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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성경] 히브리어 산책: 아흐, 아호트(형제,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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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31 ㅣ No.3458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아흐, 아호트


친밀한 사이서도 ‘아흐’(형제) ‘아호트’(누이)라 불러

 

 

- 아흐. 히브리어로 형제란 의미다. 지난호를 읽은 독자들은 알레프 밑에 붉은 기호가 ‘아-’를 의미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초록색 자음은 ‘흐’로 옮길 수 있다.

 

 

형제(아흐)와 누이(아호트)도 알레프로 시작한다. 지난주에 본 대로, 엄마와 아빠는 수직적 관계를 나타내는 명예의 호칭이었지만, 아흐(형제)와 아호트(누이)는 수평적 교류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역사를 따라 더 보편적이고 더 친근하고 더 낮은 이에게 적용된 사랑과 평등의 호칭이었다.

 

 

피붙이

 

형제는 본래 피붙이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장면을 보면, 두 번이나 ‘그의 아흐 아벨’이라고 표현된다(창세 4,8. 우리말로 “아우 아벨”이라고 옮겼다). 아흐는 이복형제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요셉의 아들들은 어머니가 달랐지만, 모두 “형제”라고 불렸다(창세 37,4). 고대 이스라엘은 남성중심의 사회였고 일부다처제가 당연시되었으니, 이런 호칭은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다.

 

- 아히. ‘나의 형제’라는 뜻이다. 역시 지난호와 같이, 파란 색 기호는 모음 ‘이’를 뜻하는데, 1인칭 단수 소유격인 “나의”란 뜻이다.

 

 

부족과 동포

 

아흐는 고대에 이미 직계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섰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다. 우리말 성경에 “조카 롯”(창세 12,5; 14,12)이라고 나오는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그의 아흐의 아들’이다. 형제의 아들이니 우리말로 조카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조카를 향해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창세 13,8)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혈육’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형제의 사람들’이다. 조카를 포함해 모두를 그저 형제로 부른 셈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누가 손위인지, 누가 직계가족인지 등을 따지지 않았다. 항렬이 아니라 형제애가 중요한 것이다. 모세가 이집트 왕궁에서 자라나고 처음 자기 동포들에게 갔을 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탈출 2,11) 충격을 받아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인다. 

 

그런데 여기서 ‘동포’로 옮긴 말이 아흐다. 본디 모세는 동포를 향한 애정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 아호트. 자매 또는 누이를 의미한다.

 

 

친밀한 형제와 누이

 

형제와 누이는 친밀한 사이에서 부르는 사랑의 이름이기도 했다. 다윗과 요나탄은 “목숨처럼 사랑”하였다고(1사무 20,17) 묘사될 정도로 깊은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요나탄이 아버지 사울을 거슬러 다윗을 살려준 적이 있지 않은가(1사무 20장). 그래서 요나탄이 죽었을 때, 다윗은 깊은 슬픔에 잠겨 애도하는 노래를 짓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2사무 1,26)라고 목놓아 울었다. 이 노래에서 다윗은 요나탄을 “나의 아흐”(2사무 1,26. “나의 형”)라고 불렀다.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니지만 깊은 우정을 나눈 대상을 이렇게 부른 것이다. 아호트(누이)도 애정이 듬뿍 담긴 말이었다.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 아가를 보면, 신랑이 신부를 향해 거듭하여 “나의 누이”(아가 4,9-12)로 부른다. 전통적으로 이런 다정한 호칭에서, 신부인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애정이 드러난다고 이해했다.

 

 

하느님 백성 전체가 형제

 

아흐는 고대부터 폭넓게 쓰인 말이었다. 그래서 ‘형제’만으로 하느님 백성 전체를 가리키기도 했다. “빚 때문에 종이 된 이를 놓아주는 규정”(신명 15,12-18)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끼리는 종살이를 하더라도 7년째에는 풀어주어야 했다. 이 규정은 “너희 동족인 히브리 남자나 여자”(신명 15,12)에게만 해당된다. “너희 동족”은 “네 아흐”를 옮긴 말이다. 하느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니, 가까운 혈육이 아닌 사람도 포함하는 호칭이고, 게다가 “남자와 여자”라고 토를 달았으니, 남성과 여성을 함께(!) 칭하는, 보편적인 호칭으로 발전하는 말이기도 했다.

 

 

가난한 형제가 없도록

 

급기야 아흐는 더 낮은 이를 향한 보편적 사랑의 언어로 발전한다. “네 아흐(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신명 15,7) 나이나 성별을 막론하고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신명 15,10)는 규정에서 아흐는 보편적 형제애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구약의 가르침은 예수님에게 이어진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가르침을 보라.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수천 년간 숙성시킨 형제애의 완성을 볼 수 있지 않은가. 다음에는 역시 알레프로 시작하는 ‘사랑’과 ‘아멘’을 보자.

 

*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근동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31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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