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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 그리스도인의 ‘참된 휴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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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8-17 ㅣ No.1678

[경향 돋보기 -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 그리스도인의 ‘참된 휴식’이란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9월 5일 교황청 일반 알현에서 십계명 가운데 세 번째 계명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에 대해 가르치면서 휴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십계명의 여정은 오늘 우리에게 휴식의 날에 대한 계명으로 인도합니다. 이 계명은 실천하기 쉬운 계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휴식을 취한다는 것은 참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짓 휴식’과 ‘참된 휴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휴식은 수고와 고생으로 표현되는 삶의 자리인 일상을 떠나는 것이다. 또한 평상시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는 시간이다. 이를 우리는 ‘힐링’(healing)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몸과 마음의 치유와 회복을 뜻하는 힐링을 찾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이 지닌 ‘공허함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로 채워지고 싶어 하는 것, 곧 자신의 일상을 지탱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그것으로 채워지고 싶은 욕구가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그동안 영위한 힘든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휴식의 시간 동안 재미를 유발하는 많은 것을 하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유형의 즐길 거리가 우리에게 휴식을 선사할까?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즐기고, 밖으로 나가고, 크루즈 여행을 하고, 많은 여행을 하는 것 말고도 많은 것이 여러분에게 마음의 충만함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에게 휴식을 주지 않습니다.”

 

교황의 통찰에 따르면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에게 ‘거짓 휴식’만을 선사한다. 이러한 유형의 휴식은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작용하며,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만을 지상 목표로 삼아 늘 이러한 휴식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여기에 거짓 휴식의 독성이 자리한다. 이러한 독성은 늘 새로운 것과 더 자극적인 것, 그리고 쾌락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게 한다. 이것은 이른바 ‘발포성 위안’만을 추구하게 한다. 발포성 위안은 그 자극이 가라앉으면 현실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의 공허감과 무기력감 때문에 휴식이 현실에 힘을 주지 못하고 반복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독성은 하느님께 자리를 내드리지 않게 하고 일의 속박과 돈에 대한 숭배에도 저항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황은 인류가 오늘날처럼 많은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음에도 오히려 인간은 늘 공허감을 느낀다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교황이 생각하는 ‘참된 휴식’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 어느 성서학자의 성찰을 떠올리게 된다. “노동과 휴식은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이고,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서로 만나 정화되고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 노동과 휴식은 하느님과의 결속 관계에서만 그 의미를 갖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측면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나는 보았다”(코헬 2,24).

 

더욱이 성경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휴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를 인간 휴식의 기원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고 말하는 창세기는 하느님의 쉼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2,2-3).

 

탈출기 또한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20,11)라고 설명한다. 결국 구약 성경이 제시하는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직접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해 기뻐하신 날이고 거룩하게 만드신 날이기에, 주님을 위한 거룩한 안식의 날을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고 엄명한다(탈출 31,12-17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휴식은 무엇보다 창조주의 휴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곧 인간 스스로 하느님께서 직접 만드신 모든 것을 응시하는 날이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직시하는 것이다. 인간이 삼위일체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리고 그분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하느님의 자녀임을 상기하면서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되새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휴식은 기쁨 속에서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미를 동반하는 시간이 된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거룩함이 수고의 일상을 멈추게 하는 시간이요, 그 수고가 축복을 받도록 내드리는 시간이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 삶의 한 자리를 내드리는 것이다. 이로써 휴식은 현실에 대한 축복으로 자리한다.

 

 

해방을 위한 휴식

 

더 나아가 이러한 휴식과 찬미는 해방에 참여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 “너희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이었다는 것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구해 내신 것을 기억하여라”(신명 15,15).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손을 통해 해방되었듯이, 종들도 자신들의 주인과 함께 해방의 파스카 축제를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의 상징인 휴식은 우리에게 또 다른 측면을 제시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또 다른 일반 알현(2018년 9월 12일)에서 강조하였듯이 해방에 참여하는 휴식은 자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요한 8,34)이듯,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을 거부하여 스스로 자기를 배신하고 죄의 노예가 되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739항). 이에 대해 회심을 목전에 두고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는 묶여 있던 것입니다. 누구의 쇠사슬이 아닌 바로 내 의지의 쇠사슬에 말입니다. 원수가 내 마음을 쥐고 있으니 그것이 원인이 되어 쇠사슬이 되었고, 나를 묶어 놓은 것입니다. 이를테면 삿된 마음에서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따르다 보면 버릇이 생기고, 버릇을 끊지 못하면 필연이 생기게 되는 것이옵니다. 이렇게 서로 뒤얽힌 - 그러기에 쇠사슬이라 일렀습니다만 - 고리들에 묶이듯 나는 모진 종살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8,5,10).

 

히포의 주교는 이러한 모진 종살이를 ‘죄악의 법’이요 ‘습관의 폭력’이라 표현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감옥에 갇혀 있게끔 만들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굴레에서 해방을 가져다주는 치료약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마십시오”(갈라 5,1).

 

결국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9)라고 하신 말씀처럼 해방의 상징인 휴식은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것이요, 이를 통해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온갖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의 쉼 

 

“때때로 손에서 일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잠시 일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보면 자기 삶의 조화로운 균형이 어떻게 깨져 있는지 분명히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의미심장한 이 명언에 드러나듯 우리는 휴식을 통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나의 사랑은 나의 무게입니다.”(「고백록」, 13,9,10)라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표현처럼 나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영혼의 움직임’이기에 방향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성인에게 ‘무게’는 사물을 자신의 자리로 기울게 만든다.

 

더욱이 사랑은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을 일치시키는 힘을 가졌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되지만 땅을 사랑하면 땅이 된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강조한다. 그렇기에 성인은 “당신 선물에서 저희가 안식을 얻습니다. 거기서 저희가 당신을 누립니다. … 당신의 선물로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 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마음의 오르막길을 저희는 오르고 그러면서 층계송을 노래합니다.”(「고백록」, 13,9,10)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우리 삶의 무게 중심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될 때, 우리는 휴식을 통해 다시 내면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 쉴 때만이 내적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수고와 고생으로 표현되던 일상생활은 더 이상 회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안에 자리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축복을 바라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참된 휴식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단언하듯이 자신에게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고백하게 하는 시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고백에 동참하여 천국을 앞당겨 맛보고 살아가면서 “내 영혼은 오직 하느님 품에서 안온하구나.”(공동 번역 성서, 시편 62,1)라고 노래하는 참된 휴식의 시간을 갖도록 하자.

 

* 변종찬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성신 교정에서 교부학을 가르친다.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교부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9년 8월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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