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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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체ㅣ구역반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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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4-11 ㅣ No.146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9)



Ⅳ 친교의 교회

4. 삼위일체적 친교

1) “교회가 송곳입니까?”

몇 년 전 필자가 교구에 대한 몇 가지 불만을 선배 신부님께 표현하였다가 그 선배 신부님으로부터 “박 신부, 송곳을 발로 차면 박 신부 발만 찔린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즉시 반발하면서 큰 소리로 반문하였다. “교회가 송곳입니까?” 모리스 준델 신부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최근에 저는 역사적인 작품인 교회사를, 특히 초기 시대의 것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공의회에서는 교의를 반대한 사람들을 너무나 잔혹하게 다룬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가령 네스토리우스가 에페소 공의회에서 어떻게 쫓겨나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육화의 진리들에 관련된 견해 때문에 문제가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그의 교설을 거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법의 희생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 교회법은 그를 괴롭혔고, 과연 인간의 정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온 무게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같은 세기의 또 다른 공의회에서 주교들은 자기들 생각에 그리스도를 갈라 놓는다고 생각되는 동료 주교를 갈가리 찢어 죽이도록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런 면이 이 교회 권위자들에게서 받는 인상입니다. 그들은 교의를 마치 압착(壓搾) 롤러처럼 여겼습니다. 그들은 결코 하느님을, 사랑의 친밀한 관계로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이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이성을 짓이겨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압착기가 아닙니다. 신앙이란 우리 마음에 당신의 비밀을 털어 놓으시는 하느님의 마음의 사랑입니다.”(나날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모리스 준델, 성바오로, 98-99면)

2)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는 ‘친교의 교회’

교회의 개념이 잘못된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역사적인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면서 복음에 입각한 교회의 성사성과 정체성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친교의 교회’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여러 교서들을 통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의 중심이 친교 교회론임을 분명하게 천명하신다. ‘친교의 교회론’은 공의회 문헌들의 중심 개념이고 기본 개념이다. … 교회 당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20주년이 되던 해인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2차 특별 총회를 통하여 지난 공의회에서 피력된 ‘친교의 교회론’이 모든 공의회 문서의 핵심적인 통찰이라고 선언하며 공의회 이후의 교회의 모든 쇄신 노력을 촉진하는 힘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1998년 로마에서 개최된 아시아주교대의원회의 의안집도 제6장 제목을 ‘친교인 교회’로 정하면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2차 특별 총회와 같은 ‘친교 교회관’의 입장을 반복하여 천명하고 있다. ‘시노드의 마지막 진술은 이 교회론의 중심 사항을 요약하고 있다. 곧 ‘친교인 교회’는 삼위일체의 친교에 근거를 둔다. 교회는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친교를 잇는 힘이며 표지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친교이며, 모든 민족의 친교의 장소이며 상징이다.’”(소공동체 연구, 주교회의, 84-86면)
 
3)교회는 계급사회가 아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본질과 본성과 실체를 드러내야 할 성사로서 계급적 구조와 상하 관계가 아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적 세 위격체로 존재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이 세 위격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삼위일체적 친교’를 드러내야 한다. 그 ‘삼위일체적 친교’를 심상태 몬시뇰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관계 안에 있는 순전한 생명이시요,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가없이 충만한 사건이시며, ‘줌(성부)’과 ‘받음(성자)’과 ‘하나로 함(성령)’이라는 ‘친교’이시다.”(소공동체 연구, 주교회의, 86면) 그리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적 신비는 결코 높고 낮음이 있는 계급 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세 위격들 사이에는 높고 낮음이 없고 앞서고 뒤따름이 없이 영원으로부터 진리와 사랑 안에서 영원히 서로 삼투하는 동등하고 동격의 친교 관계만이 존재한다.”(같은 책, 86-87면)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중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소공동체가 안 되는 큰 원인도 여기에 있다. 아직도 교회는 오랫동안 길들여진 교계(敎階)제도에 묶여 있거나 젖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교회는 피라미드식 계급(階級) 구조 안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성직자들이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신부들이 평신도들을 종이나 심부름꾼, 운전기사나 기쁨조로 취급하면서 독선과 횡포를 휘두르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또 다른 성직자 중심의 교회, 성직자 위주의 교회인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 수 없다.

우리 한국 교회는 레지오 마리애식 신앙생활에 젖어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온통 레지오 마리애에 매달려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모든 본당이 레지오 마리애를 중심으로 본당 운영을 하고 있다. ‘Legio Mariae’는 글자 그대로 ‘마리아의 군대’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활동한 결과, 많은 신자들이 명령과 지시에 의하여 움직이며 복종과 보고를 하는 군대식 신앙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이로 인하여 신자들은 피동적이며 소극적인, 나아가 방관자 내지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교회에는 역동성과 창조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진부한 도식 안에 가두는 교회가 되어 화석화되거나 박제된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줄 뿐이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을 위한 구원의 진정한 성사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린 죽은 교회가 되고 만다.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과거의 교회관이 공동체보다는 교회법적 ·성사적 교회의 성격을 지녔다.”고 간주하면서 공동체적 차원을 간과하였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중세 이래 교회가 자신을 성서-교부적 친교 공동체로서보다는 교계적이요 법적으로 파악되는 사회적 실재로 이해하였고, 신학적으로도 제도 중심적 교회관이 주도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원래적 교회관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크게 변색되어 있었고 점점 뒷전에 퇴조해 있었다. 중세에는 특별히 교회와 국가가 혼돈되고 동일시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서부터 교회는 자신을 더욱 교계적이요 법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한 사고 안에서 그 시대에는 조직체적이요 법적인 교회 이해가 자연히 넓게 자리를 잡게 된다.’”(같은 책 87면)

‘친교’는 교회의 본질이다. 이 ‘친교’는 성서적 개념인 코이노니아(koinonia)의 의미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 공동체성과 하느님과 일치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친교 공동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임병헌 신부는 ‘신적(神的) 친교’와 ‘형제적 친교’로 구분하여 나누고 있다.(같은 책, 90면 참조) 그러나 이 신적 친교는 상하, 수직적 계급구조의 개념이 아닌 ‘사랑의 관계’, ‘수평적 관계’, ‘사귐과 나눔’, ‘함께’, ‘더불어’, ‘같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신적 친교 내지 삼위일체적 기막힌 친교가 아닐 수 없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불교에 이런 말이 있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소공동체를 통하여 ‘삼위일체적 친교’를 드러내는 ‘친교의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월간빛, 2014년 4월호, 박성대 요한 신부(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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