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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황 사절 코스탄티니의 중국 파견과 동서 문화의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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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8 ㅣ No.846

교황 사절 코스탄티니의 중국 파견과 동서 문화의 소통*

 

 

1. 머리말

 

21세기에 세계는 여전히 종교 사이의 충돌, 문화 사이의 충돌로 점철되어 있다. 인류는 타자를 이해하며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는 없는 것인가. 타문화와 자문화에 대한 대화와 소통은 오늘날 바로 ‘여기’에서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특히 다문화 사회가 급속히 진행되는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는 바로 ‘나’와 ‘타자’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이다. 이 논문은 중국에 파견된 교황 사절 코스탄티니(Celso Costantini, 剛恒毅, 1876~1958)의 중국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중국에서 여전히 ‘他者’이며, ‘洋敎’로 간주되고 있던 천주교를 중국 사회와 어떻게 소통하며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천주교사와 문화교류사에서 코스탄티니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922년 중국의 첫 교황 사절로서 파견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교회에 대한 프랑스 선교 보호권[保敎權]1)의 종결에 대한 상징이었고, 20세기 중국 천주교 토착화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코스탄티니는 중국에 주재하던 기간에 중국 천주교와 제국주의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를 제창했고, 서양 가톨릭 문화와 중국 전통문화의 소통을 촉진하였다.

 

현재까지 코스탄티니에 대한 연구는 중국과 교황청과의 외교관계의 역사에서 몇몇 다루고 있으며, 교황청을 대표하는 신분으로서 중국에 파견된 초대 교황 사절이라는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다.2) 또한 프랑스 보교권을 배제시키고,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를 위해 활동한 코스탄티니 개인에 대한 연구에 치중되어 있다.3) 특히 국내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인물의 소개도 전무한 상황이다.

 

이렇게 코스탄티니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개인 인물에 치중한 면이 있으며, 교황청과의 외교관계 역사 속에서 초대 교황 사절의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인 활동도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義和團 사건 이후의 천주교회 내부의 자성론, 5.4 운동 이래 대두된 민족주의와 ‘非基督敎運動’, 교황 베네딕도 15세와 비오 11세 시기 교황청의 선교 정책 변화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코스탄티니의 회고록 및 교회 내부 인사의 기록과 천주교 관련 잡지 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그의 개인적인 측면을 심도 있게 고찰하면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그에게 미쳤던 영향 등 좀 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그가 진행했던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노력, 그리고 서양 천주교 문화와 중국 전통문화의 소통 방법과 실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논문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서술하고자 한다.4)

 

첫째, 코스탄티니의 간단한 이력과 함께 그가 중국에 파견될 당시 교황청의 중국 천주교에 대한 정책적 변화 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또한 당시 중국 천주교가 처한 상황과 코스탄티니가 이를 어떻게 인지하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둘째, 코스탄티니가 파견될 당시 중국의 정치 · 사회적 상황과 더불어 중국 천주교 내부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중국은 5.4 운동의 발발과 더불어 국민혁명 이래 중국 내 민족주의가 대두되던 시기였다. 특히 1920년대에 발생한 비기독교 운동과 이로 인해 고양된 민족주의는 중국 천주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교회 내부 인사들의 중국 천주교의 개혁과 토착화 운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셋째, 코스탄티니의 중국 천주교 토착화 방법과 실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코스탄티니는 明淸 시대 예수회 선교사들의 ‘補儒論的’ 선교 방식을 모델로 삼아 이를 승계하고자 했다. 그는 ‘과학’을 맹신했던 1920년대에 오히려 儒家로 대표되는 중국 전통문화의 유교적 가치가 중국 내 천주교 전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어떤 민족의 예술이라도 천주교 사상을 표현할 수 있으며, 더욱이 동방 예술은 천주교의 이념을 표현하는 데 아주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4장에서는 중국 천주교회의 토착화 방법의 하나로써 중국 예술과 건축이 어떻게 천주교에 도입되었는지 몇몇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2. 초대 중국 교황 사절의 파견

 

1919년 11월 30일,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선교 회칙 <막시뭄 일룻>(Maximun illud, 온 세상에 전파된 가톨릭 신앙에 관하여)을 선포했다. <막시뭄 일룻>에서 지적하기를, 외국인 선교사는 현지인 사제, 인민과 연계하여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으며, 선교 중에 현지의 문화와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고 했다. 동시에 회칙은 이국에서 하느님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부모 나라의 이익과 영광을 교회의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하여 당시 교회 중의 식민주의 경향을 반대했다.5) 이 회칙은 세계 교회에 반포한 것이지만, 얘기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주로 중국 교회에 관한 것이다.

 

<막시뭄 일룻>은 이미 교황청에서 일련의 경험을 겪은 후에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천주교 내부의 개혁적 신자인 英斂之와 馬相伯 등이 중국 천주교회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고등 교육의 필요에 따른 천주교 대학을 중국에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한 건의문,6) 그리고 중국 천주교회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판하였던 중국 내의 외국인 선교사 뱅상 레브(Vincent Lebbe, 雷鳴遠)와 코타(A. Cotta, 湯作霖) 신부의 일련의 보고서,7) 또한 1917~1918년에 교황청이 중국과 직접적 외교관계를 맺고자 교황 사절을 파견하려고 했지만, 프랑스의 방해로 실패한 경험8) 등이 그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은 선교 단체가 선교구를 기반으로 한다는 문제, 현지인 사제의 배양 문제, 선교사와 제국주의의 관계 문제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막시뭄 일룻>에서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중국 천주교의 당면 과제를 해결해야 할 첫 번째 순서는 바로 교황 사절을 중국에 파견하는 것이다.

 

코스탄티니는 1876년 이탈리아 프리울리(Friuli) 태생으로 1922년 교황 비오 11세가 그를 중국 교황 사절로 임명했는데, 그는 교황 사절 신분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주재한 최초의 인물이다. 당시 포교성성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그는 16세에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1897년 로마로 가서 1899년까지 대학에서 공부했다. 1899년 12월 3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가톨릭 예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저서 《가톨릭 예술 강의》가 이탈리아 수도원의 교과 과정으로 채택될 만큼 그는 가톨릭 예술 방면에서 매우 뛰어났다.9)

 

그는 청년기에 교회 개혁과 관련하여 로스미니(A. Rosmini)의 자유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자유, 政 · 敎 관계에 대한 자유사상이었다. 그는 교회와 이탈리아 국가의 화해가 가능하며, 신앙과 현대 문화가 대면해야 한다고 믿었다. 훗날 ‘근대주의’라는 명목으로 단죄된 사조에 한때는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고, 신앙과 예술의 접점에도 조예가 깊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국 이탈리아에 봉사했다. 1920년 피우마(Fiuma) 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된 그는 이탈리아가 영향권을 주장하던 이스트리아(Istria)에서 화해를 주선했는데, 이때 교황청 국무원장이 그를 눈여겨보았던 것이다.10)

 

사실 그가 중국 교황 사절로 임명되기 전에, 이미 교황청 내부에서 다른 사람들이 교황 사절로 물망에 올랐지만, 그들은 교황청의 전문적 외교관으로 알려진 사람들로서 프랑스 정부가 각각 친독일, 친오스트리아 성향이 있다는 빌미로 그들을 중국 교황 사절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다.11) 당시 명목상으로는 프랑스 보교권이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12) 실질적으로 프랑스는 계속해서 중국에서 프랑스의 천주교 보호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황 사절의 파견은 프랑스 보교권의 폐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프랑스가 반대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이탈리아 사람이면서 외교가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코스탄티니가 교황 사절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 학자 시모나토(R. Simonato)에 의하면 그의 임명 배경이 예술 분야에 대한 문예평론가 우고 오예티(Ugo Ojetti)의 조언과 가스파리(Pietro Gasparri) 추기경이 코스탄티니가 피우마 보좌 주교로 있었을 때의 외교력에 대한 호평, 그리고 코스탄티니의 과단성 있는 성격 등이 선발에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았다.13)

 

프랑스의 반대에 직면했던 교황청은 코스탄티니의 중국 교황 사절 파견을 비밀스럽게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청은 <막시뭄 일룻> 회칙에 의거하여 코스탄티니에게 교황 사절 부임 후 집행할 방침에 대해 정해주었는데, 그는 이러한 방침을 5가지로 기록하였다.

 

① 교황 사절은 순수한 종교적 성질의 것이다. 이로 인해 어떠한 정치적 색채를 띠어서는 안 된다.

 

② 중국 관리나 외교사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과 우호를 표시하고, 절대로 자주를 지키며 열강의 정치 이익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교황에 속하며 교황을 대표할 뿐이다.

 

③ 교황 사절은 정치에 간섭하지 않으며, 간혹 정치가 종교의 범위로 들어올 때는 우연적이거나 잠시 잠깐이어야 한다.

 

④ 교황 사절은 중국에 대해 조금도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으며, 열강의 정책과는 관련이 없다. 교황은 중국에 매우 관심이 많으며 중국이 굳건히 흥기하기를 바라며 중국은 중국인의 것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⑤ 선교 사업은 단지 복무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지극히 공적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보면, 교회의 현지인이 주교가 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선교의 초기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많을 수밖에 없지만, 일단 현지에 교계제가 건립되면 외국인 선교사는 자기 목적이 이미 달성된 것을 알고, 즉시 여장을 꾸릴 준비를 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주님의 신천지를 새롭게 개척해야 한다.14)

 

이러한 방침은 코스탄티니가 교황 사절을 맡을 때의 원칙이 되었다. 코스탄티니는 1922년 11월에 홍콩에 도착, 상해를 경유하여 북경에 도착했다.15) 코스탄티니는 중국에 도착한 후 외국 공사관 구역 밖에 자신의 공관을 세워 그곳에서 생활했다. 그 이유는 공사관 지역이 치외법권을 향유하는 외국 참호이기 때문이고, 이 지역은 중국인에게 치욕의 장소이며, 원한을 야기하는 곳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없어져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인의 지역에 거주할 것이며, 중국인들도 자신의 관점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6) 코스탄티니는 이전의 중국에서의 선교 사업이 강권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은 초기 교회 사도들의 선교 방식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인 사제들이 이미 성장했기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은 뒤로 물러날 시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손님이지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 대다수 서양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을 반식민지로 보았다. 일단 중국에 온 후에는 중국의 명승고적을 둘러보지도 않고, 또한 중국의 문물제도를 공부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원로 선교사들의 전통적 편견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직접적으로 접촉한 인물과 환경이 단지 궁벽한 향촌의 우매한 촌부와 각종 비위생적인 환경만을 보았다. 그들은 이미 복잡한 색안경을 쓰고 중국에 대해 어떠한 호감도 가지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스스로 우수 민족이라 여기고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떻게 천주교를 중국에 전파하겠는가? 단지 천주교를 지킬 수 있을 뿐이며, 본당에 앉아 있을 뿐이고, 몇몇 가난한 사람들이 교우로 증가할 수 있을 뿐이다.17) 또한 당시 중국의 한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중국인 수도생의 일상을 살펴보자.

 

내가 작은 수도원에 있을 적에(1923년에서 29년 사이) 우리들이 받은 교육은 비록 이미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수학에서 보면 이 6년의 기간에 우리들은 시종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과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과목은 모두 라틴어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매번 수업을 할 때면 1에서 수십만, 수천만까지 세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거나 틀리면, “너는 아직 더하기도 못하느냐”라고 꾸짖었다. 이것으로 인해 다음에 또 하고 하기를 6년이나 더했다. 우리들은 수도원에서 매번 원장을 보면, 반드시 허리를 굽혀 절을 해야만 했다. 낮에 반드시 “Bona clies”(좋은 하루)라고 말해야 했고, 밤에는 반드시 “Bona nox”(좋은 밤)을 말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례하다고 질책받아야 했고, 혹은 너는 “멍청한 놈”이라며 혼나야 했다. …당시 중국어 학습은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에게 사상이 불량하다는 죄명이 씌워질 것이다. 기괴한 것은 당신이 만약 영어나 프랑스어를 배우기를 원한다면 원장은 허락할 것이다. 어떤 교구의 수도원은 중국말을 하는 것조차도 불허하였다. 이유는 프랑스어 혹은 영어를 학습시키려고 했는데, 이로 인해 수사들의 서양어 실력은 훌륭했지만 중문은 어떠했겠는가! 기껏해야 소학교 수준이었다. 나는 1935년 북경의 중앙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에 우연히 永平府의 두 명의 젊은 수도사를 보았다. 그들은 유창한 프랑스어를 쓰면서 서로 얘기를 했는데, 나는 당시 매우 놀라웠다! 후에서야 이것이 그들 수도원의 규정이라는 것을 알았다.18)

 

이것으로 보아 1920~30년대 중국 천주교의 중국인 학생이 받은 사제 양성 교육이 당시에 어떠했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중국 천주교는 프랑스 선교 보호권의 비호 아래 많은 특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외국인 선교사는 기득 권익을 위해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교회 설립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교회에는 단 한 명의 중국인 주교도 없었다. 코스탄티니는 말하기를, “사도들이 그리스도 교회를 건립하고 현지인 주교를 세웠다. 그러면 이 교회는 외국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중국에서 우리들은 이미 3세기가 지났지만, 전체 교회의 조직은 모두 외국인이 맡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50명의 주교가 중국 각지에 있는데, 모두 외국인이며, 모두 수도회 수사이다. 그리스도의 뜻이 이러한 교회인가? 중국인은 천주교회가 수입품이고 항상 외국 정치의 이익과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설마 중국인의 착오란 말인가?”19)라면서 당시 중국 천주교가 각종 수도회에 의해 외국 교회로 군림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코스탄티니가 중국에 온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중국 공의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1924년 5월 15일에 상해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회의에 참가한 사람은 42명의 주교, 5명의 감목, 13곳의 선교구 대표 등을 포함하여 108명이었다. 그중에 두 명의 중국인 감목이 포함되어 있었다.20) 이 회의는 개최 자체로 상징적인 의의를 지는 것이며, 교황 사절이 중국 천주교의 내부 사무를 관리할 권리가 있음을 나타낸다. 코스탄티니는 “지금까지의 회의가 외부의 압력과 간섭을 받아 종교 사무를 관장하는 수장이 진심껏 토론을 하지 못했다. 나는 중국 정부와 각국 공사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들이 절대적으로 회의의 자유를 존중해 준 것에 경의를 표한다. 지금껏 아직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21)고 하였다. 그는 회의를 진행하는 중에 어떠한 요청도 모두 거절했으며, 교회 병원에서 거행된 교우들이 주관한 연회에 전체 주교와 선교사들과 함께 참석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상해 전국 공의회 이후 교황 사절의 중국 천주교회 관리는 확정되었다.22)

 

코스탄티니가 중국에 온 또 다른 임무는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이다. 중국인 사제에서 주교를 맡을 인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외국인 선교사가 중국인 주교의 권한 아래 복종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해결 방안은 중국인 사제가 관리하는 대목구를 설립한 후에 주교를 임명하여 관리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코스탄티니는 비교적 개방적인 서양인 주교와 이 문제를 협의하기도 했으며, 그들은 원칙적으로 교황청의 정책을 찬성했다. 그러나 중국인 사제가 관할하는 대목구를 성립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코스탄티니는 새로운 중국인 사제가 관할하는 독립 관할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23)

 

1926년 3월 30일, 교황청에서는 코스탄티니에게 로마에서 중국 주교의 축성을 할 것이라고 통지했다.24) 1926년 9월 10일, 코스탄티니는 6명의 중국 주교를 데리고 상해를 떠나 10월 16일 이탈리아 나폴리에 도착하였고, 이탈리아 정부가 마련해 준 전용열차를 타고 로마에 도착했다. 중국 주교의 서품식은 10월 28일에 진행되었다. 주교 서품식에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국 학생들도 참여했으며, 당시 중국에서 사실상 추방되었던 뱅상 레브도 참가하였다. 교황 비오 11세가 이 예식을 집전하였고 직접 강론까지 했으며, 코스탄티니는 이 예식의 공동집전자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인 주교의 서품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일로 평가받고 있다.25) 중국인 주교의 서품 이외에 코스탄티니는 중국인 수도회(주님 제자회)를 성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창설 목적은 교회의 중국 토착화를 이룩하여 지식인들에게 신앙을 전파할 자질을 갖춘 중국인 사제단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26)

 

코스탄티니가 중국에 온 또 다른 임무는 북경에 천주교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북경 천주교 대학에 대한 창립 경비를 원조할 것을 선포하고, 베네딕도회 수사를 중국에 파견해 학교를 창립하게 했다. 베네딕도회를 요청한 것은 베네딕도회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으며 청렴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그리고 이전에 중국에 선교구를 가지고 있지 않아 북경 라자로회의 저항을 감소시키기 위해서이다. 코스탄티니는 비록 직접적으로 천주교 대학의 설립 준비 일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지지자였다. 천주교 대학의 설립은 조심스럽게 실시되었는데, 그것은 북경에 선교구를 가지고 있던 라자로회와 프랑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천주교 대학의 성립 준비가 끝난 즈음에야 비로소 라자로회 주교와 프랑스 공사에게 사실을 알렸다.27)

 

1925년 7월, 북경 천주교 대학이 성립 절차에 따라 먼저 예과를 설립하여 이름을 輔仁社로 했으며, 1927년 7월 29일에 교육부가 정식으로 인가하여 교명을 輔仁大學으로 개명했다. 9월 26일 대학이 개학했는데, 당시는 단지 文學院에 4개 科가 있었다. 당시 코스탄티니는 천주교 대학의 설립을 맞이하여 致詞를 요청받아 연설을 했다. 그는 “우리들은 진지한 마음으로 중국 인민을 존중하며 그들을 상처 내는 어떠한 행동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능력 있고 청렴한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며,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기를 희망한다. 여러분 중에는 정말 애국적인 사람들이 있으며,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국가에 복무하고, 국가에 공헌할 수 있다. 대학의 학생들 중에는 서로 다른 신앙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신앙을 존중해주며, 우애 있게 지내기를 희망한다”28)라고 하였다. 당시는 국민혁명 시기였고, 민족주의가 대두하던 중국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강연은 그리스도 신앙이 애국에 배척되지 않는다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보인대학의 설립에 대한 다른 수도회의 대항적 행동은 설립 과정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라자로회 소속 프랑스인 파브레그(Fabregues)는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프랑스 국적의 도미니크회 선교사들에게 일명 ‘도미니크’ 대학을 세워 프랑스 정부에 소속되어 관리하는 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이 ‘도미니크’ 학교는 1928년 9월에 순수 프랑스 예식에 따라 개막되었고 프랑스 대사관에서 대표가 파견되어 개학식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비기독교 운동의 물결 속에서 학생들의 퇴학 운동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폐교되었다. 천주교 대학이 제국주의 침략의 어용적 도구로 여겨져 보인대학 역시 이러한 학생 운동의 표적이 되었지만, 보인대학은 1928년에 교황이 발표한 8.1 通電29)의 내용을 대학에 걸어놓고, 국민정부를 지지하며 국민정부에 의한 중국 통일을 축하하고, 보인대학이 문화 침략과 제국주의의 도구가 결코 아님을 역설하였다.30)

 

1928년 12월, 동북군벌 張學良이 蔣介石의 국민정부에 복종할 것을 선언하였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영국과 미국 등의 열강도 사실상 국민정부를 승인하였다. 1929년 1월에 와서 이미 12개 국가가 국민정부와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였다. 코스탄티니는 1월에 장개석을 접견하고 외교부장 王正廷과 政敎協約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번에 협의할 조약은 바로 중국에서 프랑스 보교권의 폐지에 대한 조약이며, 교황청과 중국이 직접 체결하는 것이다.31) 코스탄티니와 왕정정은 아래와 같은 기본적인 회담의 기초를 세웠다.

 

첫째, 신앙의 자유를 보증한다. 둘째, 천주교회가 재산의 권리를 가질 것을 승인한다. 새로운 규정에 따라 교회 재산을 처리할 것이며, 새로운 규정은 반드시 기왕으로 소급하지 않는다. 셋째, 천주교회가 학교를 창립할 권리가 있음을 승인한다. 그러나 정부의 관련된 법령을 준수해야 한다. 각각의 신학원, 철학원 혹은 크고 작은 수도원의 교과 과정은 정부가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공질서와 위생에 관련된 문제는 예외이다.32)

 

이 회담은 교황청이 파견한 교황 사절과 중국 국민정부가 서로 프랑스 보교권을 폐지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큰 진척은 없었다. 이 또한 프랑스가 국민정부 외교부에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33) 따라서 이전 여러 차례 있었던 외교관계의 수립과 상호 외교사절의 파견 계획은 또다시 보류되고 말았다. 중국과 교황청의 조약 체결과 외교관계의 수립에 대한 코스탄티니의 의지는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중국 교황 사절의 직을 그만둘 때까지 성사되지 못했다. 중국과 교황청과의 외교관계는 1942년에 가서야 비로소 수립되었다.

 

교황 사절로서 코스탄티니의 중국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 중국 천주교를 프랑스 보교권에서 배제시켜 직접적으로 교황청 관할 아래 두려고 하였으며, 둘째로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사업을 진행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활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보다 넓게는 당시 교황청의 선교 정책의 변화에 따른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 중국의 정치적 상황과 천주교 내부의 변화 속에서 진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중국 천주교 내부의 변화

 

코스탄티니가 중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5.4 운동이 지나고, 1922년에 발생한 非基督敎運動이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비기독교 운동이란 1922년에서 1927년까지 발생한 전국적 범위의 애국민족 운동으로, 종교를 이용하여 문화 침략을 진행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목표로 진행된 운동이다. 이 운동의 정치적 배경에는 민족주의의 대두가 있다.

 

20세기에 이르러 민족주의 조류가 중국 천주교회에 미칠 때에도 천주교회의 서양 선교사들은 여전히 이전 시대의 제국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신자들 사이에서는 점차 민족주의의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19년 5.4 운동 시기 天津의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구국단’을 성립하여 교회 내부의 중국 신자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조하자고 호소했다. 아울러 프랑스가 보교권을 이용하여 중국을 침해하는 사실을 지적하기까지 했다. 이에 상해의 천주교 출판 잡지에서 천진의 천주교 신자들의 애국적 행위에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 고위 인사의 압력으로 해당 천주교 잡지는 노동자 파업과 학생 운동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고, 천주교 신자들이 이에 가담하면 처벌받을 것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당시 교회 스스로 중국의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에 출현한 ‘비기독교 운동’은 바로 그에 대한 상대편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34)

 

비기독교 운동이 발생하게 된 직접적 도화선은 世界基督敎學生同盟이 1922년 4월 4일에 북경 淸華大學에서 개최한 제11회 대회가 발단이 되었다. 중국 내에 비기독교 운동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해 2월 YMCA의 기관지인 《靑年進步》가 특별호를 내어 선전하고 3월 말에는 기독교 잡지인 《生命月刊》이 역시 특별호를 내어 선전한 것에서 비롯된다.35) 이러한 소식은 우선 상해와 북경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곧이어 몇몇 기독교 반대 조직이 잇따라 성립되어 비기독교 운동이 발발하였다.

 

비기독교 운동은 광범위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각지에서 반종교동맹이 조직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3월 하순에서 4월 하순까지 단지 20여 일 동안 전국에서 반기독교 및 반종교동맹이 50여 개가 성립되었고, 지식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단체, 예를 들어 中華心理學會, 工人周刊社, 共進社, 唐山工學界 등도 잇따라 반종교 단체를 성립하였다. 세계기독교학생동맹의 개최와 함께 전국적으로 발생했던 비기독교 운동은 기독교학생동맹이 폐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5월에 들어서면서 정체되었고, 각지의 간행물에서도 점차 비기독교 운동에 대한 비판 논쟁은 줄어들었다.

 

1924년 국공합작의 성립 이후 국민혁명이 고조되자 비기독교 운동이 재차 발생하였다. 비기독교 운동이 1922년에 주로 종교가 과학을 위배한 것에 반대했다면, 1924년에 와서는 운동의 목적이 교회교육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각지 학생들은 적극적인 행동을 조직하여 교육권 회수를 요구하였다. 中華敎育改進社와 全國敎育聯合會 및 各省 敎育會 등은 잇따라 결의안을 통과시켜 교회학교 회수를 요구하였다. 이른바 비기독교 운동이 이론적 비판에서 정치적 행동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1925년 5.30 운동 이후 중국 내 민족주의 정서는 더욱 고조되어 전국 청년의 기독교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비기독교 운동은 전 민족의 제국주의 침략의 투쟁으로 융합되어 반제 투쟁의 주요한 부분이 되었다. 비기독교 운동은 점차 교육권 회수 투쟁으로 전개되었고, 전국 각지 교회 학교 학생은 보편적인 退學風潮가 폭발하였다. 운동의 추진 아래 북경정부는 ‘북경정부 교육부 포고 제16호령’을 반포하여 외국인이 중국에서 설립한 학교는 반드시 중국 정부에 허가를 받도록 하는 안건을 규정하고, 교육과 관련된 중국 법령을 준수할 것을 규정하였다. 1926년 북벌 전쟁은 비기독교 운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1927년 蔣介石의 ‘4.12 정변’ 이후 국민당 정부의 내외정책이 변화되어 비기독교 운동은 점차 소멸되었다.

 

1920년대의 비기독교 운동은 단순한 기독교 반대 운동이라기보다는 당시 고조되어 있던 反帝, 反軍閥 그리고 민족주의 대두의 한 형태로 보이는 전형적인 운동이었다. 이러한 비기독교 운동은 중국의 그리스도 교도로 하여금 충격을 받게 하였고, 중국의 그리스도교 역시 비기독교 운동의 충격을 통해 중국에서의 선교 활동 방식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교의 토착화 운동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5.4 운동과 비기독교 운동이 발발하기 이전에 이미 천주교 내부에서 몇몇 중국인 신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 내부의 개혁 필요성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를 했던 이들이 있다. 바로 英斂之와 馬相伯 등이다. 그들은 먼저, 중국 천주교회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들은 중국 천주교회가 중국 고등 교육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서 교황에게 천주교 대학의 설립을 요청하였다. 영렴지와 마상백은 1912년에 “북경에 대해 논하자면, 우리 천주교만이 오로지 대학과 중등 교육 기관이 없으며, 단지 프랑스어 학교가 있으며 학업을 마친 후에는 프랑스인에게 의지하여 생계를 도모할 수 있을 뿐이다. 淸朝 시기에 京師大學堂을 우리 선교사에게 위탁했는데, 이를 거절하여 개신교가 이를 대체했다”36)라며 통탄하였다.

 

20세기 들어서서 중국의 신청년들은 지적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선교사들은 중국 젊은이들을 매료시킨 지적 발전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감지했는가? 한마디로 답할 수는 없다. 북경의 일부 교회 책임자들은 대중적 개종이 기대되던 그 시기에도 누구에게나 개방되는 근대 교육 기관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다른 교회 책임자들은 교육 사업에 헌신할 방법들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학교 조직에 구체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하고 교황 비오 11세가 엘리트 양성을 위해 학교 설립을 장려한 다음, 선교지들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37)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중국 천주교 내부 인사들이 교황청에 천주교 대학의 설립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청에서 직접적인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다. 영렴지를 비롯한 교회 인사들은 이와는 별도로 그 해에 ‘輔仁社’를 설립하여 敎中 자제 20여 명을 모집하여 국학을 연구하게 하였다. 마상백, 陳垣 등이 북경에 와서 함께 학생들을 지도했다. 보인사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교회 내부 인사가 국학과 교회사를 연구하는 서막을 열었다. 이를 바탕으로 후에 보인대학이 설립했던 것이다.38)

 

영렴지(요셉)는 경건한 천주교도이며,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이었다. 1888년에 천주교 신자가 된 그는 1902년 천진에서 <大公報>를 창간하여 사회 개량을 주창하였다. 그가 당시 중국 천주교에 대해 가장 불만을 느낀 것은 하느님의 신민으로서 외국인 선교사는 자신의 국가에 대해 애국을 얘기할 수 있고, 중국 신부와 교우는 오히려 애국을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렴지는 1917년 《勸學罪言》에서, 이전에 벨기에가 독일에 의해 파괴된 후 벨기에의 추기경 주교가 조국을 사랑하는 글을 발표하여 국민을 독려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선교사는 애국을 제기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천주교의 도리는 중국인 신자가 외국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진실로 해답을 구하려는 자는 없다고 통탄했다.39)

 

마상백(빈첸시오)은 집안 대대로 천주교 신자 집안 출신이다. 1862년, 22살 되던 해에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나 14년 후 예수회를 떠났다.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하였고, 고베 주재 영사와 나가사키 영사를 지냈다. 중국으로 건너와 이홍장의 막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1898년에 교회로 다시 돌아갔다.40) 이로 인해 그는 교회 내부에서의 중국과 서양의 차이에 대해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마상백은 보교권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맺어 프랑스 보교권을 폐지해야 한다고 일찍부터 주장했다. 그는 코스탄티니가 외교적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에 교황 사절로 왔지만, 매우 기뻐하여, 이미 81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코스탄티니의 활동을 찬양하고, 그가 어떤 정치적인 공세를 벗어날 수 있도록 그의 공관 건립에 대한 천주교 교우들의 모금을 추진하기도 하였다.41)

 

또한 마상백은 현지인 사제가 그곳 교회를 관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서양 선교사 10명 중에 한두 명은 중국말을 하지 못하고, 문자도 알지 못한다고 개탄했다. 중국 문화를 멸시하는 서방 선교사에게 배운 중국인 사제들은 중문 수준도 높지 않고, 라틴어 수준도 낮은 상태인데, 그들이 어떻게 중국인을 계도하고 중국 천주교 업무를 할 수 있겠느냐며 비판하였다.42) 영렴지 역시 이를 비판하여 말하기를, “현지인 사제가 그곳 문자를 모르는데, 어찌 현지인을 대할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 현지 사회와 단절하고 우수한 집단과 벽을 쌓을 따름이다”43)라고 중국인 사제들의 서양화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영렴지와 마상백 등 중국 천주교 인사가 중국 천주교의 상황에 대해 비판하고 있을 때, 중국에 온 대부분의 서양인 선교사가 그렇지는 않았다. 그래도 개별적으로 서양 선교사가 천주교회의 행태에 대해 비판을 하고 반성을 하였다. 벨기에 국적의 라자로회 소속 선교사 뱅상 레브가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뱅상 레브는 중국인 신자들 역시 유럽과 아메리카 신자들과 ‘똑같은 양상’의 애국자가 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서양 선교사들은 유럽과 아메리카 사제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뱅상 레브는 진정한 애국심이 여러 유럽 교회에서 환영받을 수 있고 또 환영받고 있는 것이라면, 그 또한 중국 교회에도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이야말로 가톨릭이 중국인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대중들을 교회의 품 안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필수적인 인간 조건의 하나라고 주장했다.44) 레브 신부는 중국인 사제단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모든 선교사가 어느 국가에 가든지 그 나라 사람이 되어 동서를 나누지 않고, 종족을 나누지 않고, 각처에 복음을 전해야 하며, 모두 현지 사람이 해당 교회를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에서의 선교 활동 중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레브 신부가 ‘老西開’ 사건 중에 프랑스인에게 공개 대항한 것이었다.45) 노서개 사건은 결코 종교 사무에 속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로 인해 촉발된 것은 오히려 천주교 내부의 불일치였다. 강제로 천진을 떠나게 된 레브 신부는 그의 친구 코타 신부와 지속적으로 중국 교회 내의 서양 선교사들의 잘못된 인식과 행태에 대해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코타 신부는 중국 내의 교회의 불공정에 대해 교황청에 진정서를 제출함으로써 진정한 중국적인 교회 설립에 관한 보다 광범위하고 신중한 문제를 이끌어냈다. 후에 그것은 1919년에 발표된 선교사에 관한 유명한 회칙인 <막시뭄 일룻>의 초고에 결정적인 원천을 제공해 주었다.46)

 

노서개 사건을 빌미로 중국에서 강제 추방되다시피 했던 뱅상 레브는 유럽에서 중국 유학생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했으며, 교황청을 방문하여 중국인 주교단의 적격자로서 중국인 사제를 추천하였고, 그중 3명이 주교 서품을 받았다. 1927년 중국인으로 귀화하여 중국에 들어온 뱅상 레브는 서양 선교사들의 거부 운동에 위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했을 때부터 뱅상 레브의 선교 활동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코스탄티니는 중국 내의 대학생들을 위한 ‘가톨릭 대학 연합회’를 발족하여 레브 신부를 주임 신부로 임명하여 그의 중국 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장시켜 주었다. 이후 레브 신부는 코스탄티니의 지지를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서 수도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가톨릭 운동을 전개하고 나아가 중국 민족의 해방과 혁신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47)

 

코스탄티니는 1920년대에 발발한 비기독교 운동의 과정에 교황청을 대표하는 신분으로 중국에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리스도교 반대 운동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이나 지지를 표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은 교황 사절이 정치적 색채를 띠어서는 안 된다는 <막시뭄 일룻> 회칙 이후 교황청의 정책적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에서 발생한 민족주의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의 대목구장들에게 서신을 보내길, 사제들이 어떠한 정치적 색채를 띠어서는 안 되고, 신문에 정치적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중국인의 애국심을 존중해 주고, 그들의 합법적 정부를 존중해 줄 것을 요청했다.48) 코스탄티니는 비기독교 운동의 과격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그 흐름 속에 나타난 중국 민족주의의 조류를 읽어내었다. 또한 영렴지나 마상백과 같은 중국 천주교인 및 뱅상 레브 등의 개혁적 외국인 선교사들의 당시 중국 천주교에 대한 비판과 중국 천주교 토착화 운동의 흐름을 함께 읽어내어 그의 교황 사절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였다.

 

 

4.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방법과 실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로 대표되는 예수회 선교사는 천주교를 매개로 중국의 사회, 문화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결코 天主를 중국 사회와 대립시키려 하지 않았고, 유학과 그리스도 교의의 소통을 꾀하려고 하였다. 아울러 근대 과학의 인문지식을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례논쟁’ 이후 중국 문화와 서양 문화 사이의 소통이 단절되었고,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 방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코스탄티니는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국가에서 선교할 때에는 그 지역의 문화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는 것이 중국 · 일본 · 인도에 가서 선교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중국, 일본 그리고 인도에서 선교사는 문명국의 민족들 틈에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높은 문화적 수준과 사상을 가진 민족이다. 선교사는 당연히 해당 지역의 문화를 존중해야 하며, 깊이 연구해야 한다. 더욱이 자기의 민족 우월감을 나타내서는 안 되며, 해당 지역 거주민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49)고 하였다.

 

또한 코스탄티니는 ‘신앙’과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했다. 각 민족의 전통문화는 모두 천주교 신앙의 기본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선교 방식에서 코스탄티니의 견해는 마테오 리치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원래 셈 족에서 기원했는데, 후에 그리스 철학 언어를 흡수하고 자신의 신학사상을 표현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교가 중국, 일본 그리고 인도에 온 이후 마찬가지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천주교 사상과 중국 전통의 유가사상에는 소통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했다. 천주교가 중국인을 대면할 때, 서양의 이론과 형식을 적용해서는 안 되며, 중국 철학의 형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결코 중국 사상을 ‘유럽화’하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중국 사상을 ‘그리스도화’하려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0) 코스탄티니의 입장에서 볼 때, 단지 종교는 인류의 관심과 박애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을 구현하면 되지, 종교적 교의와 규율에 얽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코스탄티니가 동서 문화의 소통에서 큰 공헌을 한 것은 중국 예술과 건축을 천주교회 내로 끌어들이려고 한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 탐구에 힘썼으며,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후 조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으며, 가톨릭 예술에 대해서는 뛰어난 연구 성과가 있다. 그의 저서 《가톨릭 예술 강의》는 이탈리아 각 수도원에 의해 교과 과정으로 채택되었으며, 그가 펴낸 《예술연구》라는 저서는 가톨릭 예술의 기원 역사를 상세히 기술했으며, 출판된 후에 각처에서 유행하여 사람들이 앞다투어 구매하였다. 1910년 《십자가와 예술》이 완성된 후에 인구에 회자되어 유럽에서 예술 대가의 칭호를 얻었다.51)

 

코스탄티니가 중국에 왔을 때 중국 주교가 한 명도 없었는데, 마찬가지로 당시 교회에는 중국 예술과 건축물이 없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당에서 중국식의 성상, 중국식의 제사 무대, 중국식의 성체, 심지어 중국 건축의 성당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두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심지어 감히 중국식의 성상을 성당 안에 거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코스탄티니가 중국에 와서 느낀 것은 교회가 중국 예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큰 착오라고 생각했다. 그는 교회가 중국 예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코스탄티니는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구비한 국가 안에서 천주교 예술도 선교의 새로운 경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코스탄티니는 1925년에 이탈리아의 베네딕도회 예술가 그레스니트(D. Adalbert Gresnigt) 신부를 중국에 오도록 요청했다. 이후 그레스니트 신부는 중국에 와서 중국 예술의 정신을 연구하여 북경 보인대학, 홍콩과 開封의 대수도원, 宣化 主徒會 성당 및 기타 몇몇 작은 건축의 설계도를 제작하고, 공사를 감독하였다. 그레스니트 신부는 중국 전통 예술의 요소를 응용했지만, 동시에 일종의 새로운 정신 - 천주교 정신 - 을 그것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야말로 그가 건축하는 것은 손을 대면 환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을 정도로 활력으로 충만했다. 옛것을 끄집어내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부흥 운동’으로 부를만하고 예술의 생명을 비등하게 하였다.52)

 

또한 코스탄티니는 교회 내부에서 중국 회화 도입을 추진하기 위해 중국 화가 陳緣督의 협조를 요청했다. 코스탄티니는 진연독의 그림에서 중국 예술의 전통 정신을 발견하고 그에게 성모상을 그리도록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진연독 또한 천주교 신앙을 연구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후에 보인대학의 예술학 교수로 초빙되었다.53)

 

교회 내에서 중국 예술의 표현은 마치 중국 주교의 출현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기초를 튼튼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의 교류를 촉진하게 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천주교회의 회화는 중국에서 신속히 발전해 나갔고, 동시에 유럽에 전파되었다. 후에 코스탄티니가 포교성성에서 근무할 때, 많은 수의 중국 천주교회 회화를 인쇄하였다. 동시에 코스탄티니는 예술과 관련된 그의 저작에서 여러 차례 중국 예술을 소개하여 서양 사람들에게 중국 예술의 이해를 돕게 하였다. 현재 밀라노 박물관에는 중국식의 천주교 회화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54)

 

이러한 중국 천주교의 새로운 예술 경향에 대해 교황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교황은 중국의 종교 예술 영역에서 이미 천주교의 참된 정신을 찾았으며, 그것으로 인해 큰 발전을 하게 되었고, 일방적인 서구 취향을 버린 것에 대해 매우 기뻐했다.55) 천주교에 중국 예술을 도입하자는 코스탄티니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서방 예술을 중국에 사용하는 것은 형식의 착오이다. 각 민족은 모두 특수하고 정형적인 특징이 있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은 그들이 가진 역사적 건축과 민간과 사회의 예술품으로 충분히 표현해 낼 수 있다.

 

2) 외국 건축 양식을 그대로 중국에 가져오면, 매우 적절하지 않다. 우리들이 중국에서 선교할 때 가장 곤란한 점은 많은 중국인이 천주교를 수입품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각 교구 장상 및 신부들은 존경받는 그리스도 정신을 가지고 진력하여 이런 불행한 오해를 없애야 한다. …중국인이 교당 안에 있을 때 서양 가옥에 있다는 것을 느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들에게 자기의 집에서와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해야 한다.

 

3) 우리는 가톨릭이 토굴에서 나온 이후 로마인의 가옥 궁정 양식에 따라 가톨릭의 성당 혹은 대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서구에서 유행한 로마식에 대해 얘기하자면 비록 그것이 매우 오랫동안 전형적인 기본 요소를 보존했지만 이후 시대와 지리적 영향을 받아 점점 변화, 진전되어 본래의 형태에서 바뀌었다.

 

4) 우리는 중국 건축술의 정수를 연구하여 가톨릭에 맞게 새로운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절대로 廟宇의 형식을 답습하는 것은 아니며, 이도 저도 아니게 중국적 요소를 짜 맞춰서도 안 된다. 중국 건축과 미술의 정수를 학습하여 가톨릭의 사상을 잘 표현해 내어야 한다.56)

 

한편, 코스탄티니는 ‘의례논쟁’ 이후 중국 의례 금령에 대해 교황 사절로서 처음 중국 의례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국민정부 시기에 국민혁명의 기초는 孫文의 三民主義였다. 새로이 성립된 국가 교육 체계 중, 교회학교는 즉각 國父 손문에 대한 경례 및 삼민주의를 가르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외국인 주교들은 교회학교에서 국부의 像에 예를 표하는 것은 미신의 혐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코스탄티니는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어 삼민주의가 천주교의 사회적 원칙에 부합되며, 중화민국의 창립자 손문에 대한 경의 표시는 사회적 행위임을 강조하였다.57)

 

또한 南京 中山陵에 손문을 봉안할 때 코스탄티니는 교황청 특사의 신분으로 교황의 허락을 받아 사회적 행사인 봉안식에 참가하여 각국 공사 모두 손문의 영구 앞에서 세 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할 때, 코스탄티니는 바로 결단하여 그 역시 손문의 영구 앞에서 세 차례 허리를 굽혀 절하는 의례를 표시했다.58) 이러한 행동은 중국 의례 금지령과 상반되는 행동이었지만, 이후 교황청이 祭祖祀孔 금령을 폐지하는 첫 번째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코스탄티니는 당시 로마 교황청의 변화된 중국 선교 정책 아래 중국의 천주교 토착화를 위해 중국 문화와 천주교 문화의 소통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인류에 대한 봉사와 ‘보편성’을 중국에 실천하고자 했다. 코스탄티니는 선교사에게 온전한 희생을 봉사 정신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더욱이 자신의 이해를 위해 목적을 달성하지 않았다. 그는 사도 바울의 선교 정신을 사랑하여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포부를 드러냈다. 코스탄티니는 아래와 같은 사도 바울의 두 말을 항상 인용하여 선교사의 선교 정신을 고무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으로 삼고자 했다.5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율법 밖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60)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를 내고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내며,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61)

 

이전의 중국 교우가 선교사들을 접견하는 예의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백발의 노인조차도 모두 두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코스탄티니는 이러한 의례에 변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코스탄티니가 북경 대표공관에 있을 때였다. 교우들이 찾아와서 함께 얘기를 할 때 교우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항상 동등한 자격으로 그들을 대했다. 엄숙할 때도 존비를 나타내지 않았고, 친절할 때는 父子兄弟와 같았다. 그가 宣化에 갔을 때 주교 식당에서 교우 대표와 함께 식사를 하였다. 그의 이같이 자신을 낮추는 태도는 좌우에 있는 사람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것을 태연하게 처리했으며, 사람들의 불평에도 그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62)

 

교황 사절로서 코스탄티니의 행동은 1930년에 들어 프랑스 측의 계속된 비난과 더불어 외국인 선교사들의 반대에도 직면했다. 또한 그를 지원해 주었던 교황청의 가스파리 국무원장이 물러나자 코스탄티니는 1930년 말에 이탈리아로 돌아가 다시금 교황청의 중국 선교 정책에 대해 지지를 받고자 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를 접견하고 그의 지지를 확인한 후 코스탄티니는 1931년 8월에 북경에 도착했다. 1932년 12월에 다리 부종이 심해져 교황청에 귀국 휴가 신청을 하고 1933년 2월에 유럽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는 잠시 떠난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으로 교황 사절의 임무는 끝나고 말았다.63)

 

이후 코스탄티니는 포교성성에서 차관으로 재직할 때 교황이 그에게 추기경 직함을 주려고 했으나, 선교 사업에 매진하기 위해 받아들이지 않다가 이후 연로하고 병약해지자 추기경 직함을 받았다. 1958년 비오 12세가 선종했을 때 코스탄티니는 병원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때 그의 친구 베네치아의 총대주교 안젤로 추기경이 병원에 문안하러 왔었고, 그들은 새로이 선출될 교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코스탄티니는 심장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어 새로운 교황의 선출에 참가하지 못했다. 또한 그의 친구 안젤로 추기경의 교황(요한 23세) 등극을 보지 못했다.64) 그러나 우리들은 새로운 교황의 활약과 재위 시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개혁을 보았다.

 

교황 요한 23세가 개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전의 공의회들과 달리 교회의 교리를 공격하거나 교회 일치를 저해하는 것을 다루기 위해 소집되지 않았다. 그것은 요한 23세가 천명했듯이 “교회 생활의 모든 분야가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차원을 넘어 완전히 의식 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한 23세의 대담한 행동은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란 말로 잘 표현되었다. ‘쇄신과 개혁’이라는 공의회의 주제에 따라 이제까지의 폐쇄적인 교회의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세상과 소통의 문을 여는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가톨릭과 제1세계 중심 논리에서 벗어나 타 종교와의 관계에서도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유의할 것과 비종교인까지도 포용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또한 선교 방법에서 각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그것에 적응해야 하는 토착화를 주장하였다. 가톨릭교회는 이제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려고 한 것이다. 코스탄티니의 교황 사절로서 중국에서의 활동은 이미 그것의 선구적 활동을 대변해 준다고 하겠다.

 

 

5. 맺음말

 

코스탄티니는 교황 사절 신분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주재한 최초의 인물이다. 교황 사절로서 코스탄티니의 중국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중국 천주교를 프랑스 선교 보호권에서 배제시켜 직접적으로 교황청 관할하에 두려고 하였다. 둘째,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사업을 진행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활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보다 넓게는 당시 교황청의 선교 정책 변화에 따른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 중국의 정치적 상황과 천주교 내부의 변화 속에서 진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동안 천주교는 중국에서 여러 가지 폐단을 낳기도 했는데, 20세기에 들어서서 교회 내부에서도 자성론이 대두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영렴지와 마상백 등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한 외국인 신부인 뱅상 레브는 중국 교회의 토착화를 주장하였고, 사회의 개량과 항일투쟁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중국 천주교회 인사들의 끊임없는 개혁 요구가 교황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중국에서 천주교회의 토착화를 추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코스탄티니는 비록 외교적 권한이 없는 순수 교황 사절이었지만, 중국 교회가 프랑스 선교 보호권의 비호 아래 큰 특권을 누리고 있고, 외국인 선교사가 자신들의 권익을 누리기 위해 토착화된 교회 건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코스탄티니는 중국인 사제를 추천하여 주교 직무를 담당시키고, 새로 임명된 중국인 주교를 데리고 로마에 가서 주교 서품을 받게 했을 정도로 중국 천주교의 토착화 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개신교의 문화 · 교육 사업보다 상당히 뒤처졌던 천주교 교육 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천주교 대학(輔仁大學) 설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특히 그는 예술과 조각에도 조예가 깊던 인물로서 중국인의 철학적 언어와 예술 양식으로 천주교 신앙을 표현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각 나라와 민족의 전통문화는 모두 천주교 신앙의 기본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중국의 예술을 천주교회에 도입하고, 중국 천주교 회화를 유럽에 소개하였으며, 중국의 건축 예술을 천주교에 도입하고자 하는 등 동서 종교 문화 간에 소통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30년대에 이르면 중국인 주교는 이미 23명에 달하고, 중국인 신부는 1,6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수녀는 3,600명에 달했고, 중국의 천주교 신자는 300만 명에 달했다. 1945년에는 靑島의 田耕莘 주교가 아시아인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946년 중국에 교계제도가 설립되어 중국은 20개의 대교구, 79개의 교구, 38개의 감목구로 나누어졌다. 이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교황청과 외교관계가 단절되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을 미리 보여 주고 토착화와 지역 교회의 성장과 현지인 사제의 양성을 촉진하면서 광범한 활동을 펼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 이 논문은 2010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0-327-A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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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교 보호권이라는 의미의 ‘保敎權’은 ‘護敎權’, ‘保護權’ 등으로도 쓰이는데, 중국에서는 ‘保敎權’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국내 중국사 연구자들도 일반적으로 ‘보교권’으로 표현한다. 포르투갈의 보교권(Portuguese Padroado)은 교황이 직접 부여한 권한으로 프랑스의 보교권과는 다르다. 프랑스 보교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프랑스가 淸朝와 체결한 조약에서 법률적으로 보장받은 중국에서의 천주교 보호에 대한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즉 중국에서의 천주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보호하는 것, 천주교 선교사 및 교민과 관련된 교섭, 敎案 처리의 대행 및 간섭 등으로 좀 더 좁혀 말할 수 있겠다. 프랑스 보교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崔炳旭, <중국에서의 프랑스 ‘保敎權’의 기원과 성립 - 淸初 프랑스 예수회선교사의 중국파견에서 淸佛 「北京條約」의 체결까지>, 《明淸史硏究》 22, 2004 참조. 본 논문에서는 가톨릭과 천주교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천주교로 통일할 것이며, 인용문에서 가톨릭으로 쓸 경우에는 그대로 사용하였다. 또한 이 논문에서 역사적 용어인 ‘反基督敎’, ‘非基督敎’와 같은 용어를 쓸 때의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2) 羅光, 《敎廷與中國使節史》, 臺北 : 傳記文學出版社, 1984 ; 顧衛民, 《中國與羅馬敎廷關係史略》, 北京 : 東方出版社, 2000 ; 顧衛民, 《中國天主敎編年史》, 上海書籍出版社, 2003.

 

3) 顧衛民, <剛恒毅與1924年第1屆中國敎務會議>, 《上海大學學報》, 2005-3 ; 顧衛民 · 楊國强, <二十世紀初期在華天主敎會的中國化>, 《?案與史學》, 1995-5 ; 顧衛民, <剛恒毅與近代中西文化交流>, 《世界宗敎硏究》, 1996-4.

 

4) 이 논문에서 이용하는 1차 자료는 주로 코스탄티니의 회고록(《剛恒毅樞機回憶錄 : 在中國耕耘》 上 · 下, 《剛恒毅樞機回憶錄 : 零落孤葉》, 《剛恒毅樞機回憶錄 : 殘葉》)과 코스탄티니와 동시대에 교류한 인사들의 기록 및 관련 천주교 잡지 등이다. 코스탄티니의 회고록 및 그와 관련된 자료들은 필자의 언어적 한계로 인해 대부분 中文으로 번역된 것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5) 方豪 編, <敎宗本篤十五世通牒>, 《馬相伯先生文集》(上智編譯館, 1947, 影印本), 臺北 : 文海出版社, 1972, 225~241쪽.

 

6) 方豪 編, <上敎宗求爲中國興學書>, 위의 책, 22쪽. 1912년에 교황에게 보낸 이 상서는 교황의 관심을 받았는데, 교황은 이를 통해 북경 대목구가 백인종 우월주의를 가진 프랑스 국적의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들이 중국에서 대학 설립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으며, 만약 기타 수도회가 북경에서 대학을 설립한다면 기반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7) 클로드 쇠텐스, 김정옥 옮김, 《20세기 중국 가톨릭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8, 105~111쪽.

 

8) 교황청은 이미 1885~1886년에 교황 레오 13세 시기에 중국에서의 프랑스 보교권을 폐지하려고 직접 청 정부와 외교관계의 수립을 시도하였다. 당시에도 프랑스의 방해로 교황청은 교황 사절을 파견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崔炳旭, <淸朝 · 敎皇廳의 外交關係 樹立 교섭(1885~1886)과 프랑스 ‘保敎權’ 문제>, 《東洋史學硏究》 100, 2007 참조. 1917~1918년에도 중국과 교황청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자 상호 외교사절 파견을 약속했으나, 프랑스의 압력으로 외교 수립을 연기했던 바 있다. 羅光, 1984, 206~214쪽. 베네딕도 15세 시기 교황청과 중국의 외교관계에 대해서는 Agostino Giovagnoli 著, 顧衛民 譯, <本篤十五任敎宗時期羅馬敎廷與中國的外交關係>, 《近代中國》, 1996-1 참조.

 

9) 顧衛民, 앞의 글, 1996, 92쪽 ; 化一, <剛樞機恒毅生平>, 《恒毅》 8-4, 1959, 21쪽.

10) 클로스 쇠텐스, 김정옥 옮김, 앞의 책, 144~145쪽.

11) 陳方中 · 汪國維, 《中梵外交關係史》, 臺北 : 商務印書館, 2003, 112~113쪽.

 

12) 1906년 1월에 주중 프랑스 공사는 중국 정부에 프랑스 교회와 국가와의 분리 원칙에 근거하여 주중 프랑스 공사관은 단지 프랑스 선교사와 관련된 사무를 처리할 것이며, 기타 국가의 선교사는 선교사와 관련된 국가의 공사관에서 처리할 것이라고 했다. 舍英曼(М. М. Шейнман) 著, 黑龍江大學俄語系飜譯組 譯, 《梵?岡史 : 十九世紀末和二十世紀初時期》, 哈爾濱 : 黑龍江人民出版社, 1982, p. 598 註1. 사실상 중국에서의 ‘모든’ 천주교 선교사에 대한 프랑스 보교권은 이때에 폐지됐다고 볼 수 있지만, 프랑스인 선교사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이 많아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선교 보호권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13) 클로드 쇠텐스, 김정옥 옮김, 앞의 책, 145쪽.

14) Celso Costantini, 《剛恒毅樞機回憶錄 : 在中國耕耘》 上(이하 《在中國耕耘》으로 약칭), 臺北 : 天主敎主徒會, 1980, 5쪽.

 

15) 코스탄티니가 교황 사절로 중국에 파견되었을 때에도 프랑스와의 관계 문제를 상당히 신경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익명으로 그해 11월에 홍콩에 도착했고, 프랑스를 비롯한 外交街를 안심시키기 위해 처음 몇 달 동안 北京이 아니라 漢口에 자리를 잡았다. 클로드 쇠텐스, 김정옥 옮김, 앞의 책, 144~149쪽.

 

16) 《在中國耕耘》 上, 107~108쪽. 당시 코스탄티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사관 지역은 치외법권을 향유하는 외국의 참호와 같은 곳이다. 그곳의 유래는 1901년 의화단 사건 후에 체결한 조약이다. 주요 대사관은 모두 이곳에 있으며, 사방이 높은 담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담에는 기관총이 놓여 있다. 이 지역은 치욕스러운 기념품을 구성하고 있어 중국 사람들의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내가 중국에 온 것은 외국 정부의 정책에 부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다. 당연히 나는 중국인의 거주지에서 머물러야 하며, 중국인도 나의 이러한 관점에 찬성한다.”

 

17) 趙賓實, <讀「雷鳴遠神父傳」後的我感與回憶>, 《恒毅》 14-11, 臺北 : 天主敎主徒會 恒毅學社, 1965, 21쪽.

18) 趙賓實, 위의 글, 21~22쪽.

19) 《在中國耕耘》 上, 47쪽.

 

20) 《在中國耕耘》 上, 162쪽. 중국인 감목은 코스탄티니가 이미 1923년 12월 12일과 1924년 4월 15일에 임명하여 1924년 5~6월 전국 공의회에 참석시켰던 것이다. 클로드 쇠텐스, 김정옥 옮김, 앞의 책, 150~151쪽.

 

21) 《在中國耕耘》 上, 163쪽.

22) 1924년 중국 공의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클로드 쇠텐스, 김정옥 옮김, 앞의 책, 153~166쪽 참조. 

23) 吳宗文, <由剛樞機的回憶錄看中國第一批主敎的選擇與敎區成立的經過>, 《恒毅》 6-3, 1976, 18~19쪽.

 

24) 당시 포교성성 장관 판 롯숨(G. van Rossum) 추기경은 중국 宣化 대목구 설립과 중국인 주교 임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교황에게 상황을 알리는 동시에 교황이 직접 이 첫 중국인 주교를 축성해 주도록 건의하였고, 교황은 동의했다. 또한 蒲圻와 ?縣의 두 감목도 동시에 주교로 축성할 생각이었다. 코스탄티니는 이러한 소식을 듣자마자 台州 지역과 汾陽 지역 장상도 주교로 임명하여 함께 축성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7~8월에 중국인 사제를 해당 대목으로 임명하였다. 첫 중국인 주교로 임명된 6명은 다음과 같다. 1) 宣化 대목구 趙懷義(필립보) 주교. 1904년 사제 서품, 라자로회 회원. 코스탄티니 중국 파견 이후 교황 사절 비서에 임명. 2) 汾陽 대목구 陳國砥(알로이시오) 주교. 1903년 사제 서품, 프란치스코 회원. 3) 台州 대목구 胡若山(요셉) 주교. 조상 대대로 12대 천주교도, 1909년 사제 서품, 라자로회 회원. 4) 海門 대목구 朱開敏(시메온) 주교. 1898년 사제 서품, 예수회 회원. 5) ?縣 대목구 孫德楨 주교. 1897년 사제 서품, 교구 사제. 6) 蒲圻 대목구 成和德(베드로) 주교. 프란치스코회 회원. 위 6명은 각각 교구 사제 1명, 라자로회 회원 2명, 프란치스코회 회원 2명, 예수회 회원 1명이다. 顧衛民, 앞의 글, 1996, 95쪽 ; 吳宗文, 앞의 글, 18~19쪽 ; 클로드 쇠텐스, 김정옥 옮김, 앞의 책, 175쪽.

 

25) 첫 중국인 주교 축성은 온 가톨릭계에 깊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것은 교회사 초유의 유색인 주교 임명이었다. 그 사건은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뱅상 레브 신부는 그때 “교회사의 중요한 순간”을 체험했고, “감동과 우주적 기쁨의 날”을 체험했다고 말했다. 클로드 쇠텐스, 김정옥 옮김, 앞의 책, 177쪽.

 

26) 중국어로 이것을 主徒會라고 한다. 1927년 1월 4일, 교황청은 주도회 성립을 비준하였다. 주도회 창립 후 불행히도 중일 전쟁 및 국공내전이 발발하여, 많은 젊은 신부와 수사들을 잃었다. 이후 대만에 恒毅 중학을 창립하는 등 교육 사업을 하고 있으며,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 사제를 파견하여 학교를 세우고 성당을 건립하고 화교들에게 선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張振東, <剛恒毅樞機與中梵關係>, 《中梵外交關係史國際學術硏討會論文集》, 臺北 : 天主敎輔仁大學歷史學系, 2002, 193쪽.

 

27) 《在中國耕耘》 上, 434~435쪽.

28) 《在中國耕耘》 上, 436~437쪽.

 

29) 8.1 통전은 1928년 8월 1일, 교황청 가스파리 추기경이 코스탄티니에게 전보를 보내 교황 비오 11세를 대표하여 발표하게 한 것이다. 이 전보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다. 교황이 중국의 평화를 기원하며, 새로운 국민정부에 대한 합법적 지위를 지지한다는 내용이다(《在中國耕耘》 下, 26~27쪽).

 

30) 《在中國耕耘》 下, 44~51쪽.

31) 《在中國耕耘》 下, 83~85쪽.

 

32) 《在中國耕耘》 下, 86~87쪽. 후일 공포된 외교문서를 보면 쌍방은 당일 더욱 진전된 외교적 업무에 대해 회담하여 <중 · 바티칸 교약 초안>을 마련했는데, 그중 제2항에는 “중국 정부와 교황청은 상호 정식으로 외교사절을 파견한다. 사후 모든 천주교 업무는 쌍방이 직접 협의하여 처리한다”는 내용으로 외교관계 수립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陳聰銘, <1920年代末梵 · 法在華保敎權之爭?以敎宗駐華代表剛?毅爲中心的討論>,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集刊》 65, 2009, 70쪽.

 

33) 프랑스는 코스탄티니와 왕정정의 회담에 앞서 교황청에도 항의하였다. 프랑스는 주교황청 대사에게 명령하여 친히 교황청 국무원장 가스파리를 예방하여 프랑스 측의 입장을 표현하였다. 코스탄티니가 중국 정부와 공식적으로 접촉하기 전부터 교황청은 프랑스로부터 거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가스파리는 코스탄티니가 중국 정부와 접촉한 것은 교회 재산의 일 때문이지 다른 사항은 없다고 했으나, 프랑스는 사전에 프랑스의 동의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과 교황청이 절대로 ‘정교협정’을 체결할 수 없다는 승낙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陳聰銘, 위의 글, 67~69쪽. 이후 프랑스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교황청은 1858년의 청불 천진조약 조항의 국제조약 혹은 계약을 위반하는 어떠한 것도 체결할 수 없다고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34) 顧衛民 · 楊國强, 앞의 글, 47~48쪽.

35) 閔斗基, 閔斗基 編, <國民革命運動과 反基督敎運動>, 《中國國民革命運動의 構造分析》, 지식산업사, 1990, 142쪽.

36) 方豪 編, <上敎宗求爲中國興學書>, 앞의 책, 22쪽.

37) 클로드 쇠텐스, 김정옥 옮김, 앞의 책, 89쪽.

 

38) 보인대학의 설립 과정에 대해서는 孫邦華, <試論北京輔仁大學的創建>, 《世界宗敎硏究》, 2004-4 참조. 1920년대 비기독교 운동 이후 중국 각 교회대학은 1927년을 전후로 기독교의 중국화 운동의 추세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남경 국민정부 교육부가 반포한 <사립대학 및 전문학교 설립안 조례>의 법률을 준수하여 중국인을 이사장과 교장으로 추천하도록 하여 보인대학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1929년 7월에 보인대학은 새로이 27명의 이사회를 정비했는데, 그중에는 마상백과 코스탄티니가 포함되어 있었다(위의 글, 104~105쪽).

 

39) 顧衛民 · 楊國强, 앞의 글, 49쪽.

40)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北京 : 宗敎文化出版社, 2007, 656~660쪽.

41) 方豪, <馬相伯先生與剛恒毅樞機>, 《恒毅》 5-9, 1956, 19쪽.

42) 孫邦華, 앞의 글, 101쪽.

43) 方豪, 앞의 글, 668쪽.

44) 고파르 · 소이에 편, 김정옥 역, 《뱅상 레브 신부 서간집》, 수원가톨릭대학 출판부, 1990, 178, 184쪽.

 

45) 노서개는 천진시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중국인 소유지로, 1912년 부임한 천진 감목 대리가 대성당과 주교관을 짓기로 한 곳이자 프랑스가 거류지 확장에 탐내던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와 교회 측에서 이곳을 차지하려 하자 레브 신부가 공개적으로 프랑스 정부에 중국인들과 함께 대항하였고, 결국 강대한 사회적 압력 아래에 이 토지는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일종의 징벌로서 수도회 長上들은 레브 신부를 천진에서 추방하였다. 노서개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최병욱, <20세기 초 중국의 反基督敎에 대한 소통과 치유 - 뱅상 레브(Vincent Lebbe) 신부를 중심으로>, 《중앙사론》 32, 2010, 221~223쪽.

 

46) 클로드 쇠텐스, 김정옥 옮김, 앞의 책, 102~111쪽.

47) 최병욱, <사회적 실천과 치유 - 뱅상 레브(Vincent Lebbe) 신부의 例?>, 《인문과학연구》 30, 2011, 417~420쪽.

48) 《在中國耕耘》 上, 277~293쪽.

49) Celso Costantini, 《剛恒毅樞機回憶錄 : 零落孤葉》, 臺北 : 天主敎主徒會, 1980, 35~36쪽.

50) 顧衛民, 앞의 글, 96~97쪽.

51) 化一, 앞의 글, 21쪽.

52) Celso Costantini, 孫茂學 譯, <天主敎藝術在中國> 1, 《恒毅》 14-10, 1965, 27~28쪽.

 

53) Celso Costantini, 孫茂學 譯, 위의 글, 28쪽. 1937년 진연독이 북경 보인대학에서 거행된 천주교 미술전람회 개막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회화의 가치는 결코 그것의 외재적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가의 사상에 있다. 중국 예술은 상징적이고 주관적이다. 이것은 조형 혹은 사실파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중국화는 會心的이다. …중국 화가는 종교 소재에 대해 흥미가 그렇게 많지 않다. 이로 인해 화가의 대다수는 중국 역사와 소설에서 소재를 찾는다. 그러나 과거 불교와 도교는 걸출한 화가와 화파가 있었다. 이로 인해 우리들 천주교 화가는 실로 이러한 대선배들을 거울삼을 수 있다”고 하였다. 보인대학의 예술학과는 매우 빠르게 신사조와 신활동의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상해와 북경에서 수차례 천주교 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다. 보인대학 예술학과의 작품은 각 선교 잡지에서 발표되었고, 심지어 개신교에서도 그들의 간행물에 게재하기도 하였다(위의 글, 28쪽).

 

54) 회화와 건축의 동서 문화의 교류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미 청나라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특히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화가인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郞世寧, 1688~1766)는 건륭제 시기 선교사보다는 궁정 화가로서 50여 년간 활동하면서 청대 회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한 원명원에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건물들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데 참여하였다. 카스틸리오네가 남긴 다량의 유화 작품과 서양식 투시법을 중국 전통 안료와 융합한 線法畵 등은 당시 궁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중국과 서양의 회화 교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전통 화풍과 혼합된 서양화법은 궁정 화단을 중심으로 馬晉과 황족 출신 화가 溥雪齋 등에게 계승되었고, 북경을 중심으로 중국 근대 화단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물론 당시 건륭제의 서학에 대한 관심은 서양 문물 자체보다는 그 기능적 측면에 대한 것으로, 건륭제는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고 서양화법 역시 마찬가지의 기능을 행하였던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李周玹, <乾隆帝의 書畵 인식과 郞世寧 화풍의 형성>, 《미술사연구》 23, 2009 ; 조지 뢰어, 김리나 옮김, <淸 皇室의 서양화가들>, 《미술사연구》 7, 1993 참조.

 

55) Celso Costantini, 孫茂學 譯, <天主敎藝術在中國> 2, 《恒毅》 14-11, 1965, 37쪽. 

56) Celso Costantini, 孫茂學 譯, 위의 글, 37~41쪽.

57) 《在中國耕耘》 下, 70쪽.

58) 《在中國耕耘》 下, 116쪽.

59) 德雷, <宗座使華首任代表?剛恒毅樞機?>, 《恒毅》 19-2, 1969, 10쪽.

60) 1코린 9, 19-22.

61) 로마 13, 7-8.

62) 德雷, 앞의 글, 11쪽.

63) 陳方中 · 汪國維, 앞의 책, 139~142쪽.

64) 德雷, 앞의 글, 11쪽.

 

[교회사 연구 제40집, 201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병욱(강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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