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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서지 마을: 보라색 공기가 맴돌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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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05 ㅣ No.1922

[순교자 성월 특집 I] 서지 마을 – 보라색 공기가 맴돌던 마을

 

 

우리 교구에는 배론이나 풍수원 외에도 오래전 박해를 피해 살던 교우촌, 순교자들이 살던 사적지가 여러 곳 있습니다. 이번 순교자 성월에는 원주교구에 있지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신앙 유적지들을 소개해 드립니다.

 

1. 부론 서지마을 2. 강원감영 3. 백운 화당리(꽃댕이) 4. 학산 묘재

 

 

“보라색이더군. 공기는 보라색이야.” 1881년 인상파 화가 마네(Édouard Manet)는 그의 친구에게 공기의 진짜 색을 발견했노라며 이렇게 말했다. 인상파 화가인 마네가 공기의 색을 보라색이라고 한 이유는 익숙하고 관습적인 색깔 너머에 있는 진짜 색, 진짜 빛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색 다음에 오는 빛을 찾던 그들에게 보라색은 새로운 체험이었다. 실제로 보라색은 사람이 볼 수 있는 빛 중에 가장 짧은 파장을 지녀서 이 보라색(紫色)을 벗어난 빛을 자외선(紫外線, UltraViolet UV)이라 부른다. 그들은 색의 끝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인상파 화가들이 처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보라색은 전통적으로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고귀한 색으로 여겨졌고, 상처의 색깔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색깔이기도 하였다. 가시관을 쓰고, 수난의 길을 걷는 예수가 보라색(紫色)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가 상처를 입었으나 치유자라는 뜻이고, 그가 모욕을 당하지만 승리하신다는 상징인 것이다.(마르코 15,17 요한 19,2) 그 전통을 따라 대림과 사순의 시기에 교회의 공기도 보라색으로 변한다. 그 보라색에 물들어 사제는 자색제의를 입고, 제대 위의 초도 보라색 불을 밝히는 것이다.

 

서지(西芝)마을은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있는 마을인데 우리 교구의 순교 복자 최해성(崔海成, 요한)과 최 비르지타와 그 이후 또 다른 순교자들이 살던 오랜 교우촌이다. 서지(西芝)라는 마을의 이름은 지초(芝草)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 지초는 ‘보라색’ 염료를 만드는 원료로 쓰이는 약초이다. 곧 서지마을은 보라색을 만드는 마을, 순교의 고통과 승리의 기품을 드러내는 보라색 공기가 맴돌던 마을이었다.

 

서지마을에 처음 정착한 최해성은 본래 충청도 홍주 다락골(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았는데,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온 가족이 조부를 따라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최양업 신부님 12번째 편지) 그러나 외교인들 가운데서 신앙생활이 어려워지자 최해성은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가족과 함께 서지마을로 이주하여 작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작게 시작한 이 서지마을 교우촌은 겨자 나무처럼 점차 커져 신자들이 늘어나고 선교사 사제가 방문을 하여 견진성사를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닥치자 최해성은 그의 가족들을 이웃 교우촌인 백운 꽃댕이(지금의 백운 화당리)로 피신시키고 교회 서적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서지마을로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원주 감영에서 순교하였다. 최해성의 고모인 최 비르지타도 서지마을에 살았는데, 그녀의 남편 유씨가 백서를 쓴 황사영 알렉시오를 숨겨준 죄로 유배를 가자 뒤따라 갔다가 남편이 순교하자 다시 서지마을로 돌아와 최해성과 함께 순교하였다.

 

최해성, 최 비르지타의 순교 이후에도 이 서지마을의 교우촌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인박해 증언록」에 따르면 1868년에 강원도 횡성 둔내에 살던 교우들이 체포되어 순교한 일을 전하면서 함께 체포된 이들 가운데 “원주 서지 사는 박 사도 요한의 아내”도 포함되어 있고(증언록 84), 또 「병인치명사적」에는 1869년 ‘원주 서지에 살던 최 필로메나 잡혀 서울에서 순교하였다’는 기록, ‘조치언 이라는 사람도 서지에 살다가 순교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No.91-D) 이로 미루어보면 서지의 교우촌은 적어도 병인박해까지도 당시 교우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활발한 교우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병인박해 이후에는 아쉽게도 서지마을에 대한 기록도, 구전도 남아 있지 않아 보라색 서지마을은 오랫동안 잊혀진 교우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원주교구에서는 약 30여 년 전부터 서지마을에 대한 조사를 하고, 최근까지 서지마을의 교우촌을 기념하려고 기도하며 여러 준비를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그 노력과 기도의 응답을 주셨다. 지난 2020년 2월 서지마을에 살던 변경희(가브리엘라) 자매가 자신이 살던 집과 밭을 서지마을 순교자 기념관 조성을 위하여 기증한 것이다. 기증해 주신 집과 밭은 앞으로 순교자와 교우촌을 기념하는 장소로 꾸며져 서지마을에 살았던 신앙 선조들의 고난과 기쁨, 그들이 순교와 승리를 기념하는 보랏빛 공간이 될 것이다.

 

[2020년 9월 6일 연중 제23주일 원주주보 들빛 5면, 문화영성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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