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이주사목] 난민문제와 교회의 연대: 난민문제의 위기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2 ㅣ No.964

[경향 돋보기 - 난민문제와 교회의 연대] 난민문제의 위기

 

 

필자는 2001-2002년 동티모르의 예수회 난민기구에서 일했다. 1999년 동티모르의 독립과정에서 생긴 난민과 귀향민의 만남을 통해서, 역사의 뒤틀림에 놓인 사람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을 통해서 분쟁 뒤 화해와 정의, 국가건설 과정, 유엔 같은 국제사회의 구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을 통해서 얻은 배움 가운데 하나는, 난민문제는 우리와 거리가 먼 ‘저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이산가족이나 새터민 문제도 실상은 난민문제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은 난민문제 해결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21세기 초반, 세계는 난민문제의 ‘위기’를 겪고 있다. 첫째로, 역사상 유례없이 많은 공식, 비공식 난민들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 둘째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세계적 차원의 난민보호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이 글은 먼저 난민문제의 위기상황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 그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을 상호 연관된 구조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난민문제는 모두의 문제

 

오늘날 난민문제는 단지 유럽이나 중근동, 북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디어를 통해 한국에도 잘 알려진 시리아나 남수단, 아프가니스탄은 물론이고, 한국인에게서 잊혀가고 있는 소말리아는 여전히 세계 3대 난민 배출국이다. 게다가 난민수용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것은 유럽만이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난민 신청자가 본토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가혹한 정책을 펼치고 있고, 또 그들을 수용한 역외 수용소에서 자행한 인권유린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다른 한편, 난민의 범주에는 캄보디아에 있는 베트남계 사람이나 미얀마에 있는 로힝야족 같은 무국적자도 포함한다. 한국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난민신청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2015년에는 시리아 난민을 포함하여 5711명이 된다.

 

그러므로 난민문제 하면 보통 떠올리는 지중해나 유럽에서의 난민은 세계 난민의 일부이며, 그보다 더 많은 난민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보호를 요청하고 생계를 찾아서 헤매거나 열악한 난민촌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난민문제는 단지 몇몇 배출국과 수용국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곧 거의 모든 나라의 문제가 되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www.unhcr.org/figures-at-a-glance.html) 강제 이주가 된 사람은 2015년 현재 6530만 명이다. 이는 남한보다 더 많은 인구로 세계에서 스물한 번째 민족이 될 만큼 큰 규모다. 그런데 난민문제가 위기라는 것은 비단 방대한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국제사회가 난민을 돌보도록 만든 ‘국제 난민체제(global refugee regime)’가 유례없는 규모에 비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체제의 핵심 규범은 1951년 제정된 국제 난민협약이며, 이 규범을 구현하는 가장 중요한 기구는 유엔난민기구이다. 이에 더하여 많은 비정부 국제 조직(NGO)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 난민체제가 실효적으로 기능하려면, 기후 온난화에 대한 국제적 대응 등의 세계적 쟁점과 같이 국제적인 협력이 필수적이다. 특히 풍부한 자원과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부국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함에도 실상은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 기구가 돌보는 610만 명의 난민 가운데 86%는 발전도상국이 수용하고 있고, 특히 가장 저개발이 된 나라에 420만 명의 난민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곧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국이라 하여 난민을 더 많이 수용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주요 난민 배출국에 인접한 나라인 터키, 파키스탄, 레바논, 이란, 에티오피아, 요르단 순서로 난민을 더 많이 수용하고 있다. 여력이 있는 부국들은 실향하여 고국을 떠나서 보호를 원하는 난민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외면하거나 생색내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 보호받지 못한 채 떠돌다가 해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꼬마 난민이나 난민촌에서 태어나 자라난 젊은이들은 난민문제 해결이 위기에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다.

 

 

책임 분담인가 책임 전가인가

 

국제 난민체제 아래에서 난민에 대한 실질적인 보호와 지원을 위하여 부국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국제 난민체제란 난민의 보호와 원조를 위한 다수의 기구, 인도주의법과 인권법에 기반을 둔 일련의 법적 규범과 규칙 그리고 의사결정 절차를 일컫는다.

 

이를 통해서 난민에 대한 국가들의 대응을 규제하고, 국제사회에서 난민이 보호와 해결책을 보장받을 수 있게 국가 간 협력을 촉진한다. 이 체제를 구성하는 주요 규범은 첫째로 난민 신청자에 대한 ‘보호’이며, 둘째로 다른 국가의 영토 안에 체류하고 있는 난민을 지원하는 ‘책임 분담’이다.

 

‘보호’에 대한 국제협력은 강제송환 금지 원칙에 근거하며 비교적 강력한 규범적, 법적 틀을 가지고 있다. 곧, 난민체제를 비준한 국가는 인도주의적 이유와 국제적 안보를 위해서 난민을 받아들이는 비용을 감수하게 된다. 한국도 이 체제에 1992년에 가입했기에 시리아 출신의 난민 신청자를 일방적으로 쫓아내지 않고 난민심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 분담’을 규정하는 틀은 강한 구속력이 없는 것이 중요 문제이다. 곧, 다른 국가의 영토에 체류하는 난민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자유재량에 따라 결정되는 식이다. 따라서 각국이 타국에 체류하는 난민을 지원하고자 책임을 분담한다는 당위적인 원칙에 동의했더라도, 각국을 구속할 수 있는 중앙권력이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실행은 부족하다. 게다가 부유한 국가들이 난민 신청자에게 난민지위를 부여하는 경향이 낮아지면서(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4.5%), 많은 사람이 남아프리카나 케냐, 이집트, 태국과 같은 새 도착지에서 난민신청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국가가 난민 신청자를 수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보호하고자 책임을 분담한다.’는 규범성은 구속력 있는 법적 틀이 약해 부국들의 생색내기나 책임 전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두의 책임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라는 것이 난민 보호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불안과 무지, 무관심

 

난민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주체인 부국들이 적극적인 책임 실행을 미룬 채 생색내기나 책임 전가를 일삼는 데에는, 자국민의 무지와 무관심, 불안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 시민들 대부분이 일상생활에서 난민을 실제로 대면하는 경우는 적다. 난민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된 이미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난민에 대한 연민은 환대나 연대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하기보다는 불안이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밀려난다.

 

많은 이가 2015년 9월 초 터키의 한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남자아이의 사진을 기억할 것이다. 감청색 반바지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해변가 모래 위에 엎드려 있던 아이, 마치 파도에 떠밀려온 인형 같던 세 살짜리 쿠르디다. 이 사진이 알려지면서 세계는 분노와 연민으로 들끓었다. 유럽에서는 난민수용에 대한 관용적인 여론형성에 잠시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곧 잇달아 일어난 테러는 이러한 서구의 여론을 잠재우고, 이주민이나 난민에 대한 환대는 테러에 대한‘  불안’에 밀려나게 되었다.

 

테러에 대한 불안뿐 아니라, 경제에 대한 불안도 환대의 정신을 밀어낸다. 모든 나라에서 세금부담과 복지혜택을 두고 갈등이 있다. 이는 얼마나 이주민이나 난민을 지원할 수 있는지와 연계된다. 미국에서 백인 노동자들이 이민에 반대하는 정서를 가장 크게 가진 것도 이런 맥락이다.

 

경제적 불안 요소와 더불어 언어와 종교, 민족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연결되면 더욱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다음 글은 어느 한국 국민의 염려를 드러낸다.

 

“솔직히 말해서 왜 한국이 저들에게 한국 국민이 낸 세금을 사용해야 할까요? 이탈리아나 영국, 프랑스, 독일같이 식민지를 지배했던 나라라면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보지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오히려 식민지 지배를 당한 한국이 무슨 이유로 저들에게 한국 국민의 세금을 내야 하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난민인권센터’ 게시판의 댓글).

 

안보나 경제에 대한 불안 말고도 무지와 무관심 또한 국가들의 책임전가를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보자. 세계의 대다수 시민은 2012년 제정된 한국의 난민법에 규정된 것처럼 ‘난민’에 대해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 곧,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 또는 … 무국적자인 외국인을 말한다”(난민법 제2조 1항).

 

이러한 규정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두 국제 분쟁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며, 1951년 국제 난민협약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최근에는 20세기 후반의 국제적 현실에 부응해서 위의 범주 말고도 자연 재난이나 경제실정으로 생긴 난민이나 국내 실향민도 난민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유엔난민기구와 가톨릭교회는 이 넓은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한국의 난민법처럼 난민을 협소하게 이해할 때, 난민 신청자는 보호가 아닌 경제적 목적을 가진 ‘불순한’ 이주자와 동일시되면서 ‘난민’의 자격을 의심받게 된다. 따라서 난민 신청자는 난민 인정 심사과정에서 자신이 불순한 이주자가 아니라는 ‘난민성’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민들이 무지와 무관심 또는 불안해 할 때, 국가는 문명국가의 책임을 방기하거나 전가하기 쉽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하기 쉽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필자는 국제 난민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국가, 특히 부국들이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시민들이 무지와 무관심과 불안을 넘어서 난민들에 대한 환대의 행동양식을 갖추기를 주장했다. 하지만 동티모르에서 난민과 귀향민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필자 또한 날마다 돌아가는 일상에 매몰되어, 난민의 삶은 나와는 상관없는 ‘저들’의 문제로 여겼을 것이다.

 

유엔난민기구는 이렇게 밝힌다. “우리 시대는 가장 많은 난민과 실향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 위기는 단지 양적인 위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연대성의 위기이다.” 21세기의 난민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파편화된 개인으로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동안 연대성을 망각하도록 강요받는 현대인은 다음의 성경 구절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신명 10,19).

 

난민은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성경의 가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세상을 만들라는 살아있는 표지이다.

 

* 김우선 데니스 - 예수회 회원이며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맡고 있다. 예수회 난민봉사 기구 동티모르 책임자, 예수회 아시아-태평양 지역구 사회사도직 코디네이터,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초빙 교수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6년 11월호, 김우선 데니스]



2,98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