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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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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5-03 ㅣ No.642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상)


병자들 돌보며 시작된 수도회

 

 

-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를 창설한 ‘사랑의 사도’ 복자 루이지 마리아 몬띠.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제공.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는 1857년 이탈리아에서 ‘사랑의 사도’로 평가받는 복자 루이지 마리아 몬띠(Luigi Maria Monti, 1825~1900)에 의해 창설됐다.

 

당시 이탈리아는 국가 통합을 위한 긴 전쟁으로 원인 모를 피부병들이 유행하고 있었다. 로마 성령병원(S.Spirito) 간호사와 보조 약사였던 복자는 이런 병으로 고통 받는 국민들과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수도회를 설립한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를 주보성인으로 한 이 수도회는 창설자 정신에 따라 병자의 치유, 고아와 소외된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교육을 통한 성화를 목표로 한다.

 

복자는 1825년 7월 24일 이탈리아 북부 보비시오(Bovisio)에서 태어났다. 1825년은 영국에서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개통돼 조지 스티븐슨의 증기 기관차 로코모션 호가 세계 최초로 승객과 화물을 싣고 달린 해다. 인류 최초로 사진이 촬영된 해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에서는 조선 순조 25년이었던 이해에 성 정하상과 성 유진길 등이 교회의 수난을 교황청에 보고했다.

 

그의 가정은 매우 신실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늘 기도와 일상의 노동으로 하느님을 경배했다. 특히 부친은 ‘가정 내에서의 다툼과 기만은 성당에서 싸우고 속이는 것과 다름없다’며 ‘가정은 교회’임을 강조했다.

 

부친은 복자가 12세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정 생계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터에 나서야 했던 그는 목공소에 취직했다. 일하면서도 기도 생활에 게으르지 않았고 동년배들과 기도하며 영적 대화를 나눴다.

 

이후 수도 생활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였고, 직장 및 마을 동료들은 그런 깊은 신심에 이끌리며 그와 함께 수도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재속 봉헌’(Consecratio mundi)의 선구적 모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틈만 나면 모여서 복자와 함께 해가 질 때까지 이야기하고 노래했다. 또 복음 말씀을 나눴다. 성지 순례를 했으며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이들 모습은 주변을 감동시켰고 더 많은 젊은이가 점점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수도회 설립은 병자들과 함께하는 생활 중에 이뤄졌다. 1857년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수도회를 시작한 복자는 1858년부터 로마 성령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봉헌된 삶을 살았다. 외과 응급처치와 약 조제, 간호사 업무를 익혔고, 그중에서도 간호사 일에 주력했다. 이는 평생을 어려운 이웃과 환자를 위해 헌신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복자는 세상에서의 삶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시간이라고 믿었다. 그런 이념 속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가운데에서도 성경을 읽고 기도와 성사 속에서 하느님을 찾고 갈망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5월 3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중)


성모 신앙 따르겠다는 신념 담아

 

 

-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로고.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제공.

 

 

‘마리아의 아들들’은 복자 루이지 마리아 몬띠가 수도회 이름을 결정해야 했을 때 제안한 것이다. 여기에는 수도회를 설립하기 전부터 줄곧 자신을 마리아의 아들이라 말해왔으며, 항상 마리아의 아들이기를 원했던 그의 신념이 담겼다.

 

수도회 설립 후 수많은 좌절을 겪는 과정에서 복자는 성모 마리아를 믿고 따랐다.

 

그는 어느 날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듣게 된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나를 위해 젊은 청년들을 모아 그들이 순수함을 지키고 정결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그토록 많은 일을 했는데, 그런 너를 내가 저버릴 수 있겠느냐? 용기를 내어라”는 내용이었다.

 

복자는 이런 과정에서 지상의 시련에는 반드시 천상의 도움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보다 더 단호하게 하느님 뜻을 행했다.

 

사랑은 사람의 몸 안에서 피와 같은 역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그는 더 나아가 겸허했다.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마치 죄로 가득 찬 사람처럼 항상 회개를 열망했다.

 

그런 겸허함은 소박한 성격에서 나온 것이었다. 늙고 쇠약한 모습의 그가 수도원 식당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자기보다 나이든 형제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발에 입 맞추는 광경을 형제들은 자주 목격했다.

 

자신을 오해하는 장상들로부터 모욕과 박해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영웅적인 겸허함이 요청되는 일이었으나 수도회 이익과 관계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다.

 

다음은 특유의 소박함을 드러낸다. “교회와 식당에서 우리는 동일하다. 비록 우리 역할은 다르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이 배고픈 자들인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한 평등을 원했던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심하게 아플 때조차 특별한 치료와 대우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도 먹지 않는 음식을 골라 먹었다. 허리 디스크, 위궤양, 눈병 등으로 고통 받았지만 참을 수 있는 한 내색하지 않았다. 그에게 신체적 고통은 하느님을 위해 바쳐야 하는 하나의 의무였다.

 

그의 영혼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성사 속에서 겸허하게 그러나 힘차게 신적인 것을 갈망했다. 가능한 한 작은 죄도 짓지 않고, 내쉬는 숨 하나하나와 행하는 행위 하나하나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바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원했다.

 

복자는 겸손함과 소박함과 순명이 ‘가장 숭고하신 성모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가장 큰 덕이라 믿었다. 이 덕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여시고,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성령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셔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으신 바로 성모 마리아께서 지녔던 덕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탈리아 로마의 한 신문은 ‘주님께서는 그분의 평화 속에, 이 충실한 종의 영혼을 거둬들이셨다’고 애도했다.

 

2003년 11월 9일 루이지 마리아 몬띠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복자 반열에 올랐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5월 10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하)


언제나 “예”로 응답하신 성모님처럼…

 

 

2018년 부제서품식 후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회원들.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제공.

 

 

“당신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언제나 ‘예’로 응답하신 성모님의 모범을 우리의 수도 생활의 지표로 삼으며 언제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수도자적 봉헌의 삶을 살아갑니다.”(회헌 6)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모시는 수도회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평수사와 성직 수사들로 이뤄진다. 회원들은 인류에게 사랑을 증거하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청빈, 정결, 순명을 보다 자유롭게 따르며 그리스도를 닮은 완전한 애덕 성취를 추구한다.

 

특별히 창설자 정신에 따라 병자 치유와 고아 그리고 버림받고 소외된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교육을 통해 자신을 성화한다.(회헌 1-3)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대륙 10여 개 국가에 진출한 수도회는 의료 분야와 교육 분야 및 사회복지 분야에서 다양한 사도직을 펼치고 있다.

 

수도회의 사도직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항상 함께하신 성모님의 모범에 따라 사도직을 통해 인류 구원 사명에 참여한다’(회헌 109)는 정신에 따른다.

 

교육 분야는 전문적으로 양성된 교육자 수사들이 초기 교육 과정에서부터 전문가 과정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인성교육과 전문적인 교육 프로그램의 실행으로 종합 교육의 장을 여는 데 힘쓴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는 시설 설립과 상담소 운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의 요청에 응답한다. 의료 영역은 의사, 약사, 간호사, 특수 분야의 전문가, 원목 수사 신부들로 구성돼 환자들과 함께 봉헌된 삶을 살아간다.

 

한국과의 인연은 1996년 시작됐다. 이후 2002년 사회복지법인 바다의 별 설립 허가를 취득하고 2003년 수원시 이목동에 수도원의 터전을 마련했다.

 

현재 수원과 철원, 용인 등 3개 지역에 수도원을 두고 있는데 수원 수도원에는 장애인시설 바다의별, 몬띠 피정의 집, 몬띠 가족상담소, 바다의 별 직업재활센터, 이디(IDI)코리아가 자리해 수도회 카리스마를 사회와 교회 안에서 실천하고 있다.

 

철원수도원은 2012년 설립돼 몬띠 노인요양원을 운영 중이다. 요양원은 치매, 뇌졸중 등 노인성 질환을 겪는 어르신들을 돌본다. 인격적 사랑 실천을 목표로 하며 어르신들의 안정된 노후 생활과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한다.

 

용인수도원은 2015년 설립돼 장애인시설 하늘의 별을 경영하고 있다. 하늘의 별은 지적 장애인들이 더욱 나은 환경에서 서비스를 받으며 지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수도회는 지난 3월 19일 수원 인계동에 ‘몬티센터’를 개원했다. 센터에는 2011년 창간한 월간 가톨릭 비타꼰과 도서출판 가톨릭 비타꼰, 카페가 들어서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5월 17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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