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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충돌과 화합: 마샹보[馬相伯]의 중국 천주교 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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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5 ㅣ No.892

충돌과 화합 : 마샹보[馬相伯]의 중국 천주교 토착화*

 

 

국문 초록

 

이 연구는 중국인 천주교도이자 청년 시절 예수회 신부였던 마샹보[馬相伯]의 활동과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중국 근대사회의 흐름에서 겪어야 했던 내적 문화충돌의 경험은 어떠했으며, 예수회를 탈퇴한 이후 정치무대에서의 활동과 다시 교회에 돌아와 천주교 토착화를 위해 어떻게 천주교와 중국 문화와의 화합을 꾀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 연구는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서술하였다. 첫째, 청년 시절 예수회 신부이자 민족주의자로서의 충돌의 과정을 서술하였다. 마샹보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전통 유학교육도 함께 받았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아편전쟁이 발발한 시기였다. 이제 천주교는 이전과는 달리 열강의 힘을 업고 들어온 종교가 되었다. 천주교 선교정책에 변화가 발생하면서 마샹보의 내면에서 문화적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고, 예수회를 탈퇴하게 된다.

 

둘째, 마샹보의 중국 천주교 토착화 방법에 대해 서술하였다. 마샹보가 인생의 전반기에 예수회 신부이자 민족주의자로서의 내적 충돌을 겪었다면 인생의 후반기에는 천주교와 중국문화와의 화합을 꾀하고자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를 위해 힘썼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천주교를 서양인의 종교 즉, ‘양교’(洋敎)로 간주했다. 천주교 및 외국 선교사의 ‘양’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가장 유효한 방식은 바로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이다. 마샹보는 천주교의 ‘양교’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 선교사들이 중국의 국적을 취득해야 하고 중국어를 배워 중국어로 선교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학문 선교를 주장하면서 천주교 대학 창립에 앞장섰으며, 마테오 리치적 방법으로 중국에서 천주교가 뿌리내릴 것을 주장했다. 마샹보는 ‘양교’의 천주교가 토착화의 과정을 거치면 서양의 종교가 아니라 중국 사회에 융합되어 중국 고유의 종교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마샹보의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에 대한 노력은 사회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었다. 그는 중국 천주교 토착화 운동에서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 머리말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년 10월, 광시[廣西] 구이린[桂林]에 피신해 있던 마샹보[馬相伯]는 전쟁을 피해 베트남 랑썬[Lang Son ; 諒山]으로 들어갔다. 그가 다음 해인 1939년 4월 6일, 100세의 나이로 타국의 땅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했던 말이 있다. “나는 한 마리 개다. 1백년을 짖었지만 중국을 각성시키지 못했다.”1) 아편전쟁이 발발했던 1840년에 태어나 중국의 근현대사를 목도했던 마샹보의 이 말에서 중국의 운명과 시대에 대한 실망이 배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때는 예수회 신부로서, 환속하여 정치가로서, 말년에는 경건한 천주교 신자로서 종교를 통해 세상을 개혁하려 했지만 순탄치 않았던 정치적 상황이 내재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겠다.

 

현재까지 마샹보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없으며, 단지 뱅상 레브(Vincent Lebbe) 신부와 교황 사절 코스탄티니(Celso Costantini)의 중국 천주교 토착화와 관련된 연구에서 간단히 언급만 하고 있을 뿐이다.2) 중국의 마샹보 관련 연구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마샹보의 정치사상과 실천 활동에 대한 연구이다.3) 마샹보는 정치가로서 양무운동에 참여하였고, 후에는 입헌파로 활동했으며, 신해혁명 시기에는 대리장쑤도독[代理江蘇都督]이었다. 민국 초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 총통부 고등정치고문을 맡았으며, 이후 항일투쟁에도 민주인사들과 함께 온몸을 던졌기에 정치활동과 사상에 대한 연구들이 있다.

 

둘째, 마샹보의 교육사상과 실천 활동에 대한 연구이다.4) 마샹보는 중국 근현대 유명한 교육가이다. 그는 예수회 학교인 쉬후이공학[徐匯公學] 교장을 담임했고, 이후 가산을 털어 진단학원(震旦學院), 푸단공학[復旦公學, 후의 푸단대학]을 건립하였다. 후에 가톨릭 대학인 푸런대학[輔仁大學] 설립에 앞장섰다. 그는 중국 현대 교육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교육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크다. 따라서 마샹보 연구에서 그의 교육 사상 및 실천 활동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다룬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마샹보의 종교 사상 및 문화 활동에 대한 연구이다.5) 마샹보의 사상 및 활동의 과정에서 그의 종교적 주장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초기 마샹보 연구가 교회 내부 인사의 연구에서 시작되었다면, 이후에는 역사학자들이 마샹보의 종교사상 및 문화 활동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마샹보에 대한 연구는 이처럼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되었지만, 많은 연구가 마샹보의 언론 및 담화 등의 자료에서 출발하여 정치, 종교, 교육 등 관련된 분야별로 분류하고 분석하여 결과를 도출해 내는 연구 방법이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마샹보는 역사가 깊은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또한 전통 유학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다. 아편전쟁 이후의 근대 중국 사회라는 시대 흐름 속에서 그가 유전인자로 지녔던 유가와 그리스도교의 두 문화에 대한 내적 선택 및 그가 교회와 세속 세계와의 모순된 심리상태를 경험한 심적 노정을 밝힌 연구를 찾기는 어렵다. 이러한 모습을 함께 살펴보아야만 근대 중국 사회에서의 진실한 마샹보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예수회 신부로서의 마샹보와 민족주의자로서의 마샹보의 심리적 ‘충돌’의 과정을 살펴보고, 그러한 충돌의 과정을 거친 후에 동서 문화의 ‘화합’의 모습인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2. 예수회 신부와 민족주의자로서의 충돌

 

마샹보는 1840년 장쑤[江蘇] 단투[丹徒]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단양(丹陽) 마가촌(馬家村)이다. 단양 마가촌은 청대(淸代)에 비교적 잘 발전된 천주교 촌락으로 아편전쟁 이후 다시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가 이곳의 신앙이 잘 유지되었음을 발견했다.6) 마샹보의 얘기에 의하면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온 이후 우리들의 조상이 가장 먼저 교도가 되었다. 나의 외조부모도 천주교를 신봉했다”7)고 한 것으로 보아 마샹보는 이미 역사가 오래된 천주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또한 마씨가보(馬氏家譜)에 의하면 원대 대유학자 마단림(馬端臨)이 마샹보의 선조이며, 마샹보의 부친은 유의(儒醫)로서 자연스럽게 유가의 정신도 그에게 전해졌을 것이다.8) 이러한 환경에서 마샹보는 출생 1개월 후 세례를 받았고, 세례명은 요셉이었다. 유학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후대 사람이 보기에는 모순되는 것이지만, 예수회가 유가 문화를 존중하는 시기에 이러한 문화상의 결합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마샹보의 어머니 심씨(沈氏) 역시 천주교 집안에서 출생한 독실한 신자였다.9)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엄한 교육은 마샹보의 세계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구술에 의하면, “어렸을 때, 모친이 매우 엄하게 가르쳐 나의 언행 하나하나에도 소홀히 하시는 법이 없으셨다. …모친의 독실한 신앙심과 엄한 교육의 영향 아래 자랐고, 이 때문에 후에 사람을 대할 때 야박하게 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게 되었다”10)고 하여 어머니 심씨는 엄격히 유년의 마샹보에게 올바른 행동, 언행을 요구했다.

 

또한 덕행 교육 이외에 지식 교육도 천주교를 준수했다. 마샹보는 “나는 가정의 영향을 받아 인생관과 세계관 모두 당시 중국 사회 전통의 견해와 풍속에 구애받지 않았다. 중국인은 항상 아이들에게 귀신 관념을 심어주고, 평소에도 종종 기괴한 말로 아이들을 무서움에 떨게 한다. 또한 그들은 길흉화복을 막론하고 모든 것을 사당에 가서 기도하고, 미신을 맹종한다. …나는 종교의 계몽으로 천자(天子)도 우리들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을 조물주가 창조하고, 삶과 죽음이 모두 같으며, 상제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안다”11)고 하며 그의 인생관과 우주관이 유년시절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마샹보는 이러한 자신의 세계관이 천주교화 된 가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확실히 천주교가 매개가 되어 그는 성년 후에 서학을 배운 많은 다른 유생들과 비교하여 서방 근대 문화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샹보의 유년시절 환경은 천주교 이외에 항상 다른 전통이 있었다. 그것은 전통 유학 교육이다. 마샹보의 부친은 유생으로서 젊은 시절 학당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고, 의술을 펼치거나 상업을 경영하기도 했다. 마샹보는 5세 때에 사숙에 들어가 사서오경을 배웠고, 부친의 영향을 받아 현시(縣試)를 통과하여 수재(秀才)가 되었다.

 

이 시기 마샹보는 중국 전통사회와 천주교 사이에서 1차적 문화적 충돌을 경험했다. 과거 규정에 의하면 학정(學政)이 주관한 원시(院試)에 통과하면 현(縣) 학교의 생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단양은 마샹보의 원적으로, 규정에 따르면 이곳에 입학해야 한다. 그러나 마씨 형제가 매우 뛰어났고, 현 생원의 정원을 그들이 차지할 것을 알고 있었던 단양 사람들이 마씨가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시험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서 마샹보의 부친은 인근 현 단투에서 상업에 종사하면서 의료행위를 하고 있었는데, 부친의 비교적 좋은 사회관계에 의지하여 마씨 형제는 단투에서 시험에 참가하여 생원의 자격을 취득하였다.12) 유년 시절의 마샹보는 아마도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알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천주교 집안 출신의 내력과 중국 전통 사회와의 모순적 충돌이 그에게 다가온 것만은 확실하다.

 

마샹보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천성이 활달하고 자기주장이 강해 소년 시절 경학 위주의 전통교육을 한 사숙의 스승을 비판하기도 했다.13) 하지만 그가 전통교육을 통해 획득한 고전 지식이 그에게 중국문화의 가치를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중국 고전에 대한 깊은 조예는 13세 때 과거시험에 참가하게 된 바탕이 되었고, 이후 상하이 쉬후이 공학에서 공부할 적에 서양인 교장 조톨리(Angelo Zottoli) 신부가 그에게 조교 일을 담당하게 하여 학교의 국문과 경학을 가르치게 한 계기가 되었다.14)

 

마샹보는 11세 때인 1851년 겨울에 부모를 속이고 전장[鎭江]에서 상하이로 왔고, 친구의 소개로 쉬자후이[徐家匯]의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이냐시오(Ignacio) 공학(후에 쉬후이 공학으로 개칭)에 들어갔다.15) 당시 학교를 주도적으로 운영하던 예수회는 여전히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옛 예수회 선교방침을 따르고 있어 선교사들에게 중국 언어와 문학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초기 쉬후이 공학의 교과과정에는 중국의 전통교육도 있었으며, 신학의 교재도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이었다. 마샹보는 마테오 리치가 서양 선교사로서 중국문화에 조예가 깊은 것에 감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진리를 유가 윤리에 녹여내어 화합하는 것에 매우 기뻐했다.16)

 

쉬후이 공학은 우연히 건립되었는데, 1850년 강남지역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지자 쉬자후이 천주교당이 12명의 농민 자제들을 받아들인 것이 시초가 되었다. 당시 쉬자후이 천주교당에서 이 학생들을 가르칠 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학생들의 배경도 천차만별이라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기본적인 읽기, 쓰기, 계산하기 교육을 하였다. 또한 자격이 되는 학생은 과거시험에 참가를 권하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서양 언어와 과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17)

 

쉬후이 공학 안에서 중국문화 분위기가 농후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학교의 사무를 주관하고 있던 조톨리 신부가 열렬한 한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나폴리 사람으로 1843년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5년 후 중국에 와서 1852년 쉬후이 공학 교장에 임명되었다. 조톨리 교장이 마샹보에게 경학 공부를 계속 시켰던 것은 아마도 자기의 저술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라틴문 저서 《중국문화교정》(中國文化敎程)은 초기 서양인이 중국문화를 이해하는 본보기였다. 조톨리 신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교과과정은 확실히 쉬후이 공학 초기의 학교 운영 방침이었다.18) 이로보아 중국 학문의 흥미에 대한 쉬자후이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치(同治, 1861~1874) 이전의 선교사는 개신교 선교사를 포함하여 모두 중국의 사회, 문화와 조화롭게 지내는 것이 비교적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1849년에 설립된 쉬후이 공학은 1852년에 정상 궤도에 올라 학생이 44명에 달했다. 공학 측에서는 로마와 연락한 후에 교학(敎學)을 예수회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마샹보는 여기에서 4년의 중문 과정과 2년의 라틴어 과정, 1년의 인문 과정과 1년의 철학 과정을 마쳤다. 그 후 1862년 예수회가 상하이에 신학원(Seminary)을 건립하였고, 마샹보가 신학원 제1기 11명 신학생 중의 한명이 되었다. 신학원의 최초 2년은 예수회 특유의 ‘정신훈련’을 받았고, 견습으로 교구 일에 종사하였다. 조톨리 신부가 그의 지도교수이자 신학원 원장이었다.19) 마샹보는 신학원에서의 일련의 과정을 거쳐 1870년 예수회 시험을 통과하여 신학박사학위를 획득했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중국인으로서 마샹보처럼 사대부이면서 성직자인 경우가 물론 처음은 아니다. 명(明) 이후 예수회선교사는 대부분이 외국인 선교사이지만, 오력(吳歷. 문인화가로 유명하였고, 중년에 예수회 입회)과 같은 중국인 사대부도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중국인 선교사는 중년에 개종했거나 본래 학식이 부족하거나 혹은 단지 한 곳에서 보조 역할을 했던 경우이다. 마샹보와 같이 예수회의 엄격한 훈련과 체계적인 학위과정으로 성직자로 양성된 예는 중국에서 첫 번째이다. 또한 교회 역사를 떠나 중국 근대 역사에서 보면, 마샹보는 비록 그 핵심이 서방 신학일지라도 변혁의 시대에 사대부로서 가장 먼저 앞서 전면적으로 서학교육을 받아들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마샹보의 상하이 예수회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온했다. 당시 중국의 강남 예수회는 예수회 파리성(省)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전통적으로 비 프랑스국적 선교사가 가입되어 있었다. 다양한 국적의 선교사가 함께 모여 있어 마찰이 일어났는데, 모순은 1870년대에 폭발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중국 교회에 대한 선교 보호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천주교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예수회 소장 자료에 의하면, 1875년 프랑스인 교구회장 푸코(Foucault)가 총회 이후 다시는 이탈리아 국적 선교사가 중국에 오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프랑스에 반감을 가진 쉬자후이의 젊은 중국인은 모두 이탈리아인들이 교사한 것이라고 했다.20) 이 얘기는 아마도 마샹보와 조톨리 신부와의 관계를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1876년, 마샹보와 예수회와의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예수회를 탈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기 전 이미 여러 차례의 징조가 발생했다. 18세가 되던 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당국에서 정식으로 그에게 번역과 비서 일을 하도록 요청했는데, 마샹보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구체적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내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은 프랑스를 위해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다”21)라는 그의 말을 통해 청년시절 마샹보의 애국주의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그는 쉬후이 공학 내에 머물러 있었지만, 태평천국운동과 2차 아편전쟁의 시대적 상황이 이미 상하이 조계 안에도 그에게 전달되어 중요한 영향을 발생시켰던 것이다.

 

리훙장[李鴻章]을 도와 양무운동의 선봉장이었던 그의 동생 마젠충[馬建忠]은 당시 예수회 수사였지만, 외국 신부와의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교회를 떠났다. 1870년대 초, 마샹보 형제에게 일어난 한 사건은 이후 마샹보가 교회를 떠나게 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마샹보, 마젠충 형제는 쉬후이 공학의 한 남향 방에 거주했는데, 이미 이곳에서 몇 년 동안 거주하고 있었다. 그해 파리성에서 프랑스인 수사가 왔을 때 예수회는 마샹보 형제를 북향의 방으로 옮기게 하고 프랑스인 수사를 그들의 방으로 배치했다. 평상시 기숙사 조정이라면 그리 큰일도 아니지만, 한 외국인 수사를 위해 중국 수사가 원래 거주지에서 쫓겨난 것이었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중국인과 외국인 수사를 차별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일로 마젠충은 굴욕을 느끼고 교회를 떠났다. 당시 마샹보는 전체 교육과정을 마치고 신학박사학위 시험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남았다. 하지만 이 일은 그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22)

 

1871년에서 1873년까지 그는 쉬후이 공학 교장을 맡았고, 1874년 신학원 원장 겸 쉬후이 공학 교장에 다시 임명되었다. 그는 이 기간에 공학의 학생들에게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였고, 학생들이 천주교도가 되기 위해서는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대한 강습(講習)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로 인해 서양인 선교사들은 마샹보의 교육방법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학생들이 공교(孔敎)를 믿는 이교도가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1875년에 마샹보가 공학 사무를 보지 못하게 하고 천문 연구 책임을 맡게 하였다.23)

 

마샹보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쉬자후이에는 천문을 연구하는 현대적 관측기기가 없었고, 단지 마테오 리치가 이전에 사용했던 구식 천문 관측기기만 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연구방향을 수학으로 돌렸지만, 그들은 또 나에게 마음을 놓지 못하고 난징[南京]으로 발령을 내 수리 관련 책을 번역하게 했다. 그런데 참지 못하는 것은 쉬자후이에서 내가 번역한 수리 책이 이미 수백 권이 있는데 모두 서재에만 있고, 인쇄를 하지 않고 있으니 번역과 저술을 많이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불어 당시 난징 교회의 요리사가 매우 비열한 외국인이었는데, 그가 한 요리는 먹을 수가 없었고, 매우 비위생적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말도 없이 상하이로 돌아왔다”24)고 하였다. 이때가 1876년이었다.

 

그가 예수회를 떠나려고 결정했을 때 그의 형 마젠쉰[馬建勳]이 편지를 써 이미 산둥[山東]에 있는 한 친구의 양무(洋務) 활동을 도와주라는 얘기가 있었다. 결국 그는 예수회를 떠났다. 로마에 있는 예수회 문서에 보면, “마샹보는 매우 총명하고, 외적인 풍모도 결점이 없는 사람이다. 12년의 종교생활 중 그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근래에 몇몇 사건이 그의 평범한 품격과 과도한 오만을 드러내었다. 그의 형이 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형은 아주 나쁜 사람이며, 주교들이 싫어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가 마샹보 신부에게 편지를 썼고, 정식으로 예수회를 탈퇴하도록 했다”25)고 하여 당시 마샹보의 결정에 대한 예수회의 반응을 볼 수 있다.

 

마젠쉰은 당시 상하이에서 회군(淮軍) 양대(糧臺)를 맡아 리훙장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26) 마샹보가 쉬저우[徐州]에서 교당 관리업무를 하고 있을 때 수재(水災)로 인해 마젠쉰에게 백은(白銀) 2천량을 부탁하여 수재민을 구제하였다. 이 일을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이 알게 되었고, 그들은 교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독단으로 자금을 사용하여 교규를 어겼다고 생각하여 마샹보를 상하이 예수회 내에 있는 ‘성찰실’에 유폐시켰다. 이 일로 마젠쉰이 크게 화를 내며 몇 십 명의 병졸을 데리고 와 교회에 성토하였다.27)

 

예수회를 떠나도 천주교도로서 신앙을 유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예수회와의 불화로 교회를 떠난 마샹보에게 상하이의 예수회 교회가 우호적일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신앙 활동을 위해 교당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1876년 11월 루이 쇼뱅(Louis Chauvin) 신부를 통해 성체를 영하는 것을 요구하였고, 1877년 1월 교회는 그의 성당생활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예수회가 그에게 즈리[直?]로 가서 교무 일을 맡거나 재가 신부를 맡을 것을 명령했지만 결국 거절했고, 그는 예수회에서 제명되었다.28) 이처럼 마샹보와 상하이 천주교회와의 관계는 계속 긴장과 충돌의 관계였다.

 

이 일로 보아 당시 마샹보는 매우 복잡한 심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샹보는 어려서부터 중국 전통교육과 서양교육을 받았고, 양자는 이미 유전인자로 고정화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양자를 찢어놓았다. 결국 예수회를 떠났지만, 종교적 신앙은 여전히 그에게 반복적으로 그치지 않고 몸부림치게 했다. 이때의 마샹보는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마샹보는 예수회를 탈퇴한 후에 형 마젠쉰의 친구가 있는 산둥으로 가서 관리가 되기 위한 시작을 하였다.29) 이로부터 마샹보는 세속 정치 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20여년의 청말 관료사회의 부침 속에서 비록 성공했다고 할 수 없지만 외교가로서는 몇 가지 활동도 하였다. 이미 그의 동생 마젠충은 예수회에서 나온 이후 리훙장의 추천으로 프랑스로 유학갔다가 법학석사학위를 받고 1880년에 귀국한 터였다. 동생 마젠충과의 관계로 1881년 리수창[黎庶昌]이 일본 공사로 파견되었을 때 마샹보는 공사관 참찬(參贊)에 임명되어 일본으로 갔다가 고베 주재 영사가 되었다. 그 해 가을 병중에 있던 마젠쉰을 보기 위해 귀국했고, 이후 마젠충을 대신해 리훙장에 의해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국왕의 정치고문을 담당하게 된다.30)

 

1887년 리훙장은 부족한 해군건설 경비를 해결하고 각 항목의 부족한 경비를 제공하기 위해 미국과 합작 은행을 설립하고자 했다. 리훙장은 마샹보를 미국으로 파견하여 차관 문제를 협의하고자 했다. 이 일 역시 청조측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샹보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미국에서 국빈대접을 받았으며 미국 은행가로부터 많은 투자금 지원을 약속받고 리훙장에게 전보를 보냈지만, 조정에서 반대 여론이 심해 승인할 수가 없다고 하여 황급히 미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31) 그는 런던, 파리를 거쳐 로마로 갔다. 그리고 교황청에서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했다. 이를 계기로 그가 다시 교회에 흥미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지만 마샹보는 성(聖)과 속(俗), 어느 한 쪽을 버리지 않고 반복적으로 투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몇 가지 원인을 들 수 있는데, 1893년과 1895년에 아내와 큰 아들이 항해 중에 재난을 만나 사망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그 영성의 자극을 야기했으며, 청정부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마샹보의 정치적 열정이 감퇴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원인이 당연하겠지만 이것 이외에 아마도 더욱 중요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의 전반기에 민족주의자로서 또한 천주교 신자로서 내적 갈등이 표출되었고, 중국 사회의 세속 사업을 위해 부득불 예수회와 결렬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사회가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을 때 그는 자연적으로 내적 생활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는 충돌의 과정이 아니라 화합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화합 과정의 촉매제는 바로 명말 청초 예수회 선교사들의 방침을 따라 천주교의 토착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마샹보의 문집 중에 1897년에 교회로 돌아와서 연속적으로 4편의 글을 남겼는데, 그것은 <마테오 리치 유상제사(遺像題詞)>, <서광계 유상제사>, <아담 샬 유상제사>, <베르비스트 유상제사>이다. 이것은 마샹보의 천주교 토착화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동서 문화의 화합 :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마샹보가 다시 교회로 돌아온 해는 1897년이었다. 그 해 유년의 동학(同學) 예수회 신부 선저궁[沈則恭]의 도움 아래 마샹보는 교회와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1개월간의 피정을 마치고, 쉬자후이로 돌아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제 60세에 가까운 그에게 40년의 짧지 않은 후반 인생이 남아 있고, 개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가들에 의해 다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그 역시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쉬자후이는 상하이 조계지역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어서 비록 마샹보가 정치적 중심에서 떠나 은거하고 있었지만, 이후의 정치적 상황이 그를 정치적 방관자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캉유웨이[康有爲]가 마샹보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고, 량치차오[梁啓超]는 역학관(譯學館) 설립 계획에 대한 주관을 마샹보에게 요청하기도 했다.32)

 

인생 후반기에서 마샹보는 교회 이외의 영역에서 많은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자산은 교회에 있었다. 이것이 그의 전반기 단계에서 예수회에서 일탈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1897년 다시 쉬자후이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그의 명의 하에 있던 대부분의 재산을 예수회에 헌납하여 교육 부흥의 용도로 사용하였다. 1903년에 그는 선교사들의 도움 하에 진단학원을 설립하였다. 1905년에는 유럽 선교사들이 강압적으로 교칙을 준수하는 것에 반대하여 진단학원 학생들을 데리고 나와 푸단공학을 창립하여 교장을 담임했다.33) 이것이 이후의 푸단대학이다.

 

이후 그의 사회적 주장은 명확히 중국 천주교회 및 그리스도 신학의 바탕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1908년 그는 ‘신아헌정설’(神我憲政說)을 제기하여 헌법 중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34) 1916년에 그는 베이징 정부의 공교(孔敎) 설립 계획에 대해 중국 천주교 각 교구 천주교도를 대신하여 반대하는 글을 연이어 발표했다.35) 5·4운동 시기에 신청년들이 비기독교운동을 궐기할 때, 그는 글을 써서 과격론에 대해 반박했다.36) 그는 적극적으로 베이징 교회의 잉롄즈[英斂之]에게 도움을 주어 푸런대학 창립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고, 천위안[陳垣]에게 자금을 도와주어 천주교 역사 연구에 종사하도록 하였다.37) 중국교회, 그리고 그리스도 신학과의 긴밀한 관계는 마샹보의 후반기 인생에서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중국의 정치·사회적 환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마샹보가 무술개혁 이후 ‘서학’(西學)의 스승으로 추대되기도 했지만, 그가 신봉하는 ‘서교’(西敎)는 여전히 사대부의 배척을 받았다. 신해혁명 후 각계에서 그를 초대했지만, 젊은 지식인들의 ‘반종교’(反宗敎)에 대처해야 했다. 다른 반면, 교회 내부에서 그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주장을 견지하였고, 교회가 중국문화에 적응해야 함을 요구했다. 즉, 천주교의 토착화를 주장한 것이다.

 

마샹보가 교회로 돌아온 이후의 최대 희망은 바로 중국교회를 위해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당시 교황청이 아직 전체 《성경》의 번역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교회는 300년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해석식의 소책자와 《성경》 이야기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마샹보는 아직 성경 전권을 번역할 권한이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4복음서》의 번역에 도전하여 경문을 강해하는 방식으로 중국 신도에게 전면적인 《성경》 내용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38)

 

당시 중국 사람들은 천주교를 서양인의 종교 즉, ‘양교’(洋敎)로 간주했다. 마샹보는 천주교를 ‘공교’(公敎)라고 했다. 공교는 보편성을 가진 종교이며 모두를 위한 종교라고 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진 똑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남녀노소, 부귀빈천,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공교라고 했다.39) 그는 천주교가 ‘양교’로 불리는 까닭은 사람들이 여전히 천주교를 중국에 뿌리내리지 못한 ‘객교’(客敎)로 보고 있기 때문이며, 많은 원인이 ‘양관’(洋官)에 있다고 보았다.40) ‘양관’은 서양 선교사를 말한다. 천주교 및 외국 선교사의 ‘양’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가장 유효한 방식은 바로 천주교의 중국화이다.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에 대한 마샹보의 구체적인 생각은 1919년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게브리앙 주교(Mgr. Guebriant)를 교황청 순시자로 임명하여 중국의 천주교 상황을 파악하고자 왔을 때 주교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작성한 교황 상서에서 요약할 수 있다.

 

마샹보는 여기에서 외국인 선교사의 행위가 중국인의 그리스도교 반대 환경을 조성하는 주요 원인임을 비판하였다. 서양인이 언제나 본국 관원에게 의지하여 교무를 통제하고 있는데 어찌 중국인이 반감을 갖지 않겠느냐고 비판했다. 중국인 성직자는 교회 내에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으며, 외국인 선교사는 그들의 서신 왕래에서 중국인이나 중국 관리들을 조롱하는 것이 유행일 정도로 중국을 무시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각국의 선교사는 중국 국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불교나 이슬람교도 외래종교이지만, 양교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선교사가 모두 중국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과학적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했으며, 현재 천주교회의 중서문(中西文) 정도가 높지 않은 수준에 직면하여 기층의 포교 근간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교회의 문화적 지위를 제고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인과 외국인 성직자는 모두 동등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교회 내부에서 중국의 보통 언어의 사용을 제창했다.41)

 

교황청 순시자로서 게브리앙 주교의 중국 방문은 중국 천주교 역사상 중국교회의 자주독립의 서막을 연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42) 당시 이미 80세였던 마샹보는 게브리앙 주교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했고, 중국의 천주교 상황을 게브리앙 주교를 통해 교황에게 전달함으로써 중국 천주교 토착화 운동의 서막을 열게 하였다. 예수회 신부였던 젊은 시절의 경력에서도 확인되기도 하지만, 1897년 교회로 돌아온 후의 많은 활동은 직접적으로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1) 서양인 선교사의 중국 국적으로의 변경

 

마샹보는 천주교의 ‘양교’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 선교사들이 중국의 국적을 취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3) 당시 중국 사람들이 천주교를 반대한 것은 실제로 외국의 식민정책을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교사가 중국인이 된다면 본국 정부와의 연계가 없어 중국인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44) 반대로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 급진파 인사들이 주장하는 “교민이 앞잡이며 서양 선교사는 첩자”45)라는 인식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이슬람교와 불교가 중국에서 성행하는 이유는 바로 그 종교의 관리인이 중국 국적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중국에 온 서양 천주교 선교사가 국적법에 따라 중국 국적으로 변경하면 된다고 하였다.46)

 

또한 마샹보는 중국인 교회 책임자를 적극적으로 양성할 것을 요구했다. 통계에 의하면 1919~1920년 선교사들은 외국 국적이 1,417명, 중국 국적이 963명이었다.47) 그러나 천명에 가까운 중국 선교사 중에 단 1명의 주교도 없었다. 1918년 그는 잉롄즈에게 보낸 서신에서 중국 교회가 기생물이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중국인 성직자를 배양하여 중국 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48)

 

마샹보의 주장은 게브리앙 주교의 보고서를 통해 결국 로마 교황 베네딕도 15세의 주의를 이끌어냈다. 교황은 비록 서양 선교사의 국적 변경 문제에 대해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중국 국적 선교사가 교회 관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1919년 11월에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모든 선교구역을 관리하는 자의 주요임무는 당연히 그 지역의 국민에게서 성직자를 배양하고 건설해야 한다는 회칙을 선포했다.49) 그것은 바로 선교 회칙 <막시뭄 일룻>(Maximun illud, 온 세상에 전파된 가톨릭 신앙에 관하여)이다. 이 회칙은 세계 교회에 반포한 것이지만, 얘기하고 있는 핵심은 주로 중국 교회에 관한 것이었다.

 

2) 선교사의 중국어 학습과 선교

 

마샹보는 외국인 선교사가 중국어를 배워 중국어로 선교할 것을 주장했다. 서로 간의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서로 이적시하고 이단시하게 마련이다. 천주교의 양교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국인 선교사가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50) 그는 서양 선교사 10명 중에 한두 명은 중국말을 하지 못하고, 문자도 알지 못한다고 개탄했다. 중국 문화를 멸시하는 서방 선교사에게 배운 중국인 사제들은 중문 수준도 높지 않고, 라틴어 수준도 낮은 상태인데, 그들이 어떻게 중국인을 계도하고 중국 천주교 업무를 할 수 있겠냐며 비판하였다.51) 잉롄즈 역시 이를 비판하여 말하기를, “현지인 사제가 그곳 문자를 모르는데, 어찌 현지인을 대할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 현지 사회와 단절하고 우수한 집단과 벽을 쌓을 따름이다”52)라고 하였다. 당시 중국의 한 수도원의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 수도원은 중국어 학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에게 사상이 불량하다는 죄명을 씌울 것이다. 기괴한 것은 당신이 만약 영어나 프랑스어 배우기를 원한다면 원장은 허락할 것이다. 어떤 교구의 수도원은 중국말을 하는 것조차도 불허하였다. 그 이유는 프랑스어 혹은 영어를 학습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수사들의 서양어 실력은 훌륭했지만 중문은 어떠했겠는가! 기껏해야 소학교 수준이었다. 나는 1935년 베이징의 중앙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에 우연히 영평부(永平府)에서 온 두 명의 젊은 중국인 수사를 보았다. 그들은 유창한 프랑스어를 쓰면서 서로 얘기를 했는데, 나는 당시 매우 놀라웠다! 후에서야 이것이 그들 수도원의 규정이라는 것을 알았다.53)

 

이것으로 보아 당시 중국 천주교의 중국인 학생이 받은 사제 양성 교육이 어떠했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장악한 상하이 쉬자후이 예수회는 장기간 프랑스어를 사용하여 선교하였고, 중국 선교사가 중국어로 선교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심지어 중국어를 ‘마언(魔言)’이라고 멸시하였다.54) 여러 언어에 정통한 마샹보는, 한 국가의 언어는 한 국가의 의지를 소통하게 하는 것이며, 한 국가의 문자는 한 국가의 이상이 나타내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민족국가에서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였다.55)

 

마샹보는 외국 언어와 마찬가지로 중국 언어도 선교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사도 바울의 얘기를 들어 “선교를 귀로 들어야 하는데 서로 알아듣지 못하면 남만북이(南蠻北夷)일 뿐이다. 그래서 본고장 사람이 본고장에서 선교해야 한다. …성신강림축일에 사도가 설교하는데, 청중이 비록 각국의 사람들이었지만, 사람들이 듣는 말은 모두 본고장 방언이었다. 첫째 날 세례자가 2천 명, 둘째 날에도 2천 명이었다. 이것은 모두 본고장 방언으로 선교를 한 결과이다. …이렇게 보면, 중국어도 초월성 진리를 설교할 수 있다”56)고 하였다.

 

천주교도로서 마샹보는 당연히 맹목적인 그리스도교 반대를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인의 그리스도교 반대의 진의는 바로 외국 식민정책의 반대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중국문자와 중국어를 쓰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식민정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반박하였다.57) 그렇다고 해서 마샹보는 단순히 ‘그들 문자, 그들 언어’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다. 마샹보 자신도 여러 외국 언어에 정통하였다. 그는 전반적인 서양화와 ‘우리글, 우리말’을 버리는 것을 반대하였다. 단지 서양책만 읽는 중국 선교사에 대해 마샹보는 진심으로 그들이 자기의 민족문화정신을 상실하게 되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십여 년 동안 서양 책을 읽으면 서양으로 동화된다. 중국의 예의 풍속 습관을 모두 망각하게 된다. 이러한 중국인이 서양인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래서 수도회의 수사는 중국 책을 많이 읽어야 하며 중국의 습관 풍속을 잘 알아야 한다”58)고 하였다. 그는 날로 개방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외국어 학습과 이용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의 완전한 ‘치우침’은, 심지어 ‘국어 숭상’은 중국 교육의 민족정신과 문화사명에 저해가 된다고 보았다.

 

3) 학문 선교의 주장

 

마샹보는 학문 선교를 주장하면서 천주교 대학 창립에 앞장섰다. 명말 청초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학문을 앞세워 선교를 하였다. 그들은 충분한 지혜와 도량을 지니고 ‘천주’(天主)를 중국 문화 · 사회와 대립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선교를 할 때, 종교적 교의와 유학의 소통을 이끌었고, 선교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근대 과학과 인문지식으로 보완하였다. 하지만 의례논쟁 이후 서구 선교사들 중에는 새로운 지식으로서 동서 문화 사이의 소통을 끌어낸 자가 매우 적었고, 중국 천주교 신자 중의 지식인 계층도 크게 감소했다. 이것은 결국 20세기에 들어서서 천주교의 문화 사업이 개신교에 크게 뒤지게 된 결과로 나타났다.

 

마샹보가 교회로 돌아왔을 때 천주교 신자의 학문적 자질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는 명말 청초 유럽 선교사의 성공은 그들이 오로지 학문에 의지했고, 학문을 이용하여 선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 중국에 온 선교사가 학문을 이용하여 선교하는 자가 거의 없으며, 수도생이 로마로 유학 가서 공부하고자 하는 자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또한 현재 중국이 민주제로 정체가 바뀌었지만, 천주교 신자 중에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자가 아무도 없고, 부현(府縣) 의원이 된 자가 아무도 없으며, 향(鄕)이나 시(市) 의원도 전혀 없다고 하면서 천주교가 중국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한 작업이 미약함을 지적하고 있다.59) 이러한 인식에 기반 하여 마샹보는 잉롄즈와 함께 중국에서 천주교 대학의 창립을 위해 노력했다.

 

중국 천주교와 선교사에 대한 마샹보의 우려는 많은 인사들의 동정과 지지를 얻었다. 1919년 그는 베이징의 신자들을 대표하여 교황에게 상서를 입안하여 선교사의 자질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선교사가 언어 문자의 기본적 소질이 결여되어 있는 것 이외에 라틴문, 역사, 과학 등 지식 소양도 매우 빈약하며, 수도원 내에 중국문 수준은 본래 높지 않았으며, 라틴문 수준도 매우 낮다고 하였다. 또한 천주교 역사도 강해하지 않으며, 과학은 더욱 논하지 않는다고 하였다.60) 그는 “현재 교회 밖 사람들이 반교(反敎)를 선언하고 있는 것 이외에 구미에서 유학한 교육가, 역사가, 과학자 등이 번역한 유명한 서적이 천주교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선교사는 학문 수준이 높지 못해 이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중국인을 계도하고 교회 일을 하겠는가?”61)라고 하였다. 결국 마샹보는 선교사의 자질 및 ‘학술 선교’의 정신을 강조하여 교황 베네딕도 15세의 관심을 이끌어 내었다.

 

중국 천주교 대학 설립의 주장과 동시에 마샹보는 적극적으로 중국 신학생의 로마 유학 파견을 주장하였다. 그는 중국 선교가 효과적으로 되려면 중국의 밖에서 재능을 빌려오는 것은 힘들고, 스스로 라틴문과 한문의 재능을 키우고 과학의 재능, 교회법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로마로 학생을 파견해 공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62)

 

마샹보는 중국 천주교 인사와 연명하여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어 중국에 천주교 대학을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이러한 서신은 교황청의 중국 천주교 토착화 추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샹보는 교회에 대한 호소 이외에도 직접 재산을 헌납하여 진단대학과 푸단대학을 세우고 후에 가톨릭 대학인 푸런대학의 창립에도 도움을 주었다.

 

4) 마테오 리치적 방법의 주장

 

마샹보는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적 방법으로 중국에서 천주교가 뿌리내릴 것을 주장했다. 그는 중국인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유가 경전을 이용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중국과 서양의 언어 사이에 일종의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부합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마테오 리치의 번역이 그 이상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보았다.

 

서방에서 전래된 종교는 중문 가운데서 그 상응하는 개념과 술어를 찾아야 하며, 논리적인 하나의 전제는 중국 고적 중에서 ‘상제’(上帝) 혹은 ‘천주’(天主)가 있다는 것이다. 설사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가 고적 중에서 ‘제’, ‘상제’, ‘천’ ‘주’를 찾았더라도 《천주실의》 내에서의 마테오 리치의 번역은 반대론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반대론자들은 유서(儒書) 중의 ‘상제’와 그리스도교의 ‘Christ’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0년대 프랑스 《교무월지》(敎務月志)는 마테오 리치가 ‘Christ’를 직역 혹은 음역한 ‘아열화인’(阿悅華人)이라고 하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마샹보는 이에 대해 ‘상제’라는 한 단어로 그리스도교를 이단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실 ‘천주’라는 단어도 유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63)

 

마샹보는 중국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진리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찬(杜撰)의 신어(新語)’64) 즉 새로이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익하다 하여 반대하고 명 · 청 시대 유학화된 언어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그는 명·청 시기의 ‘보유역불’(補儒易佛)의 전통을 회복하여 유가문화를 근본으로 하여 천주교를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샹보는 유가를 중국문화의 주체로 간주했다. 유가로 대표되는 중국문화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해석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그는 “중국 언어도 초월성 진리를 설명할 수 있다”65)라고 대변하였다. 이를 위해 중국의 선교사들은 중국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고, 중국의 풍속을 더욱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66)

 

또한 선교사는 최대한 중국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전통문화로 교의를 해석하는 것 이외에 선교 과정 중에도 전통 풍습에 대한 존중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어떤 선교사는 중국인이 예의상 교제를 중요시하는 것도 모두 없애야 한다고 하는데, 마샹보는 이러한 것은 절대로 천주교 선교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해당 지역의 풍속을 고려해야만 선교과정에서 장애를 덜 받으며 지역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67)

 

이상의 서술을 통해 마샹보의 중국 천주교 토착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샹보의 논리에 따르면 천주교가 이러한 토착화를 거치면 다시는 서양의 종교가 되지 않으며, 중국 사회로 융합되어 중국 고유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마샹보가 인생의 전반기에 예수회 신부이자 민족주의자로서의 내적 충돌을 겪었다면 그의 인생의 후반기는 정치, 교육, 종교 등 다양한 방면에서 동서 문화의 화합의 결과로 나타났다. 종교적 방면에서 보면, 그것은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비록 마샹보는 여전히 서양의 선교정책 및 선교사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질책했지만,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이전과 같은 긴장과 모순도 존재하지 않았다.

 

 

4. 맺음말

 

마샹보는 1840년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전통 유학 교육도 함께 받았다.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아편전쟁이 발발한 시기였다. 이제 천주교는 이전과는 달리 서구 열강의 힘을 업고 들어온 종교가 되었다. 천주교 선교정책에 변화가 발생하면서 마샹보의 내면에서 문화적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고, 예수회를 탈퇴하게 된다. 마샹보는 어려서부터 동서 문화의 교육을 받았고, 양자는 이미 유전인자로 고정화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양자를 찢어놓았다.

 

서방문화를 수입하여 낙후된 중국을 변화시키는 것은 청나라 말기 마샹보의 시대가 명나라 말기 서광계(徐光啓)의 시대보다 더욱 절실했다고 볼 수 있다. 마샹보는 서광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정치와 학계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움직임에 많이 참여했다. 청말 사회가 점차 병들어가는 것이 명말의 상황과 매우 비슷한 측면에서 마샹보는 서광계와 마찬가지로 매우 근심 걱정으로 애를 태웠고, 세상의 모든 불합리한 현상에 대하여 분개했다. 그것이 마샹보 생애 전반기의 ‘충돌’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마샹보가 인생의 전반기에 예수회 신부이자 민족주의자로서의 내적 충돌을 겪었다면 그의 인생의 후반기는 동서 문화의 ‘화합’을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로 이루고자 하였다. 1897년 그가 교회로 돌아온 후 그의 내면에 종교와 세속, 중서(中西) 문화는 충돌하지 않고 화합의 형태로 나타났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천주교를 서양인의 종교 즉, ‘양교’로 간주했다. 천주교 및 외국 선교사의 ‘양’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가장 유효한 방식은 바로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이다. 마샹보는 천주교의 ‘양교’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 선교사들이 중국의 국적을 취득해야 하고 중국어를 배워 중국어로 선교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학문 선교를 주장하면서 천주교 대학 창립에 앞장섰으며, 마테오 리치적 방법으로 중국에서 천주교가 뿌리내릴 것을 주장했다. 마샹보는 ‘양교’의 천주교가 토착화의 과정을 거치면 서양의 종교가 아니라 중국 사회에 융합되어 중국 고유의 종교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마샹보의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에 대한 노력은 사회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었고, 교황청은 1922년 코스탄티니를 첫 교황사절로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사업을 진행하였다. 1926년에는 교황 비오 11세가 로마에서 친히 6명의 중국인 주교를 축성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면 중국인 주교는 이미 23명에 달하고 중국인 신부는 1,6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수녀는 3,600명에 달했고, 중국의 천주교 신자는 300만 명에 달했다. 1946년에는 톈겅신[田耕莘] 주교가 최초로 중국인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에 마침내 중국에 교계제도가 설립되었다. 이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교황청과 외교관계가 단절되었지만, 마샹보는 중국 대륙과 대만에서 모두 중국 천주교 토착화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4S1A5A2A01016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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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張若谷 編著, 《馬相伯先生年譜》, 北京 : 商務印書館, 1939, 234쪽.

 

2) 최병욱, <20세기 초 反基督敎에 대한 소통과 치유 - 뱅상 레브 신부를 중심으로>, 《중앙사론》 32, 2010 ; 최병욱, <교황 사절 코스탄티니의 중국 파견과 동서 문화의 소통>, 《교회사연구》 40, 2012. 이밖에 뱅상 레브의 천주교 토착화와 관련된 국내 연구로는 신태갑, <뱅상 레브 신부와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대구사학》 103, 2011이 있으며, 뱅상 레브 신부의 활동을 사회적 실천과 치유의 입장에서 해석한 최병욱, <사회적 실천과 치유 - 뱅상 레브 신부의 예>, 《인문과학연구》 30, 2011도 있다.

 

3) 婁獻閣, <馬相伯與抗日救亡運動>, 《抗日戰爭硏究》, 1993-2 ; 權赫秀, <馬相伯在朝鮮的顧問活動(1882年11月~1884年4月)>, 《近代史硏究》, 2003-3 ; 張繼才, <淸末至北洋政府統治時期馬相伯對國家結構的思考>, 《湖北社會科學》, 2009-10 ; 薛玉琴, <民國初年有關制憲問題的爭論 - 以馬相伯的經歷爲視覺的考察>, 《復旦學報》, 2012-2 등.

 

4) 宋維紅, <馬相伯敎育思想述評>, 《蘇州大學學報》, 1992-3 ; 黃書光, <論馬相伯在中國近代高等敎育思想的地位>, 《高等敎育硏究》, 2003-6 ; 黃書光, <馬相伯中西匯合的文化敎育觀>, 《華東師範大學學報》, 2004-1 ; 劉正偉·薛玉琴, <敎育救國: 科學與人文幷重 - 馬相伯大學理念與實踐考察>, 《高等敎育硏究》, 2006-7 ; 陳才俊, <文化會通與中國敎育現代化的嘗試 - 以馬相伯敎育哲學理念爲中心>, 《?南學報》, 2010-6 ; 蔣純焦·杜保源, <馬相伯大學敎育思想探析>, 《大學敎育科學》, 2012-4 등.

 

5) 黃書光, <馬相伯宗敎價値觀與天主敎中國化探索>, 《學術界》, 2004-1 ; 孫邦華, <試論北京輔仁大學的創建>, 《世界宗敎硏究》, 2004-4 ; 劉義, <基督徒與民初憲法上的信敎自由>, 《東岳論從》, 2005-1 ; 謝麗莎, <馬相伯宗敎觀述評>, 《華夏文化》, 2010-4 ; 金燕, <馬相伯與基督敎會>, 《?案與建設》, 2012-2 ; 李天綱, <馬相伯晩年宗敎生活與思想>, 《史林》, 1995-3 등.

 

6) 1850년 이 일대에 방문했던 선교사는 우시[無錫]에서 창장[長江] 일대에 600~700명의 단양 교우들이 4곳의 교당 주위에 모여 살았는데, 다른 3백 명 정도는 성내(城內) 혹은 성 밖에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마샹보가 태어난 전장[鎭江]은 37명의 교우들이 살고 있고, 외부와의 접촉도 적다고 하였다. 史式徽(J. de la Serviere), 《江南傳敎史》 1卷, 上海譯文出版社, 1983, 253~254쪽. 이로 보아 당시 마샹보 집안 역시 천주교도로서 활동이 매우 소극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7) 馬相伯, <我的兒童時代與宇宙觀與家敎>, 朱維錚 主編, 《馬相伯集》, 上海 : 復旦大學出版社, 1996, 1135쪽. 이하 저자로서의 마샹보[馬相伯]는 생략함. 

 

8) 李天綱, <信仰與傳統 : 馬相伯的宗敎生涯>, 《馬相伯集》, 1228쪽. 리톈강[李天綱]의 글은 마샹보와 관련된 예수회 소장 자료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하 예수회 소장 자료는 리톈강의 글에서 인용했음을 밝힌다.

 

9) 당시 천주교를 매개로 집안 간 혼인관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마씨 집안의 장녀이자 마샹보의 큰누나 마젠수[馬建淑]가 시집간 곳이 천주교 세가 주씨(朱氏)였다. 주씨는 상하이[上海] 동쟈두[董家渡]에 모여 살았다. 마젠수의 아들 중 하나는 1926년 처음으로 임명된 6명의 중국 주교 중의 한명인 하이먼[海門] 주교 주카이민[朱開敏]이다. 또한 주카이민의 조카 주안성[朱安生] 역시 신부이다. 李天綱, 위의 글, 1233~1234쪽.

 

10) <我的兒童時代與宇宙觀與家敎>, 《馬相伯集》, 1135쪽.

11) <我的兒童時代與宇宙觀與家敎>, 《馬相伯集》, 1136쪽.

 

12) 李天綱, 위의 글, 1235쪽. 그러나 마샹보의 회고에 의하면 8세 때에 정식으로 사숙에서 전통교육을 받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我的幼年>, 《馬相伯集》, 1083쪽) 5세부터 8세까지는 정식 교육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 <經學與‘月亮’>, 《馬相伯集》, 1124쪽.

14) 마샹보는 14세 때 이미 학생이자 선생으로서 모든 학생의 국문과 경학은 자신이 가르쳤다고 했다. <我的幼年>, 《馬相伯集》, 1084쪽.

15) <我的幼年>, 《馬相伯集》, 1083~1084쪽.

16) 陸永玲, <站在兩個世界之間 : 馬相伯的敎育思想和實踐>, 《馬相伯集》, 1285쪽.

17) J. de la Serviere, 앞의 책(1), 179쪽.

18) 쉬후이 공학은 국문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과거에 응시하여 수재가 된 자도 여럿 있었다. 《馬相伯先生年譜》, 86쪽.

19) 陸永玲, 위의 글, 1285쪽. 11명 중 9명이 쉬후이 공학 출신이고, 두 명은 수도원 출신이었다(J. de la Serviere, 앞의 책(2), 97쪽).

20) 李天綱, 앞의 글, 1275쪽. 각주 53.

21) 《馬相伯先生年譜》, 264쪽.

22) 薛玉琴 · 劉正偉 著, 《馬相伯》, 石家庄 : 河北敎育出版社, 2003, 63~64쪽.

23) <獲得神學博士學位以後>, 《馬相伯集》, 1085쪽.

24) <獲得神學博士學位以後>, 《馬相伯集》, 1085쪽.

25) 薛玉琴 · 劉正偉, 위의 책, 66쪽에서 재인용.

26) <獲得神學博士學位以後>, 《馬相伯集》, 1085쪽.

27) 馬玉章, <懷念先祖父相伯公>, 朱維錚 等著, 《馬相伯傳略》, 上海 : 復旦大學出版社, 2005, 294~296쪽.

28) 李天綱, 위의 글, 1247쪽.

29) <獲得神學博士學位以後>, 《馬相伯集》, 1085쪽.

 

30) 朱維錚, <近代中國的歷史見證-百歲政治家馬相伯>, 《馬相伯集》, 1177~1178쪽. 특이한 것은 마샹보의 조선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의 말년 회고록인 《일일일담》(一日一談)과 그가 직접 쓴 두 개의 문건 정도에 불과하다(《일일일담》과 그의 문건은 모두 《마상백집》에 실려 있다). 당시 중국을 대표하여 조선에 파견된 고위관료이며 조선에서의 신분 또한 국왕 고문인데, 청조의 문서에는 그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당시 리훙장이 조선 문제 처리 과정의 상주문에서도 마젠충만 나올 뿐이며, 마샹보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리훙장이 청정부를 대표하여 조선에 파견한 정식고문은 바로 마젠충이라는 것이며, 리훙장이 마샹보를 지정하여 조선으로 보낸 것은 확실히 마젠충 대신이었기 때문이다. 마샹보는 마젠충 대신에 조선 국왕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다 임오군란의 정변 기간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我與高麗>, 《馬相伯集》, 1089~1091쪽. 31) <借款>, 《馬相伯集》, 1101~1102쪽.

 

32) 《馬相伯先生年譜》, 197~198쪽. 당시 마샹보는 동의를 표시했지만, 역학관을 상하이에 설치해 줄 것을 청정부에게 요구했고, 아울러 쉬자후이의 예수회 선교사를 초청해 역학관의 사무를 관리할 것을 요청했지만, 무술개혁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같은 책, 198쪽.

 

33) 寥梅, <馬相伯生平簡表>, 《馬相伯傳略》, 200~201쪽.

34) <政黨之必要及其責任>, 《馬相伯集》, 70~76쪽.

 

35) 마샹보는 공교를 만들려는 베이징 정부의 헌법 초안 즉 ‘천단초안’(天壇草案)에 반대하는 일련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공통된 주제는 인민은 신앙의 자유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글로 <《憲法草案》大二毛子問答錄>, <書《‘天壇草案’第十九條問答錄》後>, <書《請定儒敎爲國敎》後>, <保持《約法》上人民自由權> (모두 《마상백집》 수록) 등이 있다. 이러한 글은 모두 1906년에 발표되었는데, 그 해는 마샹보의 일생에서 가장 정론(政論)을 많이 쓰면서 활약한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36) <《尤其反對基督敎理由》書後>, 《馬相伯集》, 451~455쪽.

 

37) 잉롄즈는 만주인으로서 1888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1902년 톈진[天津]에서 <대공보(大公報)>를 창간하여 사회 개량을 주창하였다. 또한 ‘푸런사’[輔仁社]를 설립하여 마샹보 등과 함께 인재들을 영입하여 국학과 교회사를 연구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후에 푸런대학이 설립되었다. 잉롄즈 역시 마샹보처럼 경건한 천주교도이자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으로서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를 주장했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최병욱, <교황사절 코스탄티니의 중국 파견과 동서 문화의 소통>, 267~268쪽.

 

38) 李天綱, 앞의 글, 1252쪽. 그는 말년에 여전히 두 건의 작업으로 천주교 토착화에 공헌했다. 하나는 《성경》 전권을 번역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명 · 청 예수회 선교사의 중문저술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 번역은 계속해서 교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쉬자후이에 들어온 10여 년 동안의 간헐적인 개인적 작업은 1913년에 복음서를 강해한 《신사합편직강》(新史合編直講)의 출판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어서 그는 직접 《신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의 수기 원고는 1937년에 우빈(于斌) 주교의 비준을 얻었고, 《복음경》(福音經)(로마 監本 四聖史 對譯) 간행을 준비했지만, 1949년에 와서야 상무인서관에서 정식으로 출판하였다. 마샹보가 《복음경》에서 보여준 중국 고전 언어의 능력은 후배들보다 높았고, 후에 우징숑[吳經態] 등의 《성경》 번역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같은 글, 1268~1269쪽

 

39) <宗敎在良心>, 《馬相伯集》, 153쪽.

40) <錄北京一九一九年十一月十八日巡閱使光主敎致天津華鐸書幷按>, 《馬相伯集》, 357쪽.

41) <代擬《北京敎友上敎宗書》>, 《馬相伯集》, 360~363쪽.

 

42) 1920년 6월 1일, 게브리앙 주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중국 방문 보고서를 포교성에 제출했다. 1) 좀 더 중국적인 교회가 필요하다. 일부 감목 대리구를 중국인 사제단에 위임하고, 외국 공사관의 지원은 최소화해야 한다. 중국인 사제단을 외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며, 중국인 주교 선발에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 2) 사도직 방법, 교리서와 기도양식, 성경 구절 등을 통일해야 한다. 3) 소규모 감목 대리구를 더 많이 설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한 전국 시노드 개최와 교황 사절 임명이 절박하다고 강조했다. 클로드 쇠텐스 지음, 김정옥 옮김, 《20세기 중국 가톨릭 교회사》, 왜관 : 분도출판사, 2008, 118쪽.

 

43) <代擬《北京敎友上敎宗書》>, 《馬相伯集》, 360쪽.

44) <致英華>, 《馬相伯集》, 339쪽

45) <代擬《北京敎友上敎宗書》>, 《馬相伯集》, 360쪽.

46) <答問中國敎務>(殘稿), 《馬相伯集》, 352쪽.

47) 徐宗澤, 《中國天主敎傳敎史槪論》, 上海書店, 1990, 281쪽.

48) <致英華>, 《馬相伯集》, 345쪽.

49) <《敎宗本篤十五世通牒》譯文>, 《馬相伯集》, 388쪽. 

50) <序‘利先生行蹟’後>, 《馬相伯集》, 224쪽.

51) <代擬北京敎友上敎宗書》>, 《馬相伯集》, 362쪽.

52)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07, 668쪽.

53) 趙賓實, <讀《雷鳴遠神父傳》後的我感與回憶>, 《恒毅》 第14卷 第11期, 臺北 : 天主敎主徒會恒毅學社, 1965, 21~22쪽.

54) <致英華>, 《馬相伯集》, 294쪽.

55) <‘古文拾級’序>, 《馬相伯集》, 101쪽.

56) <學術傳敎>, 《馬相伯集》, 599쪽.

57) <致英華>, 《馬相伯集》, 339쪽.

58) <學術傳敎>, 《馬相伯集》, 600쪽.

59) <上敎宗求爲中國興學書>, 《馬相伯集》, 116쪽.

60) <代擬《北京敎友上敎宗書》>, 《馬相伯集》, 362쪽. 

61) <代擬《北京敎友上敎宗書》>, 《馬相伯集》, 362쪽.

62) <致英華>, 《馬相伯集》, 343쪽.

63) <書《利先生行蹟》後>, 《馬相伯集》, 222~225쪽.

64) <致英華>, 《馬相伯集》, 339쪽.

65) <學術傳敎>, 《馬相伯集》, 599쪽.

66) <學術傳敎>, 《馬相伯集》, 600쪽.

67) <致英貞淑>, 《馬相伯集》, 364쪽.

 

[교회사 연구 제48집, 2016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병욱(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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