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12: 제5차 귀국 여행, 백령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15 ㅣ No.1586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2) 제5차 귀국 여행, 백령도


거센 파도 뚫고 갔으나 잘못된 지도로 꼬여버린 귀국길

 

 

최양업의 귀국 여행

 

제1차 : 마카오 - 상해 - 태장하 - 소팔가자

제2차 : 소팔가자 - 훈춘 - 소팔가자

제3차 : 소팔가자 - 변문

제4차 : 변문 - 홍콩 - 고군산도(신치도) - 상해

제5차 : 상해 - 교도(백령도) - 상해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5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백령도로 떠났다. 제5차 귀국 여행이었다. 두 사제가 백령도로 향한 이유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의해서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보고에 따라 백령도 인근에 중국 산동 어선들이 자주 나타나기에 접선이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김대건 신부가 만든 지도 요청 

 

메스트르 신부는 백령도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김대건 신부가 만든 ‘조선전도’를 복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전도’가 지리학적으로는 정확하지 않지만, 백령도 인근 섬과 해안들을 인지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해서다. 하지만 ‘조선전도’는 떠나는 날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최양업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는 1849년 5월 마카오에서 온 배(최양업 신부 서한에는 프랑스 함선, 사식휘의 「강남전교사」에는 모래선이라고 적혀 있다)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해 백령도로 항해했다. 둘은 이번 여행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기대했다. 조선에 있는 페레올 주교와 미리 약속했기 때문에 지정된 장소에서 자신들을 태울 조선 신자들의 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선장은 영국인이 작성한 해도를 따라 백령도로 배를 몰았다. 아마도 1816년 영국 군함 알세스트호의 맥스웰 함장과 리라호의 홀 함장 일행이 작성한 해도였을 것이다. 5월의 서해는 그리 녹록지 않다. 이 시기 서해는 중국 산동과 요동 반도에 자주 형성되는 저기압과 막바지 겨울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돌풍을 동반한 너울을 만들기도 한다. 두 신부를 태운 배도 이 시기 변덕스러운 서해 날씨를 비켜갈 수 없었다. 

 

“계절이 꽤 나쁜 때였으므로 위험과 노고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사슬이 끊어지고, 닻은 잃어버렸으며, 선장은 함선 전체를 파선 당하게 할까 봐 조바심을 냈습니다. 무진장 애를 쓴 끝에 우리가 그토록 찾고 바라던 포구에 도착했습니다”(최양업 신부가 상해에서 1849년 5월 12일 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은 백령도에서 신자들을 만나 배로 입국하려 했으나 만나지 못해 입국에 실패하고 만다. 사진은 백령도에서 본 서해. 「순교의 맥을 찾아서」 저자 오영환 교수 제공.

 

 

최양업과 메스트르 신부는 포구에 도착한 후 「조선전도」를 입수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영국 해도에 표시된 ‘교도’(Kiaotao-황해도 초도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봄)였다. 최 신부 일행은 배를 정박시킨 후 주민들에게 섬의 이름과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해도에 표기된 지명과 전혀 다른 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신부는 다시 배를 돌려 해도에 ‘백령도’라고 적혀 있는 다른 섬으로 가봤으나 중국 배나 조선 배 그 어떤 배도 보지 못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보고에 의하면, 이 섬에는 많은 산동 어부들이 떼를 지어 모이므로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큰 선단을 만나게 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같은 편지에서).

 

궁지에 빠졌다. 최 신부 일행이 도착한 곳은 전혀 알 수 없는 생소한 곳이요 지극히 위험한 곳이었다. 닻을 내릴 수도 없고 안내자를 부를 수도 없었다. 어떤 조선 사람이라도 외국인에게 심부름하기 위해 접촉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두 신부를 태운 배는 사제들이 경황없이 허둥대는 동안 섬에서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뱃머리를 상해로 돌려 항해를 했다.

 

- 김대건 신부가 작성한 ‘조선전도’.

 

 

“우리 선장은 라 피에르 함장이 당했던 것과 같은 운명을 당할까 봐 시시각각으로 조바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은 더 이상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 성녀께 구원을 청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온전히 하느님의 자애로우신 섭리에 맡길 따름이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도 만나기로 한 장소에 두 신부가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 몹시 안타까워했다. “제가 정했던 백령도 근처의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곳으로 보낸 배가 중국에서 온 배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제대로 왔더라면 매우 좋은 기회였을 텐데요. 약속 장소로 오지 못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페레올 주교가 1849년 11월 28일 한양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상해에 돌아와서야 받은 지도 

 

메스트르 신부는 백령도 여행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가는 선상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난처한 일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말한 산동 배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어선들에 관한 정보를 산동에서 두 번 물어보게 했는데, 그때마다 조선 해안으로 가는 배들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배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길은 제게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상해에서 1849년 5월 15일 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해에 도착한 두 신부는 그제야 여행 전 그토록 원했던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받을 수 있었다. 만약, 두 신부가 백령도 여행 전 이 지도를 갖고 떠났다면 가정이지만 성공할 확률이 아주 높았을 것이다. 서로 다른 지도를 가지고 만나기로 한 것 자체가 순진한 발상이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16일, 리길재 기자]



5,25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