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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72: 16세기 (1)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영신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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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30 ㅣ No.1152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2) 16세기 ①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영신 수련


묵상과 성찰로 내면의 악습에 맞서다

 

 

근세 영성 사조는 비록 약간의 예외는 있더라도 시기에 따라 특정 국가를 중심으로 강세를 이루었습니다. 14~15세기에는 독일과 저지대 국가들이 영성 사조를 이끌어 갔다면, 16세기에는 스페인이 영성 사조의 대표로 부상했습니다. 또한 17세기에는 프랑스가 영성 사조의 자리를 잇게 됩니다.

 

 

스페인 종교재판소 설치

 

1469년 결혼했던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 페르난도(Fernando II de Aragn, 1452~1516)와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자 이사벨(Isabel I de Castilla, 1451~1504)은 먼저 이사벨이 1474년 카스티야의 왕위를 계승하고, 1479년 페르난도도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두 왕국의 공동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1492년 무슬림의 마지막 소유였던 그라나다 왕국마저 정복하면서 에스파냐(Espaa)의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1496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PP. VI, 재임 1492~1503)는 페르난도와 이사벨을 가톨릭 군주들(los Reyes Catlicos)로 칭했습니다.

 

한편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연합왕국에서 유다교인과 이슬람교인을 색출하거나 가톨릭 교리를 거스르는 이단과 거짓 신비 체험가를 단죄할 수 있는 독자적인 권한을 요청하자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PP. IV, 재임 1471~1484)는 1478년 스페인 종교재판소(Inquisicin Espaola)를 설치해 운영할 수 있도록 허가했습니다. 이후 종교재판소는 가톨릭 군주들의 정치적 야심에 휘둘리거나 그리스도인들을 과도하게 재판정에 세우기도 했지만, 유럽 본토에서 불어오는 외부 개혁의 바람을 차단하고 오히려 교회 내부에서 영적으로 쇄신할 수 있도록 돕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종교재판소는 그리스도인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을지라도 역설적으로 스페인에서 많은 영성가를 배출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정적인 관상기도를 제시한 베르나르디노

 

스페인 남서부 세비야(Sevilla)에서 성장한 라레도의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de Laredo, 1482~1540)는 세비야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507년쯤 내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1510년 가까운 친구가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평수사로 입회하자 베르나르디노도 그를 따라 같은 수도회에 평수사로 입회해 ‘산 프란치스코 델 몬테(San Francisco del Monte)’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베르나르디노가 1529년 저술을 완료하고 1535년 출간한 저서 「시온 산의 등정(Subida del Monte Sin)」은 3부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1538년 출간한 개정판은 그 당시 영향력 있는 영성 작품이 되었습니다. 베르나르디노는 제1부에서 자기 인식과 감각들을 어떻게 정화하는지를, 제2부에서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생애의 신비를, 제3부에서 관상의 삶을 다루었습니다. 특히 베르나르디노는 제3부에서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완성하기 위해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정적인 관상기도를 핵심 개념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1535년 초판에서 생 빅토르의 리카르두스(Ricardus de Sancto Victore, 1110~1173)의 신비신학의 영향으로 지성 중심의 관상기도를 강조했다면, 1538년 개정판에서는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500?)와 카르투지오회 신학자 발마의 후고(Hugues de Balma, ?~1304/05) 및 헨드릭 헤르프(Hendrik Herp, ?~1477)의 신비신학의 영향으로 사랑을 열망하는 의지 중심의 신비적인 관상기도를 언급했습니다. 훗날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de vila, 1515~1582)는 묵상에 대한 어려움이나 초자연적인 체험 때문에 당혹감을 느낄 때에, 베르나르디노의 작품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묵상을 제시한 프란치스코

 

스페인 세비야 오수나의 가난한 소작농 가정 출신인 오수나의 프란치스코(Francisco de Osuna, 1492/97~1540)는 세비야 대학교에서 라틴어와 수사학을 공부하던 중에 친구와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순례를 하며 종교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1513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프란치스코는 이듬해에 수도 서약을 하고 1522년까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는 소임을 맡았습니다. 1523년 피정의 집으로 들어간 프란치스코는 절제된 은둔 생활을 하며 내적 기도의 삶을 발전시켰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527년 출판한 저서 「제3의 영성 입문(Tercer Abecedario Espiritual)」에서 단순하고 정적인 기도와 그리스도의 인성을 묵상하는 신심을 다루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베르나르디노의 저서와 함께 프란치스코의 저서에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소개했습니다.

 

스페인 화가 클라우디오 코에요(Claudio Coello) 작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적 쇄신을 위한 영신 수련을 지도한 이냐시오

 

스페인 바스코(Vasco) 지방 아스페이티아(Azpeitia) 출신이었던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cio de Loyola, 1491~1556)는 152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부상해 고향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 작센의 루돌프(Ludolf von Sachsen, 1295/1300~1377/78)의 저서 「그리스도의 생애(Vita Christi)」를 읽고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즈음 이냐시오는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환시를 경험하고 커다란 위로를 받았습니다. 1522년 이냐시오는 가르시아 데 시스네로스(Garca de Cisneros, 1455/56~1510)가 새 신심 운동과 영성 훈련을 소개했던 베네딕토회 몬세라트(Montserrat)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을 방문해 깊이 통회하고 인근 만레사(Manresa)에서 1년가량 동굴에 은거하면서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의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이냐시오는 「영신 수련」 서문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창조된 인간은 구원을 위하여 피조물에 무관심해야 한다고 강조한 후에 첫 주간에 죄와 지옥을, 둘째 주간에 성지주일까지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셋째 주간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그리고 넷째 주간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묵상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냐시오는 피정자가 사용할 묵상 방법으로 추리적 묵상 및 영적 감각을 사용하는 묵상 방법 등을 제시했습니다. 또 이냐시오는 그리스도의 깃발과 하느님의 영광을 선택하도록 권고했으며 영의 식별을 위한 규칙을 제시했습니다. 이처럼 이냐시오가 언급한 영성 훈련은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생활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냐시오가 제시한 영성은 묵상과 내적 성찰을 통해 자신의 악습을 철저하게 끊는 영적 투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새 신심 운동으로 시작, 영성 훈련으로 발전했던 영성 생활은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에 와서 새로운 묵상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발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이냐시오는 영적 발전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영적 지도를 받을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수행할 사도직을 설립하고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을 제시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4월 29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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