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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평: 늦깎이 교회사학도들의 집단 연구성과물 한국교회사아카데미 논총 1(김영익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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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6 ㅣ No.925

순교자들의 열정과 인내를 체득한 늦깎이 교회사학도들의 집단 연구성과물

《한국교회사아카데미 논총 1》

김영익 외,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6

 

 

1. 서평자의 입지

 

서평자는 2014년 가을 무렵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부설의 ‘교회사 아카데미’에서 한국 교회사와 관련된 한문 사료를 수강생들과 함께 몇 주간 강독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17년도 봄부터는 ‘한국교회사 세미나’라는 과목을 담당하여 때로 강의를 하면서, 수강생들과 한국교회사 관련 쟁점을 토론하며 그간 학계의 연구업적을 점검하고 향후의 과제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서평을 하라고 맡겨진 이 논총에 대해서는 그 구상부터 원고 작성, 심사, 편집 과정 등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 논총을 편집한 담당 교수가 서평자에게 부탁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현재 서평자가 아카데미의 강사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교회사 아카데미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임은 분명하므로 사실상 팔이 안으로 굽듯이 자연스럽게 이 논총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여지가 많다는 점도 또한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주마가편(走馬加鞭)의 심정으로 이 서평문을 작성하기에, 온갖 노력을 다 쏟아부은 필자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이해가 부족하다” 또는 “평가가 너무 박하다”라는 등의 불만을 들을 것 같기도 한데, 이런 상반된 측면들을 독자 대중께서 모두 헤아려주시면 좋겠다.

 

 

2. ‘논총’에 게재된 논문들의 공통된 특징

 

이 책, 《한국교회사카데미논총》(*이하에서 ‘논총’으로 약칭) 제1집에는 모두 7편의 글이 실려 있다.

 

김영익, 유관검의 천주교 신앙과 그 특성

이권형, 황사영 처자 유배설화의 문화사적 가치와 의미

홍화선, 병인박해 전후 정의배의 삶과 신앙

유영흥, 수원성당 복원을 위한 건축사적 고찰

홍성언, 가톨릭 의료인 수정 박병래의 활동과 봉사정신

김용준, 군종제도 창설을 전후한 군종 신부의 활동

홍현자, 한국순교복자빨마수녀회 창설의 의미

 

‘논총’에 실린 이상의 글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공통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필자들은 모두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부설한 순교영성연구소의 교육 프로그램인 ‘교회사 아카데미’(*이하에서 ‘아카데미’로 약칭)의 수료자들로서, 2년간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된 대학원 수준의 전문 강의와 세미나 수업을 받고, 각자가 관심 있는 교회사 분야에 대해 졸업논문의 일환으로 이 글들을 발표한 것이다.1) 따라서 ‘논총’은 아직은 예비적 성격이 강하지만, 일종의 ‘교회사 석사학위 논문 모음집’에 해당된다.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분야에서 이 같은 학위논문 모음집이 시도된 것은 아마도 이 ‘논총’이 최초가 아닌가 생각되므로, 교회사 연구의 저변을 본격적으로 확대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카데미 수료자들이 정식 교회사 석사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므로, 이 ‘논총’은 일종의 ‘준석사 논문’에 해당한다.

 

둘째, 필자들은 모두 서로 다른 학과의 대학과정이나 때로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이 ‘아카데미’에 입교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회사’라는 공통의 수업을 받았지만, 각자의 관심과 전공분야는 매우 다양하였다. 따라서 ‘논총’에 실린 위 제목들도 교회사 연구의 다양한 세부분야를 골고루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업적들은 ‘사상사’와 ‘정치사’에 해당되는 논문들이 대종을 이룬다. 그러나 이 ‘논총’에는 ‘사상사’ 분야 2편(김영익, 홍화선의 논문)을 제외하면, ‘문학사’(이권형의 논문), ‘건축사’(유영흥의 논문), ‘의학사’(홍성언의 논문), ‘군제사’(김용준의 논문), ‘수도회사’(홍현자의 논문) 등 교회사 분야에서는 평소 잘 볼 수 없는 논문들이 세부 분야별로 골고루 전개되고 있어서, 논문을 읽는 내내 서평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특히 처음 대하는 의학사와 군제사 관련 논문들은 “교회사의 분야가 이처럼 다양한 학문 분야 내지 관심사들을 포용할 수 있구나!”하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해주었다. 만약 이런 다양한 세부 학문 분야의 연구논문이 정기적으로 계속 나와 준다면, 교회사가 이른바 융합학문 내지는 학제 간 통합학문의 영역으로 진화해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안겨준다.

 

셋째, 이 ‘논총’에 실린 글들은 다양한 세부분야에 걸친 논문들임에도 불구하고, 취급하고 있는 주제나 언급된 주요 인물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한결같이 피땀을 흘려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언하는 증언자 내지 증거자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곧 이 논총의 필자들이 받은 2년간의 ‘아카데미’ 교육의 지향점, 곧 여기 이 땅에서 한국 순교자의 피와 땀이 일군 한국 천주교회의 살아 숨 쉬는 현재의 모습을 깨닫고, 다 함께 나아가야 할 신앙공동체와 민족공동체의 바람직한 지향점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논총’은 일종의 ‘순교 영성 논문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점은 ‘아카데미’를 개설한 ‘순교영성연구소’의 교육지침과 부합되는 알찬 영적 결실이라고 할 것이다.

 

 

3. 개별 논문에 대한 논평자의 소견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가진 ‘논총’의 글들을 하나씩 검토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맨 먼저 실린 김영익, 〈유관검의 천주교 신앙과 그 특성〉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열심한 일꾼으로서 호남지역 천주교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순교자 유관검(柳觀儉, 1768~1801)의 일생을 다루면서, 기존에 유관검에 대해서 가졌던 교회의 부정적 편견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유관검이 그의 형 유항검에 못지않은 교회 내외 역할이 지대하고, ‘대박청래운동’ 또는 ‘선교사 영입운동’에 기여한 바가 크며 사회 개혁적 신앙형태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조정의 박해자들이 ‘일장판결’(一場判決)의 논의를 체제전복 내지는 반역을 도모하는 반민족적인 과격파로 몰고 가는 방식에 그대로 끌려가서는 안된다고 외친다. 필자는 유관검이 평등관이나 새로운 인간관에 입각한 ‘애인여기’(愛人如己)의 신앙고백을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진정한 신앙인이었을 뿐, 결코 반역자나 배교자가 아니었다고 항변한다. 특히 달레 신부가 유관검을 ‘비겁한 배교자’로 잘못 오해했지만 《사학징의》 등에 보이는 전라감사의 밀계는 그가 밀고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에 대체적으로 수긍하지만, 몇 가지 세부사항에 있어서 아쉬움이 있다. 유관검의 ‘일장판결’의 논의를 황사영 백서의 이른바 ‘삼조흉언’과 철저히 대조 분석하면 양자의 차이점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유관검을 과격분자로 몰아붙이는 박해자들의 논리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데, 이 논문에는 그런 내용이 일절 없다. 이점은 매우 아쉽다. 1791년 윤지충의 순교 이후 고산에 형성된 윤지헌 일가의 ‘저구리’ 교우촌을 최초의 교우촌으로 서술하면서, 1784년 유항검이 서울에서 천주교를 배워 일가친척들에게 전교함으로써 형성된 전주 인근의 ‘초남이 마을’을 ‘조선 천주교 최초의 마을’이라고 규정했는데, ‘저구리’와 ‘초남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교우촌’과 ‘천주교 마을’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대단히 궁금해진다. 한편 유관검에게 교리를 전수한 “윤지충을 사람들이 존경하며 주교(主敎)라고 불렀다”고 서술하지만, 《사학징의》의 해당 원문은 “주교와 같이 존경했다”[尊之如主敎]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는 필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문장 표현이 달라진 사소한 실수처럼 보이지만 명백한 오역이다.

 

‘논총’에 두 번째로 실린, 이권형, 〈황사영 처자 유배설화의 문화사적 가치와 의미〉는 문학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구전 설화(口傳說話)가 어떻게 역사적 사실(事實)로 정착될 수 있는지, 때로 그 과정에서 당연히 전승자들의 첨삭이 가해져서 사실과는 동떨어지게 된 구전을 사실과 명백히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경우, 역사연구자는 물론이고 그 연구자의 업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교회의 사목자와 일반 대중들에게 얼마나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상당한 경계와 우려심을 드러내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로 황사영이 역적으로 처형된 이후에 연좌형에 걸려 전국 각지의 유배지로 길을 떠난 그 가족과 노비들 중에서 제주도 대정현의 관비로 유배된 황사영의 처 정 씨와, 2살의 어린 나이 때문에 겨우 목숨을 구하여 추자도로 유배된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에 대한 온갖 다양한 구전과 희소한 역사기록 사이의 격차에 대한 필자의 세밀한 고찰에는 바로 이러한 학자적 고민이 엿보인다. 또 여러 가지 증언자료를 모아서 논문 뒤쪽에 첨부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고 연구자의 자세와 전문성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너무 장황하고 중복된 서술과 필체는 자상함을 넘어선 지루함의 차원으로 독자를 이끌기 쉽다. 한편 필자가 말했듯이 구전으로 전승된 다양한 설화는 그 자체로 그 시대와 지역의 문화를 반영하는 소중한 자산임이 틀림없으므로, 역사적 사실과는 별도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때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면서 흥미롭게 들려줄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러한 구전 설화가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대중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필자는 황사영의 처 정 씨와 아들 황경한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헌자료와 다양한 구전들 사이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후대의 전승 과정에서 생긴 허구인지를 정확히 꼭꼭 짚어서 서술하지 않고 있다. 그간 필자가 이 논문을 쓰기 위해 수차례 제주도와 추자도 현장을 답사하고 전국에 흩어진 여러 지역의 증언자들을 방문한 노력(인터뷰와 수집 문헌)의 성과가 제대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서 말의 ‘구슬’을 순서대로 잘 꿰어 ‘보배’로 만들 보다 철저한 후속작업이 필요하다.

 

세 번째로 ‘논총’에 실린, 홍화선, 〈병인박해 전후 정의배의 삶과 신앙〉에서는 1830년대에 입교하여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울지역의 평신도 회장으로서 선교사들의 한국어 교사 겸 복사로서, 또 전교회장으로서 겸손하고 열심한 신앙생활과 교회 활동으로, 당시 모든 평신도는 물론이고 파리 외방전교회 주교와 신부들에게서도 한결같은 칭송을 받았던 진실한 신앙인이요, 모든 봉사자의 모범이었던 정의배(丁義培, 1794~1866) 마르코 회장에 대해 서술하였다. 특히 정의배 성인의 재혼 이후 사실상 동정부부(童貞夫婦)였던 부인 피 카타리나와의 관계는 동시대의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 성인이 페레올 주교에게 기혼자로서 더군다나 부인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사제가 되겠다고 신학교 입학청원을 할 때의 부부 동정관계와 매우 흡사한 공통점이 발견되고 이미 기존의 논문이 있는데, 이점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어서 다소 아쉽다. 또 관변 사료나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록인 《병인치명사적》, 《치명일기》 등을 언급하면서 그 속에 기술된 나이를 한국식이 아닌 서양식으로 잘못 계산하여 연도 표기의 오류를 여러 곳에서 낸 것도 아쉽다. 한국식 나이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기술한 보고서나 서한에서 언급한 나이와는 달리 “만 ○세”가 아니라, 여기에 한 살을 더 보탠 나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이 논문 또한 다양한 국내외 자료를 모두 동원하여 꼼꼼한 도표2)를 여러 개 만들어 필자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자세를 취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며, 무엇보다도 순교자의 땀과 피를 본받고자 하는 필자의 열성이 논문의 대상으로 삼은 정의배 마르코 순교성인의 삶을 통하여 진하게 우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논문 그 자체로서 매우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순교자 현양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네 번째로 ‘논총’에 수록된, 유영흥, 〈수원성당 복원을 위한 건축사적 고찰〉은 건축사가인 원로 학자의 자문과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논문이다. 그래서인지 탄탄한 논지전개가 돋보이면서 동시에 수원성당의 순교자 현양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옛 성당 복원에 실천적인 도움을 제공할 것을 목표로 삼은 매우 실용적인 논문이다. 그러나 왜 하필 복원하는 성당의 형태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지어진 서양식 ‘고딕 성당’ 뿐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안 되어 있어 궁금하고, 수원 성당 내지 수원 성지의 교회사적 내력이 적어도 초기 교회 때인 18세기 후반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왜 초기 교회부터 개항기까지의 중요한 교회사적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했는지 의문이 든다. 물론 옛 고딕 성당을 복원하려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프랑스 선교사 폴리 신부님의 열심한 활동과 고매한 덕성을 본받기 위한 것이라고는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2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금싸라기보다 귀중한 성지의 터에 서양식 ‘고딕 성당’ 하나만 복원한다는 것은 무언가 허전하고 세월의 무게에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즉 초창기 팔부자집에서 유래하는 한옥 성당과 폴리 심 신부님의 고딕 성당, 그리고 최근의 성당이나 사제관 등 시설물을 모두 골고루 재배치한다면 수원성지의 역사성을 보다 확연히 드러내주는 좋은 기념사업이자 순교자 현양사업이 되지 않을까 감히 제언해본다. 덧붙여 ‘고딕 양식’의 성당을 허물고 현재의 모습인 돔 형태의 성당을 지은 것은 필자도 표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1979년이고 누구보다 열성적이고 적극적이셨던 최경환 마티아 신부님이 본당 신부로 재직할 때였다. 그러므로 2017년 현재까지 약 40년간을 유지해온 20세기 말의 현대사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역사적 건물이기에 현재는 비록 낡고 볼품없게 보여도 몇 십 년 후에는 또다시 최 마티아 신부님 당시의 성당 건물을 복원하자는 신자들의 청원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논평자는 이 건물 또한 혹시라도 허물고 새로 짓자는 논의가 제기된다고 해도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여 새로 복원되는 건물들과 병존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다섯 번째로 ‘논총’에 실린 홍성언, 〈가톨릭 의료인 수정 박병래의 활동과 봉사정신〉은 사실상 기존에 박병래 회장을 다룬 논문이 몇 편 있었으나, 논문 내용 중에 전문적인 의학용어를 사용하여 그의 활동을 소상하게 설명하면서도 비교적 쉽게 독자 대중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한 논문이 없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의학사 관련 논문으로서의 성격도 겸하는 매우 독특한 교회사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박병래 회장의 신심과 영성의 특징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프란치스코 제3 회원으로서의 활약상 내지는 프란치스칸 영성이 그의 의료 활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논평자가 보기에는 그가 박봉(薄俸)의 성모병원에서 20년간이나 병원장직을 기쁘고 성실하게 수행한 것은 바로 가난(청빈)을 중시하는 그의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한국 사회의 각종 질병과 전염병에 대한 통계가 이 논문이 의학과 관련된 글임을 잘 알려준다. 또한 박병래 회장이 의학 연구자로서, 실제 임상에서 환자를 치료하던 경험에서 파악 정리했던 신경정신과, 피부과, 안과, 이비인후과, 소화기, 호흡기, 감염증, 외과 및 기타 증상 등으로 체계적으로 분류되고 정리된 다양한 증상과 이에 대한 처방 경험의 목록은 기존의 한국사 개설서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부분이다. 한편 박병래의 정치활동이나 교회(혜화동 본당) 활동 부분에 대한 서술들은 그의 직업이자 전공 분야인 의학과는 거의 무관하게 서술되고 있는데, 과연 그랬을까 의문이 든다. 의사요, 의학(결핵 및 전염병) 연구자로서의 전공이 이런 분야의 활동에서도 십분 활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골동품 수집과 아낌없는 국가 기증과 관련된 서술 부분에서도 아쉬움은 있다. 국보급을 비롯한 조선백자 300여 점을 수집하게 된 그의 탁월한 미술적, 공예적 안목에 대해서도 좀 더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서술을 했더라면 박병래 삶의 다양한 분야가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여섯 번째로 실린 김용준, 〈군종제도 창설을 전후한 군종 신부의 활동 - 육군을 중심으로 -〉에는 사실상 그간의 교회사 연구논문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한국전쟁 전후의 군사제도가 군종병과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전쟁의 피해와 그 와중에서 영혼을 구제하려는 군종 신부들의 고단한 활동이 배어나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군종교구사와 같은 곳에서 해당 부분 역사가 정리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학술 연구논문에서 초창기 군종 분야의 역사가 어떻게 우리 교회와 사회 안에서 형성되고 변화되어 나갔는지를 집중 조명한 이 논문처럼 전문성을 갖춘 글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본고의 특징이 부각된다. 또한 논지 전개의 상당 부분은 현재도 생존하고 계신 원로 군종 신부님들의 증언을 최대한 많이 채록하여 분석하고 이를 당시의 기록문서가 보여주는 군제사 내지 전쟁사와 비교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 본 논문의 사실성을 매우 풍부하게 해준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까지 입고 있던 국군의 군복이나 군화가 일본 강점기 때의 그것에서 별로 바뀐 것이 없었던 낙후된 사정을 잘 기술하고 있으며, 당시의 군인들의 음식과 기호품, 그리고 거주하던 내무반(요즘의 생활관)의 모습까지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점은 군종사 분야 서술을 통해서 교회사가 일반사의 범위로까지 자연스럽게 확대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교회사가 당당하게 중등학교의 일반 역사교과서에 실릴 수 있는 일정한 수준과 내용을 갖추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군종 신부의 활동과 체험을 통해서 신앙을 새로 얻게 되거나 냉담자가 회두한다든가 하는 감동적인 군인 신자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았을 것인데, 이 글에서 한두 개 정도라도 군종 활동의 소중함을 체험할 수 있도록 그 사례를 소개해주었더라면 군종 활동의 홍보에도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실린 홍현자, 〈한국순교복자빨마수녀회 창설의 의미〉는 대개 교회사 내에서도 특수한 분야로 취급되는 ‘수도회사’에 속하면서도 일반 교회사 연구 학술지에 실려 대중적 흥미와 관심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면서 모범적 하느님 백성의 일원인 수도자들의 영성과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평범하지 않은 글이다. 사실 논평자도 ‘빨마’ 또는 ‘빨마수녀회’라는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나 그 단체의 구성 및 활동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새롭게 느낀 점이 적지 않다. 수도자가 반드시 미혼의 남녀 신자들만을 회원으로 모집한다고 알고 있었던 통념을 확실하게 깨어준 것이 논평자가 이 글을 통해 얻게 된 하나의 소득이었다. 즉 하느님의 승리를 상징하는 ‘빨마(월계수)’ 나뭇가지는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앙인이면 누구든지 차지할 수 있듯이, ‘빨마수녀회’는 현재 독신의 상태에 있는 여성이면 그 나이나 과거의 신분, 직업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입회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물론 조건은 하나 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수도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리고 이 ‘빨마수녀회’를 창설하게 된 것은 한국순교자들의 영성을 수도생활의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한국순교복자수도회의 창설자 방유룡 신부의 자유롭고도 개방적인 수도회 운영의 정신이 그 창설의 수도회사적 바탕을 이룬다고 한다면, 한국전쟁 직후의 수많은 과부들의 탄생이 이 같은 빨마회 지원자들의 한국사(시대사)적 배경을 이룬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의 열심한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영성과 활동을 잘 알고 있었던 방유룡 신부가 ‘빨마회’의 실질적 주보를 오래전부터 강완숙 순교자로 삼아, 그의 생애를 닮도록 평소에 권고했다. 또 어머니 같고 이모님 같은 여성들을 자신들과 같은 수족으로 아낌없는 형제애로 지도해주고 지원해주었던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님들의 열렬한 지원과 사랑의 힘이 바로 오늘날 성장한 ‘빨마수녀회’를 있게 한 배경이 된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다. 2016년 정식으로 빨마수녀회의 주보가 된 초기 교회의 순교복자 강완숙 골롬바 여회장은 주문모 신부를 죽음으로서 보필하고 의지할 데 없는 과부와 동정녀들을 불러 모아 섬김과 사귐과 나눔의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이런 교회사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빨마수녀회’는 현재 독신이라면 미혼과 기혼을 가리지 않고 모두 회원으로 받아들여, 사제들의 식복사로서, 불우한 병자와 장애인, 무의탁 노인들의 충실한 벗이자 도우미로서, 최근에는 ‘빨마 북 까페’를 운영하는 인터넷 선교사로서 젊은이들의 감성에 호소한 선교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하느님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증거하고 있다는 점은 이 글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무궁한 감흥과 함께 수도회 입회에 대한 열망까지도 불러일으켜 준다. 아쉬운 점은 빨마회와 같이 미혼만이 아니라 기혼이라도 현재 독신이면 입회가 허용되는 다른 수도회는 없는지, 또 외국에서 빨마회와 비슷한 성격의 수도회는 없었는지 등에 대해 비교 역사적 고찰이 이루어졌더라면 더욱 금상첨화(錦上添花)였을 것이다.

 

 

4. ‘논총’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조언

 

이상에서 언급한 이 ‘논총’이 한 때의 화려한 연극과 같이 잠깐 나타났다가 곧바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서평자는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해본다.

 

첫째, ‘논총’ 제1집은 사실 필자들의 노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 탄생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 않았던 것 같다. 수차례 필자들을 만나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고, 번잡한 교열작업까지 손수 행하여 사실상 일대일 개인 지도교수의 역할을 담당한 편집 담당 교수의 전적인 헌신이 없었더라면 결코 지금의 이 ‘논총’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 같은 담당 편집자의 헌신에만 논문 탄생의 산고를 모두 맡겨서는 안된다. 그럴 만한 인재도 없지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은 시스템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이 협동해서 함께 일을 분담해야 한다. 그래야만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진로가 보장될 수 있다. 우리 속담에도 빨리 가려면 혼자 가도 되지만, 멀리 가고 싶으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비록 지금 당장에는 좀 늦어지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논총’은 이미 《교회사연구》나 《교회사학》과 같은 앞선 학술지들의 경험을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논총’의 편집위원회 구성을 비롯하여, 편집, 투고, 심사, 간행 및 사회윤리 등 제반규정에 대한 논의가 아카데미 교수진 사이에 본격적으로 진행 중인 점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논총’은 앞으로 정기적으로 1년에 1~2차례씩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현재의 아카데미 수강생 인원이 매년 지속된다면 말이다. 그리고 간기(刊期)를 기존의 등재학술지인 《교회사연구》(1년 2회-6월, 12월)나 《교회사학》(1년 1회-12월)과는 달리할 필요가 있다. 교회사 연구자들에게 논문을 투고할 기회가 한꺼번에 주어졌다가 한꺼번에 닫혀버리는 것은 투고자나 논문 편집진 양쪽 모두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매번 원고모집을 위한 경쟁적 홍보에 나서는 것도 부담스럽고 불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서평자의 생각으로는 당장은 어렵더라도 장기적으로 매년 2회 출간의 때를 3월과 9월로 잡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기존 학술지의 간기가 6월과 12월인 점을 고려할 때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존의 교회사 학술지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우리 교회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상호 공생하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논총’의 필자를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논문의 주제는 현재처럼 매우 다양한 교회사의 분야를 골고루 포괄하도록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 ‘논총’ 1집은 그 필자가 모두 ‘아카데미’ 수료자들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에 국한되지 않고, ‘아카데미’의 교수진은 물론이고, 외부의 다양한 분야와 지역의 교회사 연구자들에게도 개방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편 수록 논문의 주제도 ‘논총’ 1집에서 그 첫선을 멋지게 장식한 것을 잘 계승하여, 앞으로도 그간 교회사 연구자들이 상대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던 세부 분야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특히나 문과와 이과의 경계 내지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 내지 기술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탈경계적, 융합학문적 성향의 과감한 논문들, 국적을 따지지 않고 다양한 외국어로 된 논문들이 과감하게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논총’의 수록 주제도 자연스럽게 ‘한국교회사’에서 ‘세계교회사’로 ‘천주교회사’에서 이에 한정되지 않는 ‘그리스도교회사’로 확대 발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초, 중, 고, 대학의 한국사 교과서에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특히 자주 그 내용이 눈에 띄는 ‘우리 민족 보편사’의 일원이 되게 하는 데에도 단단히 한 몫을 할 것이다.

 

…………………………………………………………… 

 

1) 물론 아카데미 수강생 모두가 이 같은 논문을 쓴 것은 아니다. 일단 이러한 논문은 아직 의무 규정이 아니고 장려하는 권고 수준이다. 따라서 2016년 2월에 수료한 제1기 수료자 21명 중에 ‘논총’ 제1집에 졸업논문을 발표한 학생은 모두 7명으로 전체의 1/3에 불과하다.

 

2) ‘논총’ 176쪽의 도표에서 페레올 주교의 선종일자는 1854년 8월이 아니라 1853년 2월이 맞다.

 

[교회사 연구 제50집, 2017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원재연(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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