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 (10) 비인부전(非人不傳)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3 ㅣ No.542

[레지오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斷想) (10) 비인부전(非人不傳)

 

 

옛말에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이 있다. 이 ‘비인부전’이라는 말은 원래 중국 고전 “황제내경의 기교변대론(氣交變大論)”에서 나온 것이다(소문 제69편에 “其人不敎기인불교’하면 是謂失道시위실도하고 傳非其人전비기인하면 慢泄天寶만설천보하리라”란 문장). 여기에 나온 내용은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하고, 모자란 사람에게 도를 가르치면 오히려 도를 그르친다.”는 뜻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것을 축약하여 ‘비인부전’, 곧 “인간이 안 된 사람을 가르쳐선 안 된다”로 표현했다. 예부터 선인들은 인간적 성품이 결여된 자는 도를 왜곡시켜 남을 해악으로 남게 하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지식과 재능을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게 사용하며, 학력이 높고 재력이 많지만 성품이 교만한 이기주의자들은 이웃에게 유익한 그 어떤 것도 나누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표현은 “재주나 지식이 덕을 앞서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표현인 부재승덕(不才勝德)이라는 말과 덧붙여서 곧잘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니 ‘비인부전 부재승덕’(非人不傳, 不才勝德)이란 말은 “인격에 문제 있는 자에게 높은 벼슬이나 비장의 기술을 전수하지 말며, 따라서 재주나 지식이 덕을 앞서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재주나 지식이 무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달이나 명예, 혹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신분상승을 꾀할 뿐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허준이라는 드라마(1999-2000년, 64부작)에도 이 표현이 나왔었다. 의원 유의태가 아들 도지와 제자 허준을 두고 자신의 뒤를 누구로 정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한다. 이 둘은 의술에 있어 누구랄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그러나 유의태는 끝내 자신의 소신에 따르게 된다. 예의 ‘비인부전’을 들어 혈육의 정인 세속의 정리를 떨쳐내고 허준을 거둔다. 허준은 과거시험 상경 길에 애타게 의원을 찾는 마을을 지나게 된다. 이들을 구호하기 위해 따라가면 여차하면 자신의 목적을 접어야 한다. 그러나 유의태의 아들 유도지는 이들을 뒤로 하고 과거 보러 상경하지만 허준은 참혹한 광경을 간과하지 못하고 환자구제에 매달린다.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뒤로하고 의원으로서 본분에 충실했던 것이다.

 

 

재주나 지식이 덕을 앞서게 해서는 아니 된다

 

유의태는 결국 의술을 펼침에 있어서 밑바탕이 되는 요소를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또한 의원에게 있어서 환자는 경제적 수단이기에 앞서 인간적 애틋함을 바탕으로 깔고 그 위에 직업적 사명감이 더해져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근본적 사고와 의지는 학습 이전에 타고난 심성에서 기인하기에, 재능으로서 의술이 비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재능이 살집을 헤집는 칼이라면 심성은 환부를 보듬는 손길이다.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가 의원의 도리를 말하면서 “의원이 성심을 다해 환자를 돌보면, 환자도 의원을 보살핀다”는 말을 했다. 상처 입은 환자들의 환우들을 보살피고 상처를 싸매주고 보살피려는 의원으로서의 도리는 제쳐두고 환자를 골라가며 차별대우 하거나 젯밥에 눈이 멀거나 어디 가서 대우만을 받으려 한다면 환자들이 어찌 의원을 찾고 대우해주겠는가?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나왔을 때 그간 사람들이 희미하게 알고 있었거나 생소했던 한의학 용어들뿐 아니라 민간요법 등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적절한 드라마의 재미와 아울러 사람들에게 정말로 사랑받았던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 당시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구호를 들면서 의약분업 때문에 벌어진 약사들과 의사들의 밥그릇 싸움 때문이었다. 어차피 시대의 흐름 상 분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문제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표면적으로 드러났던 그들의 이권 싸움에 환자들은 안중에 두지 않았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진료를 거부하고 시위를 할 때쯤이었다. 사람들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더 한다’는 인상을 받았기에 의술은 인술이라는 가치를 표방했던 그 드라마가 당시 시대적 문제와 맞물려 진실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보상’에 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녀,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29-30) 예수님의 이 ‘보상에 대한 언약’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고자 물질적 궁핍과 마음의 괴로움을 수락한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따름’에 대한 그 ‘보상’이 세상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신이며, 그것을 위한 출가이다. 그것은 우리네 삶에는 또 다른 삶이 숨어 있다는 것, 그 삶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추구하고 있는 삶이 아닌 하느님 나라가 밭에 묻혀 있는 보물(마태 13,44)과 같은 것처럼, 우리네 삶에는 또 다른 삶이 감추어져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이란 말을 떠올리게 하는 복음구절이 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결국 출가한 그리스도 제자로서의 거룩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추종의 모습 안에 있고, 추함은 현실적 보상에 연연해하며 그것들을 탐하고 추구할 때 온다.

 

외적으로 이상적인 요소들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참된 모습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종종 엄청나게 큰 직책을 맡거나 큰일들을 해내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적인 요소들을 그들의 명예를 얻기 위해 사용할 뿐, 참된 자아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이들에게는 정작 하느님이 필요 없다. 그래서 “출가한 중이 누리는 벼슬은 닭벼슬만도 못하다”는 승가의 속담이 있다. 온갖 세속적인 것을 박차고 출가한 자가 다시 세속적인 감투에 연연함을 경계한 데서 나온 교훈이다.

 

 

가장 나쁜 것이란 가장 좋은 것이 타락한 경우

 

출가인으로서의 본분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적 권모술수를 일삼으며 자기들은 특별한 대우나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 종교기관에 관여하고 있는 한, 그 집단은 바람 잘 날이 없다. 그래서 가장 나쁜 것이란 가장 좋은 것이 타락한 경우이다. 맹자가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義)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사람들은 그 길을 버리고, 또 그 길로 다니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도 찾을 줄 모르니 슬프다. 사람은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이것을 찾을 줄은 알면서도 마음을 잃어버리고는 찾을 줄을 모른다. 학문의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데 있을 따름이다.”(孟子, 告子章句 上)

 

문득 충실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충실함이란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다. 날이 가고 해가 가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 궁핍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숨거나 냉담하거나 도피하지 않는 것, 갈망하는 사랑을 받지 못할 때나, 마땅히 받을 만한 존경을 받지 못할 때도, 또 원하는 대로 실현이 되지 않았을 때조차도,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0월호, 이동훈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상설고해전담)]



1,70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