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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13: 3세기 (4) 안토니우스의 독거 은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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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28 ㅣ No.900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3) 3세기 ④ 안토니우스의 독거 은수 생활


성경말씀과 기도로 악마의 유혹 이겨내

 

 

- 그뤼네발트 작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출처=가톨릭 굿뉴스.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은 이론을 바탕삼아 연역적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선구자적인 삶을 바탕삼아 귀납적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3세기에 그리스도교 내에서 교부들이 플라톤 철학 계열의 사상들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영적 여정의 체계를 세웠다면, 3세기 후반부터 영성가들은 그리스도인에게 귀감이 되는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가 뜸해지자 하느님을 위해 온전히 살고자 했던 그리스도인은 순교의 길과는 다르지만 하느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것은 바로 훗날 수도 생활의 원형이 되는 은수(隱修) 생활이었습니다.

 

 

은수 생활로의 부르심

 

은수 생활 혹은 수도 생활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집트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토니우스(Antonius, 251경~355/56)는 남아있는 문헌 자료로 확인 가능한 최초의 은수자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lexandrinus, 295/300~373)는 저서 「안토니우스의 생애」(Vita Antonii)에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과 저자의 재해석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섞어가며 안토니우스의 삶을 조명하여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기록했습니다.

 

이집트 출신 안토니우스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스무살가량에 부모를 여의고 여동생과 단둘이 살았던 안토니우스는 어느 날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도들(루카 5,11 참조)을 묵상하며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성당에서 마침 낭독되던 부자 청년 비유 이야기(마태 19,21 참조)에 대한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 상속받은 재산 대부분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안토니우스는 다시 성당에서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마태 6,34 참조)는 복음말씀을 듣자, 즉시 남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나누어 주고 여동생도 동정녀 공동체에 맡기고 본격적으로 은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독거 은수 생활의 네 시기

 

안토니우스는 먼저 마을 변두리로 물러나와 고독 속에서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생계를 위한 노동을 했는데, 그 수입마저도 필요한 이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성경말씀을 경청하며 부지런히 기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또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장점을 배워 실천하면서 선(善)을 추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15년가량의 이 시기가 안토니우스의 첫 번째 여정이었습니다.

 

이후 안토니우스의 금욕 생활을 시기한 악마는 그에게 분심을 일으키며 몹시 그를 괴롭혔습니다. 일차적으로 악마의 시험을 극복한 안토니우스는 금욕 생활을 강화하기 위하여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공동묘지를 찾아갔으며, 한 무덤 속에 들어가 홀로 머물렀습니다. 이곳에서 악마의 방해는 더욱 강해졌고, 안토니우스는 육체적인 고통까지 느끼게 되었으나 기도를 통해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이따금 안토니우스는 주님의 보살핌과 위로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1년 남짓한 이 시기가 안토니우스의 두 번째 여정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본격적인 은수 생활은 사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더욱 열심히 섬기려는 열정에 불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 남쪽 나일 강 하류 근처에 있는 이집트 북부 사막으로 나갔습니다. 피스피르 산 위에 버려진 요새를 찾은 안토니우스는 요새 안에 홀로 머물면서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간혹 방문객들이 있었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요새에서 20년가량 머문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은수자들의 영적 사부가 되어 요새를 나와서 은수 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한동안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로마 제국의 마지막 박해가 발생하자 안토니우스는 오랜만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박해가 끝나자 다시 사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가 안토니우스의 세 번째 여정이었습니다.

 

또 다시 홀로 고독한 생활을 원했던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나일 강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콜짐 산 속 동굴에 머물면서 독거(獨居) 은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고자 찾아왔으며, 안토니우스는 그들을 환대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모든 이의 영적 사부로 살았습니다. 40년 이상 지속된 이 마지막 시기가 안토니우스의 네 번째 여정이었습니다.

 

 

성경말씀 중심의 기도 생활

 

안토니우스가 실천한 은수 생활은 아주 엄격한 수덕 생활의 모습을 지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은수 생활 이전부터 모든 것을 포기한 사도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의 삶을 동경했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자 본인도 망설임 없이 청빈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악마의 온갖 시험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게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이 모든 수덕 생활을 철저하게 홀로 머물면서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안토니우스의 삶은 독거 형태의 은수 생활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실천한 은수 생활의 중심은 성경말씀과 함께하는 신비 생활에 있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은수 생활 이전부터 늘 성경말씀에 귀 기울였고, 사막에서 지낼 때에도 성경말씀을 암송하며 깊이 묵상했습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성경말씀과 함께하는 기도 생활이어야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은수자들에게 가르침을 줄 때에도 성경말씀이면 충분하다고 하면서 늘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은수 생활에 대한 권고를 했습니다. 아나타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기억이 성경책을 대신할 정도였다고 회고했습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3,7 참조) 결국 안토니우스의 성경말씀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은수 생활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었고, 훗날 수도자들이 성경말씀 중심으로 수도 생활을 실천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313년 밀라노에서 공표된 로마 황제의 칙령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로마 제국의 박해로 인해 피 흘리는 순교를 당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염원이 강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안토니우스가 보여준 은수 생활의 모범에 따라 자신을 극기하는 새로운 형태인 백색 순교의 길로 앞다퉈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도 생활은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2월 26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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