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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사유하는 커피3: 선악과를 선악과이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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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5-25 ㅣ No.571

[사유하는 커피] (3) 선악과를 선악과이게 하는 것


선악과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생각하자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커피였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순 없을까? 커피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 아집과 억지를 지어낼 수 있음을 경계하면서 근거를 뒤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창세기를 쓴 지 3000년이 지나서야 존 밀턴에 의해 선악과가 사과로 적시됐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엿샛날 만들어진다. 에덴동산에는 온갖 나무들이 있었는데, 하느님은 특별히 동산 한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창세기 저자는 두 나무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맥락을 통해 열매들의 특성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는데, 선악과는 말 그대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식’을 준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 없이 따먹으면 지혜로워지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탐욕에 눈이 멀어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 반면 생명과는 영원히 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선악과를 몰래 따먹은 자는 운명적으로 생명과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창세기 3장 5절에서 뱀은 선악과의 효능을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라며 여자를 유혹한다. ‘눈이 열려’라는 대목을 카페인의 각성효과로 풀이해 선악과가 커피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선악과가 커피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지자 여러 핑계가 나돌고 있다. 우선 사과를 아무리 먹어도 피곤에 찌든 멍한 눈에 이렇다 할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커피 열매에는 카페인이 들어 있어 풀린 눈에 초점을 잡아주는 듯한 각성효과를 발휘한다. 고로 선악과는 사과보다는 커피에 더 가깝다는 입장이다.

 

과학적 시각에서 접근한 다른 사례를 소개하면 이렇다. 에덴동산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한 그루밖에 없는데, 열매를 맺은 것을 보면 자가수분을 하는 나무다. 사과나무는 자가수분을 못하기 때문에 선악과로 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아라비카 커피나무는 자가수분하므로 사과보다 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논리를 내세울수록 되레 선악과가 커피인 것 같지 않다는 의심만 커졌다. “합리적인 것은 진실하며, 진실한 것은 합리적이다”는 헤겔의 말이 틀린 것인가? ‘이성적으로 합당하다’는 의미를 잘못 적용한 탓일까? 혹시 신앙고백처럼 믿음에 의지하는 게 진실에 다가가는 데 더 합리적이란 말인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조바심이 생긴다. 과학적 풀이보다는 상징과 비유에 담긴 본질에 다가가야 한다는 속삭임이 들렸다.

 

애초 선악과를 과일에 한정하려는 발상이 나를 틀에 가두어 버렸다. 선악과의 본질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 지켜야 할 약속 또는 규정이겠다. 이를테면 인간다움을 지키는 마지노선으로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탐욕에 가득 차 인간임을 포기하는 순간이다.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해 선과 악을 자신이 재단하는 세상은 끔찍하다.

 

커피를 사랑하는 나에게 선악과는 커피나무이고, 사과 농부에게는 좋은 사과를 내기 위해 지켜야 할 양심이기도 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빌려 선악과를 다름이 아니라 선악과이게 만드는 본질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 앞에 덩그러니 놓인 커피 한 잔에 “너의 본질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생각으로 이끄는 힘이지. 오늘은 너를 선악과의 의미에 잠기게 했잖아”라는 울림이 들려 나오는 듯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24일, 박영순 바오로(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커피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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