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강론자료

요한복음 9,1-41 눈이 열린 소경 (2017. 3. 26. 사순 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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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3-23 ㅣ No.2168

예수가 걸어가다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을 보았다.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에 소경으로 태어난 것입니까? 그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그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가 대답하였다. “그가 소경이 된 것은 그의 죄나 그의 부모의 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소경이므로 그의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납니다. 낮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합니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을 위한 빛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과 비교해서 더하거나 모자란 것이 있게 마련이다. 대체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많이 갖추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불행하다고 한다. 이런 기준으로 생각하면, 소경은 이라는 매우 중요한 감각기관이 없기 때문에 다른 여건을 고려할 필요도 없이 지극히 불행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태생 소경과 같은 선천적 불구의 경우 그 불행이 일어난 원인을 도저히 알 수 없다. 이때 무당이나 점쟁이들은 조상이 지은 죄에 대한 업보라든가 집터나 묘 자리가 나쁘다든가 하는 등의 이야기를 지어내어 그에 상응하는 적당한 액땜을 하도록 종용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조치를 취하고 나면 불행한 현실은 그대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효과가 있다.

 

제자들이 말하는 는 하느님께 벌을 받아야 할 잘못을 의미한다. 불행한 소경을 마주친 그들은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 하느님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지어낸 하느님의 모습이고 실제의 하느님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자처하면서 잡신을 경배하는 여느 민족처럼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 하느님은 사람의 잘못을 책망하고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이 참된 행복에 이르도록 모든 도움을 주시는 분이다. 소경은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눈을 뜨기를 원한다. 만일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눈을 뜨기를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원하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다.

 

은 성령의 지혜인 믿음을, ‘은 사람의 지혜인 학문을 가리킨다. 낮과 밤이 양립할 수 없듯이 믿음과 학문은 양립할 수 없다. 믿음을 학문을 훨씬 뛰어넘는 지혜이다. ‘우리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다. 하늘나라의 스승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낸다. 그는 또한 세상의 유혹에 맞서 믿음을 잃지 않도록 늘 기도한다. 학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처럼 어리석어서 참된 행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는 중의법으로 사용되어 예수와 그의 제자를 동시에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독자 개개인의 이다. 하늘나라의 스승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하여 세상에 하느님을 증언하므로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스승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학문에 의지하므로 어리석음의 이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눈이 먼 소경보다 훨씬 더 심각한 소경이다.

 

 

이 말을 한 다음, 예수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조금 만들었다. 그는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문지르고 그에게 말하였다. “가서 실로암 연못에 얼굴을 씻으시오.”(실로암은 보내다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가서 얼굴을 씻고 볼 수 있게 되어 돌아왔다. 그러자 그의 동료들과 바로 전에 그가 동냥하는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물었다. “이 사람은 여기 앉아서 동냥을 하던 그 사람이 아닌가?” 일부는 그가 맞소.” 하고 말하였지만 다른 일부는 아니, 그 사람이 아니오. 그와 비슷하게 보일 뿐이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 사람 자신이 말하였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들이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여 당신이 지금 볼 수 있는 것입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조금 만들어 내 눈에 문지르고 나서 나에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얼굴을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가서 얼굴을 씻자마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물었다. “그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예수의 행동은 다음 창세기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주 하느님께서 대지로부터 흙을 조금 집어 그것으로 사람을 만드셨다.”(창세기 2:7) 은 믿음이며 은 성령을 상징한다. 성서에서는 종종 하느님과 사람의 사랑을 애인의 입맞춤으로 상징하며, 입맞춤 중에 교환되는 침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타인의 침은 좀 비위생적인 느낌을 주는 것처럼 성령도 육정에는 꺼림직 한 느낌을 준다. ‘약간의 진흙은 물로 축여진 작은 흙덩이로서 사람이 육정에 대한 집착을 버린 작은 나로 되어 성령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표현한다.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한다. 진흙으로 눈을 문지르는 행위는 빛이 어두움을, 낮이 밤을, 성령의 지혜(믿음)가 사람의 지혜(학문)를 이겨내는 영적 사건을 나타낸다. 침과 실로암은 각각 창공 아래에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창세기 1:7)’에 상응하는 상징어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빛을 얻은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어그 빛을 증언하게 하신다.

 

얼굴은 자신의 정체성, 곧 참된 자아이다. 소경은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참된 자아를 찾아 세상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어떤 사람들은 몰라본다. 그는 예전의 그 소경이면서 또한 눈을 뜬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변화도 이와 같다. 영적 인간의 겉모습은 전과 변함이 없지만 그의 삶과 언행은 전혀 달라져 있다.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눈치를 채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눈을 뜬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안다.

 

는 눈을 뜬 사람이요 그 사람은 소경이므로,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은 자신 안에 서로 모순된 두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기묘한 상황을 표현한다. 그들은 어떻게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소경에게 묻는다. 그가 예수가 한 일을 말해주니 그들은 예수가 어디에있는지를 묻는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예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과 예수가 그에게 한 일은 알고 있는데 그 변화를 일으킨 예수는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누구든지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는 사람은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그 사람의 말을 믿고 자신 안으로 돌아가 예수의 힘으로 눈을 떠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핵심이다. 예수는 소경을 치유하는 퍼포먼스를 통하여 사람과 하느님이 협력하여 일으키는 영적인 탄생과 성장의 사건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보이지 않는 막후에서 주연배우를 이끄는 연출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는 와 일치하여 일하는 주님이어서 를 떠나 예수를 따로 볼 수는 없다.

 

 

그러자 그들은 소경이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데려갔다. 예수가 진흙을 만들어 그의 눈을 뜨게 해준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리하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해서 시력을 찾았는지를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말하였다. “그 사람이 내 눈에 진흙을 조금 발랐습니다. 내가 얼굴을 씻었더니 지금은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몇 사람이 말하였다. “이 일을 한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왔을 리가 없습니다. 그가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시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말하였다.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종류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그들 사이에 분열이 있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당신은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는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가 소경이었다가 지금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부모를 불러서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당신들의 아들입니까? 당신들은 그가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그가 지금은 볼 수 있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저 사람이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그가 소경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해서 지금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또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는 철이 들었으니 스스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의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회당에서 추방하기로 미리 결의하여 두었다. 그의 부모가 그는 철이 들었으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엄밀하게 지키며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로서 백성의 행위를 율법에 비추어 판단하는 권한이 있다. 예수가 성전에서 소경을 고쳐준 것은 중대한 종교적 행위이므로 사람들은 치유를 받은 당사자를 그들에게 데려가서 판단을

구한다. 눈을 뜬 사람은 바리사이파의 권위를 존중하여 자신이 겪은 일을 그들에게 상세하게 보고한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가 한 일 자체보다 그가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을 두고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

 

내용과 형식, 성령과 율법, 참과 거짓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예수에게서 치유를 받은 당사자에게 예수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 예수가 한 일을 직접 겪은 본인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매우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예언자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과 경청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경청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소경은 예수가 자신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을 뿐이고 아직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아가 아닌 예언자로 규정하고 그의 말을 조심스럽게 경청하기로 한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경청하지 않으므로 그가 예언자라는 것조차도 인정할 수 없다.

 

반 예수파가 다시 득세하여 그의 부모를 증인으로 부른다. 부모는 당연히 당사자보다 증거능력이 훨씬 약하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합리적 이성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부모는 이성과 감성을 상징한다. 영적 자아는 이성과 감성을 부정하고 신덕과 망덕을 지닌다. 이성과 감성으로는 하느님으로 오는 망덕과 신덕을 판단할 수가 없다. 따라서 소경의 부모는 눈을 뜬아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은 합리적 이성에 따라 알고 있는 것은 안다고 증언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증언한다. ‘철이 들었다.’는 나이를 먹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영적으로 철이 든 것은 아직 모른다. 미숙한 사람은 성숙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회당을 통하여 종교, 정치, 사회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부모로서는 회당에서 추방된다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 바리사이파는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을 경계한다. 그들이 이해하는 메시아는 정치적인 권력자이다. 만일 예수가 메시아라면 그들의 향유하고 있는 권력을 예수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그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정적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공격하는 적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려는 친구이다. 메시아는 백성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권력자가 아니라 백성의 삶에 동참하여 그들과 함께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참된 사람이다. 그들은 예수의 우정 어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끝끝내 그를 적으로 돌린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들여서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진실을 말하겠다고 하느님 앞에서 약속하시오. 우리가 알기로 당신을 고쳐준 사람은 죄인이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나는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는 눈이 멀었었는데 지금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물었다. “그가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그가 어떤 방법으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내가 벌써 여러분에게 말해주었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군요. 여러분은 왜 같은 말을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은가 보죠?” 그들은 그를 모욕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 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자로 말하면, 우리는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거 이상한 일이군요! 여러분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데 그는 내 눈을 뜨게 해 주었단 말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을 존경하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는 사람에 관하여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너는 죄 중에 태어나서 자랐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 그들은 그를 회당에서 추방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눈을 뜬 사람을 다시부른 것은 거짓 증언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먼젓번에 이미 그가 아는 사실을 모두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진실을 말하겠다고 하느님 앞에서 약속하시오. 우리가 알기로 당신을 고쳐준 사람은 죄인이오.”라는 말이 그들의 위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협박하여 자신들이 속마음으로 바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도록 한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런 종류의 수법을 즐겨 사용한다.

 

눈을 뜬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지혜로워졌으므로 그들의 위선을 빤히 꿰뚫어 본다. 그는 그들의 의도대로 발언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의 말을 빌려 그들이 자가당착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다. 지혜롭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거지노릇을 하던 무식한 사람에게 조롱을 받는 상황이다. 그들은 모세의 제자예수의 제자라는 차별적 칭호를 사용하면서 예수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모세는 율법을 주었으니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이야말로 모세의 제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는 함부로 율법을 어긴다. ‘예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른다.’는 예수가 어떤 근거로 안식일을 어기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그들은 예수가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7:52)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왔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므로 예수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율법은 백성을 하느님께 이끄는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으로 백성과 하느님 사이를 떨어뜨려 놓는다. 그들은 모세가 율법을 준 뜻을 저버리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은 메시아를 의미한다. 메시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예언자보다는 더 높은 존재이다. 눈을 뜬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에 비추어 자신도 모르게 예수가 하늘에서 온 메시아임을 증언하고 있다. 위선을 깨어버리고 나면 진리가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으므로 예수는 그런 능력을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지극히 타당하지만 그가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권능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나 주위 사람들도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을 목격하였지만 하느님의 권능은 아직 모른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제대로 된 증인을 부른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증인의 증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어리석다. 그러나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그들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죄 중에 태어나서 자란가망 없는 사람으로 매도한다. 만일 사람이 죄 중에 태어났다면 죄는 바로 하느님 탓이다. 이로써 그들이 말하는 는 하느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동서고금의 종교지도자들은 백성에게 지도자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죄에 대한 이론들을 개발하여 죄책감을 불어넣는다. 그들은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을 모욕한다. 그들은 눈을 뜬 사람을 회당에서 추방한다. 이로써 회당은 눈 먼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고 말았다.

 

 

예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듣고 그를 찾아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사람의 아들을 믿습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누구인지 말해주십시오, 선생님. 그러면 내가 그를 믿겠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미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지금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주님!”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예수가 말하였다. “나는 심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하여 소경은 보고, 보는 사람들은 눈이 멀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몇 명이 거기에 있다가 그가 이렇게 말하는 듣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설마 우리도 눈이 멀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예수가 대답하였다. “여러분이 눈이 멀었다면 여러분은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스스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직 죄에 빠져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눈을 뜬 사람을 심문하고 그를 회당에서 추방한 사건은 널리 소문이 났을 것이다. 예수도 그 소문을 들었다. 예수는 그를 찾아서’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고 묻는다. 메시아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 개개인을 마중나가 먼저 말을 건넨다. 소경이 사람의 아들이듯이 그에게 말을 건네는 예수도 사람의 아들이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소경에게 말을 건네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므로 예수의 말을 경청하는 그도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하늘나라를 상속한다.

 

그는 예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사람의 아들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어느 다른 곳에 있다는 말로 오해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좀체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제로 욕망을 따르는 삶은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을 듣고 예수가 그에게 한 일이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 그는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을 그렇게도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준 예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계속 그의 권능에 복종하기로 결심한다. 앞서 그는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주님이라고 부르며 그를 메시아로 인정한다. ‘무릎을 꿇음은 감사와 복종의 표시이다. 눈을 뜬 사람은 회당에서 추방되었지만 예수가 이끄는 하늘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앞서 예수는 자신은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심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고 한다. 예수의 의도를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해당 구절을 다시 인용한다. 여러분은 순전히 사람의 방법으로 심판을 내리지만 나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더라도 내 심판은 참됩니다. 나는 혼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8:15-16) 물론 여기에서는 후자의 맥락을 이어받고 있다. 소경은 자신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청한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시어 눈을 뜨게 해 주신다. 그러나 눈을 뜬 사람은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께 청하지 않으니 하느님께서는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가 없다. 예수가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온 것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소경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청하는 소경은 이미 소경이 아니다. 그는 성령에 일치하여 영적인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제 꾀에 빠져 스스로를 판단한다. 예수를 믿고 인생을 하느님께 맡기는 사람은 이미 모든 판단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이 하느님과 예수가 세상을 판단하는 방법이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서 예수가 지닌 하느님의 지혜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자타가 지혜롭다고 공인하는 학자이며 백성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정규 교육도 받지 않고 아무런 지위도 없는 예수가 설마그들보고 눈이 멀었다고 할 셈인가? 바로 이런 자부심이 그들은 눈 먼 소경으로 만든다. 사람의 아들인 예수는 스스로 소경이라는 것을 알고 늘 하느님께 눈을 뜨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아들로 인정해주셔서 성령을 내려주시므로 그는 늘 눈을 뜨고 있다. 예수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적 깨달음을 주는 참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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