 된 조선인 군속들은 비참한 몰골로 군병원 마당에 버려져 있었다. 매일 수십 명의 군속들이 새벽부터 정화의원으로 몰려들었다. 정숙은 치료는 물론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챙겨주었다. 정숙은 후원자도 없이 무료로 치료해주고 먹이고 입혔다. 정숙의 쌀독에 쌀이 떨어지면 어머니가 독을 채워주었다. 필요한 약품은 동창이나 제자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번갈아 구해주었다. 정숙은 제주의 유지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답을 물려받았다. 물론 형제자매의 깊은 이해와 아량이 있어 가능했다. 정숙은 물려받은 전답을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팔아 병원을 찾는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먹이고 입혔다. 또 어린아이들의 약과 분윳값을 충당했다. 어머니는 정숙의 자애를 자랑스러워했다. 형제자매들도 정숙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침묵의 해방

일본이 대승전하고 있다는 선전과 달리 모든 전선에서 일본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비행장을 건설하는 부역과 바닷가를 참호로 건설하는 일로 제주 주민들 모두 동원되었다. 부상자도 급격히 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하였다. 일왕이 항복하자 미군은 초읽기 중이던 제주 공격을 즉각 중지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항복하고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알리는 일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나오자 삼천리강산에 만세 소리가 물결쳤다. 그러나 제주는 무덤 속처럼 조용했다. 6만여 명의 일본 주둔군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일 일본군들이 패전하고 나가는 마당에 무시무시한 학살이라도 감행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더운 8월이 지나고 9월이 되었다. 미군이 제주에 상륙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31일, 이미애 작가(데레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1902-1977)

(7) 우리의 등불을 지키는 일


 

신성여학교를 재건한 사람들.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부터 아우구스티노 수이니 신부, 최정숙, 패트릭 주교.


어수선한 세상

해방되자 일본군 노동자로 동원됐던 조선인들이 다시 정화의원으로 몰려왔다.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없다고 했다. 그들이라고 염치가 없겠는가. 그들은 갑자기 항복한 일본에 의해 버려진 사람들이었다. 노예로 시달리다 해방이 되었으니 당연히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염치가 중요하지 않았다. 정숙은 그 마음을 오히려 애처롭게 여기고 외면하지 않았다. 정숙은 주머니를 털어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 정숙을 보고 가족과 성당 신자들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간 노무자와 병사들의 수가 1만 7000명에 달했다. 제주에 살던 일본인들도 일본으로 돌아갔다. 어수선하고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큰 불상사 없이 떠날 사람은 떠나고 고향을 등졌던 이들은 돌아왔다. 해방된 우리나라와 우리 땅, 내 고향에 산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그러나 사회는 쉽사리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새롭게 펼쳐진 세상이 모두에게 감당할 수 없도록 무질서했다. 점령군으로 미군이 제주에 상륙하고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제주는 일본과 생활필수품을 교류하는 무역이 경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전면 금지했다.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는 해방을 맞아 제주로 귀환하는 도민들의 휴대 물품과 금액을 철저히 제한했다. 결국 그들은 거의 무일푼으로 돌아왔다. 6만여 일본 출향민들의 귀국은 그동안 고향으로 송금하던 지하경제 자금의 끝도 의미했다. 무일푼으로 귀국한 동포들은 모두 실업자로 전락했다. 제주도민들도 배를 곯고 있는데 그들을 위한 일자리는 더 없었다. 더욱이 극한 가뭄과 흉년까지 겹쳐 집집마다 쌀독이 바닥을 드러냈다. 미군정이 이를 회복하기 위해 미곡정책을 펼쳤지만 모리배와 부패 관리들의 부정으로 오히려 서민들의 공출양만 늘어났다. 일제 강점기보다 더한 압박에 시달렸다. 정치도 아비규환이었다. 신탁 통치로 극심한 대립을 세웠던 중앙의 영향으로 제주도도 좌우익으로 갈라졌다. 사회가 전반에 걸쳐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군에 의해 뱃길이 끊기고 경제의 허리였던 대일무역이 불법화되면서 제주는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성여학교가 처음 시작했을 때의 모습.


주님의 등불

해방되자 정숙은 제일 먼저 신성여학교를 찾고 싶었다. 늘 그 생각뿐이었다. 천둥벌거숭이 자신이 신성여학교의 교육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알았기에 교육의 절실함이 너무 컸다. 정숙은 신성여학교 출신으로 함께 서울 유학을 했던 동기들과 후배들을 모아 부녀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먼저 제주북국민학교 교실을 빌려 글을 가르쳐주는 일을 했다. 이전까지 일본식 이름과 셈법으로 살았으니 모두 한글로 새롭게 바뀌어야 했다. 그 일은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제주신보 등사판을 빌려 밤을 새워 교재를 만들었다. 야학을 맡은 부녀회원들은 낮이면 무료로 한글을 가르쳐주니 마음 놓고 배우러 나오라고 마을을 다니며 모집했다. 집행부에 동참하려는 부녀회원의 수도 늘어났다. 정규 회원만도 30여 명이 넘었다.

그들은 야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 계몽, 시국강연, 의식주강습 등도 활발히 펼쳐나갔다. 정숙은 신성여학교를 다시 열기 위해 천주교 주교단을 찾았다. 라크루 신부의 정신을 이어받은 신성여학교는 마땅히 천주교의 든든한 교육기관으로 거듭나야 했다. 게다가 신성여학교 자리에 사찰이 터를 잡고 있어 무엇보다 다시 되돌려 찾는 일이 시급했다. 정숙은 호주 사람 아우구스티노 수이니 신부와 함께 미군정에 탄원서를 넣었다. 미군정은 전후 사정을 면밀히 조사하더니 일본에 의해 몰수당했던 학교를 되찾도록 주선해주었다.

1946년, 각고의 노력 끝에 신성여학교는 중학 과정 야간부로 학교 문을 정식으로 열게 되었다. 정숙은 감개무량했다. 고통스러운 역사에 희생되어 사라질 뻔한 모교를 1회 졸업생인 자신이 민족 해방과 더불어 재건한 것이었다. 이런 사명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었다. 정숙은 앞으로도 학교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야간부 수업에 전기가 없어 등갓에 등피를 끼운 등잔을 밝혔다.

정숙은 날마다 그 많은 등피를 손수 닦아 교실에 걸었다. 비록 1학급의 야간부로 출발했지만 뿌리도 내리고 지원도 받기 위해 튼튼한 재단이 필요했다. 정숙은 제주를 관할하는 광주교구가 신성여학교의 재단이 되어 달라고 백방으로 부탁을 넣었다. 1949년 신성여자초급중학교는 4년제 주ㆍ야간으로 인가를 받았다. 초대 이사장에 광주교구 패트릭 주교가 취임하고 교장으로 최정숙이 발령받았다. 서글프게도 정숙만큼 헌신적이고 높은 지성을 갖춘 사람이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한낱 여자가 교장 됨을 어색하게 여기는 보수주의자들이 많았다. 제주의 이 같은 정서를 잘 아는 정숙은 교장 적임자가 나설 때까지만 무보수 임시 교장으로 있겠다고 하여 논란을 잠재웠다. 그러나 누구라도 진정한 신성여학교의 교장은 최정숙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화의원 의사로, 신성여학교 교장으로 또 부녀회 강사로…. 정숙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이렇듯 쉴 틈 없는 생활 속에서도 매일 새벽 성당에 나가 신자들이 오기 전 마루를 쓸고 걸레질을 했다. 미사 종소리가 새벽 안갯속으로 퍼져 나가면 신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미사가 시작되면 정숙은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주했다. 정숙은 이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그러나 행복한 마음과 달리 재정 사정은 형편없었다. 그토록 소망하던 학교를 재건했지만 교사들의 봉급이 늘 부족했다. 미군정의 무역 금지, 태풍과 가뭄과 콜레라의 피해가 섬사람들의 주머니를 말려 수업료가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정숙의 사정은 더 나빴다. 무보수 교장직에 빈민보건소 역할을 하는 병원으로 소득은 전무했다. 그래도 정숙은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쁘게 봉헌한 그리스도의 삶에 걸맞은 청렴하고 가난한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돌개바람

1947년 3월 1일 남조선 노동당이 주최한 3.1절 기념식에서 어린아이가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차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도민들이 항의하자 미군은 총을 발사했고 시민 6명이 사망했다. 이 일의 여파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 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눴다. 그 과정에서 도민들만 속절없이 희생되었다. 집들이 불에 타고 민심은 흉흉했으며 일이 어떻게 번질지 몰라 주민들은 전전긍긍했다. 4·3 사건의 시작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의 4·3사건을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제주 해안이 봉쇄되고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군정토벌대가 제주에 상륙하여 섬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었다. 정숙은 신성여학교 학생들이 4·3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시키고 지도하였다. 학생들의 신변 상황을 교사들로부터 반복해 보고받고 위험 지역의 학생들은 정화의원이나 안전한 가옥에 거처하도록 했다.

4·3사건으로 누구나 알만한 유지들과 인사들이 어디론가 끌려가 처형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제주지방판사이며 초대 제주법원장인 정숙의 아버지 최원순과 제주농업고등학교 교장인 정숙의 오빠 최남식도 난데없이 빨갱이로 몰려 군부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4·3의 돌개바람이 정숙에게도 날아왔다. 정숙은 순수한 목적의 부녀회가 정치적인 오해를 부를까 봐 진작에 부녀회원들과 상의하여 해체해 버렸다. 그러나 정숙의 부녀회를 모방한 여성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좌익 단체의 여성동맹도 그중 하나였다. 부녀회가 해체되면서 활동이 전면 백지화됨을 못내 아쉬워한 일부 열성회원이 여성동맹에 흡수되었다. 그러자 여성동맹은 마치 부녀회와 여성동맹은 같은 단체인 듯 선전하고 다녔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9월 어느 날, 군인들이 다짜고짜 정숙을 끌고 갔다. 도착하고 보니 농업고등학교 운동장 천막 안이었다. 취조관이 험상궂은 얼굴로 윽박질렀다.

“최정숙! 당신 빨갱이지?” [평화신문, 2015년 6월 7일, 이미애 작가(데레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1902-1977)

(8) 
그분은 가난한 사람 속에 계시다


 

피란민들에게 제공된 학교 교실


독짓골

부녀회와 여성동맹은 분명히 다른 단체이고 부녀회는 이미 해체되어 존재하지 않는 단체라고 몇 번을 설명해도 취조관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조사하고 작성해둔 보고서대로 자백할 때까지 정숙을 잡아둘 작정이었다. 취조관은 독짓골에 쌓아둔 약품들과 가득 담아놓은 막걸리가 이번 폭동의 주범인 남로당을 지원하는 증거라며 빨갱이로 몰아갔다.

독짓골은 오래전 박영효가 제주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 그동안 수고해준 은덕으로 정숙의 어머니에게 준 것이었다. 여덟 채의 집과 그에 딸린 전답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독짓골은 제주 성과 거리가 멀고 한적하여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었다. 정숙은 정화의원이 낡고 협소해 간혹 후원받는 약품이나 귀하게 얻은 약품이 있으면 독짓골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항아리 그득한 막걸리는 금시초문이었다. 취조관은 약품보다 막걸리에 초점을 맞추고 정숙을 다그쳤다. 그러나 알길 없는 내용을 정숙은 말할 수가 없었다.

정숙은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제자와 부녀회원들, 친구들이 끌려와 있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농업고등학교 운동장에 세워진 천막마다 잡혀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정숙이 감금된 천막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사람이 호명되어 불려가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호명되어 불려간 이들 중 일부는 풀려나고 일부는 총살을 당했다. 기준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다. 규칙도 없었다. 정숙은 이렇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취조관이라면 총살당할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아찔했다. 정숙은 다시 반복되는 취조관의 심문에 자신은 천주교 신자라 절대 빨갱이가 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연히 정숙의 천막에 들어온 소대장이 정숙의 진술을 들었다. 소대장은 취조관에게 천주교 신자는 공산당에 가담할 리가 없다며 재조사를 즉각 지시했다. 그 말 한마디에 정숙은 기적처럼 풀려났다.

정숙은 서둘러 독짓골로 달려갔다. 놀랍게도 독짓골의 집들과 전답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군인들에 의해 연행되어 가는 정숙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그동안 정숙이 빨갱이였다며 광분하여 독짓골로 몰려가 불을 지른 것이었다. 여덟 채의 집이며 헛간이 모두 불타는 바람에 박영효가 남겨준 오래된 가구와 글, 그림 등 문화재급의 귀한 것들이 재가 되었다. 그러나 정숙은 그보다 귀하게 모은 약품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불에 탄 것이 안타까웠다. 미군 부대를 수시로 드나들며 조금씩 얻어낸 페니실린이 한 병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섬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트리고 피로 물들인 4ㆍ3사건을 뒤로 하고 6ㆍ25전쟁이 발발했다.

1949년 제1회 신성여중 졸업 기념 사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최정숙.


피란민

제주도는 전쟁의 포화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러나 육지의 전쟁 피란민들이 날마다 섬으로 몰려왔다. 피란민들이 제주 거리를 구름처럼 몰려다녔다. 아무 곳이나 빈터가 보이면 천막을 치고 짐을 풀었다. 걸인과 상이군인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구걸을 했다.

정숙을 찾아오는 피란민도 많았다. 서울 유학 시절의 은사들과 친구들, 전주와 목포 시절의 지인들이 모두 제주의 정숙을 기억하며 내려왔다. 그들 중에는 정숙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도 있었지만, 정숙의 이름만 들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숙은 가리지 않고 마음을 다해 도와주었다. 고향을 등지고 낯선 제주에서 정숙을 믿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정숙은 그들에게 임시 휴교 중인 신성여중 교실을 내어주었다. 또 그들을 먹이기 위해 독짓골의 전답도 내놓았다. 난리 중이라 제값을 못 받을 게 뻔했지만 달리 변통할 것이 없었다. 땅 판 돈으로 쌀과 땔감을 구해 학교에 짐을 푼 사람들을 보살폈다.

서울의 신학교와 성 바오로 수녀원이 제주로 내려왔다. 신학교와 수녀원이 제주로 옮겨오자 성당은 크게 활기를 띠었다. 전쟁은 아이러니하게 제주의 낙후된 교육 수준과 생활 수준을 향상했다. 아울러 천주교의 정착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전쟁 소식을 들은 미국과 유럽의 신자들이 옷가지와 학용품과 곡식을 구호물자로 보내주었다. 해외에서 보내온 구호물자로 성당은 구민사업을 펼쳐 제주 주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성당 앞 골목에서 옥수수와 약간의 우유를 섞은 죽을 나누어주는 보급소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보급소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난한 신자들의 주린 배를 달래주었다.

정숙은 정화의원을 극빈자 무료 진료소로 만들었다. 무료 진료소의 소문이 피란민들 사이에 빛처럼 퍼져나갔다. 병원을 찾는 환자들 모두 극도로 비참했다. 낡은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안고 온 엄마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야위어 있었다. 아기 엄마들은 자신보다 아기를 살려달라고 정숙에게 매달렸다. 아기들이나 아기엄마 모두 영양실조였다. 젖먹이를 데리고 피난을 나왔으니 누구 하나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나같이 모두 굶어 죽기 직전이 되어 정숙을 찾아왔다. 정숙은 아기 엄마들에게 바닷가에 나가 해초도 먹고 조개도 먹으라고 알려주었다. 바닷가에 나가면 먹을 것이 많고 해녀들도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바다를 처음 보거나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이 쇠약한 이들에게는 주머니를 털어 국밥이라도 사 먹으라고 손에 쥐여주었다. 맥이 풀린 눈동자의 아이들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굶주린 아이들은 대부분 길가 풀이나 흙을 파먹어 독이 올라 배가 땡땡하게 부풀어 있었다. 정숙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성당 보호소로 데려갔다.


삶의 조각들

제주에는 예로부터 도둑이 없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전쟁 피란민들로 인해 아름다운 제주의 미풍양속이 많이 파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한공렬 신부(나중에 광주대교구장 대주교가 됨)는 신성여중에서 보낸 3개월의 피난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제주도민들은 생활 태도가 건실하고 다른 이들에게 생활 형편을 의존하지 않는 건전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도박, 절도의 범죄가 거의 없었는데 피란민이 제주에 들어가고 난 후 소매치기, 다방, 요정이 생겨났다.’

비록 짧은 경험에서 나온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제주는 6ㆍ25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피란민이 모여들면서 기존의 질서가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1953년, 정전 협상이 성사되어 전쟁의 혼란은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살육의 시간은 끝났지만, 전쟁은 삶의 터전을 빼앗고 부모·형제를 흩어지게 했다.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산 사람도 살아있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주도로 피란 왔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터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신학교와 소신학교, 성 바오로 수녀원도 서울로 돌아갔다. 그들은 피란 생활을 알뜰하게 살펴준 정숙에게 크게 감동하고 고마움을 표했다. 정숙은 할 일을 한 것이고 모든 것은 하느님이 예비하신 일에 마음을 다해 순종한 것이라고 겸손해 했다.

제주도 어수선함이 가라앉고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정숙은 전쟁으로 인한 여러 혼란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만 할 것이 아니었다. 모든 고난에는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은혜가 베풀어졌다. 피란 온 대신학교와 소신학교의 학생들이 제주에서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몸소 보여줌으로 제주의 신자들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해주었다. 또 구제 활동은 신자 수를 증가시켰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해리를 신앙에 의지해 해소하고자,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자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편 거의 모든 사람이 고향에 돌아갔지만, 제주에 남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중 학력이 우수한 교사들이 있었다. 정숙은 그들을 놓치지 않고 신성여학교의 가족이 되게 했다. 폐쇄적인 지리적 특성으로 고급 인력을 구하기 어려운 제주로 볼 때 선물 같은 귀한 존재였다. 마른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였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14일, 이미애 작가(데레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1902-1977)

(9) 미천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


 

교장실에서 최정숙.


사랑의 빛

많은 사람이 정숙의 독신 생활을 궁금해했다. 비신자들은 호기심으로, 동료들은 열렬한 지지자로 불편해 하거나 응원해 주었다. 보통 중년의 나이가 혼인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어중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세월이 더해가면서 오히려 가족들은 그것이 정숙의 숙명인 양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회 활동을 넓혀가면서 많은 지인은 독신을 통한 신앙의 고결함을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정숙은 아주 처음부터 지녔던 그 마음, 김 아나타시아 수녀와 이 곤자가 수녀의 손을 잡고 성모상 앞에서 가졌던 그 순수한 마음을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힘들고 막막할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힘이 솟고 미소가 배어 나왔다. 정숙은 언제나 성모님께 모든 이야기를 해드렸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정숙은 자신의 생각과 고민과 마음을 성모님께 털어놓았다. 인자하신 성모님은 늘 정숙에게 든든한 위로가 되어 주셨고 자애로운 답을 주셨다.

정숙은 마음먹은 일이 도저히 해내기 어려울 때면 먼저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숙은 매주 토요일마다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고해소 앞에 줄을 섰다. 학생들은 성심이 넘치시는 교장 선생님이 매주 거르지 않고 고해성사 보는 것을 궁금해하면서도 한없이 존경했다. 정숙은 자신이 행정적으로 수도자가 되지 못했지만 주님과 성모님 앞에서 이미 처음부터 수도자였다.

정숙은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 광주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혼자 다녔다. 문득 정숙은 제주에도 마땅히 자신과 같은 신앙의 프란치스칸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살펴보았다. 정숙의 생각이 옳았다. 어느 곳이나 주님의 손길을 찾고 함께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주님과 만나는지 모를 뿐이고 주님의 빛을 기다릴 뿐이었다. 정숙은 자신의 일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모아 함께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숙은 신심이 깊은 신자들과 레지오 마리애를 조직하고 쁘레시디움과 꾸리아 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정숙은 주님과 만나는 길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갈 곳 없는 아이들

정숙이 신성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유학을 강행하지 않았다면 공부는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었다. 제주에는 진학할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교육 현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고가 없어 신성여중은 졸업생들을 그대로 맡아 고교 수업을 진행했다. 무리한 처사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속 공부하고자 하는 아이들을 고등학교가 없으니 학교가 생길 때까지 가정에서 가사를 돕거나 애를 보라고 할 수 없었다. 분명 학생들에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정숙은 신성여고의 설립을 추진했다. 전쟁 직후라 모든 것이 어려웠다. 광주교구장 현 하롤드 주교는 전쟁의 혼란 속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공산당으로부터 신자들을 지키고 교구를 돌보았다. 현 주교는 그때 정숙과 신성여중이 보여준 아낌없는 희생을 직접 눈으로 보며 고마워했었다. 그래서 신성여고를 설립하고자 하는 정숙의 뜻을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마침내 신성여중은 신성여고를 설립하게 되었다.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 폐교당한 신성여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유치원을 만들고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설립하게 되었으니 사람이 계획해서 된 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일깨우며 주님께 감사드렸다.

신성여고 초대 교장에 최정숙이 발령받았다. 중학교 교장 취임할 때의 거부감과 달리 모든 사람이 정숙을 마땅하다고 여겼고 정숙도 열악한 재정의 부담을 덜고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느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 원하시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도 주신다. 만일 수단과 방법이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일이 아니었다. 정숙은 오랫동안 불가능한 일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섭리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를 걱정하시고 배려하신다.

학교는 해마다 늘어나는 학생들로 교실이 턱없이 부족했다. 교재나 기자재도 마찬가지였다. 정숙은 그런 어려운 사정을 현 주교에게 가감 없이 부탁했다. 더러 학교 사업보다 성당 건립과 보수가 더 급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현 주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에 무엇보다 교육이 우선임을 강조하며 정숙을 도와주었다.

‘교황 훈장’ 받고 찍은 기념 사진.


성모 성월

정숙은 학교 일로 문을 닫았던 정화의원을 다시 열었다. 학교 업무가 많아 거의 병원에 나갈 수 없었지만 문이 닫힌 병원 앞에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무작정 정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숙은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잠을 줄여서라도, 자신의 사적인 일을 줄여서라도 환자들의 아픔을 해결해 주어야 했다.

5월은 아름다운 성모 성월이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중재해 주시는 분이다. 4월이 되면 천주교 신자들은 5월을 매괴 성월 또는 성모 성월이라 하여 거룩하게 보내기 위해 9일 기도를 하는 등 성모님을 더욱 특별히 모시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한다.

1955년 4월, 정숙도 다른 신자들처럼 아름다운 성모님을 위해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모 성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날 광주의 현 주교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 제주에 오겠다고 했다. 불과 한 달 전 신학기의 학생들을 축복해주고 가셨는데 무슨 일로 다시 오려는가 정숙은 잠깐 생각했다. 4월 10일, 미국 출장 중이었던 현 주교는 놀랍고도 기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하였다. 가톨릭 신자로서 최대의 영예인 ‘교황 훈장’을 최정숙이 받게 된 것이었다. 제주로 온 현 주교는 교황을 대신해 최정숙 교장에게 ‘교황 훈장’을 수여했다. 학교장을 무보수로 역임하고 빈민 구제 사업과 병원 사업을 펼쳐 희생적인 가톨릭 정신을 모범적으로 보여 준 공로였다.

정숙과 함께 교황 훈장을 받은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포 산정 교회의 김 바오로 옹이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교회를 지켰고 6ㆍ25 전쟁 때는 공산당의 위협에도 교회와 사제 신변을 끝까지 지키다가 총살형을 당했는데, 시쳇더미 속에서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 두 사람에 앞서 1951년 당시 장면 국무총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교황 훈장을 받았다. 두 번째는 6ㆍ25때 묵호 경비사령관을 지낸 백기조 해군사령관으로, 많은 동포를 구하고 교회를 보호한 공적이 커 훈장을 받았다.

정숙은 스스로 상을 받을 자격이 없고 그런 상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사실 그런 상이 있는 줄도 몰랐다. 상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 배우고자 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배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해결해 주려 하였다. 아픈 사람들을 보면 낫게 해주고 싶었다. 정숙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정숙에겐 오히려 그리스도로 보였다. 굶주린 그리스도에게 먹을 것을 드리고 배우려는 그리스도에게 배울 기회를 주었다. 아프거나 죽어가는 그리스도를 보살폈을 뿐이었다. 정숙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이 부르시기 전에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상을 받으실 분은 마땅히 주님이었다.


변하는 세상

아버지 최원순이 세상을 떠나자 정숙은 고령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겉으로 보기에 연로하신 어머니를 나이 든 딸이 모시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머니는 바쁜 정숙을 대신해 살림을 돌보아 주셨다. 정숙은 버는 것마다 도와 달라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약품 대금은 늘 빚으로 남았다. 빚이 한바탕 모여 어머니가 알게 되면 조용히 밭을 팔아 갚아 주었다. 어머니는 빚이 있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 정숙의 적자생활을 헤아려 주었다.

1960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정부기관이 생겨났다. 제주에도 현역군인이 도지사로 부임해왔다.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제주에 상수도를 보급하였다. 제주의 여성과 아이들이 눈만 뜨면 하는 일이 물 긷는 일이었다. 한참을 걸어 물 한 허벅(물을 길어 나르는 통, 제주도 사투리)을 지고 오는 고된 일이 집집마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맑은 물이 나왔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21일, 이미애 작가(데레사)]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베아트리체(1902-1977)

(10 ·
 끝)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노년의 최정숙.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정숙의 어머니 박효원은 94세를 일기로 하느님 곁으로 갔다. 정숙은 어린아이처럼 슬펐다. 어머니는 정숙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믿어주고 알아주었다. 양지가 되어주고 후원자가 되어주고 꿈을 이루도록 격려해주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지지가 있어서였다. 서울 유학을 하게 된 것도 어머니의 뒷받침이 있어 가능했다. 옥살이로 모진 병을 얻어 제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제주를 샅샅이 뒤져 약을 구해왔다. 정화의원의 숨은 공로자 어머니, 정숙은 평생을 통해 무엇 하나 어머니의 손길 없이 이룬 것이 없을 정도로 희생의 표본이었다. 남들이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을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해 하면 오히려 독립운동하고 가난하고 아픈 사람 구제하는 훌륭한 딸을 둔 것이 더 자랑스럽다며 마냥 행복해하셨다.

1962년, 정숙은 신성여고 교장을 정년 퇴임하였다. 많은 제자들과 교사들이 정숙의 퇴임을 서운해 하며 더 있을 것을 부탁했지만 요령 부리기를 싫어하는 정숙은 단호했다. 학교 관계자들은 정숙의 철학에 존경과 박수를 보냈다.

정숙은 평범한 생활로 돌아와 정화의원의 환자들을 돌보는 데 전념하였다. 제주가 지역민 특유의 건실한 품성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지만 어느 사회나 그렇듯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다. 실제로 제주에는 풍토병처럼 육지와는 다른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다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해녀들은 잠수병이라 불리는 신경통과 두통에 시달렸다. 그들 대부분 거친 음식을 먹는 탓에 위장병도 많았다. 지역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고 습도가 높아 발생하는 많은 질병이 도민들을 괴롭혔다. 현대화가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제주는 고되고 가난했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서북풍과 늦여름의 태풍은 섬을 척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결핵에 걸린다는 것은 천형이나 다름없었다. 정숙은 이런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아 대한결핵협회 제주지부장을 맡았다. 결핵협회에서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판매하고 그 수익금으로 약을 나누어 주었다. 병색이 완연한 창백한 얼굴과 쇠약해져 거동조차 불편한 환자들을 대할 때면 정숙은 그들을 위로하고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언제나처럼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기 때문이었다.

교육감 취임식 기념 사진.


내가 걸어온 길

1964년 전국에 교육 자치제가 시행됐다. 제주에서도 제주교육위원회가 발족했다. 모든 사람이 최정숙을 초대 교육감으로 선출했다. 교육자로서의 노고와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신성여학교에서 보여준 교사의 참모습,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과 교육을 위한 희생 봉사를 제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남녀차별이 아직 뿌리 깊은 제주에서 초대 교육감으로 여자가 선출된 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전국에서도 여성 교육감은 최정숙이 유일했다. 이 소식은 청와대의 육영수 영부인의 마음도 흡족하게 했다. 교육위원회 청사가 없어 제주농업고등학교 강당에서 정숙은 초대 교육감에 취임했다. 육영수 영부인은 제주에 건축 경비를 지원하고 교육위원회 청사를 짓도록 도와주었다. 이런 도움은 전국에서 유일했다. 정숙은 이 소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이라 여겼다. 교육감 현직에 있을 동안 제주의 열악한 교육 환경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문교부에 수시로 방문하고 독촉하였다. 제주에는 여전히 학교가 부족했다. 대정여자 중ㆍ고등학교와 한림여자 중ㆍ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제주대학 부설 교육과를 제주교육대학으로 분리, 승격시켰다(두 대학은 2008년에 다시 통합됐다). 적지 않은 나이에 강행군이었다. 정숙은 교육감직에 있으며 난생처음 월급을 받았다. 생활비 수준의 액수였지만 그마저도 자신을 찾아와 도와달라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늘 아껴두었다.

5ㆍ16 군사혁명정부는 사회 각 분야에서 공을 세운 이들을 포상하는 5ㆍ16 민족상을 만들었다. 1967년 정숙은 교육 부문 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부상으로 거금 200만 원을 받았다. 100만 원은 오래전부터 체납된 의료 약품비를 청산하고 100만 원은 이태수 미카엘을 생각하며 ‘정화장학회’를 만들었다. 정숙은 제주 중앙본당 출신 대신학생 이태수 미카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신부가 되려거든 호적을 파가라는 부모의 반대에도 미카엘은 서울의 대신학교에 진학했다. 부모의 외면 속에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미카엘의 학교 생활은 궁핍하고 고달팠다. 정숙은 그런 미카엘을 ‘정화장학회’의 첫 수혜자가 되도록 했다. 미카엘 이후로 수많은 고달픈 학생들이 ‘정화장학회’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정화장학회’의 수혜자 어느 누구도 장학회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정숙은 마음으로만 품었던 일들이 이루어지고 해결되는 것을 보며 주님의 조화로움에 감사했다. 정숙은 65세가 되자 많은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교육감을 퇴임했다.


갈색 수도복

교육감을 퇴임하며 교육감 관사를 나오자 막상 거처할 집이 없었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어머니 집에 살았고 교장, 교육감 직책에 있을 때는 관사에서 생활했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많은 재산은 틈틈이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니 나이 들어 정작 몸 하나 누일 땅 한쪽이 없었다. 정숙은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천주교 제주교구청은 이미 정숙의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다. 교구청 소속으로 되어 있는 옛 신성여학교 관사를 정숙에게 내어주었다. 너무 오래되어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숙은 갈 곳 없는 노인에게 자선을 베풀어 감사하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정숙은 지니고 있던 살림살이도 단출해 거의 맨몸으로 이사했다.

사회장으로 치른 최정숙의 영결식.


나이가 들어 모든 단체장과 활동에서 물러난 정숙은 온종일 묵상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날이 밝아 눈을 뜨면 아침기도를 하고 미사를 봉헌했다. 하루 세 번 삼종기도를 드리고 사이사이 산책을 하며 묵주기도를 이어갔다. 해가 지면 시간전례(성무일도)와 저녁기도로 하루를 마쳤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환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장소와 거리를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또 병이 들고 형편이 어려운 교우의 소식을 들으면 신자들과 동행하여 기도하고 돌보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 우선시하는 것 없으면서 어려운 사정이 생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절대 흘리는 일 없이 앞장서서 나섰다. 정숙은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장벽이 생길 때마다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이겨냈다. 평생의 지병으로 정숙을 괴롭힌 복막협착증과 고혈압과 심장병을 앓아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 통치마 한복을 입은 정숙은 어렵고 고단한 이웃들과 항상 함께 있었다.

정숙의 생활은 소박했다. 수도자의 의복처럼 회색 저고리와 까만 통치마 두 벌을 번갈아 입었다. 모든 일과가 마무리된 밤이면 등잔 심지를 돋우고 여러 번 해어져 기운 옷을 다시 기웠다. 잠시 짬이 생기면 삼노(삼의 껍질로 꼰 줄)를 심지로 놓고 백지를 그 위에 돌돌 말아 겹쳐 꼬는 등잔 심지 만들기를 좋아했다. 정숙의 낡은 옷 주머니와 손가방 안에는 어디에서든 아픈 사람을 만날 때를 대비해 응급처치할 수 있는 아스피린과 응급약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등잔 심지 꼬는 재료들도 그것들과 사이좋게 함께 있었다.

정숙의 나이 76세, 1977년 2월 22일 아침 9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감기로 며칠 기운을 차리지 못하더니 가족들과 지인들의 애도 속에 조용히 주님 곁으로 떠났다. 정숙의 수의는 프란치스코 3회의 복장인 갈색 수도복이었다. 수녀가 되어 입고 싶었던 옷을 죽어서야 영원히 입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수도복을 입고 누운 정숙의 얼굴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주님의 품에 포옥 안긴 것이리라. [평화신문, 2015년 6월 28일, 이미애 작가(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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