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소공동체ㅣ구역반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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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5-19 ㅣ No.148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0)



Ⅳ 친교의 교회

5. 세상과의 친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1)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 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 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 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정호승)

김수환 추기경의 손은 한 번도 성당에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성당에서 세상으로, 세상 안으로 뛰쳐 나왔다.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바로 예수님이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모든 일간지 신문에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추기경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성당에서 일어난 충격과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한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건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슬프고 수치스러운 일 때문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이나 김수환 추기경의 눈물이 주는 의미가 크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복음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는 ‘복음화’ 혹은 ‘새로운 복음화’를 부르짖고 있다. 이 ‘복음화’는 과거의 ‘선교’ 개념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교’란 신대륙을 발견하고, 1622년 포교성성의 설립과 함께 가톨릭 신앙의 전파를 의미하는 일반적 용어가 되었다. 선교에 대한 정의는 복음선포 활동의 여러 가지 단계나 양상 중에서 특히 교회로부터 파견된 선교사들이, 아직 복음을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이나 지역에 복음을 가르치고 그들을 개종시켜 교회를 부식(扶植)하는 활동”(선교의 어제와 오늘의 복음화, 정일, 27-28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선교’의 특징을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지리상의 발견 후 전통적 선교활동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된 구원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다고 간주하면서, 저들에게 선교사를 파견하여 구원의 진리를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이를 수용한 사람들을 교회로 입교시키는 것이다. 선교는 그 표현과 수행방법에 있어 독백적인 선포로 이루어지고, 그 성공도는 외부적으로 확인 가능한 예비신자나 영세자의 숫자에 입각하여 측정되며, 그 목표도 교회의 부식으로 양적인 팽창을 통한 교회 영역의 확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업은 점령군의 역할로 간주되기도 하고, 선교사는 종교 제국주의적 식민정치의 협조자라고 토착민들에게 인식되고, 근대 식민시대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앞잡이로 간주되었다. 이는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과 문화적 우월의식, 그리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선교’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유산으로 물려 받았다. 그리하여 어떤 현대인들에게 ‘선교’라는 말은 지적인 혼동과 감정적인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다툼을 연상하는 불확실한 개념이 되었고 부정적인 의미의 선전(Propaganda)으로 이해되며 심한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다.”(같은 책 28-29면) 이러한 한정적이며 배타적인 의미의 ‘선교’로 교세확장은 될 수 있어도 세상을 구원해야 할 구원의 성사(聖事)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의 의미를 더욱 확대하여 ‘복음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교회의 ‘자기 복음화’와 함께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복음화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고 구현하셨던 진리로서의 복음을 비신자들에게 선포하고 교리를 가르쳐 세례와 성사를 베푸는 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생활화하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회개와 쇄신을 통한 교회의 자기 복음화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교회를 통하여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으로 인간을 내적으로 쇄신시켜 ‘복음적 생활’로 인도하는 활동이며, 이 ‘복음적 생활’을 통해서 이룩되는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인류의 쇄신’이다.”(같은 책 35면) 이 복음화의 의미를 살펴보면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즉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만일 교회가 ‘세상을 위한 교회’임을 알지 못하면 교회의 복음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복음화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왜 교회가 ‘친교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한마디로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명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부정하려고까지 한다.

가톨릭신문은 “공의회가 폐막한 지도 40년이 지났지만 ‘세상을 향한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의 모습은 여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2013.3.31)고 보도했다. 신정훈 신부도 말하였다. “교회는 결코 자족할 수 없으며 교회 밖의 일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 없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갈라진 형제들, 타종교인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 또한 교회의 시야에 포함되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이라는 교회의 자기 이해는 ‘남과 상관없이 나만 잘 믿으면 된다.’는 편협한 개인주의적인 구원 이해를 뛰어넘는 공동체적 구원관을 제시한다.”(가톨릭 신문. 2012.2.12)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성직자들이 ‘세상을 위한 교회’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소공동체의 필요성과 가치를 몰라 소공동체가 잘 안 되고 있다.

 

[월간빛, 2014년 5월호, 박성대 요한 신부(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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