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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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시 읽어주는 신부: 좋은 사람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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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9-07 ㅣ No.359

[시(詩) 읽어주는 신부] 좋은 사람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마움

 

 

사람관계에서 가깝다는 것과 멀다는 것이 가끔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가까운 사람들은 동료와 형제와 친구들입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들은 지금의 시간과 공간을 가장 많이 공유하는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어른이 되고 난 후 만남의 횟수가 뜸해졌지만 그래도 명절이나 집안의 기념일에 얼굴을 보는 혈연적 형제들 역시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학교와 고향의 인연으로 이런 저런 인연을 맺고 있는 친구들 역시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물론 물리적이고 혈연적인 관계의 가까움이 반드시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가까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의 멀고 가까움은 단순한 수치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지만 정서적으로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고, 정서적으로는 가깝지만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서 가까움의 온기를 잘 느낄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런 외적 인연도 없고 또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사람이지만 그의 사유와 행동이 공감과 연대를 낳아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연대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서기도 합니다. 사람의 관계는 참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습니다.

 

관계의 가까움은 죽음 앞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의 부재 앞에서, 가장 슬퍼하는 사람들이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강도가 그와의 관계의 깊이를 드러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죽음에 대한 슬픔의 강도가 반드시 그와의 관계에서만 비롯되지는 않습니다. 죽음의 과정과 모습이 슬픔의 강도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세월호의 죽음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한 부재에 대한 슬픔의 강도는 그 사람과의 관계의 밀도에 달려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살면서 과연 어떤 사람의 죽음이 나를 슬프게 했는지, 언젠가 내가 죽었을 때 누가 정말 슬퍼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나와 가까웠던 사람이 누구인지, 나와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정치인 노회찬의 죽음과 소설가 최인훈의 죽음은 저에게도 하나의 슬픔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시기가 그 무렵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저와 아무런 물리적 관계가 없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공인이어서, 매체와 책을 통해 그들의 말과 글과 행동(삶)을 자주 눈여겨보았습니다. 소설가 최인훈 선생은 저의 문청시절 가장 흠모하던 작가였습니다. 그의 모든 글을 읽었습니다. 선생과 제가 생일이 같은 날이라는 것도 괜스레 묘한 기쁨으로 간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소함으로라도 연결되고픈 순진한 마음이었습니다.

 

직업적 정치인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매체를 통해 알게 되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의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주장만 있고 권력을 향한 욕심만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정치 자체를 터부시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관계 안에는 힘의 역학이 작동됩니다. 삶이 곧 정치입니다.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은 저마다의 정치적 문맥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정치가 우리 삶에 중요한 요소인데도 불구하고 좋은 정치인이 많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불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정치의 척박한 현실 안에서, 노회찬 의원은 적어도 제 기준에 의하면 참 좋은 정치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념적 주장보다 먼저 타인의 입장과 처지를 헤아릴 줄 아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약자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드문 정치인이었습니다. 한 정치인의 죽음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 것은 꽤 오랜만이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던 사람의 죽음과 부재는 안타깝고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동시대의 시간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슬픔과 고마움이 교차되던 그 시기에 이영광의 시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영광의 시는 노회찬과 최인훈의 죽음이라는 맥락에서 읽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읽기는 이처럼 자신의 맥락에서 읽는 일종의 주관적 읽기입니다. 어느 문학 평론가의 말처럼, 좋은 읽기는 결국 창조적 오독(誤讀)일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영광 시인은 제가 처음부터 눈여겨 본 시인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시집들을 사서 읽기는 했지만 강한 인상으로 남았던 시인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시적 감상 취향이있습니다. 읽는 순간부터 자신의 취향과 감각에 포착되는 시인도 있고, 또 나중에 새롭게 감각에 포획되는 시인도 있습니다. 이영광 시인은 저의 감각과 촉각이 처음부터 반응했던 시인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촉을 매개로 알게 된 시인입니다. 평론가 신형철과 황현산 선생의 글을 통해 다시 읽게 된 시인입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문학평론집을 자주 읽지는 않지만 그래도 평론가 황현산 선생과 신형철의 글은 늘 챙겨 읽습니다. 그들의 취향과 견해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감식안을 많은 부분 신뢰합니다. 이영광 시인은 그들의 감식안 안에서 다시 읽어 본 시인입니다.

 

의성 출신이며 안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이영광 시인의 시집들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절규하는 방식으로 말하기보다 그저 가볍게 툭툭 던지듯이 말하는 그의 시가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경험한 것들과 자신의 내면에서 온전하게 용해된 것들만 말하는 그의 정직성도 신선했습니다. 한 시인의 전체 시집을 읽다보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인이 어떤 사유와 정서로 살았는지 그 궤적을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간다고 다 성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기에는 성장보다 후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생에 대한 사유의 폭과 깊이가 더해지기도 하지만 상상력과 언어적 감각이 때로는 젊은 날보다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영광 시인이 지금까지 발표한 다섯 권의 시집은 다 그 나름의 미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시집들 간의 편차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시집들의 한결같은 견고함이 그의 삶의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영광 시인은 사람과 삶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시를 써온 것 같습니다. 그의 시들이 주로 머무는 거처는 “사람의 집 사랑의 집 세월의 집”(「문(門)」)입니다. 첫 시집 첫 시에서 사람의 삶이란 직선의 외나무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지나는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시인은 의성 고운사 가는 길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삶에 대한 유비적 상상을 시작합니다. “문득, 발 밑의 격랑을 보면/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 않는 직선도 없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누군가 이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거다.”(「직선 위에서 떨다」) 시인의 시적 상상 속에서 세상은 “실직과 가출, 취중 난동에 풍비박산의 세월이” 가득한 곳이고, 사람은 그 “아픈 천국의 퀭한 원주민”입니다.(「아픈 천국」) 세상의 거리는 “유령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몸들의 거리”(「유령1」)이고, “세상은 궁극적으로 형장이고/ 인간은 인간의 밥”(「동쪽 바다」)이며, 사람의 몸은 제 몸을 껴안을 수가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슬픈 운명에 처해있습니다.(「몸」) 이처럼 우리 생의 근원적 슬픈 운명을 시인은 자주 노래합니다. “사는 건 결코 어렵지 않아요/살려고 마음먹는 것보다는/ 살아보려고 마음먹을 때까지 생이/ 받아주지도 버려주지도 않는 것보다는”(「포장마차」)

 

생의 고단함과 현실의 어려움을 사람들은 견디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오늘 견딘 건 죄”(「동구릉」)이지만 “사람들은 이제 너무 잘 견딘다/ 견디지 말아야 할 것도 견디고 견딜 수 없는 것도 견딘다.”(「지긋지긋한 슬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자꾸 보면/ 앞이 어두워지는 것”(「지하(地下)」)처럼 살다보면 어두운 현실 때문에 자꾸만 음울해지지만 “잠시 나가본 길에 평생이 있어서”(「세월」) 어쩔 수없이 우리는 “살기 위해 평생을 허비할 것이다”(「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고 시인은 예견합니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저항은 고작 “살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발버둥”(「오일장」)이라는 역설뿐입니다. 산다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며(「유언」) 인간의 기도는 “신음”이며 “침묵”이며 “경련”입니다. “나의 기도는/ 기도하지 않는/ 기도이다/ 기도할 수 없는 기도이다.”(「기도」)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아도 인간은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서 생을 살아냅니다.(「사랑의 발명」) 사람은 사랑이 되어 “사랑으로 다시 한발짝 올라”섭니다.(「첫눈」) 하지만 참 사랑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사랑이 차고 넘치는/ 사랑 아닌 것이 되”(「사랑 아닌 것이 되어」)고 마는 현실이 허다하고, “114 안내원은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고 별안간 고백했다/ 사랑은 도처에서 좀비처럼 나타난다”(「현기증」) 고 시인은 지적합니다. 현세에서 사랑은 “아득한 전생”의 일이기도 합니다.(「아득한 전생」) 참 사랑은 “사랑의 난폭한 주인”일 때보다 “사랑의 하인”일 때 이루어집니다.(「사랑의 하인」) 사랑은 함께 벌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아니므로, 함께 벌받을 자격이 없다.”(「사랑의 미안」) 사랑은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이 기억을 통해 연대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먼지로 흩어진 것들의 흔적 한 톨까지도/ 끝끝내 기억한다는 것”(「호두나무 아래의 관찰」)입니다. 그를 생각하고 그를 기억하고 그래서 그와 연대하는 것이 참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살다 죽었을까/ 가끔은 궁금해”(「오리무중」) 하는 것, 그처럼 사랑은 자기를 넘어 타인에게로 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계발의 시대, 자기위안의 시대에 “정말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자기를/살려주는 일/ 정말 해야 할 일도 저에게 위로를/ 던지지 않는 일”(「깔깔대는 혼」)일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삶과 사정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먼 곳에 슬픈 일 있어 힘없는

원주 토지문화관의 저녁이다

속 채우러 왔다, 슬리퍼 끌고

 

해장국이 나오길 기다리며 신문을 뒤적이다

누군가의 소식을 읽고,

아-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이 된다

 

허기가 힘을 내는 것이 우습다가

문득 또, 누군가 내 소식을 우연히 듣고

아-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길 바라는 실없는 마음이 돼본다

 

다행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만한 용기는 없다

허기는 아무래도 쓸쓸한 힘,

뭘 바라지 못하는 순간이 좋다

 

밥보다도 더 자주 먹는 이

겁에 의해,

오늘도 무사하지 않았느냐고

무사한 사람,

 

무사한 사람,

중얼거렸다

겁도 없이

중얼거렸다

 

이영광 시인의 가장 최근의 시집 『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8)에 첫 번째로 실린 「겁」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사실은 다른 시를 소개하려고 했는데 두 죽음 앞에서 이 시가 계속 입에 맴돌았습니다. 작중 화자가 말하는, 자신과 별다른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의 안부가 왜 그렇게 다행으로 다가오는지, 그 느낌을 알 것 같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타인과 세상을 위한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삶을 불살랐던 한 사람의 죽음이, 소심하고 겁 많은 모습으로 살아온 저에게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낳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주었던 그 정치인의 말들이, 빈말들과 거세된 말들만 허공에 뿌리며 살아온 저를 아프게 찔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치인의 삶이 그저 무사하고 안일하게 살아온 제 삶을 날카롭게 헤집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소심하고 겁 많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 같지만, 속내에는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성찰의 도구로 삼는 극단적 이기성이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저어하는 마음도 듭니다. “남의 죽음 곁에서 나를 설명하느라 헤”(「앉아서 말하다」)매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 앞에서 조금은 다짐해봅니다. 그의 말들을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리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네가 참아버린 말을 나는 찾는다/ 네가 잊어버린 말을 나는 믿는다/… / 너를 쓰러뜨린 말들을 꼭 사랑할 것이다.”(「세한」) “그의 말들은 정치의 새로운 실천과 그 현실적 가능성을 가늠하는 흥미로운 잣대였다”고 철학자 김영민 선생도 말합니다.

 

이영광 시인은, (좋은) 시인이란 “여기 머물면서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사람”, “이상한 것에 정신없이 끌리는 사람”, “제가 아픈지 안 아픈지 잘 모르는 사람”,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시인들」) 좋은 사람이란 계산 없이 순박하고, 자기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아마도 좋은 사람이란 법과 규칙을 말하기에 앞서 사람의 사정과 처지를 먼저 헤아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과 확신보다 타인의 입장과 사정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서의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성서에서 법과 규칙을 말하고 자기의 주장과 확신만을 강요하는 사람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주장과 확신, 법과 규칙은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이지 타인을 구속 하고 심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닮기보다 율법학자들을 더 닮은 것은 아닌지, 좋은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이영광 시인의 시를 읽으며 뜬금없이 생각합니다.

 

시대의 부채를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맙습니다. 고민하고 끙끙거리며 “쓸모없음의 쓸모”(김현)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시인들이 고맙습니다. 그런 좋은 사람들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나도 그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월간빛, 2018년 9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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