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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27: 주요 사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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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0 ㅣ No.1610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27) 주요 사목지


산넘고 물건너 해마다 공소 100곳 넘게 찾아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해마다 사목 보고서 형태의 편지를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있는 스승에게 보냈다. 그 편지마다 도앙골(1850년), 절골(1851년), 동골(1854년), 배론(1855년), 소리웃(1856년), 불무골(1857년), 오두재(1858년), 안곡(1859년), 죽림(1860년)이라는 발신지가 기록돼 있다. 이 발신지들이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다.

 

귀국 후 1850년 1월부터 1852년 전반기까지 최양업 신부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 그리고 전라도ㆍ경상도ㆍ강원도 전 지역을 사목했다. 그의 사목지가 가장 넓었던 시기이다. 그가 이렇게 광대한 지역을 사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병석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 신부는 이 시기에 매해 전국 185개 공소 가운데 127곳을 사목 방문했다. 전체 공소의 약 69%에 해당한다. 

 

최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은 장마철과 혹한기를 피해 교우촌을 찾았다. 주로 그해 10월 초ㆍ중순에 시작해 다음 해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사목 방문을 끝냈다. 휴식 동안은 사목 보고서와 각종 전례서 번역 작업 등을 했다.

 

최 신부는 1853년 여름부터 신학교 지도와 운영을 맡으면서 충북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았다. 그는 1854년 3월 신학생들이 페낭으로 유학을 간 후 신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배티와 인근 절골, 동골을 중심 거처로 삼았다. 

 

앞서 1852년 2월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고 그해 8월 메스트르 신부가 입국했다. 건강을 다소 회복한 다블뤼 신부가 서울과 인근 경기 지역을, 메스트르 신부가 경기 외곽과 충청도 지역을 맡게 되면서 이 시기 최 신부의 사목지는 처음보다 조금 줄었다. 최 신부는 배티 신학교를 중심으로 충청도 외곽과 전라도ㆍ경상도ㆍ강원도 전 지역을 사목했다.

 

1854년 하반기부터 1856년 전반기까지 최 신부의 사목지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1854년 4월 장수 신부가 입국했으나 곧 뇌염으로 선종했다. 당시 조선 교회 장상이었던 메스트르 신부는 서울과 경기도 일부를,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다블뤼 신부는 충청도 전역을 맡았다. 그 나머지 지역은 최 신부의 몫이었다. 최 신부는 1855년 한 해 동안 어른 17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의 관할 구역 내 신자는 4075명, 예비신자가 108명이나 있었다.

 

1856년 3월 베르뇌 주교와 프티니콜라ㆍ푸르티에 신부가 입국했다. 이들의 입국으로 조선 교회 내 성직자 수는 다블뤼ㆍ메스트르ㆍ최양업 신부를 합해 6명으로 늘었다. 자연히 사목 관할 지역도 변동이 있었다. 주교가 입국함에 따라 메스트르 신부는 장상직을 내려놓고 충청도 덕산 황무실로 내려가 내포 지역을 사목했다. 푸르티에 신부는 배론 신학교와 그 일대를 담당하고, 프티니콜라 신부는 충청 북부와 경상 북부 일부, 경기 남부, 강원 일부를 맡았다. 최 신부는 경기도와 충청 외곽, 강원 북부, 경상 북부 이남, 전라도 전 지역을 담당했다.

 

1857년 최 신부의 사목지는 또 한 번 바뀐다. 그해 3월 다블뤼 신부가 주교로 서품돼 순교자 자료 수집과 편찬을 맡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푸르티에 신부가 배론 신학교 교장을 맡으면서 최양업ㆍ메스트르ㆍ프티니콜라 등 세 신부가 베르뇌 주교를 도와 사목하게 됐다. 1857년 9월 중순 최 신부는 충남 서천 불무골에 머무는데 학자들은 이곳에서 다블뤼 주교를 도와 순교자료 수집과 편찬 작업을 했으리라 추정한다. 

 

1857년 12월 최 신부의 스승이자 동료인 메스트르 신부가 선종했다. 그의 사목지는 그해 3월 입국해 우리말과 풍속을 익히던 페롱 신부가 맡았다. 최 신부는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 외곽과 경상 남부, 전라도 전 지역을 담당했다.

 

1858년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는 상당히 줄게 됐다. 다블뤼 주교가 최 신부의 가장 넓고 먼 지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라도 지역이었을 것이다. 대신 최 신부는 서양 선교사들이 방문할 수 없거나 장거리 여행이 필요한, 멀리 떨어진 지방을 맡게 됐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 선종할 때까지 경기, 충청, 강원 외곽 일부와 경상 남부, 전라도 외곽 일부를 맡아 사목했다. 그는 여전히 5개 도에 걸친 사목 구역을 맡고 있었고, 100개가 넘는 공소를 해마다 2750여㎞를 걷거나 말을 타고 방문해야 했다. 

 

그는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약 3개월 동안 경남 울주군 간월재 죽림 교우촌에서 은거했다. ‘언양 죽림굴’로 더 많이 알려진 이 천연 동굴은 1840년부터 1868년까지 공소로 사용됐다. 언양 대재 교우촌 사람들이 1839년 기해박해 이후 더 안전한 이곳으로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경신박해 때 포졸들에게 잡혔던 동정녀 김아가타가 죽림굴로 피신해 신자들의 임종 기도를 들으며 숨을 거두었고, 1868년 순교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 등이 이곳에 숨어 있었다. 최 신부는 이곳에서 1860년 9월 그의 마지막 사목 보고서를 썼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9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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