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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제주 4·3,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신학적 주제로 본 제주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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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23 ㅣ No.1505

[경향 돋보기 - 제주 4·3,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신학적 주제로 본 제주 4·3

 

 

교회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순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세상의 모든 인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신학의 범위를 세상의 모든 학문으로 확장하고, 모든 인간에 대한 관심을 신학의 주제로 삼는다(사목 헌장, 1항 참조).

 

세계 교회의 부분인 한국 교회, 그리고 제주 교회가 제주 4·3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하다.

 

 

4·3의 기억과 희년을 희망함

 

때때로 4·3을 체험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4·3은 지나간 일이다. 지금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는 반응을 보인다. 그 일을 체험한 어른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사건을 기억에서 지우려 한다. 4·3을 기억하는 일은 미래를 위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미사를 날마다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지난날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늘 현재 진행형의 일임을 상기시키며, 이 사건을 통해 우리의 원천과 미래를 찾으려는 것이다.

 

4·3이 역사의 기념물로 돌에 새겨진 기념일로만 기억될 때 우리의 미래는 차단된다. 이는 4·3의 폭력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억을 피하는 것은 폭력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역사를 되돌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교회는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였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작은 고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체적인 역사 속으로 충만하게 계시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구원의 의미를 가져다주셨다. 4·3이라는 역사적으로 불행한 일을 겪고 또 가슴속에 슬픔과 불행을 간직한 제주도민들에게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충만함(구원)을 주실까?

 

진정 4·3으로 파괴되고 수난당한 마음의 상처를 서로 어루만지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좋은 심성을 회복할 때, 진정한 희년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신앙인이든 아니든 제주에 가장 필요한 일은 바로 그것이다.

 

4·3 70주년을 맞아 진정한 화해와 치유의 희년이 되려면 4·3 사건은 계속 우리의 기억에 남아야 한다. 이 기억은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역사를 준비하는 결정체가 된다.

 

 

4·3과 하느님 나라

 

역사적 사건에 접근할 때 그 의미의 지평을 찾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부여된 과제요 특권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것은 역사성을 추상화시키기 쉬운 종교 내적인 논의를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본다는 말은 4·3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신학적인 질문을 되짚어 본다는 것이다. 또한 그 응답을 통해 역사와 하느님, 그리고 인류에게 가진 책임감을 더 분명히 하는 일이다.

 

4·3 당시 그곳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죽은 이들 중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교 신학적 측면에서 보면, 의미 없는 죽음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뜻 없이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죽음은 모두 의미 있는 죽음이다.

 

죽음의 자리에서 그들이 가졌던 갈망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모든 사회적 삶을 포괄한 총체적 해방, 곧 사랑과 평등, 그리고 평화가 삶을 지배하는 세계이다. 4·3 당시 제주도민들이 해방 공간 속에서 가졌던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 그리고 통일 국가를 염원하는 마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라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혼란한 시기에 제주 민중은 평화로운 세계를 갈망했다. 하지만 몇백 년을 이어온 새로운 질서에 대한 희망은 4·3 전후 이념적인 대결의 혼돈 속에 점점 붕괴되었다. 이제 우리는 미처 그 희망을 이루지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들이 품었던 뜻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 4·3의 희생이 우리에게 전하는 뜻이다.

 

 

4·3과 십자가

 

4·3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비무장 부녀자와 아이, 노인이 죽임을 당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잘못으로 말미암아 비극과 고통을 당할 때 하느님께서 어디 계셨느냐고 울부짖는다. 그들은 4·3 당시 오직 살육의 귀신만이 떠돌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창조한 인간들이 울부짖고 싸우며 죽이고 땅에 파묻는 폭력의 현장에 계셨다. 당신께서 창조한 아름다운 동굴 속에서 질식하고 굶어 죽어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보셨다. 아름다운 폭포수가 사형장이 되어 버린 십자가의 현장에도 함께 계셨다. 피눈물을 흘리셨으며, 그분께서 보지 않으신 죽음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을 비극의 사건을 바라보시기만 한 무능력한 존재로 보기도 한다. ‘하느님은 무심하시다.’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원망하고 욕하면서 그 한을 풀어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무언가 큰 뜻이 있으셔서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위로한다.

 

주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셔서 늘 ‘지금 여기’ 살고 계신다. 그분에게 모든 시간은 ‘지금’이다. 미래를 내다보며 오늘을 삼키는 존재가 아니시다.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그분 또한 몸부림치셨다. 소리를 지르셨다. 제발 멈추라고, 생명을 죽이는 폭력을 그만두라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야수가 되어 갔다. 귀를 닫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분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분을 못 본 체하는 자들에게 민중은 고귀한 생명이 아니라 하나의 짐승(빨갱이의 몸)에 불과했다. 이 세상에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여겨 죄책감 없이 폭력을 행사하였다. 광기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께서 인간 안에 심어 놓은 ‘하느님의 모습’은 무참히 부서졌다. 거룩함과 존귀함은 모두 짓밟혔다. 그래서 그분 또한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그분의 소리를 외면한 이들의 가슴속에서 돌아가셨고, 그들이 쏜 총알이 사람들의 심장에 박힐 때 그분도 따라 돌아가셨다. 그분의 십자가는 그들이었다.

 

 

용서와 화해

 

다시 폭력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네 형제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피 흘린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곳에 민주주의가 있고 정의가 있다. 용서와 화해가 있고 평화가 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용서와 화해’가 문제를 해결하는 정점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용서를 단순히 눈감아 주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용서란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잘못을 저지른 이가 진정으로 참회하여 용서를 청할 때 이루어진다. 정의가 앞서 나가고 사랑은 뒤따르는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이 잔혹한 범죄에 피해자만 있을 뿐 가해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용서를 청해야 할 그 당사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화해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그리스도적 사랑은 정의의 실현이다. 따라서 불의를 자행하고도 뉘우치지 않는 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은 그들의 불의를 지적하여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촉구함으로써 그들 또한 구원의 대열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칠 때 참다운 사랑과 화해를 할 수 있고 이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신앙의 정체성: 진실의 추적

 

4·3은 역사의 저편에서 잊혀 가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에게 생생하게 되돌아오는 이름이다. 과거의 추적은 진실의 추적이다. 4·3의 역사적·민족적 의미를 생각할 때 될 수 있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진상을 규명하여야 한다. 성직자도 예외일 수 없다.

 

신학은 신에 대한 인간의 사상을 기술한 학문만이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이루는 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신학의 장소는 우리 역사를 이루는 인간의 삶과 정서와 문화이어야 한다. 한민족과 공통된 정서를 읽어 내면서도 육지와는 다른 문화를 형성해 온 제주도 나름의 독특한 신학의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제주도민들에게 축복의 땅을 선물로 주셨다. 하지만 4·3과 같은 커다란 시련의 고통과 질곡을 만나면서 제주도민의 한(恨)으로 맺혀 온 게 현실이다.

 

따라서 신학적 작업은 바로 이런 한을 한 분이신 하느님의 현실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이제 제주도민만의 현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는 곧 하느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4·3의 신학적 조명을 통해 더욱더 제주도민의 삶을 점검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신학적 전망을 말할 수 있다. 4·3의 진정한 문제 해결은 진상 규명을 넘어 4·3과 같은 비극을 낳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소하는 데 있다. 4·3의 해결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진실의 추적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정의의 역사는 시간이 걸릴지언정 언제나 그 진실이 밝혀지고 승리한다.

 

4·3은 살아있다. 그럼에도 진실이 가려져 있다. 4·3의 의미를 말하려면 그들의 무덤을 향해 가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오늘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어떻게 그들의 죽음 앞에 다가설 수 있을까? 그들처럼 죽어가는 삶을 사는 길밖에는 그들의 죽음을 알 수 없다. 그들이 죽음 전에 가졌던 ‘뜻’을 품고 날마다 죽지 않는 한, 그들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반생명이 판을 치는 죽음의 세계에 저항하지 않는 한, 그들을 제대로 알 방법은 없다. 이것이 ‘진실된 삶으로서의 추적’이다.

 

역사적 자료나 분석, 인터뷰, 사회적 진상 규명도 필요하다. 4·3의 해결에 제3자의 입장이란 없다. 제주 4·3은 진실이 규명되어야 하고 그 토대 위에서 진솔한 화해가 이뤄져야 한다.

 

4·3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숨통을 트이게 한 뒤에야 4·3이 갖는 민족적이고 세계사적인 의미가 더 확연하게 비춰질 것이다. 4·3이 우리 민족에게 잊혀서는 안 될 역사적 사건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 세계의 새로운 평화 질서를 향한 반성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제주의 도민들이 더욱 좋은 방향으로 관계를 맺고 4·3과 같은 비극에 대해 서로 대화하며 화해할 수 있게 하는 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

 

* 문창우 비오 - 제주교구 부교구장주교 · 총대리. 제주교구 4·3 70주년 특별위원회 위원장. 이 글은 2013년 제주 4·3 사건 65주년을 맞아 제주교구 제주 평화의 섬 특별위원회의 제주 4·3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신학적 주제로서의 4·3’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경향잡지, 2018년 4월호, 문창우 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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