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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2) 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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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22 ㅣ No.885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2)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젊은 시절


죄 중의 삶 청산하고 옷 벗어 아버지에 돌려줘

 

 

- 젊은 시절의 프란치스코에게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신심 깊은 어머니의 모습이 다 발견된다. 그림은 조토 작 ‘부귀와 명예를 꿈꾸는 젊은 시절의 프란치스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그림.

 

 

성 프란치스코는 1181년(혹은 1182년)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의 ‘아시시(Assisi)’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포목상이었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세속적이고 야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반면, 어머니 피카 부인은 신심이 깊고 자상한 여인이었다.

 

 

요한에서 프란치스코로

 

「세 동료들이 쓴 전기」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프란치스코는 그의 아버지가 부재중일 때 태어났다. 처음에 어머니는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였지만, 후에 아버지가 돌아와서 프랑스 사람이라는 뜻의, ‘프란치스코’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프란치스코를 향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향이 어떻게 달랐는가를 말해 준다. 어머니는 아들이 장차 요한 세례자처럼 충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을 바랐지만, 아버지는 상인인 자신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줬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멋쟁이들이었던 프랑스인처럼 되기를 바란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성향의 부모, 세속적인 아버지와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동시에 받으며 성장한다. 그래서 젊은 프란치스코에게는 상반된 두 가지 성향이 함께 나타난다. 그의 젊은 시절을 전하는 다양한 전기들에는 세속적인 아버지처럼 화려한 옷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즐기며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고 기사가 돼서 입신양명하려는 모습과, 자상하고 연민 깊은 어머니처럼 늘 자신의 식탁 위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빵을 준비하며 걸인에게 적선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낸 후에는 크게 후회하는 모습이 발견된다. 또 이 두 모습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프란치스코도 태어나자마자 성인이 아니었으며,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가능성을 모두 가진 젊은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평범한 젊은이에서 죄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었을까. 더러는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프란치스코의 회개 여정에서 걸림돌이자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는 당시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적인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 중부에는 상업이 크게 발달하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이런 발달에 힘입어 부와 명예를 축적한 사람이었으므로,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프란치스코가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의 장사를 도우며, 여느 젊은이처럼 기사가 돼서 입신양명하겠다는 야망을 갖는 것 또한 당시의 젊은이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그 시절을 일컬어서 “내가 죄 중에 있을 때”라는 단 한 마디로 표현한다. 그는 그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려는 가식적 겸손의 표현은 아니다. 실제로 그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죄 중의 삶으로 인식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가 유언에서 말하는 ‘죄 중의 삶’은 사회적 범죄자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던 가치와 나아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 하느님이 아닌 세속의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세속의 젊은이였고 자기애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자신의 감정과 욕망 속에서 인간적인 가치, 세상의 가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젊은이였다. 하지만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내맡긴 후, 그러한 자신의 젊은 시절이 죄의 한가운데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가 유언에서 ‘죄 중의 삶’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한 말은 바로 ‘회개 생활’이다. 회개 생활은 나의 바람과 욕망이 아니라 주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의탁하는 삶으로, 프란치스코는 ‘죄 중의 삶’에서 ‘회개 생활’로의 전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죽음을 앞둔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회개 생활의 시작이 자신의 결단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이끄심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부모와의 결별 선언

 

그는 1206년 늦가을쯤, 아시시의 귀도 주교와 아시시 시민들 앞에서 육신의 부모와 결별을 선언한다. “이제까지 나는 당신을 나의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거리낌 없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모든 부(富)이며 나의 모든 신뢰를 그분께 둡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이 입고 있던 모든 옷을 벗어서 아버지께 되돌려주었다. 이 선언과 행위는 단순히 부모와의 의절을 선언하고 옷을 돌려주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누려 왔던 모든 사회적인 권리와 보호, 신분, 꿈꿔 왔던 희망, 추구하던 가치, 그 외에 인간적으로 누리고 바라왔던 모든 것과의 단절과 이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 그리고 지각과 인식을 저에게 주십시오.”

 

‘죄 중의 삶’과 ‘회개 생활’. 프란치스코에게 이 둘의 차이는 나의 욕망에 귀 기울이며 세속의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삶인가 아니면 성령의 이끄심에 의탁하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인가에 달려 있었다. 외적인 신분이나 상태가 그 사람이 회개의 삶을 걸어가고 있다는 보증이 될 수는 없다. 진정으로 가난하고 겸손한 자만이 모든 것을 의탁하는 회개의 길에 설 수 있으며,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을 포기한 자만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월 22일, 최문기 신부(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부관구장, 성 유대철 베드로 수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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