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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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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26 ㅣ No.44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1899-1966)

(1) 대한민국을 세운 기도의 힘


 

장면 수석대표가 한 외국 대표에게 진지하게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지지해 줄것을 설득하고 있다. 출처 = 「건국·외교·민주의 선구자 장면」


1948년 12월 12일 새벽 3시, 하늘이 뚫린 듯 퍼붓던 장대비가 멎은 파리는 쌀쌀했다. 자동차도 다니지 않고 네온사인만 명멸하는 시가지는 적막강산이다. 숙소인 팔레 데 돌세 호텔을 나서 성 요셉 성당으로 향하는 운석(雲石) 장면(張勉, 요한, 1899~1966)과 모윤숙(毛允淑, 1910~1990)의 표정이 진지하다. 다시 보슬비가 내린다.

“미스 모, 이렇게 동반해 주니 참 고맙소. 새벽에 기도드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니 마음도 시원해지고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오.”

“고맙긴요. 오늘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린 날인데 제가 동행해야지요.”

제3차 유엔 총회 마지막 날인 이날 오후 에펠탑이 바라보이는 샤요 궁(Pajais de Chaijjot)에서는 불과 4개월 전에 탄생한 대한민국 독립 승인 결의안에 대한 총회의 표결이 실시된다. 아울러 소련이 상정한 ‘5ㆍ10 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회의 해체 동의안’에 대한 표결도 있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날이다. 근대 국민 국가는 민족을 단위로 형성되는 것이 상식이지만 현실적으로 남과 북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국제기구의 승인을 받는 일이 무엇보다 다급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수석대표 장면과 대표단의 일원인 모윤숙은 어느새 성 요셉 성당에 이르러 제대 오른쪽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생처음 성당에 간 모윤숙은 30분도 안 돼 무릎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장면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자애로우신 어머님, 한국 교회의 수호성인이신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절절한 기도를 계속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야 장면은 일어나 성당 밖으로 나왔다. 모윤숙은 당연히 호텔로 돌아갈 줄 알았다.

“요 근처 아베 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거기 가서 미사 참례하실까요?”

모윤숙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장 박사님, 저는 무릎이 아파서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겠어요.”

그러나 투철한 사명의식과 뜨거운 애국심, 그리고 굳센 신앙심에 불타는 장면의 인격에 감복한 모윤숙은 아베 마리아 성당으로 함께 가서 그 역시 간절히 기도했다.

호텔로 돌아온 장면은 대표단을 다시 소집해 놓고 “각국 대표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다시 찾아가 확인합시다.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야 합니다”라며 독려했다. 그때 유엔 총회는 뒤늦게 상정된 한국 문제를 토의하느라 9월 21일 개막된 회기 마지막 날인 11일을 넘기고 새벽 2시 20분까지 이어지다가 오후 3시에 속개하기로 하고 각국 대표들이 쉬는 중이었다.

한국 문제는 회기 최종 기한 닷새를 앞둔 12월 6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가 시작되었다. 소련과 그 위성국들의 집요한 반대는 극에 달했다. 다음 날 한국 초청안이 통과되고 장면이 역사적인 대표 연설을 했다. “본인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한 바 있는 한국 정부가 곧 본인이 대표하는 대한민국 정부임을 재확인하고, 개별적으로도 승인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자 원고지 38쪽 분량의 논리 정연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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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1호. 제3차 유엔총회에 대한민국 수석대표로 참석한 장면의 여권. 이 여권에는 붓글씨로 ‘바티칸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라고 적혀 있어 가톨릭 교회의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담고 있다. 서울 명륜동 장면 가옥에 보관돼 있다.


1947년 11월 14일 제2차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유엔 감시하의 1948년 5ㆍ10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7월 20일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기 4일 전인 8월 11일 내각 구성에 앞서 제3차 유엔 총회에 파견할 대표단을 선임했다. 대표단은 수석대표 장면, 차석대표 장기영(張基永, 1903~1981), 정치고문 조병옥(趙炳玉, 1894~1960), 경제고문 김우평(金佑坪, 1898~1961) 법률고문 전규홍(全奎弘, 1906~2001), 그리고 김활란(金活蘭, 1899~1970), 정일형(鄭一亨, 1904~1982), 모윤숙, 김진구(金振九, 1906~1987)로 구성되었다.

이승만이 천주교를 대표해 제헌국회에 진출한 장면을 수석대표로 발탁한 것은 당시 국제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황청과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1호인 장면의 여권에 명기된 ‘바티칸 파견 대통령 특사’라는 직함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승만의 판단은 정확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 12월 8일 제1 위원회는 한국 독립 승인안의 총회 상정을 결정했다. 드디어 12월 12일 오후 3시 30분 유엔 총회가 속개되었다. 폭우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후 5시 8분 ‘대한민국 승인과 신(新) 유엔한국위원단을 파송해 통일을 도모할 것을 결의한다’는 대한민국 독립 승인안이 3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48 대 6(기권 1)으로 가결되었다. 7분 후 소련이 발의한 동의안은 46 대 6(기권 3)으로 부결되었다. 비로소 대한민국 건국이 완성되었다. 국민 국가로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 이면에는 미국과 교황청의 지원이 컸다. 미국 대표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는 장면과 같은 신앙인으로서 처음부터 서로 신뢰하면서 긴밀하게 협조해 승리를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7년, 비오 12세 교황은 초대 평양대목구장 패트릭 번(Patrick J. Byrne ㆍ方溢恩, 메리놀 외방 전교회, 1888~1950) 주교를 한국 주재 교황사절로 임명해 진작부터 신생 한국 정부를 인정했다. 비오 12세는 이어 교황 비서로서 교황청 외교 업무를 총괄하던 조반니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 1897~1978 , 후일 복자 바오로 6세 교황) 몬시뇰과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1881~1963, 후일 성 요한 23세 교황) 대주교에게 “한국 대표단을 적극 도우라”고 당부했다. 소탈한 론칼리는 장면으로부터 한국의 입장을 설명 듣고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 지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장면은 유엔 총회를 마치고 로마로 날아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비오 12세 교황에게 깊이 감사했다.

“사불성 생불환(事不成 生不還 : 일을 이루지 않으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라)”이라는 결의로 50여 개국 대표들을 지난 3개월 동안 일일이 만나 지지를 호소한 대표단의 노력은 눈물겹다. 11월 13일에는 헤이그 이준(李儁, 1859~1907) 열사 묘소를 참배하며 그 결의를 재확인했다. 새벽부터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장면은 ‘독립당’으로 분류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10월 3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축일(오늘날엔 10월 1일에 지냄)에 파리 서북쪽 성녀의 리지외 성지를 참배하려고 가는 기차 안에서 호주 시드니 대교구 부교구장 오브라이언 주교를 만났다. 사학자인 오브라이언 주교는 장면을 보자 “일찍부터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신앙인으로서 적극 돕겠습니다.”고 약속하고, 당시 유엔 총회 의장이던 호주 외상 에버트와 다른 나라 대표들도 소개해 주었다. 회기 마지막 안건으로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표결일이 가까워지자 장면은 더욱 초조했다. 무조건 가르멜 수녀원을 찾았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언니가 원장이었고 데레사 성녀도 방문한 수녀원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문지기 수녀의 질문에 장면은 그냥 “기도드리러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수녀는 다시 “어디서 오셨습니까?”하고 재차 물었다.

“한국에서 나랏일로 기도드리러 왔습니다. 원장 수녀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수녀원장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검은 베일을 쓴 엄숙한 가르멜 수녀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장면은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의 사명과 수녀원 문을 두드리게 된 사정을 소상하게 말했다.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원장 수녀는 휘장을 거두며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 장면을 만나 주었다. 더 자세한 호소에 원장 수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 힘을 다해 보겠습니다.”

원장 수녀도 장면의 진지한 자세에 감복했다.

“당신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우리 수녀원 모두가 기도드리겠습니다.”

수녀원 전체가 한국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도드리는 그 자체가 기적이다.

장면은 기도의 힘을 믿었다. 뿌리 깊은 신앙이다.

연재를 시작하며

필자가 장면 박사를 처음 마주한 때는 중학생이던 1963년 어느 봄날이었다. 백형(伯兄)과 함께 명동대성당 주일 낮미사를 마친 시간, 그분은 마당에서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군사쿠데타로 실각하고 옥고까지 치른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로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52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을 준비하면서 그 해답을 얻었다. 교육자, 저술가, 외교관, 정치가요 신앙인으로 살았던 그의 삶 첫째 자리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계셨던 것이다. 모든 일을 복음의 빛으로 바라보고 처리해나갔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만을 실천하고자 노력한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믿음살이를 독자 제위와 함께 따라가 보고자 한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27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1899-1966)

(2)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아들로 태어나

 

 

장면은 19세기 마지막 해인 1899년 8월 28일 서울 삼군부 뒷골목, 지금의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제물포(인천) 해관 방판(幇辦)이던 아버지 인동 장씨 기빈(張箕彬, 레오, 1878~1959)과 평양 외성의 갑부집 딸인 어머니 의성 황씨(루치아, 1878~1954)는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기도의 힘을 믿고 평생을 살았던 장면 요한 신앙의 뿌리는 언행일치의 삶으로 모범을 보인 부모의 깊은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앞서 8개월 전인 1898년 12월 22일 햇살 따사롭던 아침, 인천 전동 장기빈의 집 대청마루에 두 부부가 나란히 앉아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치아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이를 가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간밤에 참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글쎄 성당에 가는 도중에 길가 진흙덩이 사이에서 홀연히 섬광이 눈을 찌르는가 했더니 그 속에서 금가락지 다섯 개를 얻었지 뭐예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편 레오가 말을 받았다.

“나도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뒤뜰 나무 위에 내려앉은 영롱한 깃털이 찬란하며 울음소리도 신비하고 진기한 짐승을 가슴에 품는 꿈을 꾸었다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건넌방의 외숙모도 급히 마루로 나와 “나도 꿈을 꾸었는데 밭 가운데로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어”라며 대화에 끼어든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길조를 알리는 태몽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은 나란히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황 루치아는 장면을 낳기 한 달 전 가마를 타고 서울 친정으로 가서 첫 아들 요한을 순산했다. 친정에서 두 달 동안 산후 조리를 한 뒤 자랑스럽게 아들을 안고 그때 막 개통한 경인철도의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갔다. 온 집안의 축복이요 기쁨이었다.

인동(仁同) 장씨(張氏) 가문인 장면의 선대는 8대조 장익붕(張翼鵬) 때 경상도 칠곡 인동에서 평안도 성천으로 옮겼고, 고조 장인각(張仁珏) 때부터 평안도 중화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중화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1898년 부친 장기빈의 관리 시절. 앞줄 오른쪽이 장기빈.


장기빈은 1876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시작으로 열강들의 문호 개방 압력이 거세던 시기에 나고 자랐다. 그는 “이런 변혁기에 바로 살기 위해서는 그 변화의 중심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대로 살아오던 중화를 떠나 당시 부산, 원산에 이어 개항장이 된 인천으로 갔다. 쉽지 않은 결단을 하기까지에는 관리 출신으로 인천에 살던 할머니 강 안나의 남동생 강화석(姜華錫)의 도움이 컸다.

1895년에는 관립 서울 영어학교에 입학해 서구 근대 학문과 영어를 배웠고, 밤에는 일어학원에서 일어를 공부했다. 그는 1896년 레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이듬해 강화석의 중매로 평안도 8대 가의 한 사람인 구교우 황성집(黃聖集, 베드로)의 둘째 딸 루치아와 혼인성사를 했다.

영어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식장에 참석한 고종황제의 극찬을 받은 장기빈은 탁지부(度支部, 지금의 재정경제부에 해당) 방판으로 임용돼 인천 해관에서 출입국 업무를 수행했다. 1905년 주사로 승진했으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일제의 관원 노릇은 할 수 없다”며 사표를 던졌다. 어린 장면은 울분에 찬 아버지의 그 모습을 가슴에 새겼다.

장기빈은 일찍이 근대 문물에 눈 떴고 국제 정세에도 밝은 개명 선각자였으며 인정이 많은 민족주의자였다. 황 루치아도 끼니 때마다 걸인들을 위한 밥상을 별도로 차려놓을 만큼 동정심이 많은 문학파 신여성이었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계명을 그대로 실천했다. 3남 4녀의 자녀들은 그런 부모의 선각자적인 언행과 ‘사랑의 실천’을 보며 배우고 자랐다.

장면은 태어난 지 15일 만인 9월 12일 서울 종현(지금의 명동)성당에서 요한 세례자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10살 때 인천성당(지금의 답동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았다. 장면 스스로 “나의 가정은 그리 군색하지도 않았고, 내가 장남인 만큼 부모님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셔서 남부러울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상할 정도로 유복하게 자랐다. 지나가던 한 승려가 소년 장면을 보고 황 루치아에게 “저 아이는 분명히 크게 될 아이이니 각별히 보살펴야 됩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장면은 어린 시절부터 비범했다. 8살 때(1906) 인천성당에서 운영하던 박문학교에 입학해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대학, 중용, 통감과 신학문인 지리, 역사, 산술을, 교사 수녀들로부터 “천주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법을 배웠다.

- 1916년 결혼 직후의 운석 장면과 부인 김옥윤.


12살 때,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를 졸업했다. 조국이 패망하고, 1년 전 10월 29일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1879~1910)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3월 26일)하던 해다. 소년 장면은 “일생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박문학교와 심상학교 고등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장면은 1914년 4월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에 입학했다. 의학강습소를 나와 의사가 되려고 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원서조차 내지 못하고, 40명 모집에 1400명이 응시한 농림학교에 최연소로 합격한 것이다. 18살 되던 3학년 때인 1916년 5월 20일 서울 약현성당(지금의 중림약현성당)에서 부친이 정해 준 김옥윤(金玉允, 마리아, 1901~1990)과 혼인성사까지 했으니 장면에게 수원농림학교 생활 3년은 잊을 수 없는 시절이다.

김옥윤은 오랜 기간 천주교 신앙을 지켜온 집안인 경주 김씨 가문의 김상집(金商集, 요셉)과 김해 김씨 가문의 김 바울라 사이의 4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16살 때 부친끼리 혼인을 약조한 대상인 장면과 만나 모두 6남 3녀를 낳았다. 첫째와 둘째를 일찍 여의었으나 5남 2녀를 훌륭하게 키우며 50년을 동고락했다.

장면은 2학년 때 배일 운동을 목적으로 한 학내 비밀 결사 조직의 가입을 권고받고 흔쾌히 들어가 활동했다.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의식이 그만큼 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신교 신자 선배로부터 큰 수모를 당하고 인생 진로에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 서울의 유명한 목사가 수원 3ㆍ1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수원농림학교 학생들도 연일 찾아가 설교를 듣고 열광했다. 원래 웅변가인 그 목사는 설교 중에 틈틈이 독립사상을 일깨워 젊은 학생들의 정열을 자극하고 항일 의식에 피 끓게 했다. 부흥회 기간 내내 설교를 듣고 온 학생들은 매일 밤 모여 토론하고 기도하는 등 온통 개신교 열풍에 휩싸였다. 그 선배는 단연 리더였다. 그는 열정도 대단했지만 성경과 교회사 공부까지 철저히 해 교내 목사로 불렸다. 그러던 중 전교생 120명 가운데 유일한 천주교 신자인 장면에게 천주교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천주교는 완고하고 미신적이며 부패한 사교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 않아요. 한 분이신 천주님을 믿는 천주교만이 가장 올바른 종교란 말이에요.”

장면의 항변은 거기까지였다. 성경 구절을 줄줄 외고 풍부한 교회사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비방을 당해낼 수 없었다. 주변 학생들의 비웃음이 들렸다. 참을 수 없는 참담한 패배였다. 천주교가 골수에 밴 장면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그때까지 장면은 그 선배가 인용한 코린토 전서니 콜로새서가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못했고, 더구나 교회사에 대해서는 캄캄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 내에 성경 관련 서적은 「성경 직해」밖에 없었고, 호교 관계 책도 「진교사패」(眞敎四牌)뿐이었다. 그나마 신자들에게는 보급되지 않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사제들 역시 극소수여서 개인 지도를 받기란 불가능했다.

장면은 결심했다. “내 신념을 채우려면 외국으로 유학 나가 외국 원문을 통한 광범위한 섭렵으로 마음껏 교리 연구와 교회사 연찬에 전념하겠다.”

그 즉시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일반 농업 관련 수업과 실습을 하고, 밤마다 혼자 영어와 씨름했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1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1899-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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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족 복음화에 필요한 지식 얻기 위한 미국 유학

 

 

1919년 거족적인 3ㆍ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날 덕수궁 앞에서 수많은 우리 국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장면도 그때 이곳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참가했다.


수원농림학교는 당시 농학, 임학, 축산학, 양잠학 등 농림 부문 전반에 걸친 실용 학문을 하루 4시간 정도 가르쳤고, 나머지 시간은 밭을 매고 논도 갈며 때로는 똥통도 지는 실습이었다. 여름 방학도 없이 실습은 계속되었다. 서구의 선진 학문이나 문화를 접하지 못하도록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일본 이외의 나라에는 유학도 가지 못하게 막았다. 졸업하면 금테 모자에 칼을 차고 일제의 하급 관리 노릇을 하기 일쑤였다.

장면은 망국의 서러움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외국 유학의 꿈을 더욱 다졌다.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얼마 전 그 개신교 선배로부터 당한 수모가 다시 떠올랐다. 단순히 종교적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 ‘민족 복음화’라는 원대한 포부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한 유학으로 승화되었다. “탄압받는 민족의 영혼이 자비하신 천주님의 구원을 얻는 복음화야말로 민족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장면과 수원농림학교 동급생이던 한근조(韓根祖, 제4ㆍ5대 민의원, 1895~1972)의 증언 ‘언행일치의 인물’은 그 시절 치열했던 장면의 모습을 잘 전해 준다.

“수원농림학교 학생 시절 장 박사는 백안무구(白顔無垢)의 순수한 소년이었다. 그때 학교에는 배일운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 결사가 있었는데 가입 요청을 받은 학생 장면은 자신은 물론 다른 친구 2명까지 추천해 함께 가입했다. 소년 장면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은 바로 공생공사 정신의 발로였다. 장 박사는 학교 기숙사에서는 영어만 열심히 공부했고, 교실에서도 선생만 나가면 다음 선생이 올 때까지 칠판에 영어로 낙서하곤 했다. 일본의 식민 정책이 죽자하고 영어란 한 자도 가르치지 않는 이 학교에서 아주 아이러니하고 묘한 배일운동으로 느껴졌다.”

장면은 1917년 3월 26일 3년 과정의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했다. 관리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6개월 후 국내 유일의 영어학교인 서울중앙기독청년회관(YMCA) 영어과에 입학해 영어를 더 공부했다. 본격적 미국 유학 준비 과정이었다. 이듬해 4월부터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강사로 발탁돼 주로 예과 학생들에게 국어ㆍ영어ㆍ과학ㆍ산수 등 일반 과목들을 혼자 가르쳤다. 인천에서 이사 간 서울 정동 집에서 도시락을 매단 자전거로 매일 출퇴근했다. 약관의 나이인데도 3~4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 신학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미국 유학 시절 동생들과 함께. 뒷줄 왼쪽부터 장발과 장면, 앞줄 왼쪽부터 장정온 수녀와 처조카 김교임 수녀. 장정온 수녀는 6ㆍ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끌려가 순교해 현재 시복 추진 중이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제10대 서울대교구장, 1902~1984) 대주교는 “그분은 연배가 우리보다 3, 4년 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훌륭한 교수일뿐더러 덕망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나는 50년 가까이 함께 걸어온 터였다. 그는 평신도였고 나는 대주교였지만 두고두고 나를 가르치던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는 다만 나의 스승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도들의 스승이었다”고 ‘거룩한 평신도 장면’이란 글을 통해 장면을 전하고 있다.

장면은 그러나 그 후 사제품을 받고 서울대교구장이 된 노기남 대주교에게 깍듯이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으로 대하며 교육자와 국무총리, 부통령이 되어 외국 출장 갈 때마다 출ㆍ입국 인사를 갈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미국 유학 후 1931년부터 1947년까지 동성상업학교 교사와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을조’로 편성된 소신학생들을 가르쳐 1960년대 한국 성직자의 3분의 2가 제자였다. 그들 모두에게도 존댓말을 쓰며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춘천교구장을 지낸 셋째 아들 장익(張益, 십자가의 성 요한, 82) 주교가 미국 성 골롬반 신학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몇 줄 안 되는 편지를 보내 “네가 선택해 갔으니 신학교 신부님들은 물론이고 동료 학생들도 다 네가 섬길 사람으로 알아라. 네가 모든 사람의 종인 줄 알아라”며 겸손을 당부한 아버지다.

장면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재직 중 3ㆍ1운동에 동참한 데 이어 그해 9월 2일 서울역에 내린 조선 총독 이토 마코토(齊藤實)를 향한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의 폭탄 투척 현장을 목격했다. 청년 장면의 피가 끓었다. 기미년 3월 1일 낮, YMCA 영어과 학생들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목청껏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전 민족이 일제의 학정에 항거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했다”며 거리를 달렸다. 신학교로 돌아온 장면은 수업 대신 격앙된 목소리로 3ㆍ1운동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이건 천주님의 뜻이요. 이 거족적 봉기를 일으키게 한 분들은 대개가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입니다. 천주님께서 그분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독립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장면의 이런 열변은 한국 교회를 이끌던 파리외방전교회 성직자들의 방침과 달랐다. 길고 참혹했던 100년 대박해를 겪은 교회 지도자들은 철저한 정교분리 정책을 고수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렇지만 장면은 민족과 신앙을 분리하지 않았다. 민족과 함께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신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장면이 신학생들에게서 존경을 받은 다른 이유였다. 외부 세계와 단절됐던 신학생들은 그를 통해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중요성을 배웠고 용기와 희망을 찾았다.

“왜놈들의 탄압이 심해져 우리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갈지 몰라도 세계의 인류는 우리를 기억할 것이며, 천주님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오. 우리의 신앙심이 약해지지 않는 한….”

1910년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전경.


신학교 당국의 철저한 제지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아들’인 신학생들 가운데 몇 명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퇴교되고 그해 서품식이 취소되는 암울한 상항이 이어졌다. 신앙과 민족 사이에서 갈등하는 제자들에게 장면은 다시 힘을 주어 말했다.

“우리 백성들에게 필요한 건 지도자야. 그러나 우린 지도자를 갖고 있지 못해. 진정한 지도자는 오직 한 분 하느님, 곧 천주님이야. 그러나 몽매한 백성들은 그걸 몰라. 일깨워 줘야 해. 맨주먹으로는 왜놈들의 총칼을 당해내지 못하지만, 신앙심과 천주님 앞에서는 무기란 무력한 것이지. 모든 동포에게 천주님을 믿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해.”

상처받고 괴로워하던 신학생들은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깨달았다.

장면은 교회의 사명이요 자신의 사명으로 자임한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선진 학문과 교리 및 교회사 지식을 얻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3ㆍ1운동 직후여서 무척 어려웠다. 마침 서울대목구장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閔德孝, 1925년에 대주교, 1854~1933) 주교가 미국 개신교 세력이 빠르게 확산되던 평안도 지역 선교를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하고 앞으로 내한하는 선교사들을 도울 젊은 인재들을 찾고 있었다. 뮈텔 주교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장기빈의 자제들을 생각하고 이들을 그해 선교 지역 순방에 나섰다가 한국에 온 메리놀회 총장 월쉬(James Anthony Walsh) 신부에게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유학의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장면은 1920년에 일본 우에노(上野) 미술학교에 다니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이 된 동생 장발(張勃, 루도비코 , 아호 雨石, 1901~2001)과 1923년에 도미했고, 두 여동생 정혜(貞惠,구네군다)와 정온(貞溫, 마리아), 처조카 김교임(金敎任, 마르가리타)은 1922년에 미국으로 가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수도명 아네타인 정온(1906~1950) 수녀는 1950년 10월 4일 평남 송림리 공소에서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돼 순교했다. 초대 주미대사로 활동 중인 장면의 누이인 줄을 박해자들도 알았을 터이다. 사실 장면은 6ㆍ25 남침 직후 한국 정부의 유엔군 조기 파병 요청을 눈물로써 호소하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온 아네타 수녀는 현재 6ㆍ25 전쟁 때 ‘죽음의 행진’ 끝에 1950년 11월 25일 중강진 수용소에서 순교한 초대 평양대목구장이며 초대 주한 교황 사절인 패트릭 번 주교와 함께 ‘하느님의 종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에 포함돼 시복 추진 대상자 가운데 한 분이다. 하느님의 뜻은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8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1899-1966)

(4) 
평생의 지표, 프란치스칸 영성 얻은 미국 유학

 

 

미국 유학 시절 장면.


3년 과정의 YMCA 영어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장면은 ‘민족 복음화’의 원대한 꿈을 안고 1920년 10월 2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도쿄에서 아우 장발을 만난 뒤 같은 달 19일 요코하마 항을 출항해 태평양을 건너 한 달이 지난 11월 17일 미국 뉴욕에 도착해,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총장 월쉬 신부를 만났다. 험난한 항해였지만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는 민족을 생각하며 “기필코 ‘기쁜 소식’을 전하리라”는 각오로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월쉬 신부는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머나먼 이국땅에 홀로 서 있던 장면으로서는 하늘 같고 아버지 같은 은인이었다.

장면은 월쉬 신부의 권유로 1921년 9월 19일 뉴욕 맨해튼 대학에 입학하기 전 6개월 동안 메리놀회에서 운영하는 예비 신학교인 버나드 스쿨에서 영어와 교리, 교양 과목들을 배웠다. 교장 패트릭 번 신부가 직접 가르쳤다. 2년 후 평양지목구 설정 준비위원장으로 한국으로 떠나 결국 6ㆍ25 한국전쟁 때 순교하는 번 주교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장면은 “그때야말로 3년 동안 했다는 내 영어 실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절실히 깨닫고 결사적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맨해튼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뒤 1925년 6월 4일 졸업했다. 미국 내에서 교육을 사명으로 하는 유명한 남자 수도회 소속 수사들이 운영하는, 규모는 작지만 내실 있기로 정평이 나 있는 대학이었다. 재학 중 전공과목 외에 종교학, 역사학, 수사학, 철학, 사회학, 대중연설, 물리학과 화학, 영어와 불어 등 선교 활동에 필요한 과목은 거의 이수했다. 특히 필수인 교리는 매일 한 시간씩 배웠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교리ㆍ교회사ㆍ호교론 등을 자습하면서 여러 신부님께 개인 지도를 청해서 거의 무제한 질문으로 신부님들을 괴롭혔다”고 털어놓았다.

장면이 4년(1921~1925) 동안 공부한 뉴욕 맨해튼 대학 전경.


윌쉬 신부도 장면의 질문 공세를 수없이 받은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기차 여행길에 나섰다. 장면은 미국 유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수원농림학교에서 개신교 신자 선배로부터 받은 수모를 떠올리며 질문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오해를 풀어 주는 데는 어떤 책이 제일 좋습니까?”

월쉬 신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교부들의 신앙」이면 그만이니 이것을 정독해 보라. 또 「퀘스천 박스」도 매우 좋으니 이 두 책만 철저히 공부하면 대답 못 할 것이 없을 것이다.”

장면은 지체하지 않고 두 권을 구입해 단숨에 탐독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비치는 한 줄기 밝은 빛과도 같은 깨달음이 왔다.

“내가 알고 싶던 모든 의문이 가장 조리 정연하게 해설되어 모든 의문은 깨끗이 무산되고 우리 교리를 명확히 자신 있게 파악할 수 있었다.”

회고록에서 장면은 “이에 따르는 희열과 만족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고 쾌재를 불렀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276쪽).

미국 볼티모어 대교구장 제임스 기본스(1834~1921) 추기경이 1876년 쓴 「교부들의 신앙」은 1960년쯤에 이미 100여 판에 900만 부 이상 팔렸으며, 전 세계 각국어로 번역돼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는 불후의 호교론 명저다. 장면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번 주교를 도와 평양지목구 설정을 준비하던 1927년, 2년여에 걸쳐 번역 작업을 마쳤다. 그 즉시 출판하려 했으나 일제의 불허로 1944년에야 외국인 신부 이름으로 겨우 초판 3000부을 발행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연이어 5판까지 2만 부 이상 팔렸다. 원서가 그렇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진리에 목말라 하던 이들의 갈증을 해소했으며, 특히 목사와 장로 등 수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의 개종을 이끌었다. 장면은 교회 일치와 평신도의 사명을 강조하며 진행되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결과를 보완해 6판 출판을 준비했으나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7년 12월 25일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장면의 가족 등 지성인 28명이 첫 착복식(입회식)을 갖고 함께 기념 촬영했다. 둘째 줄 세 번째와 네 번째가 장면의 여동생 장정혜와 부인 김옥윤, 다섯째 줄 왼쪽에서 첫 번째와 여섯 번째가 장면(동그란 점선)과 장발이다. 장기빈과 황 루시아, 장발의 부인 서혜련, 시인 정지용과 이동구, 경향신문 사장과 초기 성모병원장을 지낸 한창우와 박병래의 모습도 보인다.


장면은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참다운 지식과 진리를 찾는 일에 한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유학 초기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카푸친 프란치스코회가 사목하던 성 요한 세례자 성당에 다니면서 프란치스코 제3회(재속 제3회)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 노력의 결실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에 푹 빠져 1921년 8월 28일 한국인 최초로 3회에 입회하고, 이듬해 9월 24일 프란치스코를 수도명으로 서약했다. 그에게 프란치스코 영성과 3회원의 사명은 그토록 찾던 참삶의 길로 다가왔다. 1965년 11월에 쓴 ‘성 프란치스코 재속 제3회’라는 글을 통해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해 당시 터득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위대한 성자 프란치스코…, 극단의 가난과 겸손과 고행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문자 그대로 따라 산 복음의 산 표본으로, 속죄의 산 재물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지와 아프리카까지 몸소 또는 제자들을 파견하여 복음 선포를 통한 일대 혁신을 일으킨 희대의 성자, 당시 위기에 빠졌던 교회를 권력 아닌 성덕의 위력으로 구출한 절세의 영웅 프란치스코는… 위대한 관상 시인이며 사회 개혁가였다.”

국권을 빼앗긴 조국을 진정으로 구출할 수 있는 길을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에서 찾은 데 이어 구체적인 실천 덕목은 프란치스코 3회 회칙에서 구했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펴낸 「발자취」제4호(1963년 겨울호)에 전국 총회장으로서 쓴 ‘복음 전파는 삼회원의 최대 의무’라는 글은 그가 선종하는 순간까지 실천한 참 신앙인 장면의 삶이기도 했다.

“삼회원은 그리스도의 성 복음을 모범적으로 지키며 자기와 이웃 사람을 성화시킴으로써 천주의 영광을 희구하며…특히 전교 방면에 전력을 기울여 구령(救靈) 사업에 획기적 신기원을 이룩하기 바라는 바이다. 전교 활동이란 반드시 전업적으로 하자기보다 각자가 자기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교면에서 모범적 교우로서의 사명과 열성적 권면으로 하나씩 하나씩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장면은 그렇게 살았다. 스스로 토로한 언어 장벽, 신체 피로 학비 부족 시간 부족의 사중고(四重苦)에 늘 시달리던 유학 생활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도 프란치스칸 영성이었다. 뒤이어 도미 유학 온 장발에게도 권유해 1922년 11월 입회, 이듬해 12월 30일 가브리엘을 수도명으로 서약하도록 했으며, 1937년 12월 25일 한국에서의 첫 입회식 때 부모와 부인 등 가족 모두 프란치스코 3회원이 되게 했다. 이때 입회한 28명 가운데 20명이 1939년 1월 3일 서약하면서 서울형제회를 결성했으며 장면은 그 자리에서 초대 회장으로 뽑혔다. 1963년 9월 17일 개최된 제2차 전국대회에서는 한국연합회 초대 회장이 된다.

장면의 성 프란치스코 재속 제3회 회원증.


장면은 3회 입회 이후 사회적 신분이 교육자, 저술가, 외교관, 국무총리. 부통령, 내각책임제 하의 국무총리로 바뀌더라도 항상 성의(스카풀라)를 목에 걸고 수도자들과 같은 수덕생활을 평생 실천하며 한국 프란치스코회와 교회 발전의 초석이 된다. 매일 미사 참례는 물론 2주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자녀들에게도 신앙 교육만큼은 철저했다.

아들 장익 주교는 “아버지께서는 목욕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스카풀라를 매고 사셨으며, 다른 모든 일은 우리들이 자율적으로 하도록 맡겨주셨으나 매일 아침저녁 기도하고 미사 참례하며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신앙생활만큼은 엄격하게 지도하셨습니다” 하고 회상했다. 미국 노트르담 수녀회에 입회해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맏딸 의숙(義淑, 베네딕타, 86) 수녀도 “수도자인 저도 아버지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나의 오랜 수도 생활을 통해 가장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버지의 말씀입니다”라며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탈장 수술을 받고 요양소에서 몸을 돌보기도 했지만 ‘민족 복음화’를 위한 지식과 프란치스코 영성으로 무장한 장면은 1925년 6월 학업을 마쳤다. 그 무렵 경성대목구로부터 7월 5일 로마에서 거행되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79위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식에 장발과 함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형제는 공부하는 몇 달 동안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여행 경비를 모아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장엄한 시복식에 참석하고 다음 날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한 뒤 40일 동안의 긴 항해 끝에 귀국했다.

비오 11세 교황은 알현 자리에서 장면에게 영어로 “네가 지향하는 모든 것에 강복한다”며 축복했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25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1899-1966)

(5)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 대표가 되어


 

장면은 시복식 일정을 모두 마치고 1925년 7월 13일 나폴리항을 떠나 8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귀국 후 3개월 동안 지치고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른 뒤 12월 2일 부인 김옥윤과 함께 평남 영유읍으로 갔다. 미국 유학의 꿈을 실현시켜 준 메리놀외방전교회를 돕기 위해서였다. 교구 설정 준비위원장으로 1923년 5월 입국한 은사 패트릭 번 신부(1949년 주교로 승품)를 도우면서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다. 훗날 ‘하느님의 종’이 되는 누이 아녜타 수녀와 처조카 말가리다 수녀도 1년 전 메리놀회 미국인 신부ㆍ수녀들과 함께 귀국해 소임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우(장발)와 제수 서혜련(徐惠蓮)도 귀국 후 메리놀회의 전교 활동을 도우며 미국인 수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으니 평양교구 설정에 기여한 장면 일가의 공헌을 엿볼 수 있다.

동성상업학교 서무 주임 시절 동료 교사들과 함께. 흰선 안이 장면. 「건국 외교 민주의 선구자 장면」


1927년 평양 지목구(知牧區, 1939년 대목구로 승격)가 설정되면서 메리놀 본부가 평양으로 이전하자 장면도 함께 이주했다. 평양에서 교구 사무처 일을 총괄하고 평양 관후리본당 패트릭 클리어리 길(Patrick Clearyㆍ吉) 신부를 도우면서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로 갈 때까지 헌신했다. 1928년에는 평양 천주교 청년회장이 되어 전교 활동에도 힘썼다.

그 바쁜 가운데 「교부들의 신앙」(Cardinal Gibo ns, The Faith of Our Fathers)을 1927년 가장 먼저 번역했다. 1929년 11월에는 「영한교회용어집」을, 1930년 8월에는 「구도자의 길」을 펴냈다.

장면이 동성상업학교로 직장을 옮긴 1930년대 세계 교회는 ‘가톨릭 액션’ 열풍 속에 복음화 노력이 가시화되던 시기였다. 전임자들의 뜻을 이어받은 비오 11세 교황은 회칙 「우비 아르가노」를 반포하면서까지 전 세계 신자들에게 ‘가톨릭 액션’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교회의 선교 사업에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참가ㆍ협조하는 운동이다.

평남 서포의 메리놀 지부 겸 평양지목구 본부.


이에 따라 한국 교회도 1931년 ‘전국 공의회’(오늘의 주교회의에 견줄 수 있는 한시적 회의체)를 열고 ‘가톨릭 액션’을 공식 채택했다. 위원장으로 선출된 제2대 평양지목구장 모리스 목(John E. Morris, 睦) 몬시뇰이 최우선으로 제시한 가톨릭 운동의 방향은 ‘문서 선교’였다. 그는 “잡지 창간과 서적 발간 등을 통해 부족한 교리 지식을 채워 가톨릭 운동을 추진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말 것”을 전국 신자들에게 당부했다. 이미 미국 유학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해 번역과 저술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던 장면으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조치였다. 민족 복음화를 위한 가톨릭 운동과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교육 운동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장면은 우선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이던 1931년 최초의 한글 교회사 개설서로 평가받는 「조선천주공교회약사」를 저술해 사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어 1933년 6월 윤형중(尹亨重, 1903~1979) 신부와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 문학평론가 이동구(李東九)와 함께 「가톨릭 청년」을 주도적으로 창간해 문서를 통한 가톨릭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40여 편의 교회사와 신학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자신의 세계관과 국가관을 밝혔으며, 단편 소설 「누이」(1935, 5ㆍ6)도 발표해 뛰어난 문장력과 문학성을 드러냈다. 그 후에도 「젬마 갈가니」(1953),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1962), 「성 원선시오」(1964) 같은 번역서와 회고록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1964)을 남기는 등 일생 집필과 번역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허동현 경희대학교 교수는 “운석 선생의 저술 활동의 근본 목적은 민족애를 바탕으로 한 신앙을 강조하는 데 있다. 한 마디로 운석 선생에게 있어 신앙이란 개인 차원의 영혼 구제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민족을 위한 신앙으로 승화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건국 외교 민주의 선구자 장면」, 분도출판사, 1999, 32쪽)고 분석했다.

장면은 저술활동뿐 아니라 종현(명동)본당 청년회장(1932), 한국 천주교 청년연합회장(1938), 프란치스코 제3회 서울형제회 회장(1939)을 맡아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했다. 거룩하고 보편되며 하나이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 교회에 평신도 대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장면은 어느새 핍박받는 이 땅의 평신도를 대표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교회를 지키고 학교와 학생들을 보호해야 하는 무거운 책무가 두 어깨에 지워진 것이다.

일제 말엽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의 장면. 머리를 깎고 군복 비슷한 복장을 한 모습에서 당시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장면은 1931년 4월 1일 동성상업학교에 부임해 영어와 과학을 가르치면서 서무 주임을 겸했다. 1936년 11월 교장이 되어 1947년 정계에 진출할 때까지 17년 동안 교단을 지켰다. 이 학교에는 1929년부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다니던 소신학생들도 ‘을조’로 편성돼 공부하고 있었다. 미국 유학 가기 전 3년을 포함해 20년 동안 신학생들을 가르친 셈이다. 장면은 신학생을 포함한 제자들을 가르쳤던 그 기간을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때로 기억했다. 1935년 입학한 김수환(金壽煥, 1922~2009) 추기경도 제자다.

“나는 17년간 교육에 종사하면서 강당도 세우고, 불타 버린 본교사도 재건하여 그 건물과 함께 나도 늙으며 매년 배출되는 대견한 제자들을 사회 각 방면으로 보내는 것으로 낙을 삼으며 살아왔다.”

그리스도교 교육자로서 그의 교육관은 분명했고 그는 그렇게 살았다.

“나라에 있어 청소년을 교육한다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거룩한 사명은 없다. 교사는 국민과 세계에 장래를 결정하도록 부르심을 입을 젊은이에게 문명과 유산을 전하는 통로다. 교사는 그 모범과 감화로 선행의 규범을 세워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학생의 정신과 영혼을 도야하고 이에 깊은 지식과 진리의 인식을 주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느님이 계시고 언젠가는 그 앞에 나아가 한평생 행한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장면이 교직에 있던 시기는 일제의 한민족 말살 정책이 강제되던 때였다. 일본어 교육을 강조하고 천황숭배 사상을 주입하며, 심지어 조선인의 성명(姓名)제도를 폐지하고 씨명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한 창씨개명까지 강행했다. 특히 장면이 교장으로 재직하던 시기는 일제가 중일 전쟁(1937)과 태평양 전쟁(1941)을 일으키며 ‘전시 체제’에 돌입한 때다. 일제는 1938년 5월부터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서도 시행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조선총독부의 거듭된 강압에 못이긴 경성대목구도 조선연맹에 참여해 평신도 대표인 장면을 담당자로 지명했다. 장면은 이후 연맹 산하 ‘비상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그해 8월 12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3회 ‘전조선유지교우묵상회’에서 “천주교가 교구로서 국민정신총동원에 가입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1940년에는 ‘玉岡勉’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각 교구장도 일본인으로 세우려던 일제의 탐욕은 오히려 한국인 최초와 두 번째 주교인 노기남 경성대목구장(1942)과 ‘하느님의 종’ 홍용호 평양대목구장(1943)의 탄생을 낳기도 했다.

장면의 친일 행위에 대한 반민족문제연구소의 비판(「청산하지 못한 역사 2」 청년사, 1994. 20쪽)은 날카롭다. “교육계와 종교계의 책임 있는 지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친일 행위에 가담한 것은, 설령 소극적인 부일에 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장면은 수원농림학교 재학 시절 반일 결사에 가담하였고, 3ㆍ1운동에 참여했으며, 당시 신학생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민족과 함께하는 신앙을 역설했다. 또 동성학교 교장으로서 한국인 역사 교사에게 노골적인 압박을 가하던 일본인 교무 주임을 해임했다. 이러한 그의 전력과 친일 행위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 조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견해(조광 외, 「장면 총리와 제2공화국」 10쪽)는 설득력을 갖는다.

“그는 천주교회 활동에 있어서 대표적인 자리에 있었으므로 일제 식민지 당국이 교회마저도 대륙 침략을 위한 동원 체제 안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연맹’에의 참여가 불가피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오직 교육 운동과 종교 운동에 전념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던 양심적 지식인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때는 일제가 학교는 물론 교회까지도 마음대로 폐쇄할 수 있는 권한을 휘둘렀던 ‘광기의 시대’였다. “교회와 학교를 지켜야 하고 일제의 탄압을 방어해야 하는 평신도 대표로서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일제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옹호론에 주목하는 근거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1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1899-1966)

(6) 조
국을 세우고 지키는 전장(戰場) 일선에 서서


 

1950년 6월 24일 밤 10시 30분쯤(미국 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조금 전 AP통신과 UP통신 기자로부터 “북괴군이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다는데 아느냐?”는 전화를 받은 직후였다. 이번에는 본국 정부에서 걸려온 지급 국제전화였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떨리는 목소리가 태평양을 건너 들려왔다.

“장 대사! 이거 큰일 났소. 북괴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서 밀고 들어오니, 장 대사가 어떻게 빨리 활동해 주어야겠소.”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곧바로 외무부 장관 임병직(林炳稷, 1893~1976) 전화도 받았다. 미국과 유엔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요청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신 하나의 역량에 국가의 운명이 달렸소.”

울면서 말하는 외무부 장관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본국과의 연락은 완전히 끊겼다. 혼자서 판단하고 활동해야 한다. 온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이 밀려왔다.

밤 11시, 국무성으로 차를 몰았다. 극동 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후일 국무장관), 유엔 담당 차관보 히커슨 등이 모여 있었다. 그날 해리 트루먼 대통령(1884~1972, 재임 1945~1953)은 미주리 주 사저로 주말여행을 떠났고, 애치슨 국무장관은 메릴랜드 주의 별장에서 쉬고 있었다. 장면이 국무성에 도착해 상황을 설명하는 중에 서울 주재 미국 대사로부터 급전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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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7일 열린 제474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회원국 대표들이 북한군의 남침에 대응하기 위해 유엔군을 창설해 파견하기로 결정하는 거수투표를 하고 있다. 전날 열린 제473차 긴급회의에서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시 전쟁을 중단하고 38선 이북으로의 철군 촉구를 결정한 바 있다. 「건국 외교 민주의 선구자 장면」


심각한 한국 상황을 전해 들은 러스크 차관보 등은 우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키로 하고 대통령의 구두 허가를 받았다. 이들은 즉시 트리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을 깨워 내일 안에 안보이사회 긴급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 총장은 북한 공산군의 남침 보고를 듣자 대뜸 “아이쿠, 하느님! 이건 유엔에 대한 도전입니다”라고 탄식했다.

주일인 25일 오후 2시 30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가 개최되었다. 상임이사국 중 소련은 불참했다. 자유중국 대신 중공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고 몽니를 부리면서 모든 회의에 불참하고 있었다. 거부권을 가진 소련의 불참은 한국으로서는 ‘하늘이 도운 기회’였다. 소련은 사실 유엔이 어떤 결의안을 채택하든 2주 후면 부산까지 완전히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다. 소련의 오래된 침략 계획이었다.

그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제소자인 미국이 제안한 대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시 전쟁 중단과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데 이어 27일 열린 2차 긴급회의에서 ‘유엔군 파병 결의안’을 가결했던 것이다. 곧바로 유엔군이 창설되고 더글라스 맥아더(1880~1964) 원수가 사령관으로 임명돼 3개월 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다.

장면은 첫날 회의에서 당사국 대표 연설에 나서서 대한민국을 구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유엔의 승인을 받은 대한민국은 현재 북한 괴뢰군의 불법 공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이런 불법 공격은 인도와 민심을 거스르는 죄악일 뿐 아니라 국제 평화의 안전에 대한 명백한 위협입니다….”

이 연설이 끝나고 실시된 투표에서 ‘정전 결의안’이 가결되고 다음날 ‘파병 결의안’까지 채택되었다. 장면은 정회 시간에는 각국 대표들에게 일일이 한국 지원을 간곡히 호소했다.

이에 앞서 26일 급거 워싱턴으로 귀환한 트루먼 대통령은 이틀에 걸친 긴급회의를 소집해 해공군의 파병을 우선 결정하고, 30일 지상군에도 출동 명령을 내렸다.

장면은 파병이 결정되기 전 26일 하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 너무나 황급한 나머지 미처 국가원수에 대한 예의를 갖출 겨를도 없었다.

“한국의 비극을 알고 계십니까? 6개월 전 제가 이 자리에서 38선 경비를 위해 무기 원조를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그 후 소총 한 자루라도 한국에 보냈습니까? 그때 우리 요구를 들었더라면 오늘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운명이 대통령 각하의 손에 달렸으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면의 거침없는 추궁을 듣고만 있던 트루먼이 입을 열었다.

“장 대사의 초조한 심정은 알겠소. 그러나 유엔이 적절히 조치할 것이니 지금 앞이 아무리 캄캄해 보이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장면을 위로하는 말만 했지만 트루먼은 육해공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미군 파병 결정은 유엔군 참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제야 장면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바쳤다. 제3차 유엔 총회의 승인으로 건국이 완성되었다면 유엔군과 미군의 한국전 참전은 나라를 지킨 쾌거다. 장면은 조국을 세우고 지킨 일등 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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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북미합중국 주재 특명 전권대사’라고 적힌 신임장.


장면은 26일부터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통해 국내에 있는 동포들에게 미군 파병과 유엔 결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지금은 국군이 후퇴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서울을 탈환할 것이니 적 치하에서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달라”고 매일 호소했다. 미국에서 들려오는 장면의 육성 방송은 많은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은 장면에게 교육계를 떠나 정계로 이끌어 나라를 지키게 한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소련보다 한 달 늦은 1945년 9월 8일 한국에 도착한 미군은 빠르게 군정을 실시해 나갔다. 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천주교를 크게 신뢰했다. 입국 다음 날인 9월 9일 명동대성당에서 5000여 명이 성당 안팎을 메운 가운데 미군 군종 책임자인 스펠만 대주교(1946년 추기경 서임)가 주례한 감사 미사에 참례한 데 이어 노기남 주교를 극비리에 만나 이승만, 김구(金九, 1876~1949) 등 지도급 인사 60명을 추천받았다. 하지 중장은 노 주교의 통역 겸 참모로 합석한 장면에게 마음이 끌려 군정 참여를 간청했다.

하지 장군은 “장 박사! 이제는 교육계에서 손을 떼고 나랏일에 힘써 줘야 하겠소. 한국은 당신 같은 양심적인 위대한 인물을 원하고 있소”라며 군정 참여를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정치에 뜻이 없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일제 당국에 협조했던 일이 마음에 걸려 장면은 망설였다.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의 강력한 권고와 노기남 주교의 추천도 뒤따랐다. 거부만 할 수 없었다.

장면은 결국 천주교 대표로 1946년 2월 미 군정 자문기구인 민주의원 의원(民主議院 議員), 같은 해 12월 입법의원을 거쳐 1948년 유엔 감시 하의 5ㆍ10 총선거 때 서울 종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50% 이상의 득표율로 여유 있게 제헌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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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 대사 발영 직후인 1949년 초 10평짜리 사무실에서 집무하는 장면.


장면은 가톨릭 정치인으로서 ‘무신론을 앞세우는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의 복음화를 통해 조국의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뚜렷한 소명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 소명 의식과 신념은 그의 정치 인생 전 기간에 걸쳐 펼쳐진다. 우선 입법의원이 되자 ‘사창(私娼) 제도’를 폐지하는 법률과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 설치안)을 통과시켰으며, 제헌의원 시절에는 천부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제헌 헌법에 “모든 국민은 사유재산권의 보호와 혼인의 순결과 가정의 건강에 관해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법조문이 규정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용인되던 축첩제가 없어지고 여권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높이 평가한 모교 미국 맨해튼 대학과 포담 대학에서 1948년과 1950년 그에게 각각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제헌 국회가 열리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거부한 북한은 9월 9일 독자적인 정권 수립을 선언했다. 그해 9월 21일부터 12월 12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의 승인은 남과 북에 다 같이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 회의의 수석대표로서 맡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장면은 12월 16일 교황청을 방문해 비오 12세 교황께 유엔 승인 과정에서 크게 도와준 데 깊이 감사하고 미국으로 갔다. 역시 유엔 승인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1949년 1월 5일 워싱턴에서 초대 주미대사로 발령받아 험난하고 외로운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 1년 후 조국을 구해내는 데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8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1899-1966)

(7) 전쟁 중 재상(宰相)이돼 돌아오니 조국은 독재의 늪으로


 

1949년 1월 20일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예복과 모자를 갖춘 장면의 모습이 이채롭다. 뒤에 보이는 뷰익 승용차는 장면이 제3차 유엔 총회 때 여비 가운데 절약해 저금해 둔 3000달러로 구입한 대사 전용차다.


장면은 1949년 1월 6일 워싱턴에서 초대 주미대사 임명 전문을 받았다. 제3차 유엔 총회를 마치고 파리에서 짐을 모두 본국으로 부치고 달랑 가방 두 개만 들고 미국에 왔는데 믿어지지 않았다. 그해 1월 1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개별 국가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한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대사라고는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음날부터 아는 각국 대사를 찾아가 서식이며 편제, 인적 조직 등을 배우면서 개별 국가로서 대한민국 승인을 호소했다. 3개월 만에 33개국의 승인을 받아내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여비서를 보내주며 세세한 부분까지 도와준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도움이 컸다.

차가 없어 시간당 5달러씩 하는 택시를 이용했다. 어느 날 중화민국 대사관을 방문하고 나오자 시간이 지났다며 택시가 가버렸고, 필리핀 대사관을 나섰을 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30분 동안이나 비를 맞으며 택시를 기다려야 했다. 장면의 회고는 쓴웃음을 짓게 한다.

“그때의 비애감은 잊을 수 없다. 서울에 연락하니 ‘중고차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대사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새 차 ‘뷰익’을 구입했다. 파리 유엔 총회 때 여비 중 절약하여 저금해 둔 3000달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6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로 참석한 국무총리 장면(왼쪽)이 1951년 11월 20일 6·25 한국전쟁 참전국 대표들을 초청해 오찬을 베풀며 환영 연설을 하고 있다. 가운데는 리(Trygv Lee) 유엔 사무총장.


장면은 그 차를 타고 그해 1월 20일 재선에 성공한 트루먼 대통령의 취임식에 특사로 참석했다. 그때 고용한 인디언 운전사 위긴스가 2년 후 제2대 국무총리로 인준 받아 귀국할 때 흑인 부인과 함께 “한국까지 따라가겠다”고 떼를 써 겨우 말렸다. 그 부부는 난생처음 장면으로부터 인간적인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을 이국에서 실천한 장면의 한 모습이다.

그해 3월 25일 성모 영보 대축일(지금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붓글씨로 ‘북미주합중국 주재 특명전권대사’라고 쓴 신임장을 제정했다. 대한민국 대사 신임장 1호였다. 1888년 1월 최초의 주미 공사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이 고종 황제의 국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공관을 개설한 지 꼭 61년 만이었다.

이제 대사관이 필요했다. 우선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서 쓰던 콜롬비안 빌딩 내 10평짜리 사무실에 임시로 간판을 내걸고 일을 시작했다. 이듬해 봄 세리든 서클에 위치한 4층 건물과 대지를 구입해 증축함으로써 공관의 위용을 갖추고 조직을 완비하는 데 1년 반이 걸렸다. 

대사관의 기초가 다져질 무렵인 1950년 1월 12일 난데없는 ‘애치슨 선언’이 터졌다. 한국과 중화민국,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 방위권에서 제외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 그어진 것이다. 참담한 지경에 빠진 한국과는 달리 소련과 북한은 쾌재를 부르며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장면은 그 즉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을 만났으나 확답을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미군을 철수하기 시작해 6ㆍ25 한국전쟁 발발 한 달 전인 5월 28일 군사 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4만 5000명의 철수를 완료했다. 전쟁이 터지자 무기도 없이 38선을 지키던 국군은 구천직하(九天直下)로 패퇴했고,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다. “2주 만에 부산까지 점령해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소련의 호언장담은 그냥 나오지 않았다.

1950년 봄 10만 달러를 주고 구입한 주미 한국대사관 전경. 장면은 이 대사관과 정원을 무척 아끼고 가꿨다.


장면은 눈물겨운 호소로 유엔 17개국과 미군의 파병이 결정된 후에도 유엔 안보리가 열릴 때마다 참석해 한국 관련 안건이 잘 처리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 사회 단체 및 언론 기관에도 “전재(戰災)에 신음하는 한국민들을 도와 달라”고 호소해 동포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장면은 미국의 소리(VOA) 방송 외에 그해 9월 유엔 안보리에 출석해 “한국전쟁은 한국군의 북침”이라며 갖은 억지와 모욕적인 발언을 계속한 소련 대표 말릭을 향해 40분 동안 참았던 울분을 토해 내면서 조목조목 증거를 제시하며 반박했다. 장면 스스로 “내 생애를 통해 가장 잊지 못할 후련한 연설이었다”고 할 정도로 명연설이었으며, 전 세계에 그대로 중계돼 “참 통쾌한 연설이었다”는 격찬을 받았다.

장면의 이런 활동은 훗날 ‘하느님의 종’이 된 누이 아네타 수녀에게 북한 당국의 지명 수배가 떨어져 결국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했다. 평남 평원군 송림리 공소에 숨어 있다가 그해 10월 4일 체포돼 처형된 누이를 생각하는 장면의 마음은 언제나 애틋하다.

“통일 없는 휴전으로 매듭이 진 조국의 숙명이 슬프기만 하다. 그리고 나의 외교 활동과 미국의 소리 방송 때문에 북괴의 지명 수배에 걸려 억울한 최후를 마친 누이동생 정온의 얼굴이 가끔 떠오른다.”

전세는 역전돼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10월 20일 평양을 탈환한 유엔군과 국군은 10월 26일에는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했다. 그때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11월 6일 중공의 월경(越境)을 발표하고 28일에는 ‘새로운 전쟁에 진입했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그 무렵(11월 23일) 장면이 국회에서 148대 6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제2대 국무총리로 인준돼 “즉시 귀국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이 시작돼 중공 문제가 유엔에서 마무리되면 가겠다”고 보고한 뒤 1ㆍ4 후퇴로 정부가 부산 임시수도로 옮긴 뒤인 다음 해 1월 28일 귀국해 2월 3일 취임했다. 유엔 총회는 2월 1일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했다. 장면은 그해 5월 22일 교황청으로부터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교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으로 ‘성 실베스테르 기사 훈장’(Knight Commander of Order of St. Sylvester)을 받았다.

장면의 귀국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국회 인준 과정에서의 일방적인 지지가 화근이었다. 이승만은 악화된 국회와의 관계를 중재해 줄 조력자로 장면을 지명했으나 국회 인준 투표 후부터는 강력한 경쟁자요, 정적(政敵)으로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장면은 당시 국내는 물론 국제 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지도자로 부상해 있었다. 특히 미국은 이승만 이후 한국을 이끌 정치 지도자로 장면을 지목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후 점점 독선과 독단, 독재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미국 정책과 다른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자주 마찰을 빚었으며, 5ㆍ30 총선거로 구성된 제2대 국회가 개원한 지 6일 만에 6ㆍ25 한국 전쟁이 터지자 ‘서울 사수’ 담화를 발표해 믿었던 의원 35명이 사망하거나 납북되었다. 이 대통령의 기만적 정치 행위와 독재화 경향에 반발하는 세력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대통령은 미국과 국내 모두에서 호평을 받던 운석 선생을 국무총리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위기상황을 모면하려 했다”(허동현, 「건국 외교 민주의 선구자 장면」 107쪽 참조). 

전쟁 중인데도 입법부와 행정부의 골은 깊어져 국민은 신음하고 죽어갔다. 장면은 그 난제를 해결하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생긴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은 장면의 이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승만은 이에 그치지 않고 관제 정당인 자유당을 창당해 1952년 7월 4일 계엄하에서 국회의원을 감금한 채 대통령 직선제를 규정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켜 결국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국회 간선제로 대통령을 뽑을 경우 당시 국회의원의 3분의 2가 지지한 장면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1954년 11월 27일 드디어 ‘초대 대통령에 한해 무제한 재출마할 수 있는 개헌안’이 재석 의원 203명 중 135명 찬성으로 개헌선인 3분의 2에 이르지 못해 부결되자 이틀 뒤인 29일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논리를 적용해 통과된 것으로 발표해 버렸다.

장면은 이에 앞서 1951년 11월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 총회 수석대표로 갔다가 간염을 얻어 입원 치료를 받고 귀국한 뒤 이듬해 4월 19일 총리직을 사임했다. 장면이 귀국해 보니 엄연히 현직 총리가 해외 출장 중인데 이승만은 측근인 허정(許政, 1896~1988)을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해 두고 있었다. 장면도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반공 민주주의를 표방한 이승만과 뜻을 같이 했지만 비민주적 독재 체제와는 함께할 수 없었다. 이승만에 대한 장면의 평가는 오히려 후하다.

“국무총리로서 지켜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보이지 않는 양 독재의 전형적인 감을 주었다….”

장면은 “진정한 민주주의란 건실한 도의에 입각한 책임 행위로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노력했으나 현실 정치는 그렇지 않았다. 정치에서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 수복후 윤형중 신부와 함께 경향신문사 고문이 되어 신앙인의 신념에 따른 집필 활동에 전념하며 훗날을 기다렸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15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1899-1966)

(8)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1956년 9월 28일 낮, 제2차 민주당 전당대회가 막 끝나갈 무렵 대회장인 서울 명동 시공관(지금의 예술극장) 복도에서 ‘탕!’ 하는 총소리가 울렸다. 독재 정권이 보낸 저격수 김상붕(金相鵬)이 쏜 권총에 부통령 장면이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왼손에 관통상을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의 급서(急逝) 열흘 후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ㆍ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을 20만 표 차이로 물리치고 부통령에 당선된 장면이 목숨 걸고 선거 운동에 힘써준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단상에서 내려간 순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통령에 대한 살해 위협이 있어 전당대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가 “꼭 뵙고 싶다”는 부산 대표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갔다가 실제로 저격을 당한 것이다. 대회장은 완전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장면이 벌떡 일어나 단상으로 다시 올라갔다.

1960년 12월 12일 제2공화국 내각 수반 장면이 4년 전 자신을 저격한 범인들을 찾아가 털옷을 주며 위로하고 있다. 장면은 그 한 달 전인 11월 2일 사형이 확정된 범인들을 무기로 감형해 줘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었다.


“동지들, 내가 건재하니 안심하십시오.”

담대한 장면의 모습에 당원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범인 김상붕과 공범 최훈(崔勳), 이덕신(李德信, 당시 서울 성동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은 그 자리에서 당원들에게 붙잡혀 이듬해 11월 1일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장면은 바로 그 다음 날 대통령에게 범인들을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내고,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된 뒤인 1960년 10월 1일 직접 무기형으로 감형해 주었다. 그해 12월 12일에는 정부 수반의 신분으로 감옥으로 찾아가 따뜻한 털옷을 입혀주며 위로하기까지 했다.

훗날 개신교 목사가 된 김상붕은 1987년 장면의 아들 장익 주교를 만나 한없이 넓고 깊은 장면의 인품을 회고한 뒤 “저에게 저격을 사주했던 사람들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 당당한 위치’에 있던 내무부 장관과 치안국장, 일선 경찰서 사찰계장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고 고백했다. 그 배후의 정점에는 이기붕이 있었음도 암시했다. 독재 권력의 하수인들은 “앞으로 3년 정도 살 것”이라는 주치의의 진단이 내려진 노(老)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가진 장면에 대해 부통령 당선 직후부터 끊임없이 암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면은 달랐다. 저격당하는 순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군사들을 보며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떠올렸다. 극한 상황에서도 장면은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사랑을 나누었다. 야당 출신 부통령으로 온갖 수모와 탄압을 받았을 때는 물론, 급기야 5ㆍ16 군사쿠데타로 실각했을 때도 장면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 조금 지난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제2차 전당대회장인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암살 지령을 받은 김상붕의 저격을 받고 서울 명륜동 자택으로 옮겨져 누워있는 장면과 문병객들. 장면은 이날 아침 암살 음모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회장에 안 가기로 당론으로 결정했으나 “보고 싶다”는 당원들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잠시 몇 해 전으로 거슬러가 보면,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키며 직선제 개헌으로 지지 세력이 열세였던 국회를 피해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 금지조항을 삭제해 종신집권을 획책하기에 이르렀다. 요동치는 정국은 장면을 정치 일선으로 다시 불러내고 말았다. 

1955년 초 민주국민당(민국당) 계열과 무소속 의원 60여 명으로 원내 교섭단체인 ‘호헌동지회’가 결성되더니, 그해 9월 19일 민주당이 탄생했다. 민주당은 이때 신파와 구파로 대별되는 양대 세력으로 균형을 잡아나갔다. 흥사단 계열과 원내 자유당계, 자유당 탈당파, 신진 재야인사들이 신파에 속했고, 구파는 해방 직후 창당한 한국민주당 출신의 재산가와 구미 유학파들이 주축이 된 민국당 계열을 일컫는다. 

장면은 신파의 중심인물이었고 구파의 핵심은 신익희와 조병옥이었다. 신익희 대표 최고위원과 함께 조병옥, 신파의 장면, 곽상훈(郭尙勳, 1896~1980), 박순천(朴順天, 1898~1983)으로 최고위원회를 구성했다. 독재 타도를 위해 정파를 떠나 하나로 뭉쳤다. 정강 제1조에 ‘일체의 독재 정치를 배제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한다’고 못 박았다. 독재 정치 청산이 가장 큰 사명임을 천명한 것이다. 장면의 창당 기념 연설은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진실한 민주주의를 살려 나가기 위해 공정한 선거와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것이며, 관료 정치에 반대하고 관권의 남용을 경계하는 것이며, 관권에 의한 경제권의 침해와 이에 수반되는 모든 부패를 배격한다.”

민주당 창당 당시의 정신과 각오를 설명하는 이 연설 내용은 5년 후 ‘자유 민주주의’와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한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의 정강ㆍ정책으로 되살아난다. 

독재와 궁핍에 시달리던 국민의 지지가 하늘을 찔렀다. 국민들은 “비로소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정책 대결에 의한 정권 교체가 가능해졌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장면은 스스로 밝혔듯이 “이때부터 진정한 야당 인사가 되어 정부를 견제하고 부정부패를 저지하는 일선에 서게” 되었다. 그만큼 박해와 모함, 수모와 생명을 빼앗길 위험도 커졌다.

1956년 8월 15일 광복절에 취임식을 갖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장면. 이승만은 다른 참석자는 모두 소개하면서 정작 그날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장면은 소개하지 않았다.


1956년 3월 25일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제3대 정ㆍ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신익희와 장면이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뽑혔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고달픈 국민의 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선거 유세가 시작되자 가는 곳마다 청중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집권 자유당의 불안과 긴장이 역력했다. 과연 정권 교체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5월 4일, 사상 최대의 인파인 20만, 또는 30만이라고도 집계한 시민들이 서울 한강 백사장에 운집한 가운데 유세를 마친 신익희 대통령 후보가 호남 유세를 위해 야간열차를 타고 이리(지금의 익산)역에 도착하기 10분 전인 5일 새벽 심장마비로 갑자기 쓰러져 끝내 숨진 것이다. 함께 갔던 장면과 민주당원들은 물론 온 국민의 비통함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10일 후인 5월 15일 선거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이 당선되었다. 러닝메이트를 잃은 장면은 “100만 표는 도둑맞았다”는 그 선거에서 41.9%(4,012,654표)를 얻어 39.6%(3,805,502표)를 얻은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이긴 것이다. 5월 23일 국민장을 거행한 신익희에 대한 추모 투표도 쏟아져 150만 표의 유령표가 나왔다. 장면과 민주당에 대한 독재자의 탄압은 그 순간부터 시작돼 결국 제2차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장면의 심장을 향해 총알이 날아든 것이다. 

장면은 4년 후인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도 러닝메이트로 나선 대통령 후보 조병옥을 잃고 혼자 선거를 치러야 했다. 위장병 수술을 받으러 미국으로 간 조병옥이 선거 한 달을 앞둔 2월 15일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숨져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장면은 1959년 10월 26일 열린 민주당 정ㆍ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494 대 491, 불과 3표 차로 자신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조병옥이 후보 지명 수락을 거부하자 그에게 다가가 “한 표가 더 많아도 조 박사가 다수결로 지명받았으니 수락해야 됩니다.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협력해서 일합시다”며 손을 끌어 단상에 오르게 했다. ‘타협과 양보’라는 민주주의의 진수를 보여준 장면에게 당원들은 열광했고, 갈라지려던 신ㆍ구파의 틈새도 봉합되었다. 

장면은 부통령 후보 겸 대표 최고위원에 뽑혀 또 한 번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의 호기를 맞았으나 하늘은 허락하지 않았다. 3ㆍ15 선거는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였다. 4ㆍ19 혁명을 불러일으켰고 독재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독재 배제’를 으뜸 사명으로 세우고 창당한 민주당의 굴하지 않은 투쟁과 민중의 분노가 더 이상 일당 독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1956년 8월 15일 취임식을 거행하면서 엄연히 부통령도 함께 취임하는 마당에 정부는 ‘제3대 대통령 취임식 및 광복절 기념식’이란 현판을 내걸었고, 이승만은 부통령 장면에 대해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 남산에 지으려던 국회의사당 기공식 때는 초청을 하고도 정작 자리를 마련하지 않아 당혹스럽게 했다. 순화동 부통령 공관은 24시간 감시의 대상이었으며, 출입자를 일일이 검문하는 비열함을 보였다. 골수 신앙인 장면조차 “나의 부통령 4년은 죄 없는 죄인의 세월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였으니 그 감시의 눈길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 순화동 공관이 민주화 투쟁의 본부였고, ‘다원화된 시민 사회의 확립’, ‘효율적인 관료 제도의 정착’, ‘민간 주도형 경제 건설’, ‘한일 국교 정상화’를 비롯한 ‘국제 사회와의 교류 확대’라는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정책의 산실이었으니 하느님의 뜻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기만 하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2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1899-1966)

(9)
군홧발에 짓밟힌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시청 앞에서 쿠데타군을 지휘하고 있는 박정희 소장. 박 소장 왼쪽은 박종규 소령이고 오른쪽은 차지철 대위다. 서울신문 포토 라이브러리 제공


1960년 ‘4월 혁명’의 횃불은 마산에서부터 밝혀졌다. 그 불길은 4월 18일 서울로 옮아 붙어 고려대생 시위로 점화되었고, 다음날 전국에서 활활 타올랐다. 고려대생 시위 때부터는 3ㆍ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외침으로 울려 퍼졌다. 사태는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4월 23일 장면은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장면이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며 목적은 이승만의 하야”였다. 그리고 비록 명목상으로 지내긴 했지만 ‘행정부 부수뇌’로서 도의적인 책임감 때문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이의 불행을 틈타 정권을 잡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으로서 장면이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이승만은 “부통령이라는 존재를 위험시하여 물러나지 않고 발악적인 비극의 사태도 불사할지 모를 일”이었다. 장면이 사임하자 그제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 사퇴와 이승만의 하야가 이어졌다. 장면은 그 위중한 순간에도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위대한 풍모를 보여주었다.


군사쿠데타로 막을 내린 ‘장면 정부’

자유 민주주의와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운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은 장면 국무총리가 2차 지명으로 국회의 인준을 받은 1960년 8월 19일 탄생했다. 주권재민의 완벽한 민주주의와 누구나 잘사는 민간 주도의 ‘경제 대국’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이듬해 5월 16일 일단의 정치군인들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9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집권 민주당 내 치열한 신ㆍ구파의 다툼으로 골이 더 깊어진 국무총리 인준 과정에서부터 파국은 배태되고 있었다.

1961년 5월 18일 중앙청에서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사퇴한 직후 심경을 털어놓는 초췌한 모습의 장면.


장면은 1961년 5월 16일 그날도 새벽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그해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단군 이래 최초ㆍ최대’라는 국토종합건설 사업과 곧 발표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산적한 국무를 챙기느라 결국 자정을 넘겼다. 부인 김옥윤이 차려온 음식으로 늦은 저녁을 먹고 함께 저녁 기도를 바친 뒤 막 잠자리에 들려는 새벽 2시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張都暎, 1923~2012) 중장의 전화를 받았다. 임시 숙소로 쓰던 서울 중구 소공동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 809호실에서였다.

장도영은 “육군 30사단에서 장난을 하려는 것을 막아 놓았고, 현재 해병대와 공수부대 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 다리에서 막고 있으니 염려 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장면은 “한 주일 전에 내가 말한 그거 아닌가?”하고 물었다.

꼭 일주일 전, 장면은 대구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소장이 주동이 된 일부 군인들이 시내 중국음식점에 모여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내용의 정보를 입수하고 장도영에게 조사해 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장도영은 이미 한 달 전인 4월 10일 박정희로부터 쿠데타 계획서를 받아보고 전모를 자세히 알고 있었던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것 아니니 염려 마시고 제게 맡기십시오”라며 거짓 보고를 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장면은 “염려 말라는 말만 말고 내게 곧 와줘. 와서 직접 자세히 보고하게”라며 애걸하다시피 독촉했으나 장도영은 끝내 반도호텔에 나타나지 않았다.

총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장면은 부인의 손을 잡고 경호원 조인원(趙仁元) 경감과 함께 전용차로 일단 그 자리를 피했다. 박종규(朴鐘圭, 1930~1985) 소령을 조장으로 차지철(車智澈, 1934~1979) 대위 등 공수특전단 중대장 6명으로 구성된 체포조가 들이닥치기 10분 전이었다.

호텔을 나온 장면은 우선 길 건너 미 대사관문을 두드렸으나 그의 표현대로 ‘문이 절벽’으로 잠겨 있었고, 무교동 골목을 지나 한국일보사 맞은편 미 대사관 사택 문도 두드렸으나 열리지 않았다. 일단 안전한 곳에서 잠시 피신해 있으면서 정세를 보기 위해 혜화동 가르멜 수녀원으로 갔다.

1960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기념 촬영한 대통령 윤보선과 국무총리 장면(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와 일곱 번째)을 비롯한 제2공화국 각료들.


쿠데타의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오고 있었다. 오전 10시 30분쯤 쿠데타군의 박정희와 유원식(柳原植, 1914~1987) 대령, 장도영과 체포된 국방부 장관 현석호(玄錫虎, 1917~1988)는 청와대로 대통령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을 찾았다. 윤보선은 쿠데타군 지도부와 현직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함께 접견실에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으나, “올 것이 왔구나!”라며 일찍 쿠데타를 인정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원주 1군 사령관 이한림(李翰林, 1921~2012) 중장과 6개 군단장에게 비서를 보내 진압군 출동을 막았다. 윤보선은 뒤이어 찾아온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 1900~1988)와 그린(Mashal Green) 미 대리 대사가 국군 통수권을 가진 대통령으로서 쿠데타 진압 명령 내리기를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그 자리에서 그린이 윤보선에게 했던 “각하의 이런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 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라는 ‘경고’는 그대로 적중해 오늘까지 대한민국이 짊어지고 있는 업보요,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사실 윤보선은 그때 이미 유원식으로부터 1960년 말 쿠데타 계획과 쿠데타 성공 후 대통령직 보장에 대한 언질을 받은 후였다. 유원식은 “혁명이 일어나면 윤 대통령으로서는 즉시 국민 앞에 사죄 성명을 발표하고 사퇴하면 혁명위원회로서는 그대로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는 말을하였고 윤 대통령도 동의하고 ‘그대로 하겠다’고 언약했다.… (1961년 5월 16일 청와대에서) 장도영과 현석호가 나가고 세 사람만 남은 자리에서 윤 대통령에게 내가 ‘앞으로 여기 계시는 박 장군만 믿고 모든 걸 상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밝혔다(1962년 5월 4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국일보 ‘나는 그때 무엇을 했나’ 기고문 참조).

윤보선은 쿠데타가 성공하면 정권이 자기에게로 올 줄로 착각했으나 그도 ‘정치활동정화법’에 걸려 쫓겨난다. 쿠데타 당시 장면과 쿠데타군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던 장도영 역시 그해 11월 2일 반혁명사건의 ‘수괴’로 사형 선고를 받고 법정 구속돼 반년 정도 옥살이를 하다가 1962년 8월 29일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훗날 미시간대학 세미나장에서 장면의 막내아우 장극(張, 1913~2008)과 만난 장도영은 흠칫 놀라며 “아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고 한다.


무능한 정치인의 낙인을 스스로 받다

쿠데타가 시시각각 진행되는 긴박한 시간에 장면은 수녀원에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쿠데타 당일 그린과 통화했고, 다음날도 미 대사관측과 여러 차례 통화하며 사태 파악을 하고 있었다. 쿠데타 진압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으나 윤보선의 태도를 확실하게 알고는 모든 진압 계획과 조치를 포기했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장도영도 그 기간 수녀원을 찾아가 보고하다가 장면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는 사실도 당시 수녀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장면은 그때 마음만 먹었더라면 얼마든지 쿠데타군을 진압할 수 있었으나 끝내 유혈진압을 포기했음도 밝혀지고 있다.

5월 16일 새벽 장면에게 수녀원 문을 열어준 심 마리아(2013년 93세로 선종) 수녀는 “장 박사는 ‘무엇보다도 유혈 사태를 막아야 한다’면서 몹시 괴로워하셨다. 곁에서 지켜보다가 ‘어서 군부대에 연락하시라’고 거듭 말씀드리자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서로 피를 흘리게 해서는 절대로 안 돼요’”라고 하더라고 생전에 증언했다.

5월 18일 내각 총사퇴를 의결하는 제2공화국 제69차 마지막 국무회의를 마치고 명륜동 자택으로 돌아와 울부짖는 송원영(宋元英, 1928~1995) 공보비서관과 이성도(李聖徒) 비서관에게도 “이 사람들아, 피를 흘리면서까지 정권을 유지하면 뭘 하겠나”라고 했다. 민주당 신파 소속이었던 장경순(張慶淳, 1927~2003) 제5대 민의원 의원의 증언도 같다.

“이주당 사건으로 구속되신 뒤 풀려나셔서 찾아가 여쭈었더니 ‘정치인과 종교인으로서의 갈림길에서 정말 고민했다. 결국 종교 쪽을 택했다. 정치 쪽을 택했을 수도 있지만 서울 시민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 종교인 입장에서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탈권(奪權)의 낙인이 찍히고 무능한 정치인으로 매도될지라도 서울 시민을 희생시킬 수 없었다’고 하셨어요.”

장면은 이에 더해 진압에 성공했을 경우 쿠데타 가담자들을 처형해야 하는 문제까지도 고민하며 유혈 진압을 택하지 않았다고 유족들은 전한다.

신앙인 장면의 참 모습이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9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1899-1966)

(10 · 끝) 하느님 뜻만을 따른 그리스도의 위대한 제자


 

1966년 6월 12일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 역사박물관 자리)에서 국민장을 마친 운석 장면의 운구 행렬이 중앙청을 지나 장지인 경기도 포천 천보산 천주교 혜화동성당 묘소로 가고 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잃은 장면은 그해 8.15 광복절을 맞아 발표한 신문 기고문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하고 이후 오직 기도와 전교에만 전념하며 살았다.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생활이기도 했다. 군사정부에 의해 이주당 사건에 얽혀 구속 수감됐을 때 “그동안 외교관, 정치인으로 바쁘게 살면서 시간이 없어 기도조차 제대로 못 했는데 지금 이렇게 마음껏 기도할 수 있어서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아들 장익 주교에게 편지로 알릴 정도였다. 그는 신문 기고문에서 “집권 9개월 미만의 짧은 기간 내에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국민의 커다란 기대에 부응되지 못하였으니, 이제 와서 해방 십육 년간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장래만을 믿어 온 삼천만 동포에게 무슨 말로써 사과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며 국민에게 고통을 다시 안겨준 데 대해 깊이 사과했다.

그러나 장면은 “정권을 유지하지 못해 국민의 여망에 어긋난 데 대해 뼈아픈 도의적 책임을 가졌지 쿠데타 세력의 정변을 용인한 것은 아니었다”고 회고록을 통해 밝히고 있다. 오직 “할 말은 많으나 주어진 정권을 빼앗기고 군정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국민 모두가 맛보게 한 데 대하여 국무총리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거듭 자책하며 사과할 뿐”이었다.

장면은 제2공화국이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데 대해 “무엇이 무능하고, 무엇이 부패였는가” 하며 묻는다.

“「군사혁명 비사」(秘史)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집권한 지 18일 만에 정권 전복의 모의가 시작되고 있다. 그동안에 부패와 무능이 나타나고 있었던가? 아니면 부패와 무능을 미리부터 예언할 수 있었다는 얘기인가? 세상에 이러한 모순이 없다. 처음부터 정권을 잡겠다는 그들이 한 번이라도 정직하게 발표한 일이 있었는가. 과문한 나는 듣지 못했다.”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도록 방조한 윤보선과 장도영에 대한 장면의 질타도 이어진다.

“쿠데타가 지난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장도영이 ‘양다리’를 짚지 않고 처음부터 굳세게 나갔거나 매그루더를 만난 윤 대통령이 진압할 뜻을 표시했다면 516 정변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기를 바랐던 바이고, 먼저 내통을 받았을 때에도 기대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에 ‘올 것이 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윤 대통령의 이러한 심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사실 1961년이 밝자 장면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실현한다는 꿈에 부풀었고, 온 국민의 기대 또한 매우 컸다. 장면 정부는 집권 직후인 1960년 9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총 규모 4억 2천 1백만 달러에 이르는 재정지원을 미국으로부터 받기로 확약받았다. 이에 따라 1961년 봄 김영선(金永善, 1918~1987) 재무장관이 미국에서 우선 2천만 달러를 받아 왔고, 나머지는 장면 국무총리가 그해 7월 10일 미국으로 가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받아 와 본격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할 예정이었다.

그해 3월부터는 단군이래 최초최대라고 평가되는 국토건설 사업이 시작돼 나라 전체가 희망에 부풀었다. 쌀 한 가마에 1만 4000~1만 7000(, 군사정부가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하기 전의 화폐 단위)하던 그때 1961년 한 해에만 4백억 환을 투입하고 연인원 4천 5백만 명을 동원해 댐을 비롯해 발전소와 도로 건설, 농지개간, 수자원개발, 산림녹화 등을 포괄적으로 하는 다목적 종합 프로젝트였다. 소요 재원은 이 사업을 ‘한국의 뉴딜정책’으로 평가한 미국에서 1961년에 2천만 달러를 지원했고, 이후 1천 5백만 달러를 추가 지원하기로 하는 등 전액 미국의 도움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매카나기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1961년 3월 11일 미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에는 “장면 정부 하의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식량 부족과 춘궁기(보릿고개), 대졸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 국토건설 사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토건설본부 수석 부서인 기획부장에 ‘사상계’ 사장 장준하(張俊河, 1918~1975)가 맡아 많은 젊은이들을 국토건설 현장으로 이끌었다. 공무원 공채 시험의 효시인 건설본부 간부 공모에 1만 수천 명이 응시해 사무직 1614명, 기술직 452명을 뽑았다. 이들은 3주 동안의 교육을 마치고 3월 1일부터 각 군 단위로 15~17명씩 배치돼 현장을 지휘감독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장 정헌주(鄭憲株, 1915~1999)는 “건설요원 선발 이후 공무원 사회에 공채제도가 자리 잡았고 그 뒤 일반 기업체에서도 실시했다. 공채가 공고되자 1961년 들어 대학가 시위 횟수도 크게 주는 등 사회 안정에도 큰 몫을 했다”고 전했다(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1999, 16~20쪽 참조).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도 “그해 3월 이후 시위 횟수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장면 정부는 무능하지 않았습니다”고 뒷받침했다.

516 후 군사정부는 장 정부의 부패 사례를 캐겠다고 전 각료와 산하 기관장들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조사를 했으나 김영선 장관이 친구인 부산 세관장으로부터 아이스박스 한 개를 선물 받은 것 외의 사실을 찾아내지 못했다. 군사정부가 오히려 장 정부의 깨끗함을 입증해 준 셈이다.

장면은 “경제의 안정을 기한 후에야 정국 안정을 바랄 수 있고,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신념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제일주의 시책을 순조롭게 펴나가던 중 쿠데타로 인해 그 꿈이 꺾이고 말았다. 부통령 시절부터 준비한 한일국교 정상화를 통한 대일청구권 자금을 경제개발 비용으로 쓰려던 계획도 좌절되었다.


용서와 자비의 삶을 몸소 실천

장면은 그 절망적인 순간에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보복할 생각도 갖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께서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 주시기를 간곡히 기도했다. 민주당 2차 전당대회장에서 저격당했을 때도 그랬지만 완전한 민주주의가 꽃피는 경제 대국을 향해 가던 정권을 빼앗긴 이 순간에도 그는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청하고 스스로 이를 실천했다.

장면은 선종 1년 전에 쓴 ‘참고 용서하자’는 글에서 “세상의 죄를 제거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의 근본 해결책으로 사랑에 터전을 둔 용서의 계명을 준열하게 주셨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0)고 말한다. 그는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사랑을 나누고 기도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한 집안을 다스리는 것도 수월한 일이 아니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느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없이는 힘들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나의 덕이 모자라고 신앙이 부족하여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으니 하느님께 사죄하고, 나로 인하여 이 나라 백성이 입은 피해를 하느님과 국민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또 틈만 나면 이웃에 복음을 전하고 모두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힘썼다. 제2공화국 각료 대부분이 516 후 세례를 받았고, 대자가 200명이 넘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조국의 복음화와 미래를 위한 투자에 헌신한 교육자요 나라를 세우고 지킨 외교관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고 모든 국민이 골고루 잘 사는 복지 국가를 세우기 위해, 또 타협과 양보라는 민주주의의 진수를 보인 정치인 장면은 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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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 내각책임제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장면이 소속 본당인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다.


장면은 작은 일에도 충실했다. 집권 9개월 동안 매일 도시락을 싸와 총리 집무실에서 먹으며 새벽 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찾아오는 손님이 학생이거나 망령기가 있는 노인이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공사(公私) 구분도 분명했다. 전차표는 공용과 사용을 구분해 사용했고, 관용차를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장면의 중심 사상은 물론 가톨릭 정신이며, 그 핵심은 프란치스칸 영성이다. 일제 치하이던 1939년 프란치스코 3회 서울형제회 초대 회장에 이어 정계를 떠난 다음 1963년 전국연합회 초대 회장을 맡아 헌신했다. 교회와 프란치스코회에 기여한 공으로 1966년 4월 16일 프란치스코 1회 편입이 결정돼 5월 1일 증서를 받았다. 장면은 그 문건을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보다 더 큰 영예”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장면은 이미 1966년 초부터 지병인 간장염이 재발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6월 4일 선종했다. 12일 아침 서울 혜화동 소신학교 운동장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한 뒤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 역사박물관 자리)으로 옮겨 10만여 조객의 통곡과 오열로 국민장 장의가 엄수되었다. 경기도 포천 천보산 기슭 천주교 혜화동본당 묘지로 가는 길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눈물로 장면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며 슬퍼했다.

장면은 탄신 100주년 추모 미사가 봉헌된 1999년 8월 27일(탄신일은 28일) 그 자리에 참석한 당시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토마스 모어, 1922 ~2009)으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사후 33년 만에 평생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헌신한 공덕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 추모 미사를 집전한 김수환 추기경은 장면의 시복 시성 운동 전개를 제의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 가신 길을 걸었듯이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겠다는 다짐과 실천일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6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이번 호 로 ‘빛과 소금-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1차년도 5인(김익진, 김홍섭, 최정숙, 서상돈, 장면)의 연재를 모두 마칩니다. 다음 호부터는 2차년도 5인(양한모, 박병래, 구상, 김구정, 김금룡)의 소개 및 연재가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계속적인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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