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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학서원28: 가톨릭 지성과 세상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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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13 ㅣ No.648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8) 가톨릭 지성과 세상 읽기


오늘날 교회, 경청과 식별 위한 신앙적 지성 절실히 요청

 

 

- 2020년 6월 의정부교구에서 열린 ‘코로나19 신자의식조사’ 결과 발표 세미나 종합토론 중 발표자들이 참석자의 의견을 듣고 있다. 세상을 정확히 읽고 복음의 진리와 가치를 설득력 있게 선포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더 세상과 대화하고 세상의 현자들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경청, 읽기, 식별

 

오늘날 ‘경청하는 교회’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주장하고 가르치려는 경향이 강한 세상에서 경청하고 배우는 행위는 중요한 미덕이다. 하지만 경청의 행위는 많은 수고와 노력을 요청한다. 경청한다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경청의 행위 안에는 말하지 않는 것, 발화되지 못한 말도 들을 수 있는 태도와 능력이 포함된다. 경청은 타자의 말과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진정한 의미와 의도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어야 하고, 타자가 말하지 않거나 말하지 못한 것들마저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경청은 대상을 향한 정밀한 읽기 행위다.

 

교회의 문맥에 있어서 경청의 대상은 사람들의 생각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경청의 대상은 무엇보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이다. 경청은 성경을 읽고, 역사와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는 것이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적 전통과 오늘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읽어내는 일은 해석과 식별의 과정을 내포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 교회 전통을 이해하는 일, 오늘의 세상을 식별하는 일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경청은 읽기와 식별의 행위를 포함하는 고도의 작업이다.

 

정확히 읽는 일, 섬세하게 식별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식별은 판단과 비판이라기보다 섬세하고 정확하게 읽는 일이다. 식별은 하느님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세상을 읽는 일,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은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복잡한 사회와 복합적인 사람들을 읽고 식별하기 위해서는 인문사회적이며 자연과학적 역량과 지성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철학과 신학의 시선으로 읽어내기에는 현대 사회와 문화는 너무 복잡하다. 변해가는 세상을 읽어낼 수 있는 지성적 역량의 부재를 교회 안에서 자주 실감한다.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 부재 현상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급속한 변화를 따라가면서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과학기술과 미디어 문화의 발전을 통해 매우 복잡해진 인간 삶의 현상들은 교회의 역량만으로 분석하고 읽어내기 어렵다. 현대 교회 역사가 마시모 파지올리는 한 칼럼에서 오늘의 교회에서 자주 발견하는 지성의 부재와 문해력(literacy) 부족을 뼈아프게 지적한다. 세상을 정확히 읽고 복음의 진리와 가치를 설득력 있게 선포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더 세상과 대화하고 세상의 현자들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파지올리는 진단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토피아」에서 서술했듯이, 복잡하고 변덕스런 현재와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전망은 과거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낳는다. 오늘의 교회 역시 시대와 문화의 도전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과거로 회피하려는 태도를 은연중에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파지올리는 교회가 “거대한 문화적 도전 앞에서 지적 무장해제”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교회 안에 지성적 열정은 사라지고 부정적 뉘앙스의 경건주의만 강화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물론 경건주의 자체는 종교에서 소중한 흐름이다. 하지만 때때로 경건주의는 형식주의와 엄숙주의 형태로 작동된다. 종교적 감정만을 강조하는 왜곡된 경건주의는 혐오와 배제를 기반으로 하는 이념화된 종교의 모습으로 전락할 위험이 많다.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의 부재는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된다. 정직하게 말하면, 신앙의 전통을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읽고 식별하기란 어렵다. 교회의 역량만으로는 세속의 급격한 변화를 따라잡지도 못한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칫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도 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본업에 집중하려는 전략적 태도를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앙적 전통에만 집중하고 세상의 문화를 단순히 세속주의로 치부하고 배격하는 것은 오만한 무지다. 교회는 신앙적 전통과 세상의 문화를 언제나 함께 안고 가야 한다.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의 부재는 성직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파지올리는 주장한다. 그는 신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말한다. 오늘의 신학교 교육이, 성직자의 성적 스캔들에 대한 예방적 방법으로서, 강화된 인성 교육과 심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은 어쩔 수 없이 신학적이고 인문사회적인 지성 교육의 소홀로 이어질 수 있다. 성직자들의 지속적 양성 교육의 부재, 고위 성직자들의 고령화 현상은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신앙의 시선으로 식별할 수 있는 교회의 능력을 위축하게 하고 있다고 파지올리는 진단한다.

 

 

가톨릭 지성의 부활을 위하여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 안에서 지성이 언제나 바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니다. 지성과 지식이 삶과 연결되지 않아 공허한 앎으로 전락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성과 지식이 권력과 자본과 결탁해서 올바른 사회적 힘으로 작동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더욱이 오늘의 시대는 이성보다 감정과 욕망이 더 중요한 시대다.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이성이 요청되는 시대다. 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현대인들이 빚어내는 현상들을 우리는 쉽게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의 모든 자리에서 이성은 사라지고 감정과 욕망만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스티븐 핑커(「지금 다시 계몽」)와 조지프 히스(「계몽주의2.0」)처럼, 계몽주의적 이상을 다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성(이성)의 역할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가톨릭의 빛나는 전통은 언제나 신앙과 지성(이성)을 두 축으로 움직여 오지 않았던가.

 

지성의 부활이 지성주의(intellectualism)의 귀환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성과 지식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지성주의는 지식인들의 한 시절의 오만일 뿐이다. 지적 우월주의가 아니라 신앙적 지성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신앙은 이성을 포함하지만, 지성은 언제나 이차적이다. 신앙도 삶이 먼저다. 앎은 삶에서 나온다. 지성적 행위로서 신학은 이차적 작업이다. 신학이 신앙보다 앞설 수는 없지만, 올바른 신앙을 위해 신학은 필수적이다.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고 식별할 수 있는 신학의 부재가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의 부재를 알리는 증거다. 사실, 가톨릭 신학은 그 본성상 전통과 시대를 동시에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던가?

 

공부하는 지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지식이 단순히 정보의 취득으로 전락하고, 공부가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전락한 시대이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지성과 신앙의 일치와 균형을 강조하는 가톨릭 신앙의 이상(理想)이 더 매혹적이지 않을까? “리터러시가 공동체적으로 갖춰지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조병영) 교회의 지성, 교회의 문해력이 성장하기를 희망한다. 경청과 읽기와 식별을 위해 신앙적 지성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절이다.

 

[가톨릭신문, 2022년 2월 13일,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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