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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31년 한국 교회 첫 공의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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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0 ㅣ No.914

[한국 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931년 한국 교회 첫 공의회 개최

 

 

1931년과 한국 교회

 

1931년은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한국 교회는 이를 기념하고자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중 하나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한국으로 이송하는 것이다. 주교의 유해는 만주의 마가자에 있다가 9월 2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다음으로 한글로 된 최초의 한국 교회 통사인 「조선천주공교회약사」가 간행되었다. 그리고 9월 26-27일에는 기도서, 십자고상, 성패, 황사영의 「백서」, 「척사윤음」 등 박해 시대의 물품 40여 종을 전시한 전람회도 개최하였다.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는 한 해였다.

 

한국 교회는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미래를 준비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하였다. 근대 병원인 성모병원의 설립(1936년 개원)을 추진하였고, 9월 13-26일에는 공의회도 개최하였다. 이 공의회는 한국 교회 최초이자 유일한 공의회이며, 이를 통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한국 천주교회를 이끈 사목 지침이 마련되었다.

 

 

역대 성직자 회의

 

공의회는 신앙, 윤리, 규범 등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주교들의 회합이며, 이와 비슷한 용어로 ‘시노드’(대의원 회의)가 있다. 양자는 혼용되기도 하지만, 1931년 당시의 교회법상 교구의 범위를 넘어선 주교들의 모임은 공의회이고, 교구 내의 전체 성직자들의 회합은 시노드였다. 1911년 이전 한국에는 하나의 교구만 존재했으므로, 이 시기에 개최된 성직자 회의는 시노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 최초의 시노드는 1857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1856년에 입국한 베르뇌 주교는 조선 교회의 발전을 논의하려고 3일 동안(3월 26-28일)시노드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선교사들의 행동 규칙과 활동 계획, 신자들이 지켜야 할 사항들이 결정되었다. 이 가운데 신자들과 관련된 사항은 1857년 8월 2일에 「장주교 윤시제우서」(한글)로 반포되었고, 선교사들이 지켜야 할 행동 규칙은 1858년 4월에 사목 서한(라틴어)으로 배포되었다.

 

두 번째 시노드는 1868년에 중국 요동의 차쿠에서 거행되었다. 이 시기는 병인박해(1866년)이후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을 계속 시도하던 때였다. 그들은 입국 기회를 엿보는 한편, 조선으로 돌아갔을 때 맞이하게 될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미리 준비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칼레 신부는 동료들에게 시노드의 개최를 제안했고, 그의 발의에 따라 1868년 11월 21일부터 12월 8일까지 차쿠의 성모설지전(聖母雪之殿) 성당에서 시노드가 개최되었다.

 

세 번째 시노드는 1884년 9월 서울에서 있었다. 이 시기는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여 신자 공동체를 재건하던 때로, 1884년 6월 20일에는 블랑 주교가 제7대 조선대목구장이 되는 변화도 있었다.

 

블랑 주교는 대목구장이 된 뒤 성사 집전과 신자 관리에 대한 여러 가지 지침을 결정하고자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때 결정된 사항은 1887년 9월 21일 「조선교회 관례집」(Coutumier de la mission de Coree)으로 공포되었다. 블랑 주교는 이 시노드를 통해 개항 이후 조선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시대적인 변화에 신축성 있게 대처하고자 했다.

 

한편 조선대목구는 1911년에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할되었다. 분할 직후 대구대목구의 드망즈 주교는 교구 내의 성직자와 신자들이 통일된 지침에 따라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1887년에 제정된 「조선교회 관례집」은 시대 상황이 변화하면서 효력을 상실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912년에 지도서의 초안을 작성하여 심의하고, 피정 때 성직자들의 회의를 거쳐 5월 26일에 그 내용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1914년에 「대구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Taikou)를 간행하였다.

 

서울대목구의 뮈텔 주교도 1887년 이후 교회의 현실이 많이 변했고, 또 1917년에 새 「교회법전」이 공포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침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1921년에 드브레 주교에게 지도서에 관한 작업을 지시했고, 1922년 5월 사제들의 피정 기간 동안 성직자들의 논의를 거쳐 9월 21일에 최종 내용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1923년에 「서울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를 간행하였다.

 

 

공의회 개최

 

한국 천주교회는 1911년에 두 교구 체제가 되었고, 1920년에는 원산대목구가 분할되었다. 1922년에는 평안도의 사목을 위임받은 메리놀외방전교회도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4년 9월 한국을 방문한 동경 주재 교황 사절은 공의회의 개최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의 주교들은 평양지목구의 설립 이후에 공의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그리고 1927년 평양지목구가 설립되자 1929년 5월에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교황청의 승인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드망즈 주교의 건강이 악화되어 공의회의 개최 시기가 다시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이 되는 1931년 9월에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1931년 9월 10-11일에 교황 사절 무니 대주교를 비롯하여 드망즈 대구대목구장, 사우어 원산대목구장, 모리스 평양지목구장, 브레허 연길지목구장이 각자의 자문 위원들을 이끌고 서울에 도착했다.

 

공의회는 9월 13일 오전 9시 명동대성당에서 개막되었다. 회의는 9월 14일부터 25일까지 각 분과위원회(① 교리 위원회 ② 가톨릭액션 위원회 ③ 사제와 신자의 규율 위원회 ④ 재무 위원회 ⑤ 지도서 준비 위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9월 26일 9시에 폐막 미사가 거행되면서 마무리되었다.

 

한국에서 공의회를 연 목적은 한국 교회를 위한 공통된 규정을 준비하는 데 있었다. 다섯 교구 체제에서 사목 활동과 선교 활동이 교구들의 협력을 통해 효과적이고 일관성 있게 추진되도록 ‘공동 지도서’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공의회가 끝난 다음, 드망즈 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지도서 준비 위원회는 1932년 2월 15일에 공동 지도서 편찬을 위한 모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3월 2일 마지막 회의에서 최종 문안을 완성하였다.

 

1932년 3월 15일 교황청은 한국의 첫 공의회가 “그리스도의 수많은 사도들의 땀과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거룩하게 된 조선이 빠른 속도로 그리스도교화되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면서,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승인했다. 결정 사항은 1932년 6월 26일에 공포되었고, 9월에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로 간행되었다. 이 지도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까지 한국 교회의 고유 규범으로 효력을 발휘하였다.

 

 

삼 년 동안 말린 쑥

 

공의회와 시노드의 개최는, 교회의 지난 모습을 돌아보고,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하여 쇄신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일찍부터 변화에 대응하고자 노력해 왔고, 오늘날에도 이러한 취지 아래 여러 교구에서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2000년 대희년 이후만 보더라도 서울대교구는 2003년, 청주교구는 2008년, 대구대교구는 2012년에 시노드를 마쳤고, 대전교구는 2018년의 본회의 개최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시노드가 미래를 위한 준비라고 할 때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맹자」의 ‘이루’(離婁)편을 보면, “칠 년 된 병에 삼 년 동안 말린 쑥을 구한다.”(七年之病 求三年之艾)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칠 년이나 오래된 병에는 삼 년 동안 말린 쑥[艾]이 특효약인데, 삼 년 전에 미리 쑥을 뜯어서 말려 두지 않으면 병이 위급할 때 필요한 약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어떤 일을 하는 데 앞을 내다보고 미리 준비해야 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교회든 사회든 개인이든 시대의 변화에 맞게 바뀔 필요가 있다. 이때 무엇을 고수하고 무엇을 쇄신할 것인지는 잘 판단해야 한다. 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다.

 

그러니 변화를 읽는 안목을 키우고, 삼 년 동안 말린 쑥을 미리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형식적이거나 보여 주는 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 날로 새롭고 또 날로 새롭다.)을 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 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7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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