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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살몽의 다블뤼 주교 전기 인용 자료 연구: 조선 입국 이후 가족에게 보낸 편지 인용 방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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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3-09 ㅣ No.1162

살몽의 다블뤼 주교 전기 인용 자료 연구*


- 조선 입국 이후 가족에게 보낸 편지 인용 방식을 중심으로 -

 

 

국문초록

 

살몽은 《다블뤼 주교 전기》를 서술하면서 여러 자료를 인용하였다. 그는 전기 서문에서 다블뤼 가족들로부터 입수한 자료의 도움이 컸음을 밝혔다. 한편으로 다른 자료들도 참조하였음을 밝혔다. 병인박해 때 생존한 선교사인 리델 주교, 칼레 신부, 페롱 신부가 제공한 자료들과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를 비롯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제공한 자료들도 인용하였음을 밝혔다.

 

살몽은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전기에 인용하면서 조선의 일반 현황, 조선 선교지의 상황과 선교사들의 삶의 양식 및 사목 방문, 다블뤼의 교회사 서술 활동 등을 중점으로 다루었다. 이를 통해 조선 대목구의 부대목구장 주교이며 조선 교회 선교사인 다블뤼의 공적인 면을 드러냄과 동시에 한 가톨릭 집안의 일원인 다블뤼의 사적 관계도 표현하였다. 살몽은 가족 간의 관계에서 드러난 인간적인 모습이 선교사로서의 다블뤼의 면모를 폄훼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와 더불어 다블뤼가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온 인간적인 모습들도 해당 편지의 인용을 통해 드러내었다.

 

살몽은 기존의 순교자 전기가 가졌던 선한 목자의 형상 강조와 순교의 영광 표현에 머무르지 않았다. 다블뤼라는 사목자가 가진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살몽은 선교사로서 다블뤼가 느끼는 기쁨과 희망, 고통과 근심 등은 물론 가족과의 유대를 끊임없이 가졌음을 표현하였다. 그러한 의도에 가장 적절한 자료는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는 다블뤼가 편지에 쓴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전기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편지 안에 들어 있는 공적인 임무와 사적인 관계가 나온 이야기를 적절히 배치하여 체계적인 전기를 서술하였다는 점이 살몽이 편지를 인용한 특성이다.

 

 

Ⅰ. 머리말

 

다블뤼(Daveluy) 주교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후 그의 고향인 아미앵(Amien)에서 《다블뤼 주교 전기》(Vie de Monseigneur Daveluy) 발간이 이루어졌다. 전기 작가인 샤를 살몽(Ch. Salmon)은 전기를 서술하면서 다블뤼와 관련한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참조하였다. 특히 다블뤼 가족들이 제공해 준 편지를 주요 자료로 활용하였다고 서문에 서술하였다.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이외에도 다블뤼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보낸 공식 서한들도 활용하였다.

 

다블뤼에 대해서는 주로 그의 조선 천주교회사 서술에 대해 주목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다블뤼가 쓴 순교자 기록에 대해 주목한 연구 성과1)가 있으며 다블뤼의 기해박해 서술을 다룬 연구 성과도 있다.2) 샤를르 달레(Ch. Dallet)의 《조선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ée)에 대해 연구하면서 그의 저작에 중요한 기초 자료를 제공해준 다블뤼의 역할을 언급한 연구 성과가 있다.3) 한편으로 프랑스 선교사로서 조선을 인식한 다블뤼 주교의 면모에 중점을 둔 연구 성과가 있다.4) 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편지에 나와 있는 글쓰기 형태와 조선에 대한 인식에 대해 연구하면서 다블뤼의 편지도 포함시킨 연구 성과도 있다.5)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 안에서 있었던 순교자 기념의 일환으로 순교자 전기를 발간한 일을 분석한 연구 성과도 있다.6) 하지만 다블뤼의 일생을 다룬 전기와 그 바탕이 된 다블뤼의 서한에 대한 연구는 미비하다. 다블뤼가 조선의 천주교회사와 순교자 이야기를 기록한 것에 대한 연구와 그의 조선 사목 활동에 대한 연구는 있지만 정작 그가 쓴 자신에 대한 기록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 반대로 다블뤼에 대해 다른 사람이 기록한 자료에 대한 연구도 미비한 상황이다. 다블뤼가 순교자의 이야기를 쓴 부분은 잘 드러나 있으나 다블뤼라는 인물과 그 인물에 대한 기록 자체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실정이다.

 

본 연구는 《다블뤼 주교 전기》 작가인 살몽이 인용한 다블뤼의 편지 중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 사항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살몽은 전기를 서술하면서 여러 자료를 인용하였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볼 때 전기 안의 인용 자료 중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조선 입국 이후에 쓴 편지를 중심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조선 천주교회의 사목자로 활동하였으며 순교한 다블뤼의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보려면 전기에서 인용한 조선 입국 이후 편지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살몽이 전기를 작성하면서 인용한 자료 사항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전기의 목차 구성과 각 목차 안에 필요한 자료들을 인용 배치한 사항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인용 자료 분석을 통해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 비중이 높음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어서 조선 입국 이후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인용 사항이 어떠한지도 밝혀보고자 한다. 또한 살몽이 전기에 인용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이 가지는 특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낸 다블뤼의 입장이 아니라 다블뤼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를 쓴 살몽의 입장을 중심으로 한 인물연구사 위주로 서술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살몽의 전기 서술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이를 통해 전기 작가인 살몽이 전하려 했던 다블뤼의 진면목에 대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의 흐름을 알려 줄 수 있는 자료라는 면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블뤼 주교 전기》에 인용한 서한 자료를 통해 해당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Ⅱ. 자료 입수 및 인용과 전기의 목차


1. 인용 자료 입수 출처

 

전기 작가인 살몽은 전기를 간행함에 있어 필요한 자료들을 입수하였다. 그는 자료 입수에 있어 다블뤼 가족의 도움이 매우 결정적이었음을 서문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하느님을 알리러 갔다가 하느님을 위해 순교한 선교 사제를 기억하기 위하여 교회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기념할 만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블뤼 주교의 동향인들과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의 생애에 관한 책을 출판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작업을 위해 아미앵의 첫 순교 주교의 전기 작가가 멀리 조선의 순교 주교의 생애도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우리를 선택하였다. 우리는 선교 사제의 가족들의 승인을 얻고는 당연히 말할 나위 없이 엄청난 자긍심을 가지고 이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제 수 년 동안의 작업 결과를 내어놓게 되었다. 이 일은 대단한 흥미를 주었지만 동시에 우리가 도저히 숨길 수 없는 큰 어려움도 주었다. 과연 우리는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낸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독자들에게 맡기겠다. 우리는 이 일을 기꺼이 도와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의 의무를 성심을 다해 완수하였다. 우선 이 감사를 다블뤼 주교의 존경하는 가족들에게 드린다. 이들의 협조가 없었으면 우리의 작업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수 년 동안 길고도 우정 어린 인내심으로 모아 온 서류들과 기록들과 추억들을 모두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36년이나 되는 기간 동안 앙투안 다블뤼가 부모에게 쓴 편지들의 원본이나 사본이 우리 손에 들어왔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할 때마다 원본과 사본을 대조할 수 있었다.7)

 

살몽은 전기 서술에 있어 가족들의 협조가 우선했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순교한 선교사를 기억하기 위한 가시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으며 그 수단으로 전기를 생각하였다.8) 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 있어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을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이 귀중한 서한을 기증한 다블뤼 가족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하였다.

 

그러나 살몽은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만 자료로 활용하지 않았다. 서문에 다른 자료들도 참조하였음을 언급하였다. 병인박해 때 생존한 선교사인 리델(Ridel) 주교, 칼레(Calais) 신부, 페롱(Féron) 신부가 제공한 자료들과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를 참조하였음을 밝혔다. 이와 더불어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제공한 자료들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음도 언급하였다. 특히 달레의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면서 인용은 했지만 표절은 하지 않고 상당 부분 편집하였음을 언급하였다.9)

 

물론 병인박해 때 순교한 다른 선교사들의 전기에도 비슷한 인용의 형태가 나온다. 대부분 순교한 선교사가 보낸 편지들과 가족 및 지인이 제공한 자료가 주요 근거임을 밝혔다.10) 베르뇌(Berneux) 주교의 전기를 쓴 피숑(Pichon) 신부 역시 서문에 베르뇌의 가족과 친구들이 제공해준 미간행 편지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을 언급하였다.11) 도리(Dorie) 신부의 전기를 쓴 보드리(Baudry) 신부도 서문에 도리 신부의 편지 112통의 일부를 활용하였음을 언급하였다.12) 이렇듯 가족들이 제공해 준 자료가 순교자 전기 서술의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다블뤼 주교 전기 서술도 이러한 형태를 따랐다. 하지만 가족이 제공한 자료만을 인용하지 않았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다양한 곳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인용하였다.

 

살몽은 《다블뤼 주교 전기》를 서술하면서 인용한 자료의 출처는 다양하다. 다블뤼 가족 관련 기록부터 파리외방전교회가 제공한 서한들과 미올랑(Mioland) 주교와 본당 신부인 프티(Petit) 신부 등 아미앵 교구 관련자들이 남긴 기록들이 있다. 《아미앵 신문 Mémorial d'Amiens》과 《뤼니옹 l'Union》지라는 언론 보도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용 자료들 중 전기 서문에서 언급한 자료는 다블뤼 가족들이 기증한 자료와 병인박해에서 생존한 리델, 페롱, 칼레가 제공한 자료,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 파리외방전교회 제공 자료이다. 그 밖에 다블뤼 주교 전기가 나오기 이전에 출간된 다른 병인박해 순교 선교사 즉,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신부, 오매르트(Aumaître) 신부의 전기도 인용 자료로 나온다.

 

이러한 인용 자료들 중에서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살몽이 인용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59통이다. 또한 살몽이 인용한 다블뤼의 신학생 시절 아버지가 남긴 비망기와 〈프티 신부가 다블뤼 신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와 〈리델 신부가 다블뤼 주교 아버지에게 보낸 1866년 8월 27일자 편지〉 역시 다블뤼 가족들이 제공해 준 자료로 볼 수 있다.

 

살몽은 다블뤼 주교의 전기를 서술하면서 필요한 자료들을 입수하는 데 있어 다블뤼 가족들과 파리외방전교회와 아미앵 교구의 도움을 받았다. 또한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와 병인박해 때 생존한 선교사들의 증언 자료 역시 전기 서술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렇듯 살몽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료를 입수하고 인용하였다. 결국 살몽이 전기 집필 과정에서 인용한 자료를 입수한 출처는 다블뤼 가족, 파리외방전교회, 병인박해 생존 선교사, 달레의 책, 아미앵 교구, 언론 보도 등 매우 다양하지만 다블뤼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고 할 수 있다.

 

 

2. 전기 목차와 자료의 인용 배치 사항

 

앞서 살펴보았듯이 살몽은 전기를 집필하기 위하여 다블뤼 가족들을 비롯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 자료를 입수하였다. 그렇다면 살몽이 쓴 전기의 각 목차에 해당 자료들이 어떻게 인용 배치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살몽이 다블뤼 주교 전기를 서술할 때 목차를 크게 3부로 구성하였다. 1부의 제목은 ‘유년기-청년기-사제’이고, 2부의 제목은 ‘선교사’이고, 3부의 제목은 ‘주교’이다. 다블뤼의 생애의 변화에 따른 목차 구성이다. 그런데 《다블뤼 주교 전기》의 전체 목차 중 조선 입국 이전의 이야기와 조선 입국 이후 이야기에 모두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인용이 나온다.

 

1부는 모두 12장인데 다블뤼의 탄생부터 어린 시절 그리고 신학교 입학에서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파견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료를 인용할 때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제공한 자료나 동료선교사들의 증언보다 가족들이 제공해준 자료의 비중이 높을 것이다. 조선 입국 이전 자료로 볼 수 있는 자료 중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18통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기에서 인용한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59통 중 36통을 조선 입국 이전에 보낸 편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36통 중 18통의 편지는 다블뤼가 프랑스를 떠나기 전에 보낸 것이다. 이외에 다블뤼의 신학생 시절과 아미앵 교구에 머물던 시절에 그와 관련한 인물들이 남긴 기록들도 들어가 있다. 미올랑 주교와 프티 신부의 기록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2부는 모두 12장인데 구성이 다소 복잡하다. 1장부터 4장까지는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마닐라와 마카오를 거쳐 조선 입국을 준비하는 여정이 나온다. 5장과 6장은 조선의 일반 사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7장에는 1839년까지의 조선 천주교회 역사 서술이 나온다. 8장과 9장은 조선 입국 과정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10장부터 12장까지는 다블뤼의 조선 도착부터 베르뇌 주교의 조선 입국까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살몽은 4장까지 서술하면서 주로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였다. 5장부터 7장까지는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가 주요 인용 자료였다. 8장부터 12장까지는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하여 파리외방전교회 제공 자료와 달레의 책이 모두 인용 자료로 나왔다. 그런데 인용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조선 입국 이전과 이후 편지가 모두 나온다. 조선 입국 이전 편지는 18통이 나오며, 조선 입국 이후 편지는 12통이 나온다.

 

3부는 다블뤼의 주교 서품부터 순교까지의 이야기이다. 3부를 구성하는 12장 중에서 7장까지는 다블뤼의 순교까지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다블뤼 생전의 이야기는 7장까지 서술하였다고 볼 수 있다. 8장부터 10장까지는 순교 소식의 전파와 아미앵에서의 기념식을 이야기하였다. 3부에서도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의 인용 비중이 높다. 조선 입국 이후에 보낸 편지 23통 중 11통을 살몽이 인용하였다. 이외에도 달레의 저서 인용 비중도 적지 않으며 병인박해 생존 선교사들의 증언 자료와 파리외방전교회 제공 자료들도 살몽의 전기 서술에 큰 도움을 준 자료로 나온다. 다블뤼의 순교 기념에 대해 다룬 9장과 10장에서는 주로 《아미앵 신문》의 기사를 인용하여 서술하였다.

 

살몽이 인용한 자료 중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의 비중이 높음은 전기의 목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선 입국 이전에 보낸 편지 중 36통, 조선 입국 이후에 보낸 편지 중 23통을 인용하였다. 이러한 양적인 면을 보더라도 전기의 각 목차 안에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주요 인용 자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만 주요 인용 자료로 볼 수 없다. 전기의 서문에 언급한 병인박해 생존 선교사 증언 자료, 달레의 저서, 파리외방전교회 제공 자료들도 각 목차 안에 적절하게 들어갔음도 드러나 있다.

 

 

Ⅲ. 살몽이 전기에 인용한 자료 사항


1. 달레의 저작과의 비교와 인용 사항 분석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의 경우 다블뤼 주교 전기에 나온 조선에 대한 소개부분인 2부 5장부터 병인박해 부분인 3부 8장까지 36번 인용한 흔적이 나와 있다. 그런데 달레가 쓴 책의 경우 전기에 인용할 때 주로 조선 입국 이후 부분만을 다루고 있다. 실제로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를 쓰면서 다블뤼의 조선 입국 이전 이야기는 김대건 신부의 조선 입국 이야기를 하면서 단순히 소개하는 데에만 그쳤다.13) 물론 전기의 2부 5장과 6장은 달레의 책에 나온 조선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 글을 인용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다블뤼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룬 내용이 아니다. 이렇듯 달레의 책에 나온 다블뤼의 조선 입국 이전 이야기는 전기에 광범위하게 인용할 수 있는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결국 살몽이 달레의 책을 인용할 때 다블뤼의 조선 입국 이후에 더 주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블뤼의 조선 입국을 시작으로 본다면 살몽의 전기 목차 구성이 달레의 책 목차 구성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다블뤼의 조선 입국이라는 상황을 기준으로 하여 살몽과 달레의 저작의 목차 구성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살몽과 달레가 쓴 책의 목차 구성을 비교해 보면 서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한 일반 사항을 서술한 후에 본격적인 이야기를 서술하였다는 면에서 목차 배열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살몽은 조선의 일반 사항을 전기의 서문에 다루지 않고 중간 부분에 삽입하였다. 다블뤼의 조선 파견 결정과 프랑스를 떠난 이후의 이야기를 서술한 후에 조선의 역사와 문화 및 지리에 대한 이야기를 달레의 책에 나온 부분을 요약하여 넣었다. 이와 더불어 2부 7장 안에 기해박해까지의 조선천주교회의 역사를 달레의 책에 나온 내용을 요약하여 서술하였다. 그런 후에 조선 입국 준비 단계의 이야기부터 다블뤼의 순교까지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달레의 책에 나온 부분 중 필요한 부분을 인용하였다.

 

이러한 목차의 구성을 살펴 보면 살몽이 달레의 책을 읽고 여기에 나온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목차 구성도 다소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목차 구성은 달레의 책이 나오기 전에 발간된 순교자 전기에도 공통적으로 나온다.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한 후의 이야기를 서술하기 전에 조선의 역사와 지리 및 문화를 비롯하여 간단한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 부분을 삽입하였다. 베르뇌 주교,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의 전기에 이러한 점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14) 이 전기에 나온 조선 및 조선천주교회 역사 서술의 근거 자료는 다블뤼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냈으며 달레의 책에 영향을 준 《조선사 서설 비망기 Notes pour l'introduction à l'histoire de Corée》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볼 때 살몽은 다블뤼의 전기를 서술하면서 달레의 책 뿐만 아니라 이미 나온 순교자 전기의 목차 구성을 참조하였을 것이다.

 

달레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편지를 주요 자료로 인용한 것처럼 살몽 역시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주요 자료로 인용하였다. 주요 인용 자료가 편지라는 면에서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달레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 및 지리를 다룬 서설을 서술한 이후에 시간의 순서에 따라 목차를 구성한 반면 살몽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전기를 서술했지만 중간에 끊기는 부분도 일부 있다. 살몽이 달레의 책을 인용하지 않은 3부 4장과 5장이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서술한 부분이다. 다블뤼의 조선에서의 일상사와 가족 관계를 다룬 부분이기에 반드시 시간 순서에 따라 쓰지 않은 것이다. 물론 달레도 조선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에 대한 간략한 생애를 소개할 때 시간을 거슬러 서술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장 전체가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은 사례는 없다.

 

살몽은 달레의 책을 인용하면서 각주에 인용한 페이지만 명기하였다. 대개 달레가 인용한 서한까지 상세히 인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달레의 책을 인용하면서 달레가 서한을 인용했다고 밝힌 부분도 두 차례 있다.15) 〈1846년 2월말에 쥐랭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 부분16)과 〈1857년 11월 21일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 부분17)이 각각 나온다. 전자는 조선에 입국한 이후 조선에 대한 첫인상을 표현한 부분이고, 후자는 다블뤼 자신의 주교 서품식을 묘사한 부분이다. 선교사로서 다블뤼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던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목차 구성 역시 다블뤼의 인생 전환점을 중심으로 3부로 나누었기에 달레의 인용 서한을 상세히 소개한 부분도 이에 따라서 했다고 볼 수 있다.

 

살몽이 《다블뤼 주교 전기》를 기술하는 데 있어 비록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만큼의 비중은 아니더라도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를 광범위하게 인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목차의 구성을 비교해보면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유사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결국 살몽이 전기를 쓰는 데 있어서 달레의 책이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 증언 자료와 파리외방전교회 제공 자료 인용 사항

 

살몽은 전기 서문에서 언급하였듯이 리델, 페롱, 칼레 등 병인박해에서 생존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서술하였다. 한편으로 파리외방전교회가 제공해 준 자료들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음을 언급하였다. 병인박해에서 생존한 선교사들의 자료는 공식적인 편지가 아니라 이들의 구술을 기록한 자료로 볼 수 있다. 인용한 각주나 본문에 자료의 출처가 명확히 나오지 않고 해당 선교사의 증언이라고만 나오기 때문이다.

 

살몽은 리델, 페롱, 칼레의 증언 자료를 다블뤼 주교의 일상 생활을 다룬 전기 3부 4장에 집중적으로 인용하였다.18) 조선에서 다블뤼가 활동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같이 활동한 생존 선교사가 이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상사를 다루는 부분은 이들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병인박해를 서술한 부분에서도 페롱은 병인박해의 시작에 대해서 서술하였다.19)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제공한 자료로는 다블뤼 주교가 동료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및 김대건 신부의 서한이다. 이 서한 자료들은 다음의 표와 같다.

 

 

 

 

살몽이 전기에 인용한 베르뇌 주교가 보낸 편지는 표에 나온 바와 같이 2통으로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로마대표부 시복시성자료로 분류하는 서한 자료이다.21) 이 2통의 편지 중 누아르(Nouard) 신부에게 보낸 편지는 자신의 서품식에 대한 설명이다.22) 이어서 드 라 브리으리(de La Bouillerie) 백작에게 보낸 편지에는 순교자의 땅인 조선에 대한 찬사가 나와 있다.23) 다블뤼의 장상이 될 베르뇌 주교의 조선대목구장 임명과 입국 과정을 다루면서 이 편지들을 인용하였다.

 

다블뤼 주교가 동료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도 5통 인용하였다. 이 중 〈시르 신부에게 보낸 1863년 9월 8일자 편지〉는 1867년에 《뤼니옹 l'Union》지24)에 발표한 편지이며, 나머지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제공한 자료로 다블뤼 문서 중 6권에 해당하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 이 편지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면서 각 시기에 다블뤼가 처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특히 박해 초기이며 다블뤼 자신이 아직 체포되지 않은 시기에 쓴 〈베롤 주교에게 보낸 1866년 3월 10일자 편지〉에는 동료 선교사들이 이미 체포당한 상황이 나와 있다.25) 박해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이 부분을 인용하였다.

 

이외에 파리외방전교회가 제공해 준 자료로 다블뤼의 조선 입국 이전 상황을 묘사하는데 언급한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1844년 12월 15일자 편지〉26)가 있다. 조선에서 활동한 다블뤼의 모습을 묘사한 〈페롱 신부의 1874년 10월 24일자 편지〉를 들 수 있다. 박해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칼레 신부가 베롤 주교에게 보낸 1866년 3월 편지〉도 인용하였다. 비록 인용한 비중은 매우 적지만 전기 내용을 보충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살몽이 전기를 서술하면서 인용한 자료 중 가장 높은 비중을 둔 것은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 다음으로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의 인용 비중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료들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병인박해에서 생존한 선교사들의 증언 자료와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제공해 준 서한 자료들도 전기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3. 조선 입국 이후 가족에게 보낸 편지 인용 사항

 

다블뤼 주교가 조선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지금 현재 밝혀진 바로는 모두 71통27)이다. 평균 한 해에 3-4통의 편지를 가족들에게 쓴 셈이다. 대부분은 수신자가 부모인데 함께 사는 가족들도 염두에 두고 썼다. 이 편지들 중 일부는 필사되어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도 보내졌다. 그런데 편지의 수신자들이 가족들이나 친척이라고 하여 사적인 내용들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다. 다블뤼 자신이 처한 현실이나 활동들, 조선의 문화나 풍습들, 조선 사람들과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28)

 

그런데 전기의 서문에 나온 바와 같이 전기 작가인 살몽은 36년 동안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의 원본과 사본을 모두 받아서 대조작업을 할 수 있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살몽이 다블뤼 가족들로부터 조선 입국 이전부터 그 이후의 편지까지 모두 받아 전기 서술에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살몽이 《다블뤼 주교 전기》에 인용한 조선 입국 이후 가족에게 보낸 편지 현황은 다음과 같다.

 

 

 

위의 표를 살펴보면 살몽이 인용한 편지는 23통이다. 다블뤼의 조선 입국 이후 그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71통 중에서 23통의 편지를 인용하였다. 그렇지만 살몽은 직접 인용한 23통의 편지만을 참조하지 않았다. 가족에게 건네받은 모든 자료들 특히 71통의 편지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전기 내용에 반영하였을 것이다. 이 중에서 전기 서술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선택하고 편집하였다.

 

《다블뤼 주교 전기》의 조선 입국 이후 목차 안에 가족들에게 보낸 서한을 어떻게 배치하여 인용했는지는 다음의 표에 나와 있다.

 

 

 

전기의 목차를 보면 조선 입국 이후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병인박해 직전 내용까지 인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2부 12장 베르뇌 주교의 입국’은 베르뇌 주교가 보낸 편지와 파리외방전교회의 공식 자료를 주로 인용하였다. ‘3부 4장 일상적 삶’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병인박해에서 생존하였으며 다블뤼와 같이 활동한 리델, 페롱, 칼레 세 선교사들의 증언 자료를 인용하였다. 물론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안에 조선에서의 자신의 일상사와 베르뇌 주교 임명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베르뇌 주교의 임명과 조선 입국에 대해서는 베르뇌 주교의 서한이나 파리외방전교회 자료가 더 정확할 것이며, 다블뤼 주교의 일상사의 경우 같이 활동했던 동료 선교사들이 더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우를 빼놓고는 병인박해를 맞이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는 주로 시간의 순서에 따라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 배치하였다. 물론 시간의 순서대로만 인용하지 않았다. ‘3부 5장 가족과의 관계’는 시간의 순서에 관계없이 편지를 인용하였다. 6장에 나온 시기인 1866년 1월부터는 다블뤼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없기 때문에 해당 편지를 인용할 수 없었다. 물론 마지막 편지인 〈1865년 10월 16일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병인박해 이전 조선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현재로서는 어린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전권을 쥐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데, 그는 지금까지는 우리 프랑스 신부들이나 교우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까요. 게다가 그는 성격이 격하고 포학하며 백성을 아낄 줄 모르고 함부로 다룹니다. 그러니 만일 그가 교우들을 공격한다면 아주 크게 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29)

 

이 편지에서 다블뤼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를 내리며 그가 박해를 한다면 매우 심할 것이라는 예견을 하였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없기에 박해의 전조를 묘사한 3부 6장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살몽은 조선 입국 이후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71통의 원본과 사본을 검토하면서 이 중에 23통의 편지를 전기 안에 인용하였다. 주로 조선 입국 직후부터 병인박해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서술할 때 집중적으로 인용하였다. 다블뤼가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낸 1865년 10월까지의 전기 서술에서 가족과의 관계를 다룬 3부 5장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당 편지들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각 목차에 배치 인용하였다. 그리고 인용한 비중이 높음을 알 수 있다.

 

 

Ⅳ. 조선 입국 이후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인용 방식과 특성


1. 전기에 인용한 편지의 내용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살몽은 조선 입국 이후 다블뤼의 행적을 전기에 다루면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다수 인용하였다. 살몽이 《다블뤼 주교 전기》에 인용한 조선 입국 이후 편지의 내용은 다음의 표를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나온 편지들이 전기에 기술한 내용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각 편지 안에는 전기에 인용하지 않은 다양한 내용들이 나온다. 하지만 살몽은 각 목차에 필요한 내용을 편지 안에서 추출하여 전기에 맞게 재구성하였다. 어쨌튼 전기가 인용한 편지 내용을 통해 살몽이 전기 서술에 있어 주안점을 둔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기의 각 목차 내용과 그 목차 안에서 인용했던 편지의 내용의 상관성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2부 10장과 11장은 다블뤼의 조선 입국 이후부터 주교품을 받기 전까지의 일이 나온 부분이다. 그에 맞게 인용한 편지 내용도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조선의 문물과 풍습에 대한 묘사, 조선 교회와 신자들의 상황에 대한 설명, 선교사들의 활동과 신상에 대한 설명이다.

 

살몽은 조선의 문물과 풍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조선의 의식주, 조선의 약재, 조선 왕의 행차를 적은 편지 부분을 직접 인용하였다. 다블뤼가 2부 11장에서 인용30)하였던 〈1851년 10월 동생에게 보낸 편지〉31)에서 조선 왕의 행차를 소개한 것처럼 단순히 처음 보는 조선의 풍습을 소개해 주는 차원에 머문 것도 있다. 하지만 의식주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에 적은 것은 단순한 풍습 소개라는 의도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의식주와 약재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에 쓴 것은 다블뤼 자신이 조선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알리기 위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살몽 역시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조선인들의 일상 생활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다블뤼를 비롯한 조선 파견 선교사들의 삶을 생생히 알려주려고 하였다. 살몽은 조선의 음식에 대해 다블뤼가 묘사한 편지를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즐겨 해주는 음식들이 아주 훌륭할 수는 있지만 조선 음식이 유럽 사람들의 위장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조선 음식이 후에 우리 선교 사제가 심한 위통을 가지게 된 원인이 되었고 그 자신도 언젠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음식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렇지만 당시에 그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32)

 

이를 통해 살몽은 다블뤼를 비롯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조선 생활이 쉽지 않았음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다블뤼가 조선 입국 시점에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는 점을 내세우며 그가 가진 용기와 열정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살몽은 다블뤼가 사목 방문을 한 일에 대해 2부 11장에 집중적으로 서술하였다.33) 이 부분을 서술하는 가운데 〈동생과 누이에게 보낸 1848년 8월자 편지〉34)와 〈부모에게 보낸 1848년 9월자 편지〉35)를 인용하였다. 이 두 편지를 인용하면서 선교사와 조선 교회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다블뤼 신부는 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에서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해도 된다면, 자신의 교우 방문들 중에서 특이한 면들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나라의 정신적인 상태, 전교의 성과, 복음을 전파하면서 겪은 어려움들에 관해 더 길게 상술하였다. 선교 사제들의 수가 아주 부족한데다가 계속 숨어 지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외교인들과는 전혀 접촉을 할 수가 없었다. … 선교 사제는 자신의 힘이 닿을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관할 구역을 세 번째로 거의 모두 방문하였다. 몇몇 사람들의 나약함과 망설임이 그의 마음을 슬프게 해주면 다른 많은 사람들의 용감한 신앙심과 확고부동함과 열성이 그를 위로해 주었다. 이때부터 그의 순교의 날까지, 너무도 긴 고통과 병환의 순간순간들을 말할 것도 없이, 은둔 시기의 길고도 단조로운 고독과 성사 베푸는 시기의 위험하고도 끝없는 활동이 나누어져 있는 거의 항상 비슷한 여러 해가 흘러갔다.36)

 

살몽은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교회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였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다블뤼의 편지에서 참조한 조선 교회의 어려움과 그 안에서 선교사들이 가진 열의와 용기에 대해 묘사하였다. 지방 사목 방문과 조선 교회 상황에 대해 설명한 다블뤼의 편지를 참조하고 인용하였기에 살몽이 이러한 묘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부 1장부터 3장까지는 다블뤼가 주교품을 받은 이후부터 병인박해 이전까지의 활동상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다. 3부 5장은 가족과의 관계를 서술한 부분인데 글의 시간 및 공간 전개상 다소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튼 3부 1장부터 5장까지 다블뤼가 조선 교회 안에서 행한 공적 임무와 편지를 통해 주고 받은 가족과의 사적 관계가 나왔으며 편지 인용도 이에 맞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3부 1장부터 3장까지에서 인용한 편지의 내용은 2부에서 인용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 선교지와 선교사들의 상황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다블뤼가 조선 교회 안에서 행한 공적 임무에 대한 서술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 교회의 상황을 설명하는 가운데 〈부모에게 보낸 1863년 9월 13일자 편지〉에 나온 조선 교회 신자들의 장례행렬 부분을 3부 3장에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37)

 

호기심을 채우려고 달려 나와 구경하는 외교인들은 아랑곳없이 선두에 십자가를 앞세우고 저마다 손에는 촛불을 들고서 큰 소리로 시편을 암송하며 열을 지어 지나가는 천주교인들의 장례행렬은 조선에서는 보기에도 참으로 야릇한 광경이지요. 그 먼 지방의 외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우리 천주교의 장례의식이 장엄하고 아름답다고 보았으며, 천주교인들의 장례가 자기네들의 그것보다 훨씬 낫게 치러지고 있다는 말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악영향을 끼칠 우려도 있어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곳에서는 교우들이 지역민들의 눈을 피할 도리가 없고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아예 숨김없이 공개적으로 장례를 치르는 쪽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공개적인 것과 비밀리에 치르는 것, 그 중간에 해당하는 방식이 어쩌면 있을 텐데요. 그러나 그러한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그리 쉽겠습니까? 그러니까 지나친 행동은 막아야만 하고 그 밖의 일들은 하느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성무를 집행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외교인들의 눈에 안 띄게 비밀리에 집행할 수가 없습니다. 제 자신은 자책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이것저것 신중을 기하지만 여러 곳에서 성무는 완전히 공공연하게 집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시어 새로 입교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 그것 때문에 크게 걱정할 이유는 없겠지요.38)

 

살몽은 이 편지를 인용하면서 박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장례 예식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다블뤼 주교의 성무 집행 역시 이에 따라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냈다. 살몽은 이 편지를 인용하기 전에 이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몇몇 지방의 신자들의 열성은 “유리를 깨뜨리지 않도록” 절제할 필요까지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어디서나 외교인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공공연하게 장례식을 하는 관습이 생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도 크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다.39)

 

사실 천주교식의 장례 예식을 공개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천주교인들의 모습이 노출되는 일이었으며, 이는 자칫하면 박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일임을 편지를 쓴 다블뤼나 전기를 쓴 살몽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없이 넘어갔음을 언급하였다. 오히려 다블뤼는 성무 집행을 공공연하게 집행하고 있으며 새로 입교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위험해 보이던 일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고 하였다. 이를 인용하면서 살몽은 다블뤼가 가진 신앙 자유에 대한 기대감을 은근히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었다. 이와 더불어 다블뤼가 성무집행이라는 공적 임무에 최선을 다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2부 11장에 나온 바와 마찬가지로 다블뤼가 행한 공적 임무 중 교우촌 사목 방문에 대한 이야기가 3부 3장에 나와 있다. 교우촌 사목 방문과 관련해서 〈부모에게 보낸 1864년 10월자 편지〉40)와 〈부모에게 보낸 1865년 10월 16일 부모에게 보낸 편지〉41)의 해당 내용을 인용하였다. 살몽은 이 편지를 3부 3장 집필 과정에서 인용하면서 다블뤼가 교우촌 사목 방문을 통해 얻은 성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가 겪은 인간적인 어려움도 서술하였다.42)

 

이러한 선교 상황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다블뤼가 맡은 가장 중요한 공적 임무인 조선 천주교회사 서술을 담은 편지를 집중적으로 인용하였다. 살몽은 다블뤼가 순교자 약전을 작성 발송한 과정과 교회사 서술을 계속 진행하고 있음을 서술한 〈부모에게 보낸 1858년 9월자 편지〉를 3부 2장 부분에 직접 인용하였다.43) 이러한 인용을 한 가운데 그는 다블뤼의 교회사 서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이와 비슷한 일을 완수하는 데에 필요한 고도의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당시 그는 조선어에 대한 완벽하고도 깊은 지식, 확실하고 신속한 판단력, 예민한 두뇌에다 전혀 빈틈없는 정확성을 지니고 있었다. …… 아콘 주교는 위에서 그가 언급한 조선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보내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풍요로운 수확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2송이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는 루방크루 수녀원의 수녀로 있는 두 누이에게 어떤 선물도 이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거라고 판단하여 이 루갈다와 1839년 박해의 희생자인 이 아나스타시아의 순교에 대한 감동스러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양이 많아서 여기에 실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가 들어있는 편지가 그 어느 것보다 먼저 원문 그대로 출판되기를 기원한다. 어떤 읽을거리도 이보다 더 모범적이고 더 감동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블뤼 주교는 1859년 성인 연구와 역사 탐구에 헌신했다고 보아야 한다.44)

 

여기서 살몽은 다블뤼가 조선 교회사와 순교자 이야기를 서술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편지와 순교자 약전 특히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 내용을 보고 이러한 평가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수녀인 두 누이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순이 루갈다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의 약전 기록을 옮겨 보냈음을 언급하였다. 여기서 언급한 편지는 〈두 누이에게 보낸 1858년 9월자 편지〉이다. 앞서 인용한 부모에게 보낸 편지와 같은 시기에 보낸 것이다. 살몽은 이 편지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읽고 참조했음은 틀림이 없다. 이 루갈다와 이 아나스타시아의 이야기가 들어간 이 편지가 원문 그대로 출판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다블뤼는 두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순이 루갈다의 약전을 모두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녀의 약전을 써내려갈 때 내 눈에는 눈물이 맺힙니다. 그녀는 조선의 순교자들 중에서도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나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합니다. 가여운 아이! 그녀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녀의 남자 조카가 여러 해 긴 세월 동안 나의 복사로 있었기에 나는 그 가문을 더욱 더 아낍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이제 편지를 끝맺으렵니다. 너무 길게 썼네요. 위의 글을 필사하기 위해 나는 여러 차례 기력을 회복시켜야 했답니다. 땀범벅이 되는 바람에 옷 한 벌을 완전히 버렸어요. 그러니 편지를 더 길게 쓰지 않는다고 나를 원망하지 말고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껏 누이들이 해왔던 기도보다 훨씬 더 많이요.45)

 

다블뤼는 수도 생활을 하고 있는 두 누이에게 동정을 지킨 이 여성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는 누이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두 동정 순교자의 약전을 편지에 그대로 전했으며, 그 약전을 편지에 기록한 의미도 전해주고 있다. 살몽은 방대한 양으로 인해 다블뤼가 두 누이에게 쓴 편지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전기 안에 양이 많아서 실을 수가 없다는 말을 하였다. 하지만 순교자 약전을 직접 실은 이 편지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한편으로 이 편지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다블뤼가 조선 천주교 순교자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한 데에 높은 평가를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살몽은 3부 3장에 〈부모에게 보낸 1865년 10월 16일자 서한〉을 인용46)하면서 주교댁에 일어난 화재 사건을 서술하였다. 화재에도 불구하고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을 추진하기 위해 모든 증인 선서와 교우들의 교육을 위한 저작물은 다행히 건져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47) 살몽은 이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다블뤼가 교회사 서술에 열정을 바치고 자신의 저작물을 소중히 여긴 면에 대해 부각시켰다.

 

이렇듯 2부 11장과 12장의 내용까지 포함한다면 살몽은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면서 다블뤼가 조선 교회 안에서 교우촌 사목 방문, 성무집행, 교회사 서술이라는 공적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음을 드러내었다.

 

다른 한편으로 다블뤼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과 자신의 사목 활동과 같은 공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사적인 이야기도 썼다. 가족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라는 성격상 사적인 부분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살몽은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전기에 인용하면서 이러한 사적인 부분도 인용하고 소개하였다.

 

가족과의 관계를 나타낸 3부 5장에서는 시간의 순서에 상관없이 조선 입국 이후 다블뤼가 가족과의 사적 관계를 다룬 부분을 인용하였다. 이에 대해 살몽은 전기 안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모두가 편지들을 연이어서 받기도 하고 가끔은 동시에 받기도 했다. 모든 편지들이 비교적 길었고 항상 작은 글씨로 마찬가지로 1845년과 마찬가지로 1865년에도 또박또박 고르게 씌어져 있다. 편지들은 항상 경건한 생각들이 지배적이었다. ……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신앙적인 만남을 상기시키고 당부하였다. 특히 형제들과 누이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인 가정에 속해 있는 행운을 상기시키고, 이런 특별한 은혜가 요구하는 의무를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언제나 가문의 정신과 단결의 정신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도록 부추겼다. 그는 형제들 개개인의 사건 하나하나, 첫영성체, 결혼 등에 관심을 보였고 이런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언급하였다. …… 독자들은 우리가 그의 편지들 중에서 사적인 부분은 공개하지 못하는 점을 이해할 것을 잘 알기 위해서는 이들을 읽어야만 한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이 편지들이 강렬한 빛을 발하게 될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가장 절대적인 헌신과 자기희생이 요구되었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사랑을 약화시키지는 않았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책에 이 사적인 편지들의 기나긴 구절들을 싣고 싶었지만 현재로서는 아주 약간만 발췌하여 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48)

 

살몽은 선교사로서의 다블뤼뿐만 아니라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다블뤼가 가진 인간적인 모습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한 부분이 선교사로서의 다블뤼의 면모를 폄훼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오히려 하느님 사랑과 가족 사랑이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였다.

 

살몽이 인용한 가족과의 관계를 다룬 부분은 크게 세 가지이다. 먼저 성심회의 수녀였던 누이 테레즈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담은 〈부모에게 보낸 1858년 9월자 편지〉49)이다. 그리고 아미앵의 보좌 신부로 있었던 〈동생 이시도르에게 보낸 1864년 10월 7일자 편지〉도 인용50)했는데 그 안에 다블뤼가 동생에게 부모를 자주 찾아가라는 권고한 내용이 나온다. 무엇보다도 큰 비중을 두고 다룬 것은 부모의 금혼식에 관련된 내용이다. 살몽은 〈부모에게 보낸 1862년 10월자 편지〉51)와 〈부모에게 보낸 1863년 9월 13일자 편지〉52)에서 부모의 금혼식을 축하하는 글을 쓴 부분을 직접 인용하였다.53)

 

살몽은 가족과의 관계를 다룬 3부 5장을 서술하면서 다블뤼가 가족의 경조사에 관심을 가지며 이와 관련하여 늘 기도를 하고 있었음을 내비치었다. 누이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 했던 편지를 인용한 것과 부모의 금혼식 관련 편지를 두 통이나 인용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살몽은 전기에서 조선 입국 이후 부분을 서술하면서 2부 10장부터 11장, 3부 1장부터 3장, 5장 부분에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였다. 양적으로만 보더라도 이 부분에서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 빈도가 높다. 편지의 내용 중 조선의 일반적 현황, 조선 선교지의 상황과 선교사들의 삶의 양식 및 사목 방문, 다블뤼의 교회사 서술 활동 등을 중점으로 다루었다. 이를 통해 순교자 이전에 조선의 선교사로서 헌신을 다한 다블뤼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또한 가족과의 사적 관계를 표현한 부분도 인용함으로써 다블뤼의 인간적인 모습도 표현하였다.

 

 

2. 편지 인용의 특성

 

살몽이 《다블뤼 주교 전기》에 편지를 인용한 사항과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편지를 인용한 특성이 무엇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가지는 특성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다블뤼가 편지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바는 다음과 같다. 우선 박해받는 조선 천주교회 선교사로서 느끼는 기쁨과 희망, 고통과 근심 등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특성이 있다. 다음으로 프랑스 교회와 자신의 가족과의 유대를 끊임없이 표현하였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의 미담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순교에 대한 다블뤼의 열망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54)

 

기존 연구에서는 순교자 전기 작가들이 순교자가 ‘선한 목자’의 형상을 갖춘 인물임을 역설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순교자 전기가 선교사의 순교를 빛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55) 또한 선교사들의 서한이 선교사들이 겪는 사건의 중심에서 구축되며 선교사 삶의 특성으로 인해 프랑스 서신교환자들에게는 독창적인 재복음화의 도구가 됨을 제시하였다.56) 또한 이전에 밝힌 부분 중에 순교자 전기 집필 목적을 순교자에 대한 개인적 추모와 유가족 및 지인에 대한 위로 차원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 차원의 기억과 추모로 확대할 수 있으며 프랑스 내부의 재복음화와 외부로의 선교열을 고취시키는 효과도 기대하고 있었음을 제시한 사항이 있다.57)

 

그렇다면 살몽은 위에서 선교사의 순교를 빛내고 ‘선한 목자’의 형상을 강조하는 형태의 저술을 강조했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부분은 그가 편지를 인용한 특성을 살펴 보기 전에 먼저 살펴 볼 내용일 것이다.

 

살몽은 전기 서문에서 예수회 신부 베스탕(Baesten) 신부가 쓴 《쥘리 빌리아르 수녀의 생애 Vie de la Mère Julie Billiart》의 서문 일부를 다음과 같이 직접 인용하였다.

 

성인들의 생애에 대해서는 비종교적인 이야기나 중요한 이유로 씌어진 이야기에서 보다 훨씬 더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되며, 최선을 다하여 작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인물에 대해서는 하느님이 그를 그 자리에 있게 하신 여러 가지 상황 중에서도 눈에 보이는 점만을 드러내야 한다. 전기는, 말하자면 사진일 뿐이다. 성인 자신이 자세를 취하여 의심할 여지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예술가가 수정하거나 미화하거나 자기 개인의 관점과 생각대로 왜곡하지 않은 사진이다. 이 인물 사진이 완전히 성공하려면 실물과 똑같아야 하고 성격과 덕행과 삶에 대한 가장 사소한 부분도 있는 그대로여야 한다. 말하자면 성실하게 다시 만들어져야 되는 것이다.58)

 

살몽은 이 글을 직접 인용하면서 전기는 사진을 찍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눈에 보이는 점만을 드러내며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인용문이 비록 살몽이 쓴 것이 아니다 하더라도 그가 동의하고 있는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결국 그가 다블뤼의 전기를 서술하면서 어떠한 방향으로 갈지 이 인용문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살몽은 전기 서문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소위 실증 철학 앞에서 형이상학적인 관념은 어떤 불행한 존재들에게는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순교자들과 19세기 극동 지방의 순교자들의 주장과 용기와 기쁨에 아주 가깝게 접근하는 길은 자료의 원문들을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언젠가는 주님의 은총으로 의심이 흔들리게 되고, 그러다 어쩌면 의심이 없어져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반면 잘 믿는 사람은 거기서 더 많은 믿음과 희망을 얻을 수 있는 동기를 찾게 될 것이다.59)

 

살몽은 실증 철학이 성행하는 이 시기에 신비적인 표현을 쓰기보다 자신이 입수한 자료의 원문을 그대로 기록하여 사실대로 전기를 서술할 것임을 명시하였다. 그러면서 이 전기가 신앙을 가진 이들과 가지지 않은 이들을 모두 겨냥하고 있으며 양자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살몽의 전기 서술은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결국 살몽은 전기를 쓸 때 다블뤼가 선한 목자라는 면이나 순교자라는 영광스러운 면만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다블뤼가 가진 인간적인 면도 자료에 드러난 대로 묘사했을 것이다.

 

이에 언급한 살몽이 전기 서술의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 방식의 특성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살몽이 다블뤼의 인간적인 면모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데 있어 가장 적절한 자료는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래서 전기 서술하는데 있어 가장 많은 비중을 가지고 인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살몽이 다블뤼 전기를 서술하는데 있어 다블뤼 가족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서문을 통해 나와 있다. 그 서문 안에는 다블뤼 가족들이 전기 출판을 원했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여기에 다블뤼 가족이 가진 의도가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아미앵의 부주교인 팔리에르(Falliéres)가 살몽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 가족 이야기에서 전기 출판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그가 흔치 않은 훌륭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도록 하셨다는 점을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부친, 즉 그 존경스럽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어울리는 성스러운 노인장께서 자신을 위로해 주러 오신 주교님께 “오! 제가 주님께 무엇을 해드렸다고 제가 세 명의 수녀와 두 명의 사제, 그들 중의 하나는 주교이며 순교자인데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단 말입니까!…”라고 하실 때, 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또 매우 품위 있고 훌륭한 어머니께서, 피를 흘리며 영광의 관을 쓰고 있는 아들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며 미소지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10년 전에도 이 두 분 모두가 깊은 애정으로 주님께 바친 세 명의 수녀들 중 하나가 영면하고 있는 순결한 침상으로 경건하게 다가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감히 다른 두 수녀들을 칭찬하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 있으니까요. 그러나 순교자의 남동생인 사제에 대해서는, 그가 조선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서 “아! 내가 조금만 건강하다면!”하고 마음을 다해서 외치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저는 귀하가 기록하신 순교자의 생애 초반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록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낸 초자연적인 훌륭한 교육의 깊숙한 곳까지 제가 얼마나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귀하의 독자들은 이들의 가정 안에서 이루어진 신자로서의 생활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그 전통 있고 굳건한 관습들을 보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이런 모습들이 드물게 되었으니 정말로 애석합니다.60)

 

팔리에르 주교는 다블뤼 가족의 신앙심이 매우 뛰어나며 그 시대의 사람들이 본받아야할 모습이라는 찬사를 하였다. 다블뤼의 순교를 받아들이는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가진 신앙이 뿌리 깊으며 강한 것임을 나타냈다. 이러한 다블뤼 가족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다블뤼 주교의 순교 사실을 알리며 이것이 동시대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살몽이 전기를 집필하게 되었을 때 자료 제공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살몽 역시 전기의 서문을 통해 다블뤼 가족에게 감사하는 표현을 하였다. 또한 전기를 집필하는데 있어 다블뤼 가족이 가진 강한 신앙심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블뤼 주교 전기는 살몽의 전기 서술 방식과 자료를 제공해준 다블뤼 가족의 의도와 맞물려 그 특성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살몽이 다블뤼의 조선 입국 이후 삶을 서술하는 가운데 편지를 인용한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편지 인용 내용에 따라 살몽이 전기 안에서 다블뤼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그 특징이 드러나 있을 것이다. 살몽이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 방식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우선 가족과의 사적 관계를 다룬 편지를 인용하고 전기의 3부 5장과 같이 별도의 장을 마련한 것으로 보아 순교자로서의 영웅적인 모습만이 아닌 다블뤼라는 한 개인의 인간적인 모습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공적 임무에 대한 서술에 얽매이지 않고 사적 관계도 부각시켰다. 특히 조선 입국 이후에도 가족 간의 유대를 늘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 유대 관계가 신앙을 매개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고 있다. 즉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전기에 인용하면서 다블뤼의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차원에만 그친 것이 아닌 그가 선교사로서 가진 열정의 배경이 가족 간의 관계 안에 드러나고 있음을 밝혔다.

 

두 번째로 조선 교회의 사목자이며 교회사 서술가로서의 다블뤼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편지 안에 나온 교우촌 사목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였으며, 조선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한 서술을 통해 사목자로서 그가 가진 열정을 서술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 천주교회사 및 순교자 이야기를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다블뤼의 모습을 그의 편지 안에서 찾아내어 강조하였다. 물론 다블뤼의 공적 임무를 다룬 부분에도 그가 가진 인간적인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보낸 1853년 9월 18일자 편지〉61)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다블뤼가 페레올 주교의 선종 이후 겪은 마음의 고뇌와 조선 선교지의 현실적 어려움을 표현하고 있다.62) 조선 교회 선교사로서의 다블뤼의 삶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세 번째로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이 혼재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가지는 성격상 두 요소를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회사 서술가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킨 부분에서도 그가 맡은 교회사 서술이라는 공적인 면만 들어간 것이 아니다. 수도 생활을 하는 두 누이에게 보낸 편지 안에 들어간 동정 순교자들의 약전과 이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에서 두 누이에 대한 사적인 권고가 들어가 있다.63) 조선 천주교회의 부대목구장이며 조선 천주교회사 서술을 맡은 다블뤼 주교라는 공적인 면모와 수도 생활을 하는 두 누이를 생각하는 오빠라는 다블뤼의 사적인 면모가 같이 드러나 있다.

 

앞서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가진 특성에 대해 이미 밝힌 내용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 중 선교사로서 느끼는 기쁨과 희망, 고통과 근심 등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점과 가족과의 유대를 끊임없이 표현하였다는 점이 전기에도 드러나 있다. 살몽이 그러한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그는 다블뤼가 편지에 쓴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전기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영웅적인 서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블뤼가 순교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을 기록하였다.

 

조선의 교회사와 순교자 이야기를 서술한 다블뤼는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한 자서전을 쓰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가족들에게 쓴 편지 안에 조선에서의 공과 사의 이야기를 들어 있으며 전기 작가인 살몽이 이를 인용 편집하여 전기를 만들었다. 살몽은 기존의 순교자 전기가 가진 순교의 영광과 선한 목자 형상 강조에 머무르지 않았다. 주어진 자료를 가능한 충실히 인용하여 그 인물이 가지는 인간적인 모습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살몽은 편지 안에 들어 있는 공적인 임무와 사적인 관계가 나온 이야기를 적절히 배치하여 체계적인 전기를 서술하였다. 물론 그가 다블뤼의 ‘선한 목자’로서의 면모와 순교자로서의 면모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여 다블뤼의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을 객관적으로 다루었다. 결국 순교한 선교사의 선한 목자로 가진 형상과 순교자로서 가진 영광스러운 모습만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까지 객관적으로 다루기 위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 것이 살몽이 가진 인용 방식의 특성이라 말할 수 있다.

 

 

Ⅴ. 맺음말

 

살몽은 《다블뤼 주교 전기》를 서술하면서 여러 자료를 인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다블뤼 가족들로부터 입수한 자료의 도움이 컸음을 전기 서문을 통하여 밝혔다. 한편으로 다른 자료들도 참조하였음을 밝혔다. 병인박해 때 생존한 선교사인 리델 주교, 칼레 신부, 페롱 신부가 제공한 자료들과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를 비롯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제공한 자료들도 인용하였음을 밝혔다. 이외에도 아미앵 교구 관련자들이 남긴 기록과 일부 순교자 전기도 참조하였음이 드러나 있다.

 

다블뤼가 조선 입국 이후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모두 71통이다. 편지의 수신자들이 가족들이라고 하여 사적인 내용만이 들어가 있지는 않다. 다블뤼 자신이 처한 현실이나 활동들, 조선의 문화나 풍습들, 조선 사람들과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71통의 편지 중 살몽이 전기에 인용한 편지는 23통이다. 그가 다블뤼 가족으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선택하고 편집한 결과이다. 전기의 2부 10장부터 11장까지 그리고 3부 1장부터 3장까지 시간의 순서에 따라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 배치하였다. 그러나 가족과의 관계를 다룬 3부 5장의 경우에는 시간의 순서에 따르지 않았다.

 

살몽은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전기에 인용하면서 조선의 일반 현황, 조선 선교지의 상황과 선교사들의 삶의 양식 및 사목 방문, 다블뤼의 교회사 서술 활동 등을 중점으로 다루었다. 그렇게 조선 대목구의 부대목구장 주교이며 조선 교회 선교사인 다블뤼의 공적인 면을 드러냄과 동시에 한 가톨릭 집안의 일원인 다블뤼의 사적 관계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가족 간의 관계에서 드러난 인간적인 모습이 선교사로서의 다블뤼의 면모를 폄훼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교우촌 사목 방문과 조선 교회사 서술이라는 공적 임무를 맡은 다블뤼가 자신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인간적인 모습들도 해당 편지의 인용을 통해 드러내었다.

 

살몽은 기존의 순교자 전기가 가졌던 선한 목자의 형상 강조와 순교의 영광 표현에 머무르지 않았다. 다블뤼라는 사목자가 가진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살몽은 선교사로서 다블뤼가 느끼는 기쁨과 희망, 고통과 근심 등은 물론 가족과의 유대를 끊임없이 가졌음을 전기에 표현하였다. 그러한 의도에 가장 적절한 자료는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는 다블뤼가 편지에 쓴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전기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편지 안에 들어 있는 공적인 임무와 사적인 관계가 나온 이야기를 적절히 배치하여 체계적인 전기를 서술하였다는 점이 살몽이 편지를 인용한 특성이다.

 

본 연구에서는 다블뤼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에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도 주로 조선 입국 이후 부분을 파악하는데 그친 한계가 있다. 이 전기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데 있어 차후 조선 입국 이전의 모습을 연구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다블뤼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중 조선 입국 이전의 것도 차후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다른 선교사들의 전기의 인용 사항과 비교해 보는 연구도 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다블뤼 전기 작가인 살몽의 다른 전기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다른 병인박해 순교 선교사 전기 작가의 서술과 비교해 보는 작업도 차후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 본 논문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에 따라 수행한 연구임.

 

 

참고문헌


1. 기초자료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Librairie Bray et Retaux, 1883.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문화위원회, 2012.

A-MEP, Mgr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조선 순교자 약전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문화위원회, 2012.

A-MEP, Mgr Daveluy Vol. 6 Lettres à des membres de la Ste des ME.(내포교회사연구소)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내포교회사연구소)

《A-MEP, Vol. 577 Coré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A-MEP, Vol. 579(A) Corée 1797-1874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2, Librairie Victor Palme, 1874.

l'Union n° 45, 1867/2/14.

 

2. 단행본 및 번역본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les Presses du Midi, 2014.

F. Pichon, Vie de Monseigneur Berneux, Legicheux-Galliene, 1868.

F. Baudry, Vie de Henri Dorie, Victor Palmé, 1867.

P. G. Deydou, Vie de Bd.-Ls. Beaulieu, Imprimerie de J. Delmas, 1868.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6.

F. Pichon, 정현명(역), 《성 베르뇌 주교 전기》, 수원교회사연구소, 2015.

Ch. Dallet, 안응렬 · 최석우(역),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윤민구(편), 《성 도리 신부 자료집》, 한국순교자연구회, 2010,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3. 논문류

 

김규성, 〈다블뤼의 기해박해 서술 연구: 기해일기 보완작업과 그 내용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5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김규성,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에서의 조선 교회 순교자 기념〉, 《가톨릭신학》 27, 한국가톨릭신학학회, 2015.

김규성, 〈기록의 선교사가 남긴 인간적이고 진솔한 이야기: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교회사연구》 5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김수태,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교회사연구》 4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김은영, 〈1831-1886년 조선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여행 보고문〉, 《프랑스사 연구》 20, 한국프랑스사학회, 2009.

김은영,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예화와 조선, 그리고 프랑스〉, 《동아연구》 57, 서강대학교동아연구소, 2009.

조현범, 〈19세기 중엽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의 조선 인식 : 다블뤼 주교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27, 한국종교학회, 2002.

최석우, 〈달레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최석우, 〈다블뤼 주교의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에 대한 검토〉, 《한국교회사의 탐구》 Ⅲ,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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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석우, 〈다블뤼 주교의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에 대한 검토〉, 《한국교회사의 탐구》 Ⅲ,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2) 김규성, 〈다블뤼의 기해박해 서술 연구: 기해일기 보완작업과 그 내용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5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3) 최석우, 〈달레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김수태,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교회사연구》 4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4) 조현범, 〈19세기 중엽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의 조선 인식 : 다블뤼 주교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27, 한국종교학회, 2002.

 

5) 김은영, 〈1831-1886년 조선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여행 보고문〉, 《프랑스사 연구》 20, 한국프랑스사학회, 2009.

김은영,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예화와 조선, 그리고 프랑스〉, 《동아연구》 57, 서강대학교동아연구소, 2009.

 

6) 김규성,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에서의 조선 교회 순교자 기념〉, 《가톨릭신학》 27, 한국가톨릭신학학회, 2015.

 

7)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Librairie Bray et Retaux, 1883, pp. xiii-xiv ;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les Presses du Midi, 2014, pp. 20-21;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6, 29쪽.

 

8) 김규성,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에서의 조선 교회 순교자 기념〉, 《가톨릭신학》 27, 한국가톨릭신학학회, 2015, 236쪽.

 

9)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xv-xvii;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 21-22;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0-31쪽.

김규성,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에서의 조선 교회 순교자 기념〉, 234-235쪽.

 

10) 김규성,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에서의 조선 교회 순교자 기념〉, 234쪽.

 

11) F. Pichon, Vie de Monseigneur Berneux, Legicheux-Galliene , 1868, p. x; F. Pichon, 정현명(역), 《성 베르뇌 주교 전기》, 수원교회사연구소, 2015, 49쪽.

 

12) 윤민구(편), 《성 도리 신부 자료집》, 한국순교자연구회, 2010, 7쪽.

 

13)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2, Librairie Victor Palme, 1874, pp. 291-294; Ch. Dallet, 안응렬 · 최석우(역),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76-80쪽.

 

14) F. Pichon, Vie de Monseigneur Berneux, pp. 397-398; F. Pichon, 정현명(역), 《성 베르뇌 주교 전기》, 16-17쪽.

F. Baudry, Vie de Henri Dorie, Victor Palmé, 1867, p. 227.

P. G. Deydou, Vie de Bd.-Ls. Beaulieu, Imprimerie de J. Delmas, 1868, p. 176.

 

15)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 425. p.489;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 33 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266쪽. 308쪽.

 

16) A-MEP, Mgr Daveluy Vol. 6 Lettres à des membres de la Ste des ME, f. 31.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2, p. 305; Ch. Dallet, 안응렬 · 최석우(역), 《한국천주교회사》 하, 95쪽.

 

17) A-MEP, Mgr Daveluy Vol. 6 Lettres à des membres de la Ste des ME, f. 239.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2, p. 423; Ch. Dallet, 안응렬 · 최석우(역), 《한국천주교회사》 하, 260쪽.

 

18)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547-564;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 425-436;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46-357쪽.

 

19)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580-581;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 448;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67쪽.

 

20) 이 표와 다음에 나올 표에서 인용할 전기의 페이지수는 다블뤼 전기 출판본 중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Librairie Bray et Retaux, 1883’을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21)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pp. 24-25.

 

22) 〈베르뇌 주교가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1855년 1월 16일자 편지〉,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pp. 42-47.

 

23) 〈베르뇌 주교가 드 라 부이으리 백작에게 보낸 1857년 9월 15일자 편지〉,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pp.342-343.

 

24) l'Union n°45, 1867/2/14.

 

25) A-MEP, Mgr Daveluy Vol. 6 Lettres à des membres de la Ste des ME, f. 155.

 

26) A-MEP, Vol. 577, f. 779;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1844년 12월 15일자 편지〉, 《A-MEP, Vol. 577 Coré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411쪽;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152-155쪽.

 

27)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잘못 분류한 2통의 편지를 제외하면 69통으로 볼 수도 있다. 본 논문에서는 71통으로 보려고 한다.(김정환, 〈해제〉,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484쪽.)

 

28) 김정환, 〈해제〉,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484-485쪽.

 

29)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 313; A-MEP, Vol.579, f. 784; 《A-MEP, Vol. 579(A) Corée 1797-1874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636쪽;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65년 10월 16일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477쪽.

 

30)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464-467;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 362-365;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290-291쪽.

 

31)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f. 103-105; 유소연(역), 〈다블뤼 신부가 동생들에게 보낸 1851년 10월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160-163쪽.

 

32)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 418;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330;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262-263쪽.

 

33)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445-457;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 350-357;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279-285쪽.

 

34)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f. 54-56; 유소연(역), 〈다블뤼 신부가 동생과 누이에게 보낸 1853년 8월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93-96쪽.

 

35)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f. 66-67; 유소연(역), 〈다블뤼 신부가 부모에게 보낸 1853년 9월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111-113쪽.

 

36)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454-457;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 356-357;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284-285쪽.

 

37)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 530;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412;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35쪽.

 

38)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 269;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63년 9월 13일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409쪽.

 

39)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 530;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412;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35쪽.

 

40)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 279;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64년 10월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426쪽.

 

41)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f. 311-312; A-MEP, Vol. 579, f. 782-783;《A-MEP, Vol. 579(A) Corée 1797-1874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pp. 634-635쪽;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65년 10월 16일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473-475쪽.

 

42)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 530;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412;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38-340쪽.

 

43)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 181;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58년 9월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279쪽.

 

44)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536-538;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 416-418;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16-317쪽.

 

45)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f. 197-198;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두 누이에게 보낸 1858년 9월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297쪽.

 

46)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f. 311; A-MEP, Vol.579, f. 783; 《A-MEP, Vol. 579(A) Corée 1797-1874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635쪽;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65년 10월 16일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474쪽.

 

47)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538-540;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 418-419;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40-341쪽.

 

48)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567-568;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 438-439;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58-359쪽.

 

49)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 178;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58년 9월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273-274쪽.

 

50)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f. 288-289;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동생 이시도르에게 보낸 1864년 10월 7일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445-446쪽.

 

51)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 255;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62년 10월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388-389쪽.

 

52)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 267;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63년 9월 13일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403-404쪽.

 

53)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568-572;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 439-442;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60-362쪽.

 

54) 김규성, 〈기록의 선교사가 남긴 인간적이고 진솔한 이야기: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교회사연구》 5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273-276쪽.

 

55) 김은영,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예화와 조선, 그리고 프랑스〉, 《동아연구》 57, 서강대학교동아연구소, 2009, 100쪽.

 

56) 김은영,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예화와 조선, 그리고 프랑스〉, 121쪽.

 

57) 김규성,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에서의 조선 교회 순교자 기념〉, 237쪽.

 

58)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xvii-xviii;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 23;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1쪽.

 

59)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 xx;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24-25;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2쪽.

 

60)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 vi ;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7-8;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25쪽.

 

61)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 115;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53년 9월 18일자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180-181쪽.

 

62)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470-471;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 366-367;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293쪽.

 

63) Ch. Salmon, Vie de Monseigneur Daveluy, pp. 536-538; Ch. Salmon, La vie de Saint Antoine Daveluy, pp. 416-418; Ch. Salmon, 정현명(역),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316-317쪽.

 

[학술지 교회사학 vol 16, 2019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규성(인천가톨릭대학교)]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68710&Page=2&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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